황금의 땅 ㅡ2권 13
밀항자
방에 들어선 이자영은 박주경 앞으로 다가갔다.
"부회장님, 부르셨어요?"
서류를 들여다보던 그가 머리를 들었다.
"거기 앉아."
턱으로 가리키는 소파에 가서 앉자 박주경이 책상에서 일어나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는 진한 끓은색 바탕에 검정무뉘가 있는 넥타
이를 매고 있었는데 이자영이 사준 것이다.
넥타이에서 시선을 뗀 이자영은 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어쩐
지 그가 뜸을 들이고 있다. 무엇인가 중요한 이야기를 꺼낼 것 같은 기
분이 들었다.
"이자영씨, 난 이자영씨를 남으로 생각하지 않아. 그건 알고 있지?"
박주경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시선을 올리자 박주경이 얼굴을 펴며
웃어 보였다.
"어떻게 보면 우리 둘이서 일성그룹을 운영해 나간다고 볼 수도 있어. "
"내가 이자영씨에게 많이 의지했고."
맞는 말이었다. 이제는 그렌드 호델의 특실이 그들의 집처럼 여겨겼
고 일주일에 적어도 사나흘은 그곳에서 보낸다. 아이 때문에 박주경은
꼭 집에 들어가지만 이자영은 그곳에서 회사로 출근하는 경우가 많았
다. 이자영은 이제 자신이 박주경에게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고영무 사건을 계기로 일성전자의 김학래 사장은 사표를 냈다. 고영
무를 일성의 얼굴로 삼으라는 그의 판단이 박재룡 회장에게도 알려졌
으므로 변명할 여지도 없었던 것이다. 그 일이 아니더라도 대표자는
책임을 져야만 했다. 오탁근 부장은 박주경의 라인이므로 견책을 받는
것으로 구제되었으나 이태규 과장은 대기발령을 받은 후에 사표를 내
야만 했다.
조정수 대리는 더 비참하게 되었다. 고영무의 직속상관이었으므로
해임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박주경에게는 신경쓸 일이 아니
었다. 김학래 사장과 동생인 건설의 박인경 사장의 연합이 차단된 것
이 장래를 위해서 제일 값진 소득이 될 것이다.
"회장님은 지금 연세가 예순셋이야, 아직도 한창 일할 나이시지. 누
구는 앞으로 20년은 끄떡없다고도 해."
박주경이 말을 이었다.
"우리 그룹을 위해서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야. 회장님이 안 계시
면 나 혼자로는 도저히 감당해내지 못해."
"회장님이 내년부터는 그룹의 사장단 회의를 직접 주재하시기로 했어."
이자영이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올해부터 박재룡 회장은.사
장단 회의를 박주경에게 맡겼고 특별한 경우에만 그가 직접 회의를 주
관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가 다시 그룹을 통괄하겠다는 의미였고,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떤 박주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 된다.
"너 무하세요."
이자영이 불쪽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 잘 해오셨지 않아요?올해의 매출액이 줄어든 것도,이익
이 줄어든 것도 아닌데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녀의 얼굴이 딸갛게 달아올랐다.
"이유가 뭔지 물어 보셨어요?"
박주경이 천천히 머리를 저 었다.
그는 이자영의 반발을 기다리고 있었던 눈치였다. 이자영의 격한 말
투에도 놀라지 않고 잠자코 있는 것으로도 증명이 되었다. 또한 머리
를 젓는 태도에는 박재룡 회장에 대한 강한 불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소문난 효자였고 이제까지 한 번도 아버지의 뜻을 거역해 본 적
이 없는 사람이다. 사원들은 박주경을 2세 후계자가 아니더라도 전문
경영인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이해가 안가.내가 아직 경륜이 부족한 탓인 것 같아.발도 넓
지 못해서 정 계나 관계의 인맥른 모두 회장넘과 통하거든."
박주경이 박자 위에 놓인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룹의 제2도약 정책이 마음에 걸리셨는지도 몰라."
일성그룹의 제2도약 정책이란 박주경이 비서실에 지시하여 연초부
터 기획해 온 내년부터 실행하기 위한 정책이다.
일성그룹은 내년부터 5년간 그룹을 재조정하여 고부가가치 품목인
전자와 반도체 사업을 확장하고 기업의 전문성을 높이기로 했던 것이
다. 따라서 축소되는 부분이 있다. 서너 개의 사업체가 흡수또는 통합
될 것인데 박주경은 자신의 지분을 그 기회에 늘일 예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현재희 그룹 전체의 지분을이 박재룹 50, 박주경 30, 박
인경 20에서 박재룡 35, 박주경 55, 박인경 10으로 재조정이 된다.
