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대구일일특강 1 ] - 인간은 무엇인가?
05,3,1 대구 주님의 교회당 강의: 이근호 목사
이번 강의 제목이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사실은 이런 질문 자체가 얼마나 생뚱맞고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 인간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립한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돌맹이가 "돌맹이는 무엇인가?" 라고, 개가 "개는 무엇인가?" 라고 스스로에게 묻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이 이렇게, "인간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는 것은, 이미 나름대로 "인간은 이러이러하다" 라고 정립한 인간관이 다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화하고 다져주기 위해서 이렇게 질문을 하는데, 즉 "아하, 내가 생각한 것이 맞는구나. 남들도 나와 같이 생각을 하는구나. 저 사람은 좀 다르지만, 그래도 교체해서 수정하고..."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물론 자기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보충하고 하는 식으로, 아무튼 자기가 생각했던 그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틀은 유지하면서 내용물을 채우겠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피 흘리신 십자가 앞에서도 유효한가?
그런데 문제는 과연 예수님의 피 흘리신 십자가 앞에서도 그런 틀을 유지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향해서도 "인간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질문자체가 과연 성립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 이렇게 십자가가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인간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는 것은 상당히 건방진 태도라는 것입니다. 마치 진리이신 예수님 앞에서 "진리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수님의 피 흘리신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성립이 안 되고, 어떤 질문이 가능하겠습니까? "당신은 왜 피를 흘리십니까?" 라는 질문만 허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다른 질문이라도 일체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궁금하고 의구심이 들어도 말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이렇게 피를 흘리고 있는데, 만약에 본프레레 축구국가대표 감독이 말하기를, "예수님, 차두리를 어디에 집어넣을까요? 이영표를 빼고 넣을까요, 아니면 그 앞에 있는 김두현이를 빼고 넣을까요?" 라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축구구경을 오신 예수님이 아니라, 피 흘리시는 십자가에서의 예수님 앞에서 말입니다.
제가 너무 엉뚱한 예를 들었습니까? 너무 조용한 것을 보니, 예를 든 이유도 별로 생각하기 싫다는 그런 표정인데, 어떤 청년이 자동차에 부딪쳐서 피를 흘리고 누워있는데, "청년아, 내가 누구지?" 라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함부로 질문을 마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허용하는 한에서만 질문이 성립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계시니 말입니다.
마치 청년이 지금 피를 흘리고서 누워있는데, 수학노트를 들고 와서는, "이것의 코사인 값이 도대체 얼마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얼마나 그 청년을 시시하고 건방지게 여기는 일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묻는 것은 자기의 자유겠지만, "당신 어떻게 다쳤어요?" 라고 묻는 것이 그런 상황에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 십자가 - 우리의 입을 순식간에 다물게 !!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에서는, 그렇게 알고 싶은 것도 많고, 자기 미래도 예측해보고 싶고, 자기가 산 로또복권, 주식 등등 궁금한 것이 제 아무리 많아도, 그러나 그런 궁금증을 내세운다는 것 자체가, 그러한 사태와 이 세상을 제대로 인식을 못하고, 즉 자기 중심으로 교만한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일시에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것입니다.
그런 십자가 앞에서 "당신은 왜 피를 흘리십니까?" 라는 질문 외에 그 어떤 질문이라도, 즉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의 10년 뒤의 모습은 어떠할까?" 등등의 질문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 앞에는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순간부터는 질문도 조절되어야할 입장에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동이나 태도는 물론이고 자기가 생각하는 그런 생각조차도 고무줄로 꽁꽁 묶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질문은 허용이 안 돼" 라고 확 묶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꽁꽁 묶여진 상태를 두고서 '예수 안' 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 '예수 안'과 '아담 안' !!
그렇다면 이렇게 예수 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성경에서 '예수 안' 이라고 나오니, "아하,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 안에 들어가야 되는가 보다" 라고 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안' 이라고 하면 자기 집 안이나, 화장실 안 등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면 이렇게 예수 안에 있기 전에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습니까?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것은 바로 '예수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밖에 있으면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가면 예수님에게 묶이는 상황이지만, 그 이전에는 자기 팔 자기 마음대로 흔들고, 하고 싶은 질문 마음대로 하는 그러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아담 안' 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 안이니,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도 우리는 어딘가 안에 갇혀서 들어있었다는 것입니다. 묶여있었고, 소속되어 있었고, 어떤 통치권 속에 존재해있었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라 말입니다. 그것을 다름 아닌 성경을 통해서만 파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꼼짝도 못하고 묶여있던 상태에서, 그렇게 사로잡혀 있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말미암아,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탈피해서, 따로 독자적으로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나라를 구축해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 구원 - 그 전제가 인간의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음 !!
