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래. 숲 속에서 짐승이 나올 수가 있으니까. 여자들은 절벽 쪽에 묵게 해줘."
모두가 반대의 의사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두 여자의 방은 정해졌고 이평원의 제안대로 세상에서 가장 공정한 게임인 가위 바위 보로 나머지 세 방을 정했다. 각자 방에 짐을 내려놓고 다시 원형 방에 나왔는데 이평원은 손에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이 산장은 나무라는 콘셉트에 맞게 곳곳에 나무조각품들이 전시되어있다. 나뭇가지 위에서 쉬고 있는 올빼미, 새끼와 함께 바닥에 코를 묻고 있는 사슴, 춤추는 나뭇가지 여인 등 다양한 작품들이 산장주인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평원은 한 작품도 남기지 않고 쉴 새 없이 셔터를 누르고 있다. 한유리가 곁에서 용량 아끼라고 말하는데 그녀는 이미 안중에도 없다. 오후 2시부터 5명의 야외활동이 시작했다. 먼저 절벽으로 나와 상층의 공기를 마시며 발밑에서 넘실대는 녹색의 바다를 감상.
이평원이 풍경을 사진 속에 담는다. 그리고 그들은 숲을 통과하는데 자기 신발에 진흙이 묻는다고 김지수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통에 박용국이 그녀를 업게 되었다. 둘이 붙어 있으니 자동적으로 말싸움이 시작한다.
그것이 오히려 둘 사이가 친하다는 증거이긴 하다. 30분이 지나 드디어 그들은 계곡에 도착했다. 박용국이 먼저 계곡물에 풍덩 빠져 흘린 땀들을 씻어내고 뒤이어 나머지도 계곡물 속에 뛰어 들어갔다. 폭포에게 자연안마를 받고 잠수해서 돌 틈에 숨은 가재를 잡기도 하며 젊은이의 힘을 모두 발산하니 어느덧 해가 지는 7시가 되어 다시 산장으로 돌아갔다.
각자 자기 방에서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은 후 원형 방으로 저녁식사를 가지고 왔다. 자기 입맛에 맞춰 구성한 도시락들이다. 자리에 앉는 순서는 시계방향으로 이평원, 이형식, 한유리, 박용국, 김지수 순. 밥을 먹으며 오늘의 추억에 대한 대화를 펼친다.
내일 돌아가야 한다는 아쉬움이 그들의 마음속에 깊게 묻어났다. 하지만 내일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저녁 8시가 되어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했다. 각자 자기 방에서 술들을 가지고 오는데 박용국은 A사 막걸리 5병, 이평원은 B사 소주 8병, 김지수는 C사 맥주 4병을 한자리에 모았다
.
이형식은 자기 방에서 플라스틱 통을 가지 고왔다. 안에는 보통 맥주잔 크기의 유리잔 5개가 입구가 위로 향하게 쌓여있다. 술잔의 겉은 크리스탈 색으로 불투명하지만 속은 투명하다. 플라스틱 통 뚜껑을 열어 옆에 앉은 한유리가 위에 있는 컵부터 옆으로 전달했다.
마지막 컵을 이형식이 받고 김지수가 자기 컵에 얼룩이 묻었다고 불만을 토로해서 이형식 것과 바꿨다. 이렇게 준비를 마치고 그들은 술병 하나씩 챙겨와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술 한 병쯤 비우고 코가 벌게진 박용국이 이형식에게 물었다.
"있냐. 형식아, 물어볼 것이 있는데 너희 둘이 어떻게 헤어진 거냐?"
박용국이 이 때만을 노린 듯이 물었다. 두 사람이 술에 취해 무방비 상태일 때.
"그거 알아서 뭐해? 쓸데 질문이야."
이형식은 박용국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의 방어가 아직도 견고하다. 박용국이 다시 추궁했다.
"너희 정말 시원한 커플이다. 해이지는 것도 만나는 것도 시원시원해. 내가 보기엔 유리가 형식이 찬 거 맞지? 형식이 성격이 좀 딱딱하니까 그랬겠지."
"내 성격이 뭐가 딱딱해? 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대답할게."
이형식이 옆에 앉은 한유리를 바라보았다. 한유리는 술에 매우 약해서 금세 취해버린다.
"유리야, 그럴 필요 없어. 너 많이 취했다. 방에 데려다줄게."
김지수가 한유리에게 다가가자 이형식이 그녀를 막았다.
"나도 알고 싶어. 네가 왜 날 찼는지."
박용국의 예상대로 찬 쪽은 한유리였다. 그녀는 소주 한잔을 들이켜고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이형식을 바라봤다.
"딴 남자 만났었어. 너보다 매력적인."
이형식의 얼굴이 굳어졌다. 큰 충격을 먹은 표정이다. 나머지 세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다. 이형식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점이 나보다 나았는데?"
