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8일
큰돌개혁장로교회 주일예배 ▶목사;“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1:7) ▶회중과 함께;“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 예배부름과 송영 시편104편 * 사도신경 다함께 *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제38주일 * 십계명낭독 다함께 * 참회기도 다함께 * 시편찬송 시편102편 헌 상 심진희 집사 목회기도 인도자 말씀의 강설 요16:5-12① 요한복음강해(89) 주의만찬 고전11:17-22 다함께 * 찬 송 찬송가 188장 * 강복선언 설교자 * 교제의 인사 다함께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 표는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 헌금은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예배 전 봉헌함에 넣어주세요. *주일오후 교리공부:“교회다운 교회 강독(20) |
제3부 인간의 감사 제38주일 제103문: 제 4계명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첫째, 복음전파와 복음에 관한 교육이 계속되어야 하며 특별히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성례에 참여하고 공적인 기도를 드리며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을 바치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 정규적으로 참석해야 합니다. 둘째, 주님께서 내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심으로써 나는 힘겨운 일상생활의 악으로부터 벗어나서 이생에서 이미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
▣성찬본문: 고전12:12-13
▶(고전12:12-13)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설교본문/ 요16:5-12
『 (요16:5-12)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다락방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마지막 고별설교는 지상교회의 현실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사도 요한의 독특한 상징언어와 극적 장치들이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우선 시간적으로는 해가 지고, 밤이 깊어가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배경을 강조합니다. 또한 공간적으로는 다락방에서 시작하여 포도원 길을 따라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는 ‘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사도공동체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마지막 밤을 기록하면서 ‘어둠속을 걷는 나그네 공동체’라는 교회의 독특한 이미지를 그려내려는 의도를 엿보게 됩니다. 이것이 요한이 그려내는 교회의 현실태였습니다.
출구전략을 고려하는 사람들에게
요16장의 설교는 예수님의 고별설교의 결론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고별설교가 주는 긴장과 무게감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제자들은 이 말씀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준비되어 있지 않은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주님은 그럼에도 이 무겁고 어려운 말씀을 주시는 것은 이 시련과 위기를 직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요16: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분칠된 달콤한 복음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을 향하여 불이 되고 검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과 세상의 극복할 수 없는 불화를 예견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기꺼이 따르는 자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박해와 고난의 ‘때를 당하면’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교회로 하여금 소망 중에 이기고 또 이기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즈음에는 교회는 내우외환의 위기를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임박한 교회의 환란(유대인의 박해와 네로황제의 박해로 시작되는)은 교회에 심각한 배교의 위협이 되고 있었고 당시 유행하던 영지주의 기독교는 순전한 복음신앙을 뒤틀어 버림으로서 두려워하는 자들(계21:8)에게 박해를 모면할 수 있는 신학적인 명분을 제공하는 매우 매력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려는 노력들이 있어왔습니다. 그들은 교회와 신자가 처한 이 어둡고 무거운 현실을 뒤틀어 세상과 불화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소유할 수 있는 기독교를 꿈꾸곤 했습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동안에 기독교 세속화, 이교화, 권력화를 추구해온 교회의 타락사를 보십시오. 이것은 전형적인 반(反) 요한적 기독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받으신 사단의 시험의 골자는 세상의 질서에 대한 그리스도의 저항이었습니다. 광야의 떡 시험은 세상의 경제적 신념을 저항하며, 성전의 시험은 세상의 종교적 신념을 거부합니다. 높은 산위에서의 시험은 세상의 정치적 신념과 질서를 반대합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이 세상의 임금인 사단과 벌인 일전(一戰)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의 몸 된 지상교회의 위치와 현실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단의 왕국을 지탱하는 것은 돈과 종교와 권력이 아닙니다. ‘죄’입니다. 사단의 왕국을 지탱하는 유일한 힘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으로서의 ‘죄’입니다. 이 세상 임금의 권력은 죄가 폭로되는 순간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단의 왕국을 지탱하는 죄의 실체를 알아챈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만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이상 사단의 권세와 질서에 순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없는 삶을 꿈꾸는 사단의 반역적 욕망 곧 죄로 인해 건설됩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추방된 가인이 보란 듯 구축한 에녹성과 그의 후손들이 건설한 화려한 문명처럼 말입니다. 그는 이미 형제 아벨을 미워한 자요 살인한 자였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창4장)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향한 근거없는 혐오와 미움을 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경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얻고자 사단의 통치와 질서에 순응할 수 있는 변절한 기독교 체계를 고안해왔습니다. 그것이 21세기 자유시장경제와 종교다원주의, 이데올로기 사회에서 자생해가는 현대교회의 길인 것입니다.
▶요한은 단호하게 경고합니다.
