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단상> 유럽의 르네상스와 멘지스의 <1434> 2008/07/31 0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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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단상 -
유럽의 르네상스와 동아시아 文明의 영향
- 개빈 멘지스의 <1434>와 東勢西漸의 문명충돌 -
중국의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중국 문명'에 대한 시각 부추기는 상황은 다시한번 개빈 멘지스(Gavin Menzies)에게서 나왔다. 그의 책 <1421>로 명나라의 쩡허 함대에 의해서 1421년에 아메리카 신대륙이 발견되었다는 주장을 폈던 멘지스는 이번에 다시 베이징 올림픽 직전에 출판한 <1434>를 통하여 유럽의 르네상스 문명이 1434년 이탈리아를 방문한 쩡허 함대에 의한 중국 문명의 도입 결과라는 주장을 했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이스-로마 문화를 리바이벌하는 의미에서 유럽 자체적인 인문주의 복고문화 운동으로 그동안의 역사 서술들이 이루어져 왔다. 동시에 그에 따른 산업혁명은 서세동점으로 세계의 산업화를 불러일으킨 동인으로 유럽중심 세계사를 형성해왔다. 그러나 <1434>에서 이번 멘지스의 주장처럼 과연 동세서점(東勢西漸)의 새로운 역사적 관점으로서 유럽의 르네상스, 나아가 산업혁명의 그 뿌리가 중국 또는 동아시아문명의 영향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멘지스가 주장하는 중국(明) 함대가 이탈리아에 도착했다는 1434년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세종대왕 치세 기간으로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해시계로 알려진 앙부일구가 만들어진 해이기도 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1434년 전후한 5년 동안의 시기에 조선시대 코리아는 대단한 과학적 혁명의 시기이기도 했다.
1433년(37세, 세종 15년) 8월 혼천의(천체 측정기) 제작 1434년(38세, 세종 16년) 10월 앙부일구(해시계) 제작.
멘지스의 <1434>의 제목은 <1434: The Year a Magnificant Chinese Fleet Sailed to Italy and ignited the Renaissance>로 '1434년, 중국 함대가 이탈리아를 항해하여 르네상스를 불붙였던 해'라는 긴 제목이다.
15세기초의 이탈리아는 특히 플로렌스(퓌렌체)와 베니스는 그 당시의 전세계 무역인들에게 인기를 끌던 세계무역의 허브였다. 멘지스가 르네상스의 뿌리가 중국 과학의 도입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 배경은 1434년 당시 이탈리아 투스카니(Tuscany) 지역에 중국 황제의 특사가 탄 함대가 당도하였다는 기록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여타의 문화적 전달 내용들에 대한 기록은 현존한 것이 전혀 없는 상태다.
멘지스에 의하면 중국함대의 특사는 플로렌스에서 교황 유게니우스 4세(Eugenius IV)를 알현했고 교황의 지시에 의하여 이탈리아에 중국학문의 다이나믹한 문화들 특히 예술과, 인문지리, 천문학, 수학, 인쇄술, 건축술, 철강제조술, 군사무기 등은 물론 특히 그 당시의 '세계지도'가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천재 수학자이자 화가인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비행기 설계도를 비롯한 그의 발명품들의 설계도가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을 비롯하여 특히 중국함대에게서 전해받은 '세계지도'는 1492년 신대륙 탐험에 나선 콜롬버스와 그 후의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에 쓰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멘지스는 중국함대가 중국에서 출발하여 세계를 돌아 카이로를 거쳐 이탈리아 플로렌스에 도착했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동안의 세계문명 발달사의 방향은 새로 쓰여여 할 것이며, 그 결과는 동아시아 문명사 중심의 세계사 기록이라는 새로운 물결을 불러 일으키게 될 것이다. *개빈 멘지스의 <1434>의 표지 멘지스의 공식 웹페이지 http://www.gavinmenzies.net/
멘지스의 주장의 핵심은 1434년에 명나라 주더(Zhu Di) 황제 즉 영락(永樂, 1403-1425)과 선덕(Xuande 宣德, 1426–1435)) 연간에 중국 특사가 이탈리아를 방문했다는 것을 기반으로 특사는 교황을 필두로 캐토릭 고위 관계자들과 연속 회합을 가졌고 그 결과 로마제국의 몰락이래 중세 천년 동안의 침체된 유럽문명에 새로운 문명적 충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쩡허 함대에 탄 중국 인텔리들의 도착으로 인하여 그리이스 로마 문명의 아이디어였다는 전통적인 인식의 르네상스 촉발 동인은 사실은 15세기 이탈리아를 방문한 쩡허함대에 의한 중국문명의 영향에 의해서였다는 것이다.