그러니 구원을 말할 때는 그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세계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 힘으로 빠져 나온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그냥 장소이동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빠져 나올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구원(구출)이라고 하면, 그 전제가 외부에서 끄집어내어 주었기에, 그래서 결과적으로 생성된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구원은 무엇인고 하니,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위치가 변하는 것을 말하는데, 즉 신분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 아담 안에는 무엇이 작용하는고 하니, 죄가 작용하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악마가 지배하고, 또 다른 말로 율법이 지배하고, 또 다른 말로죽음이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이 4가지 요소가 같은 개념 속에 들어있으면서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 아담 안의 특징 - '못 벗어남'이 우글거리는 세계 !!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아담 안의 특징이 '죄에서 못 벗어남' 이라는 것입니다. '악마의 세력에서 못 벗어남', '율법으로부터 못 벗어남',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못 벗어남' 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못 벗어남'이 우글거리는 세계가 바로 '아담 안'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숨을 골라야 하는데, 벌써 머리가 복잡해지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볼 것은,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왜 당신이 해되느냐?" 라는 것입니다. 소위 '6하 원칙' 이라는 것이 있는데, 즉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라는 것인데, 어떤 사태나 사고를 규정할 때 6가지의 원칙을 가지고 표기해서 규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하는 의도가 무엇이캑?것입니다. 도대체 어디에 써먹으려고 말입니다. 그 답변이 무엇인고 하니, '죄에 대해서 벗어나고 싶어서'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귀에 대해서 벗어나고 싶어서', '율법에 대해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벗어나고 싶어서' 말입니다.
◈ 도대체 왜 질문을 던지는가?
1학년 짜리 초등학생이 자기 어머니에게 "7×7은 얼마예요?" 라고 물었더니, 이 어머니가 뭐라고 대답하는고 하니까, "예야, 7×7은 왜 묻지? 죄로부터, 마귀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묻는 것이지?"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아이가 얼마나 어리둥절하겠습니까? 그냥 자기는 '7×6=42'는 겨우 알았는데, 그 다음이 몰라서 궁금해서 질문을 했는데 말입니다. 자기는 별 특별한 생각도 없이 물었는데, 어머니는 아주 심각하게 "그것을 왜 묻지. 네가 살고 싶어서 그렇지"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아이는 속으로 "요즘 날씨가 더워서 우리 엄마 정신이 좀..." 라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나중에 인생을 다 살고 나서 92살이 되어서야, 그제야 비로소 어머니의 그런 답변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하, 그때 우리 어머니가 그래서 그렇게 대답을 했구나" 라고 말입니다. 머리가 허옇고 이가 다 빠진 다음에야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질문은 그냥 별로 생각 없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서 남에게 자랑하고, 그렇게 함으로 자기의 어두운 분위기에서 자기도 인간임을 과시하고,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법적으로 자기가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마귀가 자기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그리고 자기는 죄로부터는 약간의 거리가 있는, 즉 죄와는 상관없이 정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남에게 폼 내기 위한, 남에게 자기는 이렇게 많이 아니 실수가 적은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자기 속에 그렇게 갇혀 있는데, 그런데 1학년 때는 어려서 그런 것도 모르고, 그냥 "엄마, 7×7은 얼마예요?" 라고 해서 '49' 라는 답을 얻어서, 그것을 친구에게 자랑하고, 그렇게 그렇게 계속해서 행동이 연결되어간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고, 또 청년이 되어 동대문 시장에서 물건을 가져다 장사를 하면서, "아주머니, 요즘은 티셔츠가 얼마에 나옵니까?" 라고 질문을 하는데,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살아도 정당하게 살고, 살 만한 가치가 있어서 산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것으로서, 그래서 '죄로부터, 마귀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탈피하겠다는 일종의 몸부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 나는 누구인가? → 내가 어떻게 살아남지?
인생을 짧게 살면 자기 정당화하는데 신경을 많이 쓰다가, 그렇게 하다가 이제 인생을 좀 경험하고 나면, 인생이 자기 중심이 아닌, 누구 중심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자기 중심은 아니고, 이 세상은 오로지 생존경쟁이고,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되는, 즉 도태되고 탈락되는 냉혹한 정글의 법칙이 통하는 사생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다음부터는 세상이 무엇이며, 자기는 누구인가를, 그런 것은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자본주의사회 - 드디어 소유?인간을 결정 !!