박주경은 길게 담배연기를 내뽑었다.
"이것은 나와 박실장 둘만이 아는 구상이었어 회사를 위해서는 과
감히 사업체 전문화가 되어야 하고 또 나는 어차피 그룹의 상속자야.
그래서 자연스럼게 생각했지."
그의 구상을 간략하게 설명한 박주경이 말했다.
"회장님의 뜻을 알 수가 없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다시 나서시려는
건지. 회장님이 나서시면 내 제2도약 정책은 백지화될 가능성이 커."
"이자영씨, 날 도와줘야했어, "
"어떻게요?"
눈을 깜박이며 이자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상체를 반듯하게 세우고
온몸을 긴장시키고 있다. 박주경의 꿈은 이제 자신의 꿈이고 미래인
것이다.
출국장 앞에서 몸을 돌리자 김영지의 눈에 민기철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10여 명의 교민들의 얼굴이 보였다.
"어머니 모시고 꼭 돌아오너라 잉?" 하고 나주댁 아줌마가 소리쳤
고, "이봐요! 영지 엄마! 꼭 전화해야 돼!" 하는 아즘마와, "영지야! 너
빨리 와야돼!"하고 김영지의 친구가소리쳤는데,그외의 소리들은 잘
들리지가 않았다.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으므로 김영지는 그들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어머니를 돌아보았더니 표정 없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다.
그것을 바라보던 저쪽에서 마침내 서너 명의 여자들이 울음소리를
내었고 출영객의 대부분이 여자인 그들은 한꺼번에 울음을 터뜨렸다.
민기철써가 소매로 눈을 닦는 것이 보였다.
김영지는 어머니의 팔을 끼고는 그들을 향해 다시 머리를 숙였다.
울음소리를 등뒤로 하고 김영지는 어머니를 부축해서 세관으로 들
어셨다.
이제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 외삼촌들 만나고 다시 돌아와도 돼. 그건 엄마 맘대로야."
여권 심사를 받으려고 잠판 서 있는 사이에 김영지가 말했다.
"아버지와 오빠 묘소는 사람들이 돌봐주기로 했어, 걱정하지 말고."
"아버지와 오빠 영혼은 언제나 엄마 옆에 있을거야, 가장 아끼는 사
람을 따라다닌대, 영흔이."
스스로 생각해낸 것이었으나 김영지는 그것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어머니의 애착이 강하다고 믿었으므로 그것은 어머니의
몫이다.
"엄마, 민씨 아저씨 좀 봐. 그 아저씨도 사고로 외아들을 잃었지만
견디어내잖아?"
민기철은 및 년 전에 자동차 사고로 아들을 잃었다. 호세 김과 어머
니는 그를 위로하려고 카르타헤나에 일주일이 넘게 내려가 있었다.
"엄마가 기운 차려야지. 안 그러떤 내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어?"
이것은 위협이다. 모든 방법을 쓰고 있었으므로 어머니는 머리가 흔
란스러울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힐끗 김영지를 바라보았다가 머리를 돌렸다.
비행기 시간이 남아 있었으므로 그들은 대합실의 의자에 나란히 앉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김영지가 손을 뻗어 어머니의 손을 쥐었
다. 이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둘뿐이라는 외로움이 밀려왔기 때
문이다. 어머니의 혈육을 찾으러 가지만 그들은 제각기 처자식이 있다.
사람은 낳고 성장하떤 또다시 분열을 일으켜 낳는다. 그 낳고 태어나
는 그 두 관계가 가장 밀접한 관계인 것이다. 어머니는 이미 자신의 계
열과 위쪽의 단계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자식과
일생을 같이하던 남편을 거의 동시에 잃었다.
김영지는 어머니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엄마, 기운내, 엄마."
이제까지 참아 왔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그것은 끊임없이 쏟
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갑자기 어머니가 가방을 및더니 손수건을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는
김영지의 얼굴을 밖아주기 시작했다.
"엄마."
와락 어머니의 가승에 얼굴을 묻은 김영지가 소리를 내어 울었다.
어머니의 가슴은 말랐으나 따뜻했다. 그녀의 손이 자신의 등을 어루만
지는 것이 느껴졌다.
"울어라, 실컷."
어머니가 속삭이듯 말했다.
