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에 1996년 이후 28년 만에 회장·부회장 직제가 신설됐다.
'기업은 사회의 것'이라는 창업주 故 유일한 박사의 신념에 따라 1969년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한 유한양행이 이번 결정으로 옥상옥(屋上屋) 비판에 직면했다.
앞서 이정희 전 대표이자 현 이사회 의장의 '기업 사유화 시도'라는 의혹이 제기되며 진통을 겪은 터라 파장이 거셀 것 으로 예상된다.
유한양행은 15일 서울 동작구 본사에서 열린 '제101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이 같은 내용의 '정관 일부 변경의 건'을 통과시켰다.
앞서 유한양행은 이번 주총에서 '정관 일부 변경의 건'을 안건으로 상정해 회장, 부회장 직제 신설하기로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내홍을 겪었다. 유한양행에 회장직이 신설되면 이정희 의장이 회장에 오를 것이란 전망이 나오자, 일부 직원들이 '이 의장이 유한양행을 사유화하려고 옥상옥을 만들고 있다'고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본사 앞에는 지난 11일부터 이날까지 이를 격렬하게 반대하는 트럭 시위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사측은 "이번 직제 신설은 글로벌 제약 회사로 나아가기 위해 직급을 유연화하려는 조치"라며 "특정 인물을 선임할 계획이 전혀 없고, 주총에서도 직제만 개편할 뿐 회장 선임은 예정되어 있지 않아 적임자가 나타날 때까지 공석일 것"이라고 해명했다. 아울러 "회사의 양적·질적 성장에 따라 향후 회사 규모에 맞는 직제 유연화가 필요하고, 외부 인재 영입 시 현재 직급보다 높은 직급을 요구하는 경우에 대비해 필요한 조치"라고 부연했다.
조욱제 유한양행 사장이 6일 서울 중구 소공로 더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LASER 301 글로벌 3상 임상 결과 발표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스1 제공]조욱제 유한양행 사장이 6일 서울 중구 소공로 더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LASER 301 글로벌 3상 임상 결과 발표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스1 제공]
특히 유한양행에서 회장에 올랐던 사람은 창업주 고(故) 유일한 박사와 연만희 고문 두 명이었고, 연 고문이 회장에서 물러난 1996년 이후에는 회장직에 오른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유일한 박사의 유일한 직계 후손으로 현재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손녀 유일링 유한학원 이사는 이날 주총 참석을 위해 급히 귀국했다. 직제 신설에 우려를 표한 유 이사는 이날 주주총회에 참석했다.
이날 주총에 참석하기 앞서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유 이사는 "여기에 어떤 것도 방해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정신과 회사를 지지하기 위해 참여했다"면서 "이것은 진실성(integrity)과 통치(governance)에 대한 할아버지의 원칙에 대한 것으로,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밝혔다.
다만 유 이사는 이날 "오늘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라며 "회장직 신설 안건이 통과되더라도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주총에서도 직제 개편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제기됐다. 한 주주는 "회장직 신설이 유일한 박사 유지에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며 "지금 경영진 중에서 나중에라도 회장이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나"라고 주장했다.
세간의 우려에 대해 이날 조욱 제 유한양행 대표이사 사장은 "회사 성장에 따라 언젠가 필요한 직제이므로 이번에 정관을 개정하는 것"이라며 "회장을 하라고 해도 할 사람 없을 것이며 한다는 사람이 있어도 이사회에서 분명히 반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유한양행은 1969년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를 선택해 이사회를 중심으로 주요 의사결정을 진행해오고 있다. 이사회 구성원은 사외이사 수가 사내이사보다 많으며 감사위원회제도 등을 두고 있다.
유한킴벌리 대표이사를 지낸 문국현 전 창조한국당 대표와 이석연 전 법제처장 등 시민사회 오피니언 리더들은 이번 유한양행 논란을 접하고 '유한을 사랑하는 시민사회 인사 대표'를 구성하고 "소유와 경영의 철저한 분리가 창업 정신"이라며 "유일한 박사의 창립 이념과 기업가 정신을 잊지 않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