드디어 질문이 바뀌는데, "어떻게 하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즉 자기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야하는지, 그런 질문들은 점차 없어지고, 이젠 얼마나 자기가 소유할 수 있는지, 자기 것으로 얼마나 않은 것을 소유할 수 있는지, 오로지 그것으로 관심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그야말로 한가할 때 하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드디어 소유가 인간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모든 신에게 묻는 것인데, 이것은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감상적이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지만, 그런데 생존사회에 나가보면 신의 자리는 지워지고 그 자리에 소유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이런 소유가 있으니, 자기는 이런 소유를 가질 정당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이런 월급을 많이 주는 좋은 직장이 있으니, 자기는 그것을 가질만한 정당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유가 신의 자리에 앉아서, 소유가 인간됨됨이를 결정하는 그러한 사회를 두고서 '자본주의 사회'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 다 의미가 없고, 즉 그 사람이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로 따지면, 교인이 몇 명이고 헌금이 얼마나 나오고 건물은 어느 정도인지, 그런 것이 그 교회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교회가 되었던, 병원이 되었던, 행정기관이 되었던, 농사를 짓던 그 어떤 직업을 종사하던 간에,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그런 것을 다 녹여버려서, 그 어떤 직장에 있던지 간에 자기가 돈을 얼마나 받은 것으로 그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즉 소유를 얼마나 가지는 것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그런 후기자본주의사회에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오직 돈이 될 수 있는 그런 기술을 얼마나 개발하고 획득하느냐에 따라서 평가를 받으니, 그래서 대학에 가는 것이고 말입니다. 물론 진리의 탐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회사에 가더라도 그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용접을 하든 말입니다. 그 공장에 합당한 소유가 있어야 하는데, 즉 그 회사의 소유를 키워주는데 공헌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만 그 회사에 취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모든 사회는 "인간은 무엇인가?" 라고 인간의 가치와 본질과 궁극적인 것을 묻지 않는데, 그것은 그런 질문 자체가 자기의 소유를 증가시키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사회는 소유증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은 서로 하지 않기로 묵시적으로 다짐을 하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이고 할 때 보통 무슨 질문들이 오고갑니까? "외삼촌, 인생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 그냥 웃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번에 과장되었다. 그러네 너는 아직 취직을 못했나? 그리고 너는 언제 시집가노?" 라고 하는 말들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이 이러한 자본주의사회 체제 속에서 "너는 어느 정도 소유를 확보하고 있는가?" 라는 것이 관심사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것을 바둑판에 비유하면, 이렇게 서로가 교체되는 지점들인데, 각자의 소유물을 껴 앉고서 이렇게 서로가 각자의 위치에 존재하게 되는데, 공무원을 하든지 공장에 취직을 하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각자의 소유공간에서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가고 한다는 것입니다.
울산강의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들뢰즈' 라는 철학자는 이것을 하나의 '고원'으로 보았는데, 사실 말이 좋아 고원이지 각자의 무덤이겠지만 말입니다. 각자가 이렇게 자기의 고유한 영역(영토)을 다들 나름대로 꿰차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교체되는 연결지점을 '테트리스' 라고, 아니 '매트릭스' 라고 하는데, 모든 정보가 교체되는 정보화시대에 있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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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렬(行列, matrix) - 숫자나 문자를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으로 배열하여 그 양끝을 괄호로서 묶은 것. 가로의 배열을 <행>, 세로의 배열을 <열>이라 한다. - 야후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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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매트릭스는 인간을 통제하고 있는가
매트릭스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는가? - 모피어스는 매트릭스 안에 있는 인간을 노예라고 불렀다. 또한 밤중에 네오와 의원이 하는 대화 중에서도, 의원은 매트릭스에 있던 시간을 잠이라고 불렀다. 스미스 요원과의 100:1 격투 장면에서, 지나가다가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요원으로 변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 요원은 아직 귀에 통신 장비를 달고 있는 상태이다. 이는 아직 매트릭스에 속박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해방된 스미스 요원은 귀에 아무것도 달지 않고 있다. 이는 매트릭스로부터 해방된 상태라는 것을 암시한다. 스미스 요원도 역시 매트릭스에서 해방된 상태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매트릭스 2까지는, 표면적으로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자신을 인식하게 된 사람들과 그를 추격하는 매트릭스의 양자 대결 구도를 보인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매트릭스가 무슨 목적이 있어서 인간들을 가지고 인간 사회를 시뮬레이션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영화에서도 가장 많이 들어본 단어 중 하나가 바로 '목적'이다.) 특히, 100:1 격투신 전에 요원들이 나오면서 차례로 말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매트릭스 2 대사중 스미스 요원의 말 인용>
『 다시 여기 온 목적을 말하자면.
