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주년의 소회
이 선 재
대학을 졸업한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60년은 꽤 긴 기간을 말하며 다이아몬드 회 년이라고도 한다. 기대 수명이 늘어나기 전의 60세는 환갑 또는 회갑이라고도 해 장수라는 놀라운 은혜를 축하하는 해였다. 2023년 11월 말 거동이 불편하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들을 제외하고 대학동기 여럿이 모여 조촐하고 오붓한 오찬을 즐기면서 졸업 60주년을 축하했다. 졸업하는 해에 바로 결혼한 친구가 회혼례를 맞아 여행을 다녀왔다며 자랑했다. 그 순간 나는 25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학교 재임 시 가정대학 학장 발령을 받던 1998년 2월 말, 나는 21세기를 선도할 첨단 생활과학의 학문적 가치와 미래시대를 선도할 역량 있는 지도자를 육성하는데 주력하리라 다짐했다. 마침 그 해가 가정대학 60주년이라는 생각이 뇌리에 스치면서 졸업생으로서의 사명감이 더해졌다.
숙명학원은 1906년 조선왕조말 고종황제의 귀비였던 순헌황후가 민족적 여성 지도자를 양성하는 여성교육기관으로 창립하였다. 그 후 1938년 재단법인 숙명학원에서 숙명여자전문대학을 창설하여 3년제 가정과와 기예과, 그리고 1년제 전수과를 개설해 40명 정원에 한국인과 일본인 반반씩으로 출발하였다.
여성교육의 새로운 뜻을 펼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 가정대학은 이 땅에 가정학이란 학문을 탄생시켜 정착시켰고 한국의 현대화를 주도하며 문화와 생활과학을 변화시키고 향상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우리나라 여성계의 귀중한 보고이다.
나는 가정대학의 60년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인간 삶의 근본인 가정경영관리, 의류학, 식품영양학, 아동복지학과의 분야별 전문인 양성과 우리 문화와 첨단 생활과학의 변천과정과 함께 학문적 가치가 세계인들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정리해 보았다. 또한 새천년에 전개될 가정학의 비전과 창조적 연구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4개 학과에서 교수 한분씩이 참여해 집필한 [가정대학 60년사]를 출간했다.
1998년 10월 29일 중강당에서 가정대학창설 60주년 기념식‘숙랑제’를 가졌다. 제1부에서는 1938년에 입학해 1941년에 졸업한 가정과 1회 졸업생들을 비롯해 반세기만에 모교를 찾은 일본인 선배 동문들 20여명을 포함한 동문 250여명과 재학생들이 다수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이경숙 총장의 치사와 학장의 인사말과 가정대학 동문회장의 연혁 보고에 이어 몇몇 은퇴교수님들의 격려사가 있었다. 총동문회장의 축가에 이어 1회 졸업생인 박현선 선배가 축시를 낭송하였다. 재학생 대표들이 11분의 은퇴교수님들에게 코사지와 순금으로 된 숙대 배지를 달아 드렸다.
2부에서는 가정과 1회 졸업생인 김경진 전학장과 이해남, 그리고 2회 이영자 선배가 회고담을 들려주었다. 일본에서 온 동문들 전원이 무대에 올라 재학당시 유행했다는 노래를 불렀다. 그 중 두 분 선배님은 A라인 감색스커트와 재킷을 입고 앞으로 나와 초대해 주신 한국 친구들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1941년 1회 졸업생이 일본에‘천종회’라는 동창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만나고 있다면서 한번 도 청파교정을 잊은 적이 없다.”며 울먹여 장내의 모두를 숙연케 했다. 흰 블라우스에 나비모양으로 묶은 파란색 리본이 날개를 펼치고 꽃 위에 살포시 앉아 있는 나비 같아보였다.
총장의 치사에서 앞으로의 대학 발전에 대한 비전을 들으면서 탁월한 리더쉽과 밝은 앞날이 내다보였다. 뒤이은 초창기 동문들의 회고담에서 해방 전 몇 해동안의 사회상과 숙전의 높은 위상을 엿보며 선배들의 자긍심과 건재가 기뻤다. 드디어 60년을 한 순간에 뛰어넘은 무대에선 신세대의 발랄한 음악과 춤, 그리고 재치 있는 진행에서 끼와 흥과 재능을 엿보았다. 무대 위와 관중석이 하나가 되어 장내는 온통 뜨거운 열기를 띠었다. 60년이라는 시차는 있지만 같은 교정에서 공부했다는 선후배란 인연으로 만나 서로 보듬는 모습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던지. 감회가 새로웠다.
[가정대학 60년사]의 출판비와 기념행사비용 전액은 가정대학 교수들의 갹출금과 외부 찬조금과 의류학과 동문회의 희사금으로 충당하였다.
가정대학 학생회에서도 전공별로 6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가정관리학과에서는 10월 30일부터 이틀 동안 연극‘또 해피엔딩’을 공연했다. 또한 선후배 동문 간 사랑의 마음을 모아 ‘새로운 사회와 가정’에 대한 세미나를 열었다. 의류학과는 9월 11일부터 5일간 도울아트타운에서 가정대학 창설 60주년기념 작품전시회를 가졌고, 세익스피어의 만남이란 주제로 생활 속에서 새로운 활력과 에너지를 충족시켜주는‘축제’를 패션쇼로 구성해 표현하였다. 의류학과 대학원 학생들의‘우리 옷 이야기’전시회와 의류학과 동문회에서의 FADOS 전시회와 제1회 퀼트 전시회가 있었다. 식품영양학과에서는‘비만과 다이어트’라는 주제로 학술제를 개최 하고 참석자들의 체지방을 무료로 측정해주고 즉석에서 만든 다이어트 쿠키를 만들어 주어 큰 호응을 받았다. 아동복지학과에서는‘아이 사랑’ 인형극 을 공연하고 사용했던 인형을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전시회를 가졌다. 아동복지학과에서는‘아동상담·심리치료의 세계’를 주제로 60주년기념 학술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하여 가정대학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재학생, 교수, 동문들의 하나 된 마음과 신뢰는 숙명인의 자존감과 정체감과 결속력을 높여주었다.
가끔 나에게 주어진 이러한 역할에 대해 감사함과 뿌듯함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섭리에 대해 무한한 경외심을 느낄 때가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불민하고 마음이 약한 나에게 분에 넘치는 보직을 맡겨주시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은사님들과 주변인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내게 약간의 온유함과 미미하나마 삶의 지혜가 있다면 그건 사람과의 관계에서 배운 것이다. 항상 남보다 천천히 걷고 나보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자 했으며 말을 아끼려고 애썼다.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랄까, 전통적 가치관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최선의 미덕이라고 믿고 내 길을 걸어오면서도 디지털 선도대학에서 21세기형 리더십 양성을 주축으로 하는 비전을 제시하려고 애써왔다.
오랜만에 [가정대학 60년사]를 꺼내보니 1998년 모교 대강당에서 가졌던 60주년기념식 정경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25년 전 80세쯤이던 숙전 가정학과 1회, 2회 선배님들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한껏 모양내고 젊음을 뽐내며 함께 했던 많은 동문들과 재학생들도 세월에 닦여 겉모습과 생각은 변했겠지만 모교 사랑의 마음은 한결같으리라.
사랑과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맞이했던 가정대학 창설 60주년의 소회를 되짚어보는 내 가슴엔 그 자리를 빛냈던 모든 인연들이 그리움과 고마움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