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대 마르코 신부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사도행전 15,7-21 요한 15,9-11 사랑실천과 계명 준수는 동시사건 포도나무의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고서 포도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정립하시고, 제자들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예수께 끝까지 머물러 있으라고 당부하셨다.(15,1-8) 오늘 복음에서도 전체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 모티브는 열매를 맺기 위한 포도나무와 가지의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가지인 제자들이 머문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조건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라고 명하시는 것은 아니다. 스승인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그 사랑은 아들을 사랑하신 아버지께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따라서 스승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그 기초가 된다.(9절)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조건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이 먼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을 모델로 제시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예수님께서는 아들로서의 자신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사실을 대단히 기뻐하신다. 제자들이 스승을 따라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문다면 마찬가지로 기쁨이 보장될 것이며(11절), 이 기쁨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제자들에게까지 베풀어주시는 기쁨이다. 계명을 지킴으로써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사실상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난 뒤 새 계명을 선포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3,34) 이렇게 계명과 사랑은 서로 묶여 있다. 구약성경을 따르는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계명과 사랑이 서로 별개의 것이며, 사랑이 계명에 종속되어 계명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신약성경 후기에 사는 우리에게도 구약의 율법은 있고, 이 율법으로부터 물려받은 십계명도 여전히 효력을 발생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계명들 속에서 사랑을 솎아내어 계명 위에 세우셨고 모든 계명의 골자로 사랑을 제시하셨다. 그래서 모든 율법과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지를 묻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신명 6,5)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이렇게 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사랑의 이중계명으로서 모든 계명의 핵심이요 골자다. 이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의 전부를 지키는 것과 같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사랑이 추상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사랑의 구체적인 모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13,34)이라는 모범 안에 들어 있다. 여기서의 사랑은 낙관주의자들이 생각하는 화사하고 달콤한 로맨스(romance)에 등장하는 낭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모델은 곧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 앞에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필리 2,8) 세상에 내어놓은 사랑이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당장 제자들의 목숨까지 요구하면서 사랑하라는 것은 아니다. 우선 ‘스승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의 교과서는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그 책 안에 들어 있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배워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숙제이다. 숙제를 하면서 늘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는 황금률이 아니겠는가? 결국 사랑하는 동시에 계명 준수가 이루어진다. 물론 사랑한다는 것이 자칫 추상적인 관념에만 머물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했을 때 계명 준수가 이루어진다. 만약 사랑의 실천이 잘 되었는지, 그래서 계명 준수가 잘 이루어졌는지 알아보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기쁨이 동(動)하고 있어야 한다. 기쁨은 곧 만족감이며, 이 기쁨은 바로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기쁨이다.(11절) 이 기쁨으로 자신을 충만케 하려면 사랑의 실천이 일상의 습관이 되어야 한다.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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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형 유스티노 신부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사도행전 15,7-21 요한 15,9-11
오늘 아침에 가족들과 축복기도를 하셨나요?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벗어 던지고 축복기도를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이 기도가 우리 가족을 얼마나 사랑의 일치로 이끄는지 그 실례를 들려 들이겠습니다.
어느 날, 한 형제님과 미사 후에 대화를 나누다가 저에게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님께서 시킨 대로 저는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에 아내와 자녀들에게 축복기도를 해줍니다. 간혹 잊어버릴 때는 문자로 축복을 꼭 보냅니다.
3개월 정도 했는데 우리 가정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선 내 자신입니다. 아주 짧은 축복기도이지만 그 기도를 통해서 내가 주님께 축복받고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집안 분위기입니다. 아침마다 전쟁터처럼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차분해지고 따뜻해 졌습니다. 며칠 전에는 감동으로 울었습니다.”
“아니, 왜요?” 그 형제님은 지금도 벅찬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신부님, 그게 말입니다. 며칠 전에 회사에서 언짢은 일이 있어서 술을 한잔하고 들어왔습니다. 전에는 제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인사만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아이들이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화가 더 납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녀석들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날 제가 막 잠이 들려고 했는데, 녀석들이 제 방에 들어오는 겁니다. 아마 제가 자나보다 하고 생각했겠지요. 저는 눈감은 채 모른척했지요.
그런데 첫째는 제 오른손을, 둘째는 제 왼손을 살포시 잡고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데 꾹 참았어요. 아이들이 나가고 난 뒤 감동으로 펑펑 울었습니다. 아! 이것이 가족의 사랑이구나. 그래! 내일 아침에도 기쁘게 하루를 맞이해야지. 주님 감사합니다.”
그 형제는 신명나게 가족자랑을 했습니다. 저도 물론 형제처럼 기뻤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은 표현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도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표현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힘은 예수님의 사랑과 가족의 사랑입니다. 항상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면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기쁨의 충만으로 가족을 향한 사랑을 축복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일터로 확장시키십시오. 특히 지금 나와 불목의 관계에 있는 형제를 향해서 축복의 기도를 행하십시오.
“주님께 노래하여라, 영광으로 가득 차신 분!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셨도다. 알렐루야.”
부산교구 이세형 유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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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유 세례자 요한 신부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사도행전 15,7-21 요한 15,9-11
저는 가끔씩 길을 가다가 사람들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상대방의 얼굴에서 느끼는 점은 아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무슨 기준으로 생활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지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상대방의 얼굴에서 그 사람의 상태를 충분히 느끼게 합니다. 피곤한 얼굴인지, 상쾌한 얼굴인지, 기쁜 얼굴인지, 슬픈 얼굴인지를 느낍니다. 그 중에서도 연인의 얼굴을 쳐다보면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항상 기쁜 얼굴을 보입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관계에 있으면 제일 기쁜 얼굴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얼굴 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상대방의 좋은 얼굴을 기억하고 그대로 쫓아 사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 또한 기쁜 얼굴을 지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데 그것이 뜻대로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잘 안 되는 경우에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 기쁜 얼굴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기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생각과 상대방이 기쁠 수 있도록 노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은 서로의 모자람을 채워주는 나눔과 일치가 있기 때문에 기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써 기쁜 생활을 하려면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생활을 하면 됩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르는 모습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바로 “서로 사랑하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 복음 13장 34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떠나시기에 앞서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시는 것은 세상이 주는 기쁨보다 더 큰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당신의 영원한 삶을 함께 누리도록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사랑은 아무런 차별 없이 개개인에게 맞는 사랑을 베푸시어 사람답게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죄인들에게는 사랑과 용서를, 병든 이에게는 마음과 몸의 치료를, 우는 이에게는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당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결국 당신 사랑의 최고 표현은 십자가에 당신 목숨을 바치심으로서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남김없이 주신 희생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비천한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는 기쁨을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주님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 자신도 그분 모범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랑 안에 머물지 못하면 모든 단절을 가져옵니다. 사랑 안에 머물지 못하는 그 단절은 무관심과 미움을 초래하게 되고 우리 모두를 파멸의 길로 가게 만듭니다.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기쁜 모습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사랑이 없는 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의 하느님께서도 기쁜 얼굴로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과 우리 이웃들에게 “서로 사랑하는” 기쁜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부산교구 김두유 세례자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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