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풀향 ・ 2023. 1. 8. 18:22 URL 복사 이웃추가 본문 기타 기능 정운(鄭運.1543.중종 38∼1592.선조 25)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무장(武將). 자는 창진(昌辰), 시호는 충장(忠壯), 본관운 하동(河東). 훈련참군 정응정(鄭應楨의 아들. 무과에 급제하고, 거산(居山) 찰방(察訪)이 되어 감사의 수행원이 민폐를 끼치는 것을 보고 태장(笞杖)을 치니, 감사가 좋아하지 않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다시 웅천(熊川) 현감이 되어 감사와 뜻이 맞지 않으므로 곧 해임하고 돌아갔다가 이어 제주판관이 되어 목사(牧使)의 뜻에 거슬리자 사직하였다. 임진왜란 때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어 이순신(李舜臣)이 원균(元均)을 구원하기를 주저하는 데 대하여 군관 송희립(宋希立)과 더불어 원균을 도와주기를 읍소(泣訴), 이순신의 전함에 종군하여 선봉으로 부산 앞바다에서 왜선 5백여 척과 싸우다가 다른 장수들은 다 후퇴했으나, 정운 홀로 싸워 많은 적선을 무찌르고 전사하였다. 북병사로 추증하였다가 다시 병조판서로 가증(加贈)하였고, 만호 이대원(李大源과 같이 흥양쌍충사(興陽雙忠祠)에 제사하였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무신(武臣).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출생.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창진(昌辰). 아버지는 훈련원 참군 정응정(鄭應禎)이다. 1570년(선조 3) 무과에 급제하여 1579년(선조 12) 훈련원 봉사가 되고, 1580년에 금갑도 권관과 거산도 찰방을 역임하였다. 강직한 성격 탓에 일시 파직되었다가 1583년(선조 16) 강령 현감, 1584년 웅천 현감을 지냈다. 1585년 해주목 판관이 되었으나 목사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1588년(선조 21) 사복시 판관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 전라좌도 녹도진의 만호로 부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라좌수군을 경상도 수영의 원군으로 투입할 것을 논의하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정운은 이순신(李舜臣)이 신뢰하였던 핵심 장수로서 옥포, 적진포,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한산도 해전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여 그해 8월 절충장군[정3품]으로 승진하였다. 9월 1일 정운은 부산포 해전에 참전하기 위해 몰운대(沒雲臺)를 지나던 중 ‘몰운대’에 자신의 이름인 ‘운(雲)’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죽음을 예견했다고도 한다. 결국 정운은 부산포 해전에서 이마에 왜군이 쏜 대철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직속상관이었던 수사 이순신은 “나라가 오른 팔을 잃었다”라고 통곡하면서 정운의 넋을 위로하였다. 부산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초기 해전 중 가장 큰 전과를 올리면서 승리하였다. 정운의 묘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평활리 오소치에 있다. 1604년(선조 37)에 병조참판에 증직되고, 1652년(효종 3) 영암의 선비들이 경호에 사당인 충절사를 세웠다. 충절사는 후에 녹도사와 함께 사액을 받았다. 1735년(영조 11)에 흥양 쌍충사에 제사를 내리고, 1795년(정조 19) 어제 어필로 충성을 포장하였다. 부산 동래 충렬사에도 배향되었다. 1796년(정조 20) 병조 판서와 의금부 훈련원사에 증직되었으며 1798년 충장(忠壯) 시호를 받았다. 같은 해에 어명으로 몰운대에 순절비가 세워졌다. 【업적】 정운의 자는 창원(昌原)으로 본관은 하동이다. 영암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거산도찰방⋅웅천현감⋅제주판관을 거쳐 임진왜란이 발발할 때 녹도만호였다. 난의 초기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도망하여 곤양 부근에 이르렀을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때 이순신의 휘하 장수들은 관할론(館轄論)과 부원론(赴援論)으로 대립되었다. 이때 정운은 어영담(魚泳潭) 등 여러 장수와 함께 경상도는 우리의 국토가 아닌가 하고 부원론을 주장하였다. 이에 이순신의 경상도 출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는 이순신 군의 선봉장이 되어 옥포⋅적진포⋅당포⋅당항포⋅한산도 해전에 참가, 분전하였다. 8월 24일 전라좌수영군은 경상좌수영군과 합동하여 부산포를 공격할 것을 결정하였다. 9월 1일 이른 아침 부산포를 향하고 8시경 몰운대를 지나자 동풍이 갑자기 일어나고 파도가 넘어 들어 함대를 정비하고 화준구미(花樽龜尾)에 이르렀다. 여기서 왜선 5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왜선 8척, 서대포 앞바다에서는 왜선 9척, 절영도에서 왜선 2척을 만나 모두 격파하였다. 이어 부산포 내에 돌진하였다. 적선 400여척이 선창 동쪽의 산기슭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때 정운은 우부장(右部將)이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분전하였다. 이때 적선 100여척을 격파하여 많은 적군의 군기를 노획하는 한편 적군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정운은 회군할 때 적탄을 맞아 전사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충장(忠壯)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영암의 충절사와 부산 충렬사 등에 봉안되어 있다. (동래문화원) 【정운공 순의비(鄭運公 殉義碑)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0호. 소재지 : 부산 사하구 다대1동 산 144. 몰운대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는 임진왜란 당시 부산포 해전(1592년 9월 1일)에 우부장(右部將)으로 출전하여 공격의 맨 앞에 서서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녹도만호 정운 장군의 의로운 죽음을 추모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있었던 정운 장군은 적병이 호남에 이르기 전에 먼저 나아가 칠 것을 주장하고, 맨 앞에 서서 공격할 것을 스스로 청하였다. 또한 옥포·사천·한산도 해전에서 공을 세우고, 왜적의 군영이 있던 부산포를 공격할 때에도 다시 맨 앞에서 공격을 하였다. 비문에는 장군이 수군 선봉으로 몰운대 아래에서 왜적을 만났을 때 몰운(沒雲)의 운(雲)자가 자기 이름자 운(運)과 음이 같다하여 이곳에서 죽을 것을 각오하고 싸우다가 순절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충장공실기(忠壯公實記)>와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에는 부산포해전에서 순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직사각형의 비는 윗변을 둥글게 다듬은 간략한 형태이다. 정조 22년(1798) 정운 장군의 8대손 정혁이 다대첨사로 왔을 때 세운 것이며, 비문은 이조판서 민종현이 짓고, 훈련대장 서유대가 썼다. 1974년 부산시가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정운 충신각(鄭運 忠臣閣】 전라남도 기념물 제76호.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 있는 정운(1543∼1592)의 정려문. 정운은 임진왜란 때 옥포ㆍ한산해전 등에서 이순신 전라좌수사의 선봉장으로서 전과를 올리고 몰운대(歿運臺)에서 순절하였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1609년(선조 41) 명정을 받았고, 그의 출생지 입구에 정려를 지었으며, 1959년에 중수하였다. 정려문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집이며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안에는 명정 편액과 12대손인 홍채(洪采)의 중수기 현판이 걸려 있다. ▲부산 정운공순의비 ▲해남 정운 충신각 [출처] 조선 무신 정운(鄭運) [출처] 조선 무신 정운(鄭運)|작성자 풀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