물론 은퇴한 영국 해군제독으로서 멘지스의 이러한 주장은 어디까지나 역사학의 학문에서 아직은 가설(hypothesis)에 불과하지만 <1421>에 의하여 <1434> 또한 베스트셀러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베이징 올림픽의 영향만이 아니라 그동안 서구 유럽중심의 세계사 서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동양문명의 중요성이 부각되어온 결과이기도 하다.
그동안 중국의 과학문명에 대한 서양학계에 소개는 로버트 템플(Roberty Temple)의 <중국의 천재들, The Genius of China>이 가장 많이 알려진 출판물이다. 그러나 멘지스의 <1434>의 출판에 대한 비판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멘지스의 중국 부각과 함께 그 비판적인 시각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코리아 문명'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면에서 유럽의 르네상스에 영향을 미친 동아시아 문명 요소들 가운데 금속인쇄문화 발명 등 우리나라 문화의 세계사적 기여에 대한 부각의 여지가 아쉬운 점이 있다.
멘지스의 <1434>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멘지스가 유럽에 영향을 준 동양문명들이 모두 1434년에 도입된 것처럼 획일처리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은 이미 르네상스 이전에 유럽문명에 영향을 미친 동양과학 문명이기 때문이다.
말등자(stirrup)는 동양과학 발명품의 서양 역사에 미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한동안 독일을 비롯한 유럽인들에게 말등자는 고구려인들에 의하여 세계 최초로 4세기에 처음 만들어져 7세기에 로마제국에 도입되었다는 학설이 제기되었다. 말등자는 역사적으로 전쟁사에서 화약의 발명에 버금가는 중요한 혁명적 발명이라고 평가되어 왔다.
말등자를 양발에 걸치는 것 없이 맨 말등에 올라탔을 경우에 말 위에 탄 기사들이 무거운 무기들을 들고 탈 수가 없었고 기마병이 적진에 뛰어 들어서 할 수 있는 행동은 많은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말등자 이전시대의 전투병력의 장수는 언제나 보병가운데 서 있었다. 말등자 없이 말을 타는 것은 그만큼 임시적이고 허술한 면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말등자의 등장으로 인하여 전쟁의 장수는 '마상의 황제'를 만들 정도로 말을 탄 기사들이 장수가 되어 전쟁사의 새로운 획기적 전기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말등자 없이 보병으로 서 있었던 장수들은 특정 지역에서 봉건적인 호족 세력으로 머물러 있었던 반면에 마상의 장수들은 지역을 이동하면서 새로운 제국 확대를 꾀한 통치 지형 확대 구도와 침략국가 형성에서 팽창주의를 생산하는 역사적인 커다란 대 변혁을 가져온 것이 말등자이다.
말등자의 발명이 3세기 또는 4세기 초에 고구려인들에 의한 것이라는 유럽의 일단의 학자들의 주장이 있는 반면에 중국문명 찬양자들에게서는 중국역사의 기록물들에서 말등자의 기원을 찾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A.D. 322년 진나라 때 말등자의 출현을 가장 빠른 기록으로 보고 있다. Dein Albert, "The Stirrup and Its Effect on Chines Military History"와 <UNESCO Courier>에 게재된 "The Stirrup - History of Chinese Science(1988)" 및 Hobson, John M. <The Eastern Origins of Western Civilisation>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등에서 말등자의 중국발명을 소개하고 있다. 말등자는 A.D. 477년까지 동아시아에 크게 확대되어 있었다.
말등자가 비잔틴 제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A.D. 580년이고 곧이어 7세기에 로마제국으로 건너간 동양문명의 중요한 서진의 영향의 하나로 보고 있다. 말등자의 유럽으로의 도입은 어쩌면 르네상스보다 더욱 강한 영향력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 도자기 문화 또한 세계적으로 사금파리와 같은 토기문화와는 전혀 다른 동양과학 문명으로 서양보다 훨씬 앞선 문명 제품이다. 과학적으로 오늘날의 CD 굽기와 곧잘 비교되어온 도자기 문화의 그 역사적 품질에서 고려청자는 세계 도자기 학계에서도 최고의 것으로 인정받고 있는 동양과학의 결정품의 하나이다. 도자기는 3세기에 중국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유럽에서는 18세기에 가서야 영국인 죠시아 웨지우드(Josiah Wedgewood)에 의하여 모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초벌구이에 그친 토기와 1천도 이상으로 구운 다벌구이의 도자기 차이는 천양지차이다. 유럽인들에게 고급 귀족문화는 '챠이나'로 통하는 도자기 문화에 의하여서 가능했다는 것은 신사숙녀의 귀족 생활문화가 동양문명에 의하여 만들언진 것을 의미한다.