요 며칠 동안에 처음 듣는 어머니의 말이었다. 어머니에게 한국에
가서 지내자고 하자 그녀는 반대하지도 그렁다고 가겠다고 말하지도
않았었다. 벙어리가 된 듯 말을 잃었던 어머니였던 것이다.
"영지야, 실컷 울어라. 나는 울 수가 없단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어.
그러면 죽은 네 아버지나 강남이한테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네가 나 대신 실컷 울거라."
어머니가 등을 손으로 토닥거리며 다시 속삭이듯 말했다.
깁슨 호텔은 다운타운의 12번 도로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알폰소의 말을 들으면 다섯 구역만 가면 컨벤션 센터가 나온다고 하
였으나 고영무로서는 12번 도로건 2번 도로건 또는 컨벤션 센터나 링
컨 센터나 의미가 별로 없었다.
LA에 도착해 있는 것이 중요했고 어느 지명을 이야기해도 처음 온
곳이어서 생소했기 때문이다. 창밖의 날씨는 화창했다. 밝은 햋볕을 받
아 빌딩의 유리창이 반짝였다.
커튼을 내린 고영무는 응접실로 돌아왔다. 머리에는 깨끗한 붕대가
감겨 있었는데 오늘 새벽에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 의사의 치료를 받았
던 것이다. 다행히 총알은 뼈를 스치지 않았으므로 꿰매기만 하면 되
었다. 늙은 의사는 전쟁터의 군의관처럼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상처
를 치료해 주었는데 치료비는 현금으로 5백 달러를 가져갔다.
그러나 상처를 째맨 것만으로도 온몸이 날아갈듯 가벼웠다. 소파에
앉은 고영무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다이얼을 누르고 난 그는 수화기를 고쳐 잡고는 상체를 반듯이 세웠
다. 신호가 가자 곧 저쪽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영무가 눈을 치켜했다.
"아니, 너 영철이 아니냐?"
"아아, 형!"
저쪽에서 소리치듯 말을 받았다.
"형 ! 형 아냐?"
"그래, 나다. 네가 집에 와 있구나."
"형!"
갑자기 고영철이 흐느껴 울었으므로 그는 어금니를 물었다.
"야 임마, 울지 마, 사내 자식이."
고영철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섬세한 성격이었고 어렀을 때부터 반
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수채였다. 아마 한번도 부모의 속을 씩인 적
이 없었을 것이다.
·난 잘 있으니까 걱정 말아. 부모님은 건강하시냐?" 고영철이
그가 말하자 전화기에서 꼭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겨우 말했다.
"형,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어머니 장례를 치렀어. 살해당하셧어."
고영무가 자리에서 일어딘다.
"누구한데? 도대체, 왜?"
목 안이 메말라 왔고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습이 아래
쪽으로 한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영철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갈라진 목청으로 그가 다시 물었다.
·어떤 놈들이 테이프를 찾으러 와서는 아버지를 묶어서 고문하고
어머니한테 이불을 뒤 집어쒸워서‥‥‥‥
"데이프?"
#그놈들은 최 누군가를 찾았다고 그래
"형,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제는 울음 섞 ·:) 목소리로 고영철이 소리 처 물었다.
·형이 최 워라는 사람을 저쪽 아파트에 살게 했다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단 말이야."
고영무는 천천히 소파에 다시 앉았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괜찮으시냐?"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묻자 고영철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아버지는 방에 누워 계셔 ."
이윽고 고영철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 ."
그리고는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고영무는 눈을 껌벅이며 벽 쪽에 시선을 주었다. 최대광과 신용만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머니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다.
"여보세요, 영무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고영무는 어금니를 물었다. 눈은 첫어질 것같이 치켜뜨고 턱을 올린
모습이 되었다.
"몸은 건강하냐?"
아버지의 목소리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영철이한데 들었구나. 그래, 돌아가셨다. 조금 아프셨는데."
"고통이 길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
"년 지금 어디에 있냐?"
"아버지 저는 지금 LA에 ‥‥‥‥
"됐다. "
아버지가 그의 말을 잘랐다.
"난 그 신부님에게 너를 믿는다고 했다. 들었느냐?"
"네, 아버 지."
"널 그렇게 만든 사람들을 결코 용서하지 말라고도 했다. 들었느냐?"
"네, 아버지."
"이곳 걱정은 말아라."
"아버지."
고영무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최대광이나 신용만이한테서 연락이 오면 제가 LA에 있다고 전해
주십시오. 연락처는 일성그룹 LA 지사에 있는 박정환 앞으로."
