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젓한 한국어 두고 영어 단어 투성이 연설
미국 숭배의 상징 'the BUCK STOPS here' 패
한글 없던 신라시대 때 이두문 보는 듯
오태규 언론인·전 한겨레 논설실장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한 가지 일을 보고 전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뜻이죠. 저는 윤석열 대통령의 언어 습관을 보면서, 그 말에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됐습니다. 거창하게 언어 습관이라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가 애용하는 어휘나 단어만 보면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한글 경시-영어 중시’의 취임 2주년 국정보고 연설문
윤 대통령이 취임 2주년을 맞아 5월 9일 낸 ‘윤석열 정부 2년 국민보고’ 내용을 들여다봅시다. 22분 동안 집무실 의자에 앉아 국민을 상대로 방송 연설을 하면서, 그는 수많은 영어 단어를 날것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펀더멘털’로부터 시작해, ‘업그레이드’ ‘퍼블릭 케어’ ‘메가 클러스터’ ‘코로나 팬데믹’ ‘아젠다’ ‘하이 타임’ ‘글로벌 스탠다드’와 같은 영어 단어를 주요 대목에서 남발했습니다. ‘기초’ ‘강화’ ‘공공 돌봄’ ‘대형 집적단지’ ‘코로나 유행’ ‘의제’ ‘적기’ ‘국제표준’으로 바꿔 부를 수 있는 것을 마치 ‘나 이런 영어도 알아’라고 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것도 가장 품위 있는 한글 문장을 구사해야 할 대통령 연설문에서 말입니다.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한국의 문화 창작물이라면서 한글 창제 반포날을 국경일(한글날)로 만들어 기리는 나라에서 말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영어와 한글을 어설프게 조합한 단어, 굳이 영어 약자를 쓰지 않아도 될 단어도 수두룩했습니다. ‘킬러 규제’(핵심 규제), ‘글로벌 중추 국가’(세계 중추 국가), ‘세일즈 외교’(경제 외교), ‘K-콘텐츠’(한국 창작물),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G20’(주요 20개국), ‘GDP’(국내총생산) 같은 표현들입니다. 같은 연설문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과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를 각 단어 뒤에 괄호를 치고 친절하게 IRA, ISA라고 영어 약자를 붙여 준 것과 대조적입니다. 이렇듯 제대로 쓸 수 있는데도 굳이 영어를 앞세우는 윤 대통령의 심리와 행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과시욕과 사대주의의 발로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집무실에서 '윤석열정부 2년 국민보고 및 기자회견'의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선물한 'the buck stops here' 명패가 보인다. 2024.5.9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미국 숭배의 상징, ‘The BUCK STOPS here!’ 명패
영어 숭배, 미국 숭배의 가장 압권은 연설 내내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The BUCK STOPS here!’라고 쓰인 영어 명패입니다. 포커게임에서 유래한 이 말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포커광이었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 친구가 이 말이 적힌 작은 표지판을 선물한 데서 유명해졌다고 하죠.
한국 사람은 그렇다고 해도 일반적인 미국 사람들조차 이런 배경과 뜻을 잘 알 리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이 명패를 카메라 앞에 진열해 놓은 채 방송 연설을 했습니다. 권위주의라는 비판을 감내하면서 굳이 집무실 의자에 앉아 연설한 것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이 패를 과시하기 위한 의도적인 기획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입니다. 큰형님처럼 떠받드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직접 선물한 것인지라 애지중지하는 마음이야 알겠으나 한국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연설에 영어 명패를 내세운 것은, 국민 무시-한글 무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보다 미국, 한글보다 영어를 중시하고 숭상하는 마음이 없고서는 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혹시 이 연설을 본 외국인들이 윤 대통령의 이름이 ‘The BUCK’으로 바뀌었나 하고 오해할까,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아니 그보다 그를 한국 대통령이 아니라 미국 식민지의 총독쯤으로 여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위가 흐리니 아래도 흐린 영어 섞어쓰기 유행병
윤 대통령의 취임 2주년 행사는, 영어투성이 연설문과 영어 명패 두 장면만으로도 너무 많은 걸 보여줬습니다. 그가 변하기 어려운 사대주의자이고 영어 숭배자임을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자국 중심성’을 내팽개치고 친미·친일 추종 외교로 내달리는 심성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해 줬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라의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은 너무 많은 사람에 영향을 끼칩니다. 대통령이 영어를 쓰니까 총리도 장관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에서 거리낌 없이 영어 단어와 국적 불명의 단어를 마구 쓰는 것은 나쁜 경우입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에 교육받은 정치 지도자들이 떠나면서 일본식 한자 섞어쓰기 풍조가 끝장나는가 했더니, 이제 대통령의 못된 본을 받아 영어 섞어쓰기가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박형준 부산시장의 짓거리가 가장 꼴불견입니다. 그는 부산시를 영어 상용도시로 만들겠다고 나대고, 부산에 새로 생기는 법정동 이름을 아예 한국 최초로 순 영어 이름인 ‘에코델타동’으로 짓겠다고 나섰습니다. 윗물이 흐리니까 아랫물도 흐려지는 현상이 한글 정책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윤 대통령의 한글 경시는 일회성이 아닙니다. 고질입니다. 그래서 더욱 심각합니다. 그는 2023년 1월 5일 교육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학교 다닐 때 국어가 재미가 없었다. 우리말을 뭣 하러 또 배우나”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바로 직전 해 12월 21일 열린 비상경제민생회의 겸 제1차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는 그런 인식이 그대로 투영된 충격적인 문장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대통령 고질병이 부른 신종 ’영어 이두 문자 시대’의 풍경
“거번먼트 인게이지먼트가 바로 레귤레이션이다. 마켓에 대해서 정부는 어떻게 레귤레이션할 거냐, 마켓을 공정하게 관리하고 그 마켓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GDP를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아주 효율적인 시장이 될 수 있도록 공정한 경쟁 체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정부가 시장에 대해서 관여하고 개입해야 하는 기본적인 방향이다. (…) 금융기관의 거버넌스가 아주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일이다. (…) 2023년에는 그야말로 다시 대한민국, 도약하는 그런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더 아주 어그레시브하게 뛰어봅시다.”
저는 이 문장을 보면서 신라 시대의 이두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한자로 된 개념어를 연결하는 조사로 등장한 이두 말입니다. ‘영어 중심-한글 주변’의 이런 윤석열식 문장이 영어 중심의 ‘신종 이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대주의자들의 방해를 뚫고 각고의 노력 끝에 한글이라는 주체적인 문자를 만들고 닦아왔는데 여기서 다시 종속적인 이두 문자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와 한글을 경시·무시하는 윤 대통령을 비롯한 사람들을 상대로 더 적극적으로, 더 강력하게 맞서야겠습니다. 개개인이 한글을 사랑하고 키우고 닦는 일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오태규 언론인·전 한겨레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