우리가 자유로워서 여기 있는 게 아니라
자유롭지 못해서 있는 것이지
우리 둘 다 알다시피, 목적이 없이는
도주할 이유도 없고
목적을 부정할 수도 없지
우린 존재할 수도 없었을 거야
우리가 생긴 목적이 있고
우리가 연결된 목적이 있고
우리를 있게 하는 목적이 있어
- 우리를 인도하고
- 우리를 조종하고
- 우리를 정의하고
- 우리를 결속하는 목적이 있지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너 때문이야, 앤더슨
네가 우리의 목적을 뺏은 것처럼
우리도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 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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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피아노학원으로부터, 이런 모든 우리가 성장하면서 받은 환경들이, 이렇게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정밀한 조직인, 즉 매트릭스에 봉사하라는 명령은 받은 요원으로서 살고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스미스 요원처럼 말입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 사회는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자체를 지우개로 지워버리는, 그런 질문을 용서하지 않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삽니까?" 라는 질문자체를 아예 정당한 질문으로 여기지 않는 사회, 바로 그런 사회에 지금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소유사회, 즉 자본주의사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지금 제가 왜 굳이 자본주의라고 하는고 하니까, 지금 우리가 태어난 자체가 바로 자본주의가 양산한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출생지가 산부인과가 아니라 자본주의사회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 속한 산부인과 병원이라는 것입니다. 병원이 아닌 집에서 태어났다구요?
이렇게 소유가 모든 것을 다 결정하는 사회에서는 옳고 그름, 선과 악, 이런 것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고, 아니 사실 용납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본주의사회에서 용납되는 것은 오로지 '생산력' 인데, 있는 것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생산하게 되는데, 이것을 두고서 '잉여생산 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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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의 축적 - 자본주의를 다른 생산양식들로부터 구분하는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자본의 축적이다. 노예제나 봉건제 사회에서는 착취자는 그가 직접생산자로부터 빼앗은 잉여생산물의 대부분을 소비했다. 생산은 여전히 사용가치가 지배하고 있었다. 생산의 목적은 소비였다. 그런데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일단 지배하게 되면 사태는 변한다. 노동자들로부터 쥐어 짜낸 잉여가치의 대부분은 소비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의 증대를 위해 재투자된다. 이러한 과정, 즉 잉여가치가 더 많은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해 항상 재투입되는 과정을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이라고 불렀다.
『자본론』제1권의 유명한 문장에서,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자본축적이 어떻게 자본가계급에게 '절욕'(節欲)의 이데올로기를 낳으며, 그 속에서 부르주아지가 어떻게 자기 자신의 소비조차 부정하고, 가능한 한 많은 잉여가치를 저축하여 재투자하도록 고무되는지 보여 주고 있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이며 예언자이다. '근면은 재료를 제공하고, 절약은 그것을 축적한다'고 [아담 스미스는 말했다.] 따라서 절약하고 또 절약하라. 즉 잉여가치 혹 잉여생산물 가운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부분을 자본으로 재전환하라!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 이 공식으로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표현했다. - http://reltih.cafe24.com/reading/marx_ideas/chapter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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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서, 보험회사에 찾아와서 보험에 들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보험에 들 마음이 없는 사람을 꼬드겨서 기어이 생명보험에 들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소유사회에서는 용납이 된다는 것입니다. 없는 데서 만든 생산력이고, 그런 능력이 없으면 보험회사의 직원으로서 자격이 없고 탈락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탈락하면 수입이 없고, 수입이 없으면 굶어죽게 되는데, 그게 바로 '매트릭스'에서 깜빡 깜빡거리다가 사라지는 불빛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배우 이은주 씨가 화장터에서 자기 몸을 태운 불꽃이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이런 생산력이 없으면 알아서 은퇴해야 하는데, 이렇게 스스로 알아서 은퇴를 하는 것은 두고서 '자살' 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제가 한 이런 이야기가 과연 옳은 것이냐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라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옳다고 해서 없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틀렸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놈의 더러운 사회' 라고 하면서도 점점 더 빠져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고 싶고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용납하지 않는 현실이니, 만약 다른 현실을 꿈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를 들어, 어릴 때부터 노란색과 빨간색만 가지고 놀면서 자란 아이에게 파란색을 크레용을 주면서 색칠하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색칠을 하고 가지고 놀아도 노란색과 빨간색만 가지고 하지 말입니다. 물론 다른 제3의 요소가 있을 때는 몰라도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크레용들은 이러한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림을 그려도 주어진 것만 가지고 그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착해야돼. 이 세상이 더러워도 나만큼은 순수해야돼. 나는 신앙심을 가지고 있어야만 돼" 라고 말입니다.
