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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소리꾼, 장사익 (출처: 한국관광공사) 음악방
2014.10.16. 00:00
http://blog.naver.com/anifeel3/220152003472
제가 좋아하는 소리꾼 장사익 선생 관련 인터뷰 옮겨 봤네요~~~
한가위에 회원님들 각 가정에 행복이 충만하길 빕니다~~~
늘 안산, 풍산 하세요~~~
한국의 소리꾼, 장사익
한국의 소리꾼, 장사익
문화와 관광은 함께 가는 콘텐츠입니다. 관광을 하러 간 곳에 문화가 없다면 그것은 그냥 구경일 뿐입니다. 이 같은 평범한 진리는 청사초롱 독자 여러분이 확인해 주셨습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발행하는 청사초롱이 지난해 11월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독자 여러분은 청사초롱에 보완해야 할 내용으로 문화를 꼽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이 같은 지적과 요구에 따라 저희 청사초롱은 이달부터 우현석 객원기자가 집필하는 문화콘텐츠 <문화와 사람>을 새롭게 신설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저, 장사익입니다. 오늘 저희 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인터뷰를 하려고 했는데, 집사람이 없어서 말이지유. 집 앞에 중국집이 있는데 거기서 자장면이나 먹고, 저희 집에서 차 한잔 하면서 얘기하세요.”
약속은 매니저와 했는데 장사익 선생이 직접 전화를 해왔다. 자기는 집에 손님 오면 무조건 식사를 대접 하는데 오늘은 어쩔 수 없어 미안하단다. 펑펑 내리는 눈을 뚫고 인왕산 줄기 언덕받이에 있는 중국집에 앉아 기다린지 3분쯤 됐을까. 약속시간은 아직 10여 분 남았는데 그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쿠! 서설이 내리니 반가운 손님도 함께 오셨네. 지가 장사익이에유.” 명함을 주고받은 그는 자장면과 탕수육을 시켰지만 기자가 자장면만 먹자고 우겼다. 식사 후 우리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면서, 중국집에서 무료로 서비스하는 자판기 커피를 한 잔씩 들고 그의 집 2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글.사진 우현석(서울경제객원기자·여행칼럼니스트)
장사익은 세간의 잣대로 구분하는 인기 가수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티켓파워는 자타가 공인하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공연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매진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런 유명세 때문에 그가 마흔여섯 나이 늦깎이로 데뷔했다는 것, 노래를 부르기 전 열 다섯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곤고한 삶을 살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오늘 인터뷰는 그런 히스토리에서 한발짝 더 그의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다.
명문 선린상고를 졸업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그 학교를 졸업하면 은행 같은 내로라는 직장에 취직하는 것은 문제 없었을텐데 왜 그렇게 여러 직업을 전전하셨습니까.
“상고 출신들은 3학년 2학기가 되면 이 직장 저 직장으로 취직이 돼유. 그런데 은행은 12월에 시험을 봐. 난 3학년 12월에 생명보험회사에 입사시험을 봐서 내근 사원이 됐어요. 그렇게 두어 달 다니다 은행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어요. 다니는 직장도 있겠다 쉬엄쉬엄 했거든. 67년 후반부터 직장 다니다가 70년 6월에 입대를 했슈. 그런데 제대해보니 다니던 직장이 다른 회사로 바뀌었더라고. 복직하려고 했더니 ‘안된다’는 거야. 인생이 헷갈리기 시작한거지. 결과적으로는 더 잘 된 건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보면 인생은 잘 못 가도 괜찮은 길이야. 산다는 건 길을 찾는 과정이니께. 우리 앞엔 수많은 길이 있잖여. 그러고 보면 인생은 재미있는 거유. 사람들은 매일 오가며 눈에 띄는 가까운 길이 있는데도 안 간단 말이지. 그러고 보면 내가 그렇게 방황했던 것도 ‘인생이라는 길을 가면서 내 길을 찾는 과정이 아니었던가?’ 생각해요. 가다 보면 평지도 비탈도 있고 그렇잖아요. 길을 가는 게 ‘도 닦는’거유. 도를 닦으려고 공부도 하고… 그런 거 아니겄어.”