▶(요일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가룟유다는 이 마지막 밤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의 고뇌는 다른 제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부재로 인한 두려움이 아니라 의심과 회의였습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했고, 그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려했던 그는 이제 크나큰 위기와 상실감을 직면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시간들이 억울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그런 그리스도를 바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빠르게 손절하기로 결단합니다. 그리고 적당한 출구전략을 짜야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팔기로 결단하고 그리스도의 마지막 떡 조각을 받아먹고 나갔을 때 ‘밤’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로부터 나갔을 때 그는 한 조각의 떡처럼 파편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도와 십자가 앞에서 출구전략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로역정에서 ‘두 마음씨’(Byends/이기주의)가 주창한 세련된 기독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는 순례자들과 같은 길을 가는 것 같지만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결국 헤어지고 맙니다. 길가다 자기와 딱 맞는 사람들을 만납니다.(세상집착, 돈 사랑, 노랭이씨) 그리고 그들에게 순례자들을 비난하면 자신의 신앙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참, 기가 막혀서……. 저치들은 날씨가 아무리 궂어도 바람과 파도가 가라앉기를 기다리지 않고 순례를 계속해야 마땅하다는 거야.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한순간에 모든 걸 잃어버리는 위험도 감수할 수 있다더라고. 반면에 나는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순간 순간 잘 처신해야 한다고 했지. 남들이 다 아니라고 하는데도 저 둘은 고집을 꺾지 않더군. 하지만 먼저 내 신간이 편해야 신앙이든 뭐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겠어? 저쪽에서는 누더기를 입고 놀림을 당해도 믿음을 지키겠다고 주장하는 반면 나는 꽃신을 신고 뭇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환한 햇살 아래 걸을 수 있어야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했어”
이게 세상을 사랑하는 기독교의 견해입니다. 요한은 그런 기독교에 관하여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는 그분을 따르는 지상교회의 경험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던 것처럼 그분의 몸 된 교회도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도리어 교회로 하여금 큰 위로와 소망을 갖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이며 몸 된 교회의 지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고난과 박해를 구원의 빙표로 간주하기도 했던 것입니다.(마05:11;행05:41;막10:30)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바울은 세상을 이기신 승전하신 그리스도의 행진에서 신자는 마치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전쟁포로로 설명합니다.(고후2:14-16) 이 행렬을 장식하는 향불은 이 승전의 영광과 기쁨을 고취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보다 먼저 교회를 이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이기신 사람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이기게 하시고(이기시고), 교회로 하여금 각서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신다고 말합니다.(고후2:14-16)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교회를 심판하십니다. 세상이 죽음의 심판을 받기 전에 이미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신자는 이미 그리스도를 따를 때 그와 함께 죽었다가 살아난 자입니다. 이것이 세례가 표증하는 바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시기 전에 이미 죄인 중에 자신의 백성을 이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심과 중생’이라고 말합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을 먼저 이기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롬0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세상과 분리시키기 위해 들 포도나무로부터 가지를 분리시킵니다. 그리고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하여 한번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망의 냄새든 생명의 냄새든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한 죽은 자의 시선으로 살지 않는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세상이 귀 기울일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과 교회가 다른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포기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올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바로 앞에 서서 하나님처럼 그를 호령하고 애굽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재앙을 내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애굽백성을 내누어 분리시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하나님은 먼저 모세에게 돌격하심으로 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그의 아내가 아들의 양피를 베어 피를 뿌림으로 그는 살아났습니다.(출4:24-25)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유월절 마지막밤, 사망의 영이 온 애굽을 덮치기 전에 이미 이스라엘 집에 사망이 임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지방과 분설주에 바른 것은 죽음을 모면하는 표가 아니라 이미 그 집에 사망이 임했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이미 자신을 죽은 자와 같이 간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그리스도와 씨름하다 환도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 완전히 패배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새벽, 그는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창3:28)
성경이 가르치는 회심과 중생의 교리는 항상 하나님과 그 자녀들의 충돌과 관련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신자를 이기시고, 실상 죽는 경험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살아난 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회개와 믿음으로 구성된 ‘회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멈추고 십자가 앞에 서다
주님의 설교는 이제 정점을 찍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주는 무게감에 압도되었고, 정신적인 패닉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요16:5-6)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근심이 가득하다(plhrovw)’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물에 잠겨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물을 머리 위까지 부어 물속에 침잠해있는 것처럼, 제자들은 근심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근심의 문제는 단순한 두려움이나 염려의 정서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정서적으로 이미 공황상태에 처했지만 그들은 십자가 앞에서 그들이 직면해야하는 상황에 대한 당혹감에 압도당한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그들은 매우 구도적이고 열렬한 행동파 제자들이었습니다. 배와 그물과 아버지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좇았던 제자들(요한, 야고보, 베드로와 안드레)이었고, 평생 몸담은 세리의 길을 하루아침에 포기한 제자도 있었습니다. 품속에 칼을 품고 이스라엘의 독립과 다윗의 왕국의 회복을 위해 투신했던 열심당원 출신의 제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열정과 비전의 사람들이었던 제자들이 자신의 무능력과 무지와 비겁함을 깨닫고 절망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즐거워했지만 그 나라가 요구하는 대가와 희생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전령이 되고자했고, 다윗의 왕국의 지상적 재건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헌신과 열정을 쏟아부을 대상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과 고별설교를 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이 십자가 앞에서 더 이상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는 한계와 절망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나의 구원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곤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데 무엇인가 의미 있는 기여를 해야할 것 같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에는 자기 본위적 신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원죄적 욕망을 ‘자기애적 욕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욕망은 자기성과 가능성의 신학을 구성합니다. 내가 자신의 행복과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면 우리는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미워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요청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철천지 원수가 타락한 육적 본성으로서의 자아라는 사실을 점점 더 깊이 체화해갑니다. 그래서 신자로 살아가는 것은 거룩한 신적 수동태를 경험하고 익숙해져갑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절망할 수 록 오직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아를 사모하고 신뢰합니다.