◈ 결국에는 돈, 돈, 돈 !!
하지만 그렇게 착하게 살려고 마음을 먹고 그림을 그려도 결국에는, "이렇게 착하게 살면 잘되겠지" 라고 하는 자본주의식 보상이라는 것입니다. "저놈들은 나쁜 짓을 해서 돈을 벌었지만, 나는 착하게 돈을 벌 거야" 라고 하는 결국은 마지막에는 '돈'이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무리 착하게 살고 어쩌고 해도 결국은 돈을 버는 것이,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축복이라고 가르쳐준, 그런 사고방식을 배태하게 된 못자리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 못자리 역시 자본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고 말입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이 애굽나라가 힘들고 못 살겠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애굽나라에서 지향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애굽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애굽에서 살면서 비록 노예는 노예이지만 그래도 좀 더 노동시간도 불고 집도 조금 괜찮은 그런 애굽생활을 원하는 것이지, 그곳에서 나가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모세 아이디어고 하나님의 아이디어이지 말입니다. 자기들 생각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목적이, 물론 나이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인데, 자기들이 교회에 나왔다는 그 선한 노동으로 인한 반대급부를 기대하는데, 이것은 바로 남들이 가지고 있던 좋아 보이고 풍부해 보였던 것들을, 세상 사람들처럼 짓을 통해 가지지 않고 자기는 하나님을 믿는 선한 것으로 쟁취하겠다는 동일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보다 더 잘먹고 잘살려는 또 다른 아이디어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열내어 강의를 하다보니,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여러분들이 한 것이 아니라, 제가 여러분에게 던져놓고는 또 제가 여러분이 그런 질문을 한 것처럼 그렇게 몰아 부쳐서 야단치고 했는데, 절망이지 죄송스럽습니다. 이거 무슨 코미디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나오는 교인들이 현실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느끼는 방향으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둘러싼 현실과 거기에 소속된 '나' 라는 존재는 얼마나 그 현실에 물들어있는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 교회에 와야 하는데, 자꾸 세상을 잊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 교회 - 세상을 잊는 장소가 아니라 보다 더 똑똑하게 바라보는 !!
아니 잊어버리려고 한다고 어디 교회에서 생활을 할 것입니까? 박태선처럼 신앙촌을 만들겠습니까? 재산을 다 팔아서 새로운 빌리지를 만들어서 공동체 생활을 할 것입니까? 교회에서 기거하는 것이 일주일에 불과 몇 시간밖에 안 되는데, 그런데도 "잊어버리자" 라고 한다는 것은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아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소속된 세상을 정확히 제대로 파악을 하는 것은, 교회에 와서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깨달으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탓할 것 없이 우리가 바로 이 세상의 산물이며, 우리도 이 세상과 한 통속이 되어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좀 알자는 것입니다. 자기가 세상과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 세상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 교회 - 세상 냄새 그대로 간직하고 나올 것 !!
그러니 세상에서 도망쳐서 교회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짊어지고 썩어진 냄새를 그대로 풍기면서 교회에 와서, 동일하게 썩은 냄새를 풍기는 이웃들과 만나서 상호기만과 상호위선으로 상호인정 받기를 원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 라는 것입니다.
◈ 교회 - 피의 십자가 마중으로 !!
그렇다면, 교회를 이렇게 보아야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교회에는 우리를 마중 나가는 게 누구인고 하니까, 목사가 아니라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마중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질이면서도 아닌 척하면서 교회에 나왔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를 마중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고 하니, "나는 누구입니까?" 라는 것을 가득 담아서 교회에 나오는데, 앞으로 어디에 어떻게 취직을 해야하며,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하는지 등등, 그런 문제를 가지고 오는데, 사실 그런 것은 부채도사에게 물어보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런 우리를 마중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피와 우리의 호기심과 우리의 미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니 우리가 자기고 있는 공포심과 초조감과 이 피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우리의 공포심과 예수님의 피를 연결해주는 자가 목회자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는 무슨 재주가 이런 역할을 하겠습니까? 피와 인생의 불안감, 즉 망할까 싶어서 벌벌 떨고, 죽을까 싶어서 벌벌 떠는 그런 불안감을 미리 이야기한 분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사도'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 자기들은 뭐가 그렇게 똑똑해서 알겠습니까?