"형식아 그만해! 너희도 형식이 말려."
한유리가 뚫린 입으로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 남자의 이목구비나 재력 등이 이형식보다 낮다는 말이다. 이형식이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왜 그 녀석보다 못한 나를 다시 만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
한유리가 대답하는 대신 김지수 곁에 풀썩 쓰러졌다. 이형식은 분노에 가득한 표정으로 산장 밖을 나왔다. 박용국과 이평원이 그를 따라갔다. 그들이 산장에서 사라지고 한유리가 잠꼬대처럼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김지수는 그 말을 듣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산장 밖 풀밭에서 박용국과 이평원은 이형식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이런저런 예기를 꺼내고 있다. 술김에 한말이니 진짜 한유리의 속마음이 아니라느니 그런 말은 이형식에게 통하지 않았다. 도리어 한유리에 대한 분노를 두 사람에게 쏟아내니 정신력에 한계가 다다랐다.
그런데 갑자기 이평원의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풀밭에 쓰러져 잠에 빠졌다. 이형식이 그를 깨우려고 흔들다 자신도 쓰러지고 영문도 모른 채 바라보고 있던 박용국도 정신을 잃었다. 산장 안에 있는 두 여인들이 이미 먼저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흘러 박용국의 정신이 돌아왔다. 머리가 아직도 깨질듯이 아프다. 주위를 둘러보니 같이 있던 두 사람과 김지수가 같이 누워있다. 다섯 사람 중 한 명이 없다. 한유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누워있는 친구들을 깨웠다. 모두 비몽사몽이다.
"형식아, 유리가 안 보인다!"
형식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의 말대로 유리가 보이지 않았다.
"유리가 어디 있는 거야? 유리야!"
"야 산장이……."
이평원이 말을 잊지 못했다. 코를 스치는 매캐한 냄새. 냄새를 따라 산장을 돌아보니 사각방 중 한 방의 창문에서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다. 분명 유리의 방이다. 가만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네 사람은 유리의 이름을 부르며 산장으로 돌진했다.
창문을 통해 본 방안은 뜨거운 불과 시커먼 불길로 가득 차 있고 문 옆에 쓰러져 있는 유리가 보였다. 그녀 주위는 이미 불길이 감싸고 있다. 이형식이 돌로 창문을 내리찍었다. 창문이 깨지면서 불길이 창문으로 뿜어져 나왔다.
창문이 너무 작아 사람이 통과할 수가 없다. 이평원과 박용국이 출입문으로 달려갔다. 원형방도 이미 불과 연기로 가득차서 앞을 보기도 힘들었다. 힘겹게 불길을 넘어 유리의 방 앞에 도착해 박용국이 문손잡이에 손을 대려고 하자 이평원이 말렸다.
문손잡이가 이미 뜨겁게 달궈져 있을 터 이평원은 서둘러 잠기지 않은 자기 방에 들어가 불에 타고 있는 가방을 열어 수건을 꺼냈다. 다시 돌아와서 자기의 오른손을 수건으로 감싸고 문손잡이를 돌렸다.
문손잡이가 안에서 잠겨져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두 사람이 뒤로 무르더니 전속력으로 문으로 돌진 했다. 나무재질이 얼마나 단단했는지 두 남자의 몸통박치기를 당한 문은 멀쩡했다. 다시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 여러번 시도한 끝에 경칩이 부서지면서 문이 반대로 열렸다.
즉시 박용국이 유리를 업고 산장을 탈출했다. 출입문에서 기다기로 있던 두 사람 곁에 내려놓고 김지수가 한유리의 맥을 짚고 가슴에 귀를 귀울였다. 그녀는 초조한 눈빛의 이형식을 바라보고 고개를 돌렸다.
이형식은 넋이 빠진 표정으로 바닥에 풀썩 쓰러져 한유리를 안았다. 그가 부르짖는 소리가 그녀에게 들리기엔 이미 그녀는 멀리 떠나버린 후였다. 불길은 그 후로 점점 커지더니 산장 전체를 집어 삼키고 거인의 발에 짙밟히듯 순식간에 폭삭 가라앉았다.
어둠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살아남은 네 사람 모두 뜬 눈을 지세웠다. 방금 전까지 살아있던 친구가 싸늘하게 죽었는데 잠을 잘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어떻게 하지…….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박용국이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여기서 전화가 불통임을 알면서도 112에 전화를 걸었다. 옆에 있는 이평원이 그의 휴대폰을 덮었다. 그는 일어서서 계곡에 가보겠다고 말하고 숲 속으로 들어가고 한 시간이 지난 후 사람들과 함께 돌아왔다.
김중동이 자기들의 신분을 밝히고 몇 사람이 경찰을 부르러 아래로 내려갔다고 말했다. 그들 중에 여고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첫댓글 즐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