30년 넘게 세검정(종로구 평창동, 신영동 일대) 근처에 살고 있다는 그는 새우젓으로 유명한 충남 광천이 고향이다. 서울에서 오래 살았다고는 하지만 희석된 충청도 사투리가 간단없이 튀어나왔다.
서른 한살에 태평소와 대금을 배우면서 음악에 발을 들여 놓으셨지요?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3년 동안 낙원동 음악학원에서 대중가요를 배웠어요. 허리우드 옆에 한동훈 음악학원이라는데서... 요즘에야 기획사 시스템이 있지만 그때는 작곡가가 피아노 한 대 놓고 발성부터 기교까지 다 가르치고, 레코드 취입도 하고 그랬슈. 나는 어렸을 때 웅변을 해서 목청은 좋았지. 군대 가서도 문선대에서 가수로 있었고. 3년간 노래를 불렀다니까. 제대하고 가수를 할까 하다가 취업을 한거지. 집안 형편도 어렵고 하니까 돈 벌 요량으로.”
그래도 직장생활을 한 기간이 상당합니다.
67년부터 94년 데뷔하기 전까지 25년이에유. 난 별다른 능력도 없고, 당시 상황도 그렇고, 성격은 소극적이라 직장에 적응도 못 하고, 쫓겨도 나기도 했지. 그래도 내 안에 꿈틀거리는게 있었슈. 그게 바로 꿈이에유. 아버지가 들려주던 농악소리, 가수가 되려고 했던 기억, 그런 굽이굽이들이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탯줄을 부여잡고 나오듯이, 음악이라는 탯줄을 부여잡은 거유. 그래서 80년대 중반부터 옛날 고향 아저씨들이 하던 태평소를 배워보기 시작했어. 처음엔 단소를 1년간 배우고, 강영근 선생에게 피리 정악 5년 배우고, 그다음엔 원장현 선생에게 태평소 3년 배우고… 그 힘든 상황에서도 음악을 부여잡고 살았던 게 운명적으로 노래를 하게 된 토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먹고 살기 힘든데 어떻게 그랬는지 몰러(몰라). 지금처럼 노래를 하기 위해 끈을 부여잡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재즈를 하시던 김대환 선생께 영향을 많이 받으셨죠.
“내 스스로 먼저 노래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92년에 마지막으로 다니던 직장이 매제가 하는 카센터였는데 하루는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좋아하는 태평소를 3년만 하면 최고가 돼서 밥은 먹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러다 이광수 사물놀이패에 합류했지. 내가 “돈 안줘도 좋으니 시켜만 달라”고 했어유. 그 때 정말 치열하게 살았어. 죽을 힘을 다해서 해보겠다고 결심을 했으니까. 여기저기 공연 다니면서 뒤풀이 때 걸판지게 놀았는데 그때 마다 내가 노래를 불렀지. 그런데 하루는 프리 재즈를 하던 김대환 선생이 찾아와서 노래를 해보라고 하는거야. 그런데 그 양반이 내 노래를 한 번 듣더니 ‘박자를 맞추지 말고 다시 불러보라’는 거라. 그 당시 그분이 신중현씨랑 같이 음악을 했는데 자기도 박자를 맞추지 않고 연주하는 시도를 했었거든.”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젓가락 장단을 맞추거나 박수를 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한 가락으로 이어지는 그의 노래는 다른 이들이 장단을 맞출 겨를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오케스트라나 밴드와 협연을 하면 반주가 들어올 타이밍을 약속한다고 한다.
선생님을 무대위로 끌어 올린 사람은 임동창(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씨죠?
“그렇지. 하루는 그 친구가 ‘형! 공연을 한 번 해보라’고 권하길래 94년 11월 7, 8일 이틀 동안 홍대 앞 소극장에서 했는데 하루 400명씩 들이 닥쳤어유. 난 그 무대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거유. 요새 TV만 켜면 온갖 경연이 다 있는데 내가 지금 나왔으면 낙동강 오리알 됐을겨. 그 당시 김건모, 신승훈, 서태지 같은 가수들이 있었는데, 말도 안되는 마흔여섯 늦은 나이에 시작한거지. 그렇게 시작한게 올해로 벌써 20년이야. 올 10월에 ‘데뷔 20주년 기념 공연’을 세종문화회관에서 해요. 어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저 이는 그 나이에 시작했는데… 우리도 안 늦었다’고 해유. 남들이 나를 보고 용기를 내는 걸 보면 ‘인생은 잘만 살면, 살 만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
선친으로부터 영향을 받으셨다고 했는데 선친도 음악에 재능이 있었습니까.
