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히트 한 한국영화「괴물」이 일본에 상륙하고, 일본의 대히트 리바이벌 작품 「일본침몰」이 한국에서 개봉되었다. 양쪽 나라에서「대히트 확실」의 기대가 높았지만 양쪽모두 평판은 별로였고 흥행은 실패였던 모양이다.
영화제목대로 일본 침몰하지 않자 한국관객들 발 뚝 끊겨
요즘처럼 정보량이 불어나고 서로의 가치관을 존중하는 시대가 되었어도 영화라는 가장 국민대중적인 문화작품에서는 아직도 共有(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일본인에게 「괴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일까? 매우 흥미있는 테마다.
1973년에 간행된 고마쓰 사킨(小松左京)씨의 SF소설「일본침몰」은 지각변동과 지진, 화산의 噴火(분화)로 일본열도가 패닉상태에 빠져, 이것을 어떻게 구해보겠다는 일본인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렸다. 때마침 당시 일본사회는 석유파동 광란 물가 등 사회불안을 안고 있어「일본침몰」은 일본인 한사람, 한사람의 위기의식을 자극하여 3백만부를 넘는 일대 베스트셀러가 됐다. 고마쓰씨의 문제의식은 「국토를 잃어버린 백성들의 행방」이었다고 하지만, 소설은 (일본)열도가 침몰하는 충격적인 결말도 있고 해서 영화화(73년)도 크게 히트한 것이다.
이번에 한국에도 상륙한 것은 (그 영화의) 현대판으로 수정된 재판이다. 「8월말 일본은 소멸한다…」- 자극적인 캐치 프레이즈의 선전효과도 있어 개봉 4이란에 47만명을 기록했다. 그런데 그 후 관객의 발길은 뚝 끊기고 말았다. 수정재판 「일본침몰」에서는 일본열도가 침몰하지 않았다. 어쩐지 한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그게 이유였던 것 같다.
해양참사대원인 히어로(주인공)의 필사의 분투로 일본은 침몰을 면한 것이다.
「미국의 음모」와 「한국적 정서」가 일본관객에게 먹히지 않았다
한국인에게 있어 「침몰하지 않는 '일본침몰' 같은 건 사기다!」라는 것이다. 나아가 일본의 방위청이나 동경 소방청이 협력하는 위기관리나 시민의 구출 등 현실감 잇는 장면을 한국의 매체들은 「군사대국화의 메시지를 여기저기 숨긴 정치영화(중앙일보 분수대)」로 받아들였다.
「일본의 국가·민족적 존망은 그저 스스로가 강해지는데 달려있다. 자신이 자신을 지키는 "집단자위"의 당위성이 바로 여기 있다」(같은신문)라는 해설이다.
이것은 일본인으로서는 정말 깜짝(놀랄)할 일이다. 「자위대가 자연재해로부터 자국민을 구출하는게 어째서 군사대국화인가요?」라고 생각에 잠겨버린다. 한국에서 일본은 정말로 신용 못 받고 있는 거다… 좀 서글픈 느낌이 들지만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이겠지.
한편 「괴물」의 일본진출도 유감스럽지만 히트하지 못했다. 한국최초의 본격怪獸(괴수)CG영화 「괴물」이 일본에서 먹히지 않은 이유는, 한국 매스콤이 이미 여러 가지로 취급하고 있지만, 내가 느끼기로는 이 작품의 「미국의 음모」와 「한국적 정서」에 일본의 관객이 반응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애당초 50년 전에 수폭실험으로 탄생한 괴수 고지라를 탄생시킨 일본은 갖가지 괴수영화가 넘쳐흐르는 「괴수대국」인 것이다. 주한미군의 환경오염문제도 현실로 있으며, 한국에서는 리얼리티를 갖고 인식되고 있는 「주한미군의 환경오염으로 생긴 괴물」에 일본인은 거의 놀라지 않는다. 또한 한강에 나타난 괴물의 모습에 관해 말하자면, 어릴때부터 괴수 장난감을 갖고 노는 일본 아이들에게 주는 임팩트(충격)가 모자란다.
한국인에게는 바로 이점이 재미있었던 거다. 서울의 일상적으로 눈에 익은 한강다리 밑에서 나타나는 괴물에 뭐라 형용키 어려운 현실감이 있었던 거다.
한국영화 「고도의 정치성」은 언제나 이상하게 여겨진다
또 하나, 「한국적 정서」라는 것은 한국인 가족의 아주 진한 유대 감정인데, 이 영화에서는 이것이 중요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떨까? 일본의 괴수영ㅇ화, 오락영화 관객의 대종은 10대, 20대다. 괴수영화라면 「쥬라식 파크」, SF라면 「ET」등에 익숙하다. 일본의 영화 팬들은 한국으로부터 처음 상륙하는 한국판 괴수영화에 대해 여태까지 본일도 없는 기상천외의 오락적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거다.