"알았다. "
"아버지,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
"죽으면 안된다. "
고진호씨가 자르듯 말했다.
"부모를 생각한다면 살아라."
수화기를 내려놓은 고영무는 두 팔을 무릎 위에 없고는 벽 쪽을 바
라보았다.
관자놀이의 상처가 맥박과 함께 큰소리를 내떤서 뛰었다. 어금니를
꽈 물고는 덕을 내밀고 눈을 한껏 치켜를 포습 그대로 그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담배 한 대 태우겠소?"
담뱃갑을 내밀자 검은 피부의 사내가 담배를 한 개비 매내더니 입에
물었다.
지미는 라이터를 켜서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걱정할 것 없어요.내가 손을 쓴다면 이곳에 몇 개월 더 있도록 할
수도 있으니까 잘하면 수용소 밖으로도 나을 수 있지."
사내가 연기를 내뿜다가 재채기를 했다.
"세뇨르,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
사내의 검은 눈동자가 지미와 시선이 마주치자 탁자 위로 내려졌다.
"이봐요,당신들은 미국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미국 시민이 되고
싶어서 밀항해 왔을텐데. 나한테 본 것만 이야기해 주면 돼요.그러면
내가 당신의 공로를 인정해 줄테니까."
지미가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사내는 담배를 힘껏 빨아들이더니 아끼는 듯이 천천히 연기를 내뿐
었다.
"당신은 행운아야, 마르코. 잘하면 지겨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돼 ."
사내는 오늘 새벽에 샌디에이고 북쪽 해변에서 붙잡힌 50명에 가까
운 밀항자의 하나였다. 그들은 모조리 잡혀서 LA근교의 밀항자수용
소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 배가 산호세 호라는 것은 알겠고. 배에 탓던 밀항자들은 모두 잡
힌거요?"
지미가 묻자 사내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세뇨르. 한국인 한 명이 탓는데 악마 같은 놈이었지요.
그놈이 우리 배에는 타지 않았습니다. "
담배를 꺼내려던 지미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럼, 그놈은 아직도 산호세 호에 타고 있단 말이오?"
"모릅니다, 세뇨르."
산호세 호는 샌프란시스코 근해로 다가갔다가 연안경비정에 나포되
어 지금 LA로 끌려오는중이다. 피터에게 연락하면 바로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마약을 운반한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소? 당신 일행이나, 아니면 배
의 선원들이 말이오."
사내가 머리를 저었다.
"모릅니다. 그런 것은 우리들 같은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
밀항자들의 몸과 짐을 샅샅이 수색하였지만 마약은 찾을 수가 없었
다. 어줬든 산호세 호가 LA에 입항되면 수색은 해보아야 할 것이다.
"됐소, 마르코. 당신 이름을 적어 놓겠소. 곧 다시 올테니까."
지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사내가 따라 일어셨다.
"세뇨르,꼭 기억해 두십시오.난콜름비아에 다시 돌아가기는 싫습
니 다. "
"알았소."
입맛을 다신 지미는 면회실을 나왔다.
산호세 호에서 빠져나온 밀항선이 검거된 것은 연안경비대의 잘난
레이더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LA시내에서 걸려온 전화 제보를 받고
출동했던 것이다.
제보자가 신원을 밝히지 않았으므로 피터 그린피트는 슬그머니 연
안경비대의 레이더로 공로를 돌리고 있었다.
마르코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 레이더건 제보건 간에
이번 배의 밀항자들은 재수가 없었다.
지미는 차에 올라 수용소를 빠져나왔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앨버트
는 마악 자리에서 일어선 참이었다.
"보스, 어디 가십니까?"
지미가 묻자 앨버트가 눈을 부릅됐다.
"지미, 산호세 흐가 들어온다. 그 빌어먹을 놈의 배를 샅샅이 뒤져야돼."
"그렇지요."
"넌 안 갈거야?"
문을 열고 나가려던 앨버트가 몸을 돌렸다.
"수용소에서는 성과가 있었어?"
"없었습니 다. "
지미가 머리를 저었다.
"산호세 호에 가시면 석탄 속에 한국놈이 있는가 찾아보세요. 난 사
무실에 일이 있습니다. "
"한국놈이라니?"
"한국놈 하나가 산타마르타에서 탓는데 밀항자 속에는 끼어 있지 많
았어요."
"물에 빠져 죽은게로군."
