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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헌 왕후
사극 '뿌리 깊은 나무' 초반부에 심온 집안 옥사와 관련해서 등장했던 소헌왕후는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조대왕의 왕비로서 문종과 세조(수양대군), 안평대군의 어머니이다. 본관이 청송 심씨로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이고, 태조의 딸 경선공주에게 시조카가 된다.
세종보다는 두 살 연상으로, 1408년 태종의 3남 충녕군과 혼인을 하여 경숙옹주에 봉해졌다가 1417년 삼한국대부인으로 다시 책봉되었다. 당시 세자이던 양녕대군의 망나니짓이 절정에 달하자 시아버지인 태종이 양녕대군을 내쫓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자, 덩달아 심씨도 세자빈이 되고 곧 왕비가 되었다.
본래 세종이 즉위했을 때는 세종이 직접 '검비'(儉妃)라고 왕비의 호칭을 지어 주었으나 시아버지 태종은 뜻은 좋으나 발음이 고르지 않다는 이유로 '공비'(恭妃)라고 고쳐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종실록 초반부에는 '공비'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덧붙여 이렇게 왕비에게 비호를 지어주는 것은 세종 8년 즈음에 사라진다.
세종이 왕이 되고 세종의 장인이자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이 영의정이 되자 외척을 경계하여 알레르기만큼 싫어하던 태종은 '강상인의 옥'(아래 참조)에 심온을 연루시켰고 사은사로 세종의 즉위를 명나라에 고하러 갔던 심온은 국경을 넘고 의주에서 결국 사약을 받았다.
심온 숙청에는 심온과 정치적 라이벌인 박은(본관: 반남)이 실무적인 주도를 하였는데, 이 때문에 심온이 죽기 직전 자손들에게 '다시는 박씨 집안과 혼인하지 마라!'고 말했다는 야사가 있다. 또한 이 때 심온 뿐만 아니라 심온의 형제와 다른 자식들까지 귀양을 갔고, 그나마 처남을 숙청했던 것과 달리 심온의 아내와 딸들은 살아났지만 변방의 관노로 전락하는 등 가문이 완전히 풍비박산났다. 이들은 태종이 사망한 뒤에야 사면되었다. (참고로 심온의 아내, 즉 소헌왕후의 어머니가 죽은 것은 세종26(1444)년이다.)
이때 역적의 딸이라 하며 소헌왕후를 폐비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나 세종의 항의와 아들을 이미 3명이나 두었다 하여 왕비의 자리를 지켰다. 그때 소헌왕후는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을 임신하고 있었다. 태종 입장에서는 이미 심씨 가문의 숙청이 종료되었고 소헌왕후가 다른 외척들처럼 야심을 내보이거나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아 굳이 중전까지 쫓아낼 필요성을 가지진 않은 듯 하다.
무엇보다 이때 한바탕 숙청한 이유가 왕비가 아닌, 외척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폐비시켰다간 다시 왕비를 간택해서 맞아들여야 하고, 법도상 조실부모한 규수는 간택 자격이 없으니 또다시 외척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외척 컴플렉스 걸린 태종 입장에선 다시 칼바람 한바탕... 그리고 어떻게 가문에 명예는 있으면서도 힘은 약한 집안을 찾아 들인다 하더라도, 소헌왕후가 이미 아들을 세 명이나 낳았는데, 폐비하고 새로운 왕비가 아들을 낳는다면 세종의 후계구도가 복잡해지는데, 자신이 이복동생이 세자가 되면서 계모와 갈등을 빚고, 끝내 왕자의 난으로 집권을 경험해 본 태종의 입장에선 손자들이 자신이 했던 일을 반복하는 것도 달가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후로는 조용히 내명부를 통솔하다가 세자인 문종의 세자빈인 휘빈 김씨의 미신 사건, 순빈 봉씨의 레즈비언 사건이 연달아 터지자 두 세자빈을 질책하기도 하였다. 실록에는 자애로우면서도 기강이 엄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세종 8년에 한양에 큰 불이 났을 때에는 당시 지방에 나가 있던 세종을 대신해서 화재 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이때도 당시 후일의 금성대군을 가져 만삭이었다고 한다. 때로 여장부 다