“그냥 시골에서 농악할 때 장구를 잘 쳤던 정도지. 그래도 음악적 정서는 그때 물려받은 것 같아요.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나는 거요. 뭐든 생짜로 잘하는 사람은 없거든. 나만 해도 초등학교 때 웅변 연습하려 산에 올라가서 목청 틔우려고 소리 질렀고, 팝송도 많이 들었고, 어려서부터 그런 벽돌을 하나씩 쌓아서 노래라는 집을 지은거지. 아, 복권 당첨돼서 부자된 사람 봤슈? 큰 부자는 매일매일 조금씩 쌓아서 부자가 되는겨. 무수한 공력이 들어가야 되는거지.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과정을 겪으라고 주어지는 거라고. 국화를 봐요. 다른 꽃 다 진 다음에 피잖여. 갖은 풍상 다 겪고 혼자 가을에 핀다고. 열심히 살면 때가 와. 열심히 살지 않으니까 안 오는거지. 내가 오늘날 이만큼 된 건 남이 쳐다보지도 않던 태평소를 한 덕분이야. 그때 노래를 했다면 지금쯤 어디 변두리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나 하고 있을 거야. 가끔은 비워야 채울 수 있는 거라니까.”
기자가 가끔 찾는 음악 카페는 하이엔드(최고급) 오디오를 갖춰 놓고 클래식 음악만 틀어 준다. 그런데 그 카페에서 유일하게 틀어주는 대중음악이 하나 있다. 바로 장사익의 음반이다. 실제로도 그의 음악은 국악도 아니고, 트롯도 아니며, 고전음악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이 부르는 노래의 장르가 뭐냐고 묻는 이들은 없습니까.
“백남준 선생이 퍼포먼스 예술을 하잖아. 그분 바지가 클린턴 앞에서 흘러내린 적이 있었슈. 난 그것도 퍼포먼스로 봐. 그 양반이
르윈스키 스캔들을 비꼰거지. 백남준이 피아노를 부수는 순간 나는 소리도 음악이잖아. 4월에 내리는 눈도 눈인 것처럼… 내가 톱스타 가수를 따라 한들 아류밖에 더 되겠어유? 어느 장르다, 뭐다 하는데 그렇게 분석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예술이라는 것은 남들이 안간 길을 가는 게 맞는 것 같아. 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하고도 약속을 해. 내 노래엔 박자가 없으니까 들어갈 구멍을 내어 주겠다고. 그렇게 하면 반주가 돼유. 규격대로 살면 피곤한겨. 일탈을 해도 상관없어. 기존의 형식을 부정하는 아방가르드가 되니까. 장르 구분은 예술에서는 필요 없다고 생각해. 마음에 와 닿으면 그게 음악이 되는겨. 한국화를 봐. 하늘에 색깔 칠하나? 계절이 어디 있느냐고. 그렇게 그리니 깊을 땐 한 없이 깊고, 높을 땐 한없이 높잖여, 나는 틀을 벗어나야 하지 않겠나 생각해. 물론 처음에는 기본을 지켜야겠지만서두.”
댁에 들어오다 보니 근처에 ‘쉼박물관’이라고 있습디다. 뭘 전시하는 곳인가요.
“상여 박물관이에요.”
선생님 노래의 1/3은 죽음을 이야기한 것이라던데, 그러면 일부러 상여박물관 옆으로 이사오신 건가요.