이러한 사도들로 하여금 올바른 말씀에 대한 해석과 취지를 이야기하신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사도들의 주가 되시는 분, 바로 '주 예수' 라는 것입니다. 즉 주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사도들로 하여금 이 세상과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의미를, 즉 생명과 죽음을 연결하도록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 성령 받은 사람 - 성경말씀에 대한 사도들의 해석이 수긍됨 !!
그렇게 되니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성령을 받은 사람에 한해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러한 초조감과 불안감과 공포심에서 벗어나서 항상 순교하는 자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비록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만든 생산물이기에 불신자와 동일한데, 다만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경말씀에 대한 사도들의 해석에 대해서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고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판단력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 속에다 담아내는 능력은 성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성도에게 담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마치 사도가 같은 인간이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해서 사도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늘 넘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동일하게 들어가서, 우리를 말씀으로 움직여나가는 그런 탱크가 된다는 것입니다. 탱크 스스로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탱크를 운전하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말입니다. 운전하시는 분이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인데, 그러면 예수님의 이러한 능력이 어디에서 나오는고 하니까, 피에서 나온 능력인데, 그러면 이 피에서 무슨 능력이 나오는고 하니까, 이 피는 보통 피가 아니라 '언약의 피' 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義 -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말씀의 성취 !!
이 언약의 피는 둘로 나누어지는데, 한쪽에는 은혜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은혜를 받아야 할 대상자인 죄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언약의 피를 완성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인데,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이런 언약의 완성을 자기백성에게 실시한다는 것입니다. 그 실시하는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죄인 됨과 은혜 됨,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실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언약의 성취라고 하는데, 이것을 바로 '의(義)'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곧 말씀의 성취인데, 이것이 바로 '의'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말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의' 라고 할 때, 이 세상에는 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죄라고 하는 것은 죄에 물든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러한데, '아담 안'에서는 그 자체가 모두 죄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나오는 것 자체가 다 죄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가 되었던, 설교가 되었던, 헌금이 되었던, 찬양이 되었던, 그 무엇이 되었던 간에 모두가 다 죄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죄이기에 의는 없는데, 그런데 다만 의가 은혜로 죄인에게 주어질 때 비로소 의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지금 제 안경을 이렇게 누구에게 주면 이 안경이 누구의 것이 됩니까? 그 사람 것이 아니라 여전히 제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 것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것을 우리에게 주었으니 여전히 주님의 소유라는 말입니다.
◈ 왜 義를 주시는가? - 우리 속에는 전혀 義가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
그러면 왜 우리에게 주었습니까? 구원시키기 위해서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는 전혀 의가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즉 죄인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너 속에는 의가 없고 죄만 있다" 라고 알려주는 관계를 두고 "의인이 되었다" 라고 하는, '의인관계'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가 포함된 사람만이 의인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의는 전혀 우리가 만든 우리의 작품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그런 의라는 것입니다. 마치 전자제품 속에 들어있는 '칩'처럼 그렇게 집어 넣어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마음속에 예수님의 의가 없는 사람은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의 의가 들어있는 사람만이 천국에 가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기 것이 있느냐로 판단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것이 얼마나 잘났느냐를 보시는 분이 아니기에 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거는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마치 낚시바늘에 제대로 걸린 물고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죽었으면 죽었지 못 빠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천국에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도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오늘밤에 죽어도 낙원에 있고 말입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교과서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우리가 배우던 배우지 않던지 간에 우리 바깥 세상이 이미 그렇게 짜여져 있고, 이미 결론이 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저는 교회에 나오기 싫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하면, "마음대로 하세요"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정 나오기 싫으면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교회에 오고 싶어서 나왔다고 하는 사람이 성도가 아니라, 그런 사람은 자기가 싫으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러한 사람이 주님이 주신 칩이 없는 사람이고, 그런데 "내가 이 교회에 나온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좀 바빠서 몇 주를 안 나오더라도, 아니 몇 년을 안 나오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있다면 그 은혜로 반드시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인간이란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인간이란 하나님께서 만든 노리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속성을 담아내기 위한 일종의 '주머니' 라고 할까요? 성경에는 이것을 '그릇' 이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 이미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사상과 주어진 사고방식에 완전히 포위가 되어서 그 주어진 사고방식의 생산물로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분위기와 모든 것이 다 말입니다. 그것을 두고 '아담 안' 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담 안'에는 4가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권력(힘)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다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① 죄에 대해서