영화는 그 나라의 사회를 보는 매우 중요한 대상이다. 여기 (특파원으로) 와서 화제에 오른 영화를 여러개 보았는데 언제나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은 한국영화의 「고도의 정치성」이다. dudd화는 섭칼처(Sub-Culture)로서 시대의 공기를 전해주고 있다.
또한 사회의 모순이나 불만의 카타르시스임으로 反(반)권력을 지향하는 것은 세계 공통이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한다. 크게 히트한 한국영화들은 왜 그리도 「반미」「반일」「친북」이 많은것일까, 라고.
북파공작원을 다룬 「실미도」는 필션의 부분과 사실의 구별이 시로 곤란한 영화였다. 「실미도사건」의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세대는 「實話(실화)」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정권에게는 적대시하는 과거의 군사정권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확산시키는데 「왔다」의 영화였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세 번이나 보고 말았다. 헐리우드급의 스펙타클장면도 압권이며 시나리오도 완성도가 높은 좋은 영화였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본 한국의 젊은 세대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이르렀을까? 남침해온 북한에 대한 전쟁책임을 느꼈을 것인가? 그보다는 「반전」이 강력하게 인상에 남는다. 상대적으로 북한에 대한 위화감은 엷어졌을 것이다. 「反戰氣運(반전기운)」은 물론 소중한 것이지만 북한이나 김정일정권에의 批判動力(비판동력)을 깎아먹는데 공헌한 작품이었다.
「웰컴투 동막골」도 재미있게 봤지만 그 콥셉트는 「태극기…」와 같았다. 북한의 구인도 같은 민족이며 피도 눈물도 있는 좋은 사람이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참전한 미국은 남쪽의 순진무구한 소녀나 북의 좋은 인간(군인)도 가차없이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미국 부시정권의 이라크에의 공격을 연상시키는 미국 비판 메시지가 번뜩이는 느낌도 들었다.
또 박정희 전대통령 암살사건을 다룬「그때 그사람」에서는 박대통령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듯한 장면이 (마음에) 걸렸다.
反軍政, 민족공조, 반일, 반미 메시지 분명한 한국영화들
최근의 화제작 「한반도」에서는 일본의 傍若無人(방약무인)적인 악한의 상과 함께 이걸 퇴치하는 한국 민족주의자의 활약이 실로 인상적이었다. 저게 진실이라고 여겨지지 않았으면 좋겠건만, 하는 걱정도 했다.
한국영화는 反(반)군사정권, 민족공조, 반일, 반미 등 메시지가 매우 분명하다. 그리고 그러한 작품이 많은 젊은 관중을 끌어들이고 있다. 영화가 현실정치, 현정권의 코드에 이렇게까지 가깝다고 느껴지는 것이 외국인의 눈으로 보면 이상한 것이다.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큰 붐을 일으키고 있던 3년전, 「그럼 왜 한국에서 일본의 TV 드라마 인기가 오르지 않는 걸까」를 취재한 적이 있다. 한국의 어떤 TV프로듀서는 『일본의 TV드라마는 출연자가 너무 많아서 스토리를 알기 힘들다』고 한 적이 있다. "악역"이었던 이물이 도중에서 "괜찮은 사람"으로 바뀌어지는 등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본의 영화나 TV 드라마에는 확실히 그런 애매한 군데가 있다. 묘사가 인물의 내면으로 향해 가는데서 그런수가 있다. 일본이에게 있어 그런 것이 드라마의 깊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류가 일본여성에게 크게 받아들여진 것은 이것을 뒤집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 드라마는 스토리가 글자 그대로 드라마틱하고 다이나믹 하다. 악역은 어디까지나 얄밉도록 악역이다. 욘사마는 한없이 멋쟁이다.
한국영화의 惡役이 「장군님」의 敵과 정확히 일치하는 건 정말 우연일까
욘 사마는 모습이 아주 훌륭하다. 보고 있으면 시원한 느낌을 준다. 음악에 비유하면 한국 드라마는 일반적으로 메이저 코드(長調코드), 일본드라마는 마이너 코드(短調 코드)가 기조다. 그리고 장조 코드는 勸善懲惡(권선징악)이 기본이다. 상쾌한 기분을 느끼는 데는 「惡役(악역)」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영화 팬은 영화에서 시원한 기분을 느끼고 싶어한다. 특히 국산 영화에 대해서는 그런 것을 바라고 있는 것 같다.
단지 신경이 쓰이는 것이 또 하나 있다. 한반도에서 여화를 좋아하는 사람하면 그것은 북한의 장군님이다. 헐리우드 영화에서부터 일본영화 「도라(寅)상 시리즈」까지 대단한 컬렉션을 갖추고 듣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인민에 대한 선전선동술도 영화감상에서 많이 배운 것 같다. 한국연화의 「惡役(악역)」이 그 장군님의 「敵(적)」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것은 정말 우연인가...
어쩌면 영화보다 무서운 이야기인지도 모른다.(konas) (출처: 한국논단 2006년 10월호)
구보다 루리꼬 (日 산께이신문 한국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