“아뇨. 그런데 그러고 보니 우연의 일치네. 쉼박물관은 들어선지 5년밖에 안됐슈. 살고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게 인생 여정의 이벤트들이요. 그때마다 음악이 있지. 축가도 있고, 장송곡도 있고, 음악으로 사람의 심리를 표현하는 거지. 내가 죽음을 노래할 수 있는 건 젊은 가수들은 노래를 하면서 인생을 배우고 있고, 나는 인생을 배운 다음에 노래를 시작한 차이지. 나는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를 마흔 중반까지 나름대로 겪고 살았어. 그래서 할 얘기가 많고, 그 얘기가 바로 죽음의 노래야. 옛날에는 상을 당하면 곡하는 사람을 돈 주고 샀잖아. 곡하는 것이 바로 노래였어요. 그런데 곡 하는 걸 보면 구박만 하다 간 시어머니가 죽었는데 진짜로 울어. 왜 그런지 알아? 그동안 내가 받았던 설움을 터뜨리는겨. 울고 나면 말짱하잖아. 울고 싶을 때 울면 얼마나 개운한지 알아? 영화를 보고 술 한잔 먹고 울어봐. 풀어지잖아. 그렇게 서로 같이 감정을 공유해야 돼. 많은 사람 이 힘든데 나만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슬픔을 보듬어주기 위해 죽음의 노래를 하는겨. 내가 꽃구경을 노래하면 다 울어. 대중음악 하나 듣고 울어. 그러면서 마음속의 앙금이 씻겨 나가거든. 남들은 죽음을 노래하는 걸 터부시하는데 나는 죽음을 노래 해. 유행가에서 누가 죽음을 이야기하겠어?
그가 말을 끊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뒷산을 오르다
동그란 무덤
잔디위에
누워보았네
모든 것에 마지막이 있다는 것이
더없이 편안해 보였는데
무덤 앞에는
비석조차 없이
누구를 사랑했는지
누구를 미워했는지
알 길도 없이
새소리만 새소리만
들리는 것이
더더욱 맘에 들었네
“내 노래를 듣고 100명 중 한 명이라도 ‘인생이 그런 거로구나’ 하고 깨달았으면 좋겠어. 기쁨도 알고, 슬픔도 알고 그러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저쪽에 있는 불꽃 하나만 봐도 희망인 것이에유. 힘든 걸 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깨닫게 되거든. 좋은 음식은 첫맛이 없다니께. 처음에 간 빼주는 사람치고 좋은 사람 없어요. 말은 없어도 향기가 나는 사람 있잖아. 슬픔을 씻어내 주고 기쁜 사람은 두 배로 즐겁게 해주는게 노래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북한에서 세 차례 공연을 하셨죠
“2000년대 초반 평양팀과 서울팀이 상암동에서 축구를 할 때 내가 아리랑을 불렀어유. 그게 중계가 됐는지 북에서 나를 다 알더
라고. 순안공항 들어가는데 출입국관리가 ‘장선생 목소리 보전하시라요’ 그러더구만. 금강산 공연 때 찔레꽃, 아리랑 두 곡밖에 안 불렀는데 다음날 목소리가 안 나와. 내가 최선을 다해 불렀거든. 난 정치가 뭔지 모르지만 그때 핏줄을 느꼈어요. 외국 가서도 동포들 앞에서 공연을 하면 종종 오버를 하고 그래요.”
이 인터뷰가 관광공사에서 내는 월간지에 나가는 만큼, 그에 맞는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외국 공연에서 우리말을 이해 못하는 외국인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고, 미국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국 사람들과 음악적으로 소통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어린 손녀가 하나 있어요. 걔도 좋은 것, 싫은 것, 짠맛, 매운맛 다 알아요. 어른하고 똑같아. 인간은 다 똑같은 거유. 우리도 외국
노래를 들으면 밝은 노래, 슬픈 노래 다 알아 듣잖아. 느낌이지. 팝송 해석해서 듣는 사람 별로 없잖여. 칸소네도 그렇고. 아무리
외국 사람이라도 내가 정성껏 노래를 부르면 눈물을 흘려. 물론 내가 해석까지 해주면 이해가 쉽겠지. 베토벤, 모차르트도 그 곡을 듣고 가슴으로 느끼는 거지. 분석하는 것은 전문가들 몫이잖어. 치성이나 기도가 다 하늘까지 전해지는 것처럼 내 진심을 담아 노래 부르면 그게 다 통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술이 먹고 사는 거지 뭐. 노래하는데 옆에서 해설가가 떠들면 다 버려.”
요즘 세상살이가 팍팍합니다. 선생의 노래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됩니까.