② 악마에 대해서
③ 죽음에 대해서
④ 율법에 대해서
인간은 이러한 4가지의 지배를 받게 되어있다는 것都求? 인간이 제 아무리 3살, 4살 때는 생명이 무궁무진해 보여도, 결국은 나이가 들면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자기는 법 없이도 산다고 하지만, 항상 그 속에는 법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자책한다는 것입니다. 자책, 자기반성, 회개 등등 이런 것들이 다 법이 있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정말로 법 없이도 산다면 사실 "나는 법 없이도 산다" 라는, 그러한 말조차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법 없이도 산다고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법을 의식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라캉은 이것을 두고 '실재계' 라고 했는데, 그리고 이러한 완벽한 법에 의해서 인간은 자기 내부에서 자기를 조절하게 되는데, 그것을 '상징계'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현실에서 내 양심으로는 이 정도로 착한 것도 대단하니, 좀 봐도" 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요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교통신호를 지켜야 하는데, 지금 너무 바빠서 그러니 사정을 봐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 속에는 법의식이 있어서, 그 법의식을 인간 자체욕망과 스스로 흥정을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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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캉 (Lacan, Jacques) 프랑스의 정신 의학자이며 정신 분석학자인 라캉(1901-1981)은 1932년 파라노이아(편집증)에 관한 논문을 제출했으며, 1936년에 유명한 '거울상 단계' 이론을 제시했다. 국제 정신 분석학 협회에서 제명당한 뒤, 자신의 학파인 파리 프로이트 학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그는 책을 많이 내지는 않았지만 방대한 세미나가 편찬되어 나오고 있다. 라캉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표어를 내걸고, 정신 분석학을 '생물학화하는' 미국 학자들의 경향을 비판했다. 정신 분석학의 핵심은 '말'에 있으며 무의식은 언어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사상이다. 라캉은 정신 분석학을 통해 주체의 문제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투명한 자아 의식으로서의 주체, 데카르트의 '코지토'는 거부되며, 무의식의 존재가 강조된다. 라캉은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그곳에 존재하며, 내가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 생각한다"는 말로 데카르트의 말을 뒤집는다. 대표작 『선집』(1966),『세미나』(1953-1980) - 엘리자베스 클레망 외 3인, 이정우 역, '철학사전', 동녘출판사, 1996.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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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악마라는 것은 영적인 것으로 인간이 느끼지 못하기에 빼버리고, 그 다음 죄에 관한 것인데, 이 죄는 율법이 쏘는 것이 바로 죄이고, 율법은 인간을 더욱더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니, 율법에 합류하게 되면 그 결과가 곧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 이미 인간내부에는 법적인 틀이 !!
이렇게 4가지를 합치면 결국 '법' 이란 것인데, 법 때문에 다 이렇게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 안에서는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고 하니, 법이 인간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헌법을 만들고 법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법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내부에 어떤 법적인 틀, 즉 법적인 인식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법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법이 전혀 나오지 않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실증법을 만들게 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 앞에 있는 대학이 경북대 법정대학인데, 이렇게 법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법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에게는 법이 내장되어 있는데, 이방인들은 이것을 '양심' 이라고 하고, 유대인들은 이 법을 '율법' 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 율법 - 에이, 죽어라 이놈아 !!
그런데 이 율법이 인간에게 언제 들어왔는고 하니, 물론 죄는 처음부터 들어왔지만 말입니다. 바로 이렇게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이 죄에 의해서 통치를 받을 때, 바로 그럴 때에 율법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즉 죄에서 빼내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것이 아니라, 아예 "죽어라. 이놈아" 라고 하면서 더욱 더 죄에 깊이 빠지도록, 죄에 짓눌려있음을 분명하게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법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고 난 뒤에, 정말 구원을 위한 자비를 베푼다고 한다면, "내가 좀 심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나의 자비로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에덴동산의 문을 활짝 다 열어놓았으니 누구든지 다 와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어라. 어서 오너라.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모두 다 들어올 때까지도 문을 닫지 않을 것이야" 라고 하시지, 율법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키지도 못하는 법을 주었다는 것은, 고생하는 놈은 고생 좀 더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럽게 하고 헉헉거리게 만드는데, 이렇게 왜 하나님이 인간들을 고생하도록 하는고 하면, 하나님의 정당성을 더욱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고, 그래서 하나님 쪽에서 법을 줘버린다는 것입니다.