르네상스 이전에 유럽은 특히 동아시아의 인쇄문명에도 훨씬 뒤지고 있었다. 기본적인 인쇄술이 14세기 중반에야 유럽에 소개되지만, A.D. 593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기초 인쇄의 기록이 있고 사회적으로 인쇄물을 사용한 것은 A.D. 700년 베이징에서 발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의 인쇄술은 모두 나무로 된 것들이어서 사용후 파손되는 문제가 잇다랐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로 금속활자 인쇄술의 등장은 대단히 중요한 발전이었다. 그것은 코리아로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은 위키피디아 등의 현재의 세계인들에게도 상당히 알려진 부분이다. 고려시대 최윤의에 의하여 금속활자인쇄술은 1234년 세계 최초로 고안되었다. 대량의 책이 고려시대때에 이동식 금속활자에 의하여 출판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금속활자 인쇄본의 가장 오래된 책은 1377년의 것이 가장 빠른 것이지만, 중국의 금속활자는 1490년에야 가능했다.
독일의 구텐베르그(Johannes Gutenberg)가 이동식 활자를 사용한 것은 1458년이었다. 말등자나 도자기처럼 인쇄문화는 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일대 혁명을 가져온 사건이라 할만하다. 금속활자는 진정한 매스미디어의 첫 출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콜럼버스 항해술에서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세계지도' 만이 아니라 나침판도 빼놓을 수 없는 탐험의 도구였다. 유럽에서 최초로 발견된 나침판은 1180년 알렉산더 네캄(Alexander Neckham)에 의해서이다. 동양문명에서 배운 서양의 나침판은 아이러니하게도 서양 항해술이 동양을 항해해온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세계지도와 나침판에 수반하여 배의 키(rudder)의 발명 또한 항해 문명의 중심 발명의 하나였다. 이 또한 동양과학의 산물이다. 배의 키는 일반적으로 A.D. 1세기 중국에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키의 사용이 유럽에서는 12세기에 가서야 처음으로 바이킹족들의 본산지인 스칸디나비아인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바다의 말등자라 할만한 키는 항해에서 손쉽게 방향타로 사용할 수 있게 된 발명품이었다.
화약은 13세기초에 유럽에 알려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동양에서 화약의 사용은 훨씬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행되고 있는 불꽃놀이(firework)의 기원은 동양의 폭죽놀이에서 기원했다. 이러한 기본적인 동아시아 문명의 서양문화에의 영향은 1434년 이후에 생긴 것보다는 그 이전에 영향을 받은 것이 더욱 많다는 점에서 멘지스의 '1434년의 르네상스 촉발'은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5세기 서양역사 특히 이탈리아에서 동양문화의 영향은 예술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멘지스도 지적했지만, 베로니즈 예술가인 피사넬로(Pisanello)가 몽골인의 모습을 1430년대에 베니스에서 스케치한 것은 주목된다.
*피사넬노(Pisanello)의 몽골인 궁수(Mongol Archer) 파리 루브르 박물관 4세기이래 훈족의 서진과 13세기의 징기스칸의 유럽진출은 유럽과 동아시아 문명의 중간지대를 확대시켰을 것이다. 멘지스는 르네상스 초기의 이탈리아 예술에서 발견되는 아시아 스타일의 엑조티비즘에 대하여 레오나르드 올쉬키(Leonard Olschki)의 [Asiatic Exoticism in Italian Art of the Early Renaissance]를 인용하고 있다. "이탈리아 투스카니 지역은 유럽으로 진출한 몽골제국과 경계를 이룬 지역이었으며, 만다린 중국인들이나 칸 및 여타의 동양문화들이 크게 영향을 주고 있던 이탈리아의 플로렌스나 시에나 지역은 마치 중국의 베지징이나 인도의 캘커타와 같은 곳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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