“어느 시대나 다 힘들어요. 우리 때는 국민소득 몇천 불도 안되는데도 살았는데... 나는 상고 나와 차별받으면서도 참고 살았어요. 지금은 어디 그려? 그래도 지금은 굶어 죽는 사람은 없잖아? 세상 사는게 인내 하는겨. 직장 생활하면서 욕먹는 것… 그런게 다 과정인데 못 참고 나오니 공들인 게 소용 없어지는겨. 나는 보통 전철 타고 다니는데 젊은 사람들이 책보는 걸 못 봤어. 나는 핸드폰도 없고, 컴퓨터도 못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급한지… 앞에 노인이 서 있는지도 모르고 앉으나 서나 스마트폰이야. 예전엔 애인에게 편지 한 장 쓰려고 시인이 됐어. 요즘은 스마트폰 문자로 모든 걸 다 해결하니까 세상이 가볍고 끈기가 없어. 내가 보니까 다들 고스톱 치고 부시고 깨는 게임들만 해. 젊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 맡기고 저 세상 갈 수 있을지 모르겄어.”
선생님 공연은 언제 어디서 하든 무조건 매진입니다. 비결이 뭔가요.
“관객들이 나더러 ‘정성스럽게 노래하더라’고 그래유. 100을 가지고 노래하면 100의 결과가 나와요.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노래하면 관객들은 죽을 힘을 다해 들어줘. 죽을 힘을 다해서 살면 그만한 결과가 나온다니까. 대충대충 살면 그만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고… 가볍게 활동사진 흘러가듯 살면 남는게 없어요. 조용필처럼 대단한 가수가 노래해도 관객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 한두 곡에만 느낌이 오는 법이여. 그 노래 한 곡에 10만원 지불할 가치가 있거든. 사람들이 그 가치를 알아주는 거야. 관객들과 소통하고 힘을 얻으면 내가 매스컴을 안타도 사람들이 오게 마련이유. 난 미국서도 공짜표 없이 100% 다 팔아.”
공연을 보러 온 관람객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쓴다는데, 가능합니까.
“여지껏 했는데 작년에는 힘들어가지고 못했어요. 금년에는 하려고 해요. 안면 있는 분에게는 ‘딸 잘 크냐?’고 한 줄만 써도 서로 마음이 오가요. 보통 4000명에게 쓰는데 열흘 이상 걸린다니께.”
악보를 못 보시면서도 작곡은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가능한 얘기입니까.
“아뇨. 악보는 볼 줄 알아요. 다만 쓰지는 못하지요. 가락이 떠오르면 굴비 엮듯이 흥얼거리다 고저장단을 집어넣고, 감정을 넣고 수십번 읖조리다 굳어지면 녹음을 해요. 작곡 잘하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내가 흥얼거리는 걸 악보로 그리라고 하지.”
그의 집을 나서자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손님과 함께 찾아온 서설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장사익이 노래를 부른다는 이유처럼 ‘그저 이 눈이 추운 겨울, 삶이 고단한 사람들을 감싸 주는 포근한 이부자리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예인(藝人) 장사익의 붓글씨
그의 집 2층, 방 한 칸의 문이 열려 있었다. 방안 테이블 위에는 신문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옆에는 서예 도구가 정리돼 있었다. 틈틈이 붓글씨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순간 인사동의 한 식당에 걸려 있는 그의 붓글씨가 생각났다.
‘붓글씨는 언제 시작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김대환 형이 죽기 전에 돋보기 하나와 송곳 하나만 가지고 쌀 한 알에 반야심경 283자를 썼어유. 형이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이렇게 쌀알에 글씨를 쓰는데 너도 한번 붓글씨 써 봐’ 라고 해서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글을 쓰고 있는 이유에 대해 “한자를 붓글씨로 쓴 역사는 오래 됐지만, 한글은 우리 글 인데다가 서예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노래에 녹아 있는 상념과는 달리 글씨는 젊고 발랄했지만 이 또한 득도(得道)의 수준이었다.
“청사초롱 독자들께 붓글씨로 인사 한 줄 부탁한다”고 했더니 “암, 드려야지. 내가 그래도 관광공사 홍보대사였는데”라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미리 써놓은 종이를 들고 왔다. 종이에는 ‘높고 파란 하늘 / 푸른 날개 달고 / 아름다운 세상 / 날고 싶어요. 2014 정월 장사익’이라고 쓰여 있었다
[출처] 한국의 소리꾼, 장사익 (출처: 한국관광공사)|작성자 프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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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멋진 글 잘읽었습니다.해미님 감사합니다
이제서야 읽는 글, 이 또한 가슴 뭉클한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