◈ 지옥을 만드신 하나님 !!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이렇게 못난 놈임에도 불구하고 편하게 살기를 바라나? 이 나쁜 놈들아" 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추방한 그 추방을 더 정당화시키고, 마지막에 지옥을 만드신 하나님의 조치가 그러한 얼마나 합당한 것인가를 인간들에게 보다 더 확실하게 해주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방금 제가 이렇게 '아담 안' 이라고 했는데, 요약한다 해놓고 더 깊이 들어가고 말았는데, 사실은 이런 '아담 안'이라는 인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예수 안'에 놓여있는 자들만이 그러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놓여있지 않는 사람은 '아담 안'이라는 말도 성립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쪽에 있기에 저쪽이 보이는 것이지, 같은 쪽에 있다면 어떻게 같은 그 쪽이 보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 같으면, "죄, 율법, 악마, 죽음" 이라는 것도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는 것은 오로지 '나' 라는 것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까?" 라는 것만,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떻게 이 고통에서 해방될까?",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받을까?" 라는 것만 남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오직 자기만 남아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불신자에게는 모든 것이 고통으로부터 출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죄로부터 출발하게 되는데, 서로 이렇게 출발점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으로부터 출발하는 대표적인 종교가 바로 '불교' 라는 것인데, 이 불교는 바로 이방종교의 대표라고 할 수 있고 말입니다. 철저히 땅의 종교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구약성경에도 보면 우상의 특징이 땅에 있다고 했고 말입니다. "이 땅에서 인간은 살면서 고통이 주어졌다. 이 고통을 신과 타협해서 어떻게 면할 수 있을까?"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가인이 제사를 드리는데, 그리고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되는데, 그 결과가 바로 '방랑자'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제사를 드리고 방랑자가 되고 하는 것이 철저하게 땅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 불신자 - 고통으로부터 출발 !!
그래서 불신자들은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자기 인생이 왜 이리 풀리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지독하게 꼬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신이 있다면 자기가 그 신에게 뭔가를 잘못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을 불교에서는 생로병사(生老病死)로 보는데, 이런 고통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 신자 - 죄로부터 출발 !!
그런데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항상 '피'로서 시작하기 때문에, "왜 저분이 이렇게 피를 흘려야 하는가?" 라고 하면서, 자기 죄가 무엇인지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즉 죄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아니라 말입니다.
조금만 더 하고 쉬겠습니다. 일단 성경을 덮어놓고서, 그러면 고통이 들어왔는데 이런 고통을 면할 수 있는 최고의 아이디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욕망을 줄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아이디어인데, 이것을 만드는데 약 3000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욕망을 줄인다는 것은 자기 욕심을 버린다는 것인데, 욕심이 증가하면 원하는 것이 많으니 현실과 간격이 점점 더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결핍' 이라고 하는데,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치려고 하다가 두 번 떨어지고 포기하고 난 다음에, 이젠 마음을 낮추어서 공무원 시험을 치는데, 7급을 치려고 하다가 그것도 어려워서 9급을 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4번 정도 떨어지고 나면, 그러다가 결국은 집에서 논다는 것입니다.
이게 뭔고 하니, 자기 욕심을 줄여감으로 말미암아 자기 욕망이 이루지 못하는 그만한 결핍에서 오는 그 고통을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 바로 눈 높이를 낮추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곧 불교이며, 이것은 모든 인간들이 다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에서는 사실 불자가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인간들이 다 불자이고 부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이나 부활절에 절에서 축하 메시지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불자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교회를 나가던 어디를 나가던 말입니다. 대승적인 관점에서 말입니다. 백 날을 교회에 가고 해도 그것은 바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그런 고통을 낮추는 술책에 불과하다고 놀리면서, 그 정도는 우리도 다 알고 있으니, "축하한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그만큼 마음을 낮추었다는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이제부터 자기 욕심을 위해서 살지 말고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자기 마음가짐을 바꾸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야기한 이웃사랑이고 참된 행복이라고, 그들은 십자가를 그렇게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이해하고 해석하는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불교 이야기를 여기서 왜 합니까? 첫 시간에 여러분이 주무시는 것을 깨워가면서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이런 불교적인 사고방식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그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 앉아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여러분들을 무시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설령 여러분이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도 24시간 가운데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시간은 5초 정도이고 나머지 23시간 59분 55초는 다, "하나님, 제가 지금 교회에 왔습니다. 복 주이소" 라고 하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성령에게 얻어터져서 정신 차려서, "내가 왜 이럴까? 이게 아닌데..."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또 그 다음 주가 되면 또 교회에 와서, "예수님, 추운데 헉헉거리며 왔습니다. 뭐 없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이고 말입니다.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미 우리 속에 이런 의식이 깔려있음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두 번째 시간부터는, 그렇다?성경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쉬겠습니다.
§ 2005년 3월 17일 오전 10시 10분 정리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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