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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인 현릉의 입구입니다. 현릉은 동구릉 경내에 있습니
다. 사진에서 참도와 망료위, 그리고 홍살문이 보이며 멀리 정자각과 비각도 얼핏
보입니다.
안녕하세요?
명절 잘 보내셨나 모르겠네요.
날씨도 연휴 내내 좋지 않았고 토,일이 연휴에 껴서 아주 운이 없는 명절이었습니다.
더구나 충청도 지방이 호우로 피해를 많이 입었다는 소식이 안타깝습니다.
침수된 논, 떨어진 과실들, 집단으로 죽은 닭들, 물이 들어와 못쓰게 된 집기들을 보며 눈물섞인 한숨을 지을 농가 분들을 생각하니 속이 상합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필 즐거워야 할 추석에 이런 된서리를 주시다니......
오늘은 조선 제 5대 왕인 문종의 능-현릉에 대해서 글을 올릴까 합니다.
현릉은 동구릉 내에 있는데 동구릉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나오는 능은 수릉이고 그 다음이 바로 현릉입니다.
조선왕릉 중에 최초로 시도된 동원이강릉(한 능역에 언덕, 즉 강을 달리 두는 능)인 현릉은 동원이강릉의 특징이지만 능역이 매우 넓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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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과 비각이 보입니다.
문종은 1414년 10월 3일에 아버지 세종대왕이 충령대군이던 시절에 한성 잠저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삼한국대부인 심씨(소헌왕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향이었으며 8살 때인 1421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1437년부터 국정에 참여하여 부왕 대신 서무를 결재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으며 1442년부터는 부왕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섭정에 들어갔고 1450년에 부왕이 아우인 영응대군의 자택에서 승하하자 바로 등극하여 국정 운영에 차질이 없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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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더기들이 뒹구는 이 자리가 바로 수복방 옛터랍니다. 언덕 위에 빼꼼히 보이
는 봉분이 바로 문종릉입니다.
세자 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학자를 가까히 하였으며 천문, 수학, 언문, 서예에 능했다고 합니다. 성격은 온화하고 자상하였으며 신중하고 기품있는 태도를 지녀 남에게 비난받을 구실을 주지 않을 정도로 꼼꼼했었다고 전해집니다.
일찍이 세자였을 때부터 국정에 참여했고 체력이 약했던 세종대왕은 통치 후반기에는 거의 대부분의 결재권을 세자 향에게 맡긴 상태였기 때문에 문종은 이미 세자 시절부터 충분한 국정 경험을 쌓아 왕위에 오른 뒤에도 조정은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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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릉과 현덕왕후릉을 모시고 있는 두 언덕과 그 사이의 간격입니다. 운동장처
럼 넓어 시원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성격이 지나치게 어질어 마음이 유약한 면도 없지 않았으며 세자 시절부터 격무에 시달렸기 때문에 왕위에 오른 뒤에는 더욱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더구나 부왕 세종이 승하할 당시에는 등창을 앓은 직후였는데 터진 부스럼이 아물기도 전에 국가 대사라고 할 수 있는 국상(삼년상)을 다 치르고 신하들을 일일히 만나면서 국정을 너무 성실히 돌봐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부왕의 국장을 치를 당시에도 신하들이 모두 건강을 염려하여 온돌에서 쉬면서 치료를 병행하라는 충언을 했으나 듣지 않고 정성을 다해 삼년상을 치뤘는데 이것도 건강 악화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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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릉으로 올라가는 언덕입니다. 꽤 가파른 편이며 예감도 보입니다.
언덕 위에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가 문종 사후의 비극을 예고하는 듯 합니다.
결국 문종은 즉위한지 2년 3개월만에 임종을 눈앞에 두게 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문종은 어린 세자 홍위(단종)을 잘 부탁한다며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 선왕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집현전 학사들을 고명대신으로 지명하고 향년 39세를 일기로 경복궁 천추전에서 승하하였습니다.
문종의 급작스런 죽음은 아직 소년에 불과한 아들 단종의 운명을 벼랑으로 내몰았고 이는 결국 단종애사로 이어지는 비운을 낳았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문종이 오래 살았다면 단종의 비극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건강 관리가 너무 부실했던 부왕 문종 탓에 단종은 어린 나이에 너무도 큰 격랑에 휩쓸리고 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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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올라서면 만나는 문종의 능입니다. 병풍석이 아직 둘러져 있어 조선 초
기의 능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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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장 뒤에서 내려다본 문종릉입니다.