▶(롬7:2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자, 주님은 세상의 미움과 교회의 시련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주제는 또 다른 전환을 예고하면서 교회를 위로하시는 약속들을 주십니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응전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보내심’입니다.
▶(요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러나 성령의 오심이 좋은 소식이 되기 위해 그들은 먼저 근심에 빠져야 했습니다. 영생을 구하는 부자청년을 주님은 ‘심히 근심하게’(눅18:23)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에 사로잡힌 절망하는 제자들에게만이 성령은 유일한 위로와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 고별설교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항상 그리스도를 앞서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아니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하나님 나라의 전위부대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래 의욕과 열정이 가득한 사람은 질문이 많기 마련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고, 하려하는 자들은 항상 질문합니다. 설교도 가끔은 그런 효과를 봅니다. 질문이 필요 없는 설교는 회중을 깊은 장탄식과 아픔을 줍니다. 그들은 쉽게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오직 기도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질문보다는 영혼의 고뇌와 필요에 목마른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그들의 활기차고 적극적인 태도에 걸맞지 않는 모습으로 깊은 슬픔과 근심에 빠져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가르치고 질문하는 관계였습니다. 스승은 제자들의 질문에 답을 주는 방식으로 지식의 내용과 체계를 효과있게 전달하곤 했습니다. 이것을 ‘후츠파와 하브루타’ 방식이라고 합니다. 공통점은 질문입니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아냄으로서 지식이든 지혜이든 스스로 체화하는 자기주도형 학습방식입니다. 질문의 목적은 ‘행동과 실천’에 있습니다. 어떤 시행착오를 겪어도 끈기 있게 도달하고자하는 목적을 이룹니다. 정답은 자신이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지금 질문을 멈추고 있습니다. 십자가앞에서 그들은 당혹해하고 있고 무얼 더 알고 행동해야하는지에 관하여 질문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요16:5-6)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십자가 앞에서 전통적인 유대인의 교육방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성을 고양하고 자기 주도적 삶을 격려 받았다면 이제는 정 반대의 상황에 직면합니다. 그들은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잃은 것같이 두려워하고 당혹해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요13장 다락방 만찬이 시작된 이후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제자들의 질문을 관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베드로와 도마와 빌립의 순서대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질문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궤를 같이합니다. 즉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려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함께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길을 홀로 걸어가십니다. 이 묘한 실랑이는 결국 마지막 지점에서 제자들로 하여금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질문들을 재구성하면 마치 성전의 입구에서 지성소에 이르는 여정을 상상하게 합니다.
① 베드로; (요13: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는 죽는 자리까지 가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진노의 번제단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감당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는커녕, 오히려 그분을 세 번 부인할 것입니다.
▶(요13:38)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지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②도마; 도마는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길을 묻고 있습니다. (요14: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그는 마치 성소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 성소로 나아가는 길에서 그는 멈추어야 합니다. 그 길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 말입니다.(요14:6)
③ 마침내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구했습니다. ▶(요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그는 하나님의 현현을 구합니다. 마치 지성소적 공간을 열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현현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④ 마지막으로 유다는 질문합니다. ▶(요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절) 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면서도 세상을 향하여는 숨으시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참된 제자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자,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여야 합니다. 오직 그들에게 주님은 영원한 거처(모레이/성전의 방)를 약속하셨습니다.
▶기독교신앙은 세상을 설득시키고, 굴복시켜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항상 그리스도를 대적할 것이고, 정죄를 받았습니다. 오직 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찾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소명으로 받은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다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전시체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증인으로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거룩한 신적 수동태적 삶은 주님이 보내실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의 오심으로 실현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세상을 향하여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입니다.(요16:8) 반대로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안에서 자라가며, 말씀을 인내로 순종하게 하심으로 많은 열매를 맺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요일0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말씀의 반추를 위한 생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