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동총동창회>>
도산공원은 도산 안창호선생이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위대한 애국정신과 민중의 교화를 위한 교육정신을
우리국민의 귀감으로 삼고자 조성된 것이다.
1973년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던 선생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하는 동시에
로스앤젤래스에서 부인 이혜련여사의 유해를 옮겨와 합장하였다.
공원의 면적은 29.974 평방km(약 9.200여평)에 이른다.
도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청담동에서 논현동으로 3.25km의 도산대로가 있다
도산 공원의 입구 깨끗하고 잘 조성되어있다,
(정확한 위치는 성수대교건너 남단 중앙하이츠파크아파트뒤)
1878∼1938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도산 안창호 선생은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한 후,
1898년 평양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연설하였다.
1999년에는 고향 강서군 동진면에 한국 최초의 남녀공학의 '점진학교'를 설립하였다.
도산은 190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가
다음해 로스앤젤레스 동부 리버사이드로 이주,
농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한인들에게 일거리를 알선해 주고 성경과 영어를 공부하였다.
1905년 미주 한인 최초의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공립신보>를 발간하였다.
청년의 기상과 기개를 일깨우는 어록,
민족의 등불 청년이여!~희망을 가져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귀국,
이갑·양기탁·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평양과 대구에 '태극서관'을
건립하여 출판사업을 벌였다.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감금되었다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12년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신한민보>를 창간하였다.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에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겸국무총리 서리 등을 지냈고
서재필·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1921년 분열된 임시정부 통일에 힘쓰다가 실패하자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국민회와 흥사단 조직을 강화하였다.
dd
도산의 기상
1.자주정신
2.진리탐구
3.협동정신
4.개조창조정신
5.애국애족
1926년 다시 상하이로 간 그는
1928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하였고,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일본경찰에 붙잡혀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감되었고,
1938년 3월 병으로 보되어 휴양 중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도산은 죽은 뒤 망우리에 안장되었다가
73년 부인의 유해와 함께 이곳 도산공원(島山公園)에 묻혀있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2001년 8월 11일 미국의 리버사이드시는
시청 앞 광장에 안창호 선생의 동상을 세우고
이 날을 '도산 안창호의 날'로 선포했다.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근간으로 하는
그의 흥사단 정신은 오늘날에도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무실역행(務實力行)
자신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힘을 길러 행동하라는 뜻
석양이 지는 저 하늘을 바라보며
선생은 오늘 무슨상념에 잠겨계실까?
이상
감사합니다.
첫댓글 오랫만에 우곤이 글을 접하게 되어 반가움을 금할수 없다.
오늘도 우곤이 글을 보며 훌륭하신 선열들의 뜻을 다시한번 되새기고
부끄러운 나의 일상도 다시한번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다.
충선이 생각이 바로 나의 생각이지...
우리는 이렇게 훌륭하신 선열들이 계셨는데...
과연 나는 무엇을했는가?
내 자신도 몹시 부끄러울 뿐이네....
대한주택공사시절 출퇴근 버스를 타고 저 앞을 수도 없이 지나 다녔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 애국자들은 따로 있구나!
주공 좋은 회산데...무시기 말쌈을....
우곤이가 오랫만에 나드리를 했는데...그 동안은 여인따라 깊은 곳에서 몸을 추스리고 나온건지요?
미안,미안, 언제 오셨는데...이제사 봤네... 내가 게을러졌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