앨버트는 사무실에 남아 있던 대원들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지미는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다이얼을 누르자 교환이 나왔다.
"사라, 한국 영사관을 바꿔줘, 지급으로."
허리를 틀어 종이를 끌어당긴 지미는 호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들
고 적을 준비를 했다.
다운타운의 꽃시장 입구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박정환이 다
가오는 고영무를 보자 입을 적 벌렸다.
"야아, 이 것."
그가 고영무의 손을 잡았다.
"언제 여기에 도착한거야?"
"이틀 되 었어. "
그들은 사람들을 헤치고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것, 배를 탈 때 다친거야. 신경쓰지 마라."
머리에 동여맨 붕대를 만지면서 고영무가 입술 끝을 올렸다.
"넌 일 잘하고 있지?"
"나야, 뭐."
그와 나란히 걸으면서 박정환은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꽃시
장은 처음이었으나 고영무가 앞장 서서 시장 구석에 놓여 있는 국화
화분 쪽으로 다가갔다. 서너 개의 플라스틱 의자가 길 쪽을 향해 놓여
있었던 것이다.
"불안해하지 마라. 난 LA에 아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찾아왔지
만, 네가 싫다면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테니까."
고영무의 말에 박정환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나도 남자야. 친구가 곤경에 빠졌는데 도와
줘야지."
"나하고 만나는 것 누가 보면 네가 힘들어져. 회사 문제도 있고."
"서울에서 최대광이나 신용만이라고, 그 둘 증의 하나가 너한테 연
락을 할거야.그러면 네가 그들의 전화번호를 적어 놔줘.내가 연락할
·데니까."
입을 열려던 박정환이 앞을 지나가는 동양인 서너 명을 보더니 입을
닫았다. 그들은 건너편의 흘로 들어싫다.
"네 연락처는 없어?"
그가 묻자 고영무가 머리를 저었다.
"있지만 말 못한다. 그리고 너도 모르는 것이 좋아."
"그리고 참, 어머넘 얘기, 나는 나중에 들었는데, 정말 뭐라고 말해
야 할지‥‥‥‥
"고합다. "
고영무가 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난 황금의 땅에 들어갔었지, 피를 묻히고 나왔지만 황금줄기는 보
았어 ."
"거기서 만난 신부님한테 들었는데 옛날에 개척자들이 엘도라도에
발을 딛고 나면 꼭 무엇인가를 본다는거다. 황금도 보고, 지옥도 보고,
또는 하다못해 자기자신도 본다는거야. 나는 모든 것을 보았어."
박정환이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또 한가지, 부탁할 것이 있는데 "
고영무가 말을 바꾸자 박정환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말해 봐."
"20일 전에 콜를비아의 카르타헤나를 떠난 이오니아 호가 있어.그
배에 수취인이 LA의 스틸웰로 되어 있는 컨테이너가 있을거다 그것
을 어디로 가져갔는가 알아봐 줘. 세관의 컴퓨터에 기록되어 있을거
야. "
"그거야 회사에서 컴퓨터로 연결해 보면 알 수 있지, 네가 재고품 판
것 아니야?"
"그래 ."
"그땐 회사가 떠들씩했다던데."
‥‥‥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김사장하고 이과장,조대리가 모두 회사
를 그만두었어.널 엿먹인 놈들이 싹쓸이 당한거지."
"이자영이 그년은 출세했지. 이제는 회장의 수행비서가 되었다. "
"흑시 수사기관에서 조사나올지도 몰라.조심해라. 나도앞으로는
널 귀찰게 하지 않겠지만."
앞쪽을 바라보며 고영무가 말했다.
"아아, 씨발, 엿 먹으라고 해."
박정환이 머리를 들고 소리치자 앞을 지나던 사람들이 이쪽으로 시
선을 돌렸다.
"년 여기에서는 밀입국자일 뿐이야. 콜름비아 경찰이 잡으러 올 수
는 없어. "
"앞으로 월 할거야? LA에 계속 있을거냐?"
"여기서 할일이 있어 "
"돈은 었어? 내가 조금 준비해 왔는데, "
박정환이 코트 주머니에서 봉투 한 개를 꺼내어 내밀었다.
"2천 달러야, 내 돈하고 매형 가게에서 탈탈 털어가지고 온거야.l.
고영무가 머리를 끄덕이며 봉투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며 칠 후에 갚지, 이자 쳐서."
"안 줘도 좋아."
박정환이 머리를 저쪽으로 돌렀다.