문종비인 현덕왕후 권씨는 권전의 딸로 1418년 3월 12일에 홍주 합덕현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즉 충청도 지방에서 나셨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문종이 세자일 때인 1431년에 14살의 나이로 세자궁의 후궁으로 뽑혀 들어왔는데 그녀는 처음에는 승휘(종 4품)에 봉해졌다가 나중에 양원(종 3품)으로 승진하였고 세자빈 봉씨가 폐출되자 세자 향의 세번째 세자빈에 책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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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릉에서 본 현덕왕후의 능입니다.
향의 첫번째 세자빈은 김오문의 딸 휘빈 김씨였습니다.
그녀는 세자가 총애하는 궁녀의 신 뒷축을 오려 태운 재를 술에 타서 세자에게 먹이면 세자가 다신 그 궁녀의 처소에 찾지 않는다느니 뱀의 정액을 닦은 수건을 지니면 세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느니 하는 어느 궁녀의 말에 현혹되어 그런 요사스런 주술을 쫓다가 발각되어 친정으로 폐출되었습니다.
휘빈은 친정으로 돌아간 뒤 폐빈 첩지가 오기 전에 죽으라는 친정 아버지 김오문의 명으로 어머니와 함께 독배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딸을 먼저 보낸 뒤 김오문도 무관답게 3척 언월도로 배를 갈라 장렬하게 자결하였습니다.
두번째 세자빈은 봉려의 딸 순빈 봉씨였는데 가냘프게 생긴 겉모습과는 달리 매우 색광이어서 세자만으로는 만족을 못하고 다른 궁녀들과 동성애를 즐겼으며 술을 즐겨 마셔 술 중독 증세까지 보였고 세종이 내린 <열녀전>을 마당에 집어 던졌으며 세자가 좋아하는 궁녀들을 잡아다가 마구 때리는 등 첫번째 세자빈보다 더욱 난리를 피웠기에 아예 폐빈의 첩지를 받고 친정으로 내쫓겼습니다.
봉려는 그런 불측한 죄로 폐빈의 첩지를 받고 쫓겨온 뒤에도 반성의 기미가 없는 딸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자신의 요대를 풀러 목졸라 죽인 후 자신도 자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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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왕후릉의 근경입니다. 현덕왕후릉에는 병풍석이 생략되어 간소해 보입니다.
이런 두 세자빈의 비극이 있은 후 세자빈이 된 권씨는 1441년 7월 23일에 세손 홍위를 낳아 시부모인 세종과 소헌왕후를 기쁘게 하였으나 세손을 낳은지 이틀만에 산후병이 악화되어 24세의 젊은 나이로 동궁이 있는 경복궁 자선당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세종과 소헌왕후는 며느리 복이, 문종은 아내 복이 정말 지지리도 없었다고 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인 세자 향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현덕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안산의 소릉에 묻혔었는데 세조 대에 능이 파괴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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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왕후릉에서 바라본 남편 문종의 능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현덕왕후는 아들 단종이 시동생인(단종에겐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영월에서 사약을 받아 죽고 자신의 어머니와 오빠 권자신도 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자 원혼이 되어 세조(수양대군)의 꿈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네 놈이 죄없는 나의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데려가겠다."
세조는 혼비백산하여 잠에서 깨었는데 내관이 울면서 달려와 세자(성종의 친아버지인 의경세자, 추존 덕종)께서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알려왔습니다.
이에 심한 충격을 받은 세조는 형수의 짓이라 짐작하고 분노하여 안산의 소릉에 인부를 보내 능을 파헤치고 관을 물가에 던져버렸으며 능역의 소나무들을 모두 배어버리고 석물을 모두 다른 용도로 사용하게 했습니다.
게다가 그에 그치지 않고 종묘 문종실에서 형수의 신위를 쫓아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현덕왕후의 신위는 중종 때인 1513년에 문종실로 돌아왔고 숙종 때인 1699년에는 아들 단종과 며느리인 정순왕후가 복위되어 능이 새로 조성되고 신위가 종묘 영녕전으로 새로 들어오게 되자 안산에 쓸쓸하게 묻혀있던 그녀는 남편 문종의 능 오른쪽으로 돌아와 묻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