"그럼 난 간다. "
고영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박정환이 서두르듯 따라 일어셨다.
"야,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 아니면 저녁이라도 하자.
이제 박정환은 긴장이 풀려 있었다.
"할일이 많아 "
고영무가 손을 내밀며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고맙다, 박정환."
그의 손을 잡은 박정환이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고영무, 너 정말 그랬니?"
한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고영무가 머리를 젓고는 몸을 돌렸다.
술잔을 들어 한모금을 삼킨 알폰소가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나는 첫눈에 당신을 알아보았지.그래서 배에서 당신과 말할 기회
를 찾았는데 산체스가 만들어 주지를 않더구만."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산체스는 돈에 팔려서 당신을 그 한국인에게 넘겼지요?"
"어쨌든 대단했어요.산체스의 부하들도 보통내기들이 아닌데 놈들
을 눕히고 돌아온 당신의 모숨에 모두들 숨이 막혔지요."
알폰소는 다시 한모금 술을 삼켰다. 밖에서 돌아오던 고영무는 호텔
앞에서 그를 만났다. 알폰소도 시내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모양이
었다.
그들은 호텔 식당에서 같이 저녁을 먹고 알폰소의 초대로 그의 방에
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고, 당신은 LA에서 무엇을 할 작정입니까?"
빈잔에 술을 따르며 그 물었다. 얼굴이 술기운에 젖어 崙은 빛으
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돈을 벌거요."
탁자 위에 툴인 술잔을 들떤서 고영무가 말했다.
"황금 줄기를 찾았으니까."
"그래요.?"
알폰소가 빙긋 웃었다. 무성한 콧수염 아래에 희고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고, 당신은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고영무가 머리를 들었다.
"당신이 알폰소라고 했지 않아요?"
"난 군인이오."
군인이건 경찰이건 간에 밀항선을 타고 온 것을 보면 콜름비아에서
는 줄이 떨어진 사람이다. 관심이 없었으므로 고영무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난 일년 전만 해도 카스틸로의 참모장이었소. 준장이었지, "
알폰소의 시선이 고영무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카스틸로가 쿠데타를 일으킬 때 날 출장을 보냈어.왜냐하면 내가
라파엘 대통령측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베네주엘라에서 부랴부랴 돌아와 보았더니 이미 카스틸로가 정권
을 쥐었더군. 라파엘 대통령은 밀림으로 숨었고, 내가 귀국했다는 정보
를 듣고 카스틸로가 날 잡으려고 군대를 보냈다고 해요. 그래서 난 밀
림으로 라파엘을 찾아갔습니다. "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라파엘측의 게릴라군 사령관이 된거묘."
고영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그에게서 군인의 분위기가
풍긴다. 모터보트에서도 한국군 이야기를 한 것도 기억이 났다.
"그런데 LA에는 무슨 일입니까?"
고영무가 묻자 그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탁자 위의 위스키병은 비어
있었다.
"미국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으러 온겁니다. 그 돈으로 필요한 것
도 구입해야 하구요."
한모금에 위스키를 삼킨 고영무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미국은 카스릴로 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다. 라파엘의 게릴라가 미국
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국 정부가 당신을 말입니 까?"
"그렇소, 우리를 말이오."
알폰소가고영무의 말을 흥내내듯이 말했다.
"카를로스가 카스틸로나 우리측 양쪽을 주무르고 있듯이 미국도 카
스틸로와 우리를 주무르고 있지요."
"미국은 카를로스를 잡아먹고 싶겠지만 어려운 일이지. 남의 나라에
군대를 보낼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양쪽에 지원을 해주지.어느 한쪽에만 지원을 하면 다른 쪽
은 금방 카를로스와 연합할테니까. 그땐 미국과 카를로스를 등에 업은
세력들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
알폰소가 머리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미국 대통령은 미군의 희생을 원치 않아요. 선거에 영향이 많으니
까요. "
"알폰소씨,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는 이유는 뭡니까?"
고영무가 소파에서 등을 떼며 물었다.
"당신은 털어놓아도 안전한 것이 첫째요.왜냐하면 얼굴을 들고 다
닐 수가 없는 신분이기 때문이지.둘째는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하기 때
문이오, 미스터 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알폰소의 얼굴은 및띤했다.
"나는 당신을 우리 일의 대리인으로 만들고 싶소.내가 이렇게 밀항
선을 타고 오갈수는 없는 노릇이오, 미스터 고."
"30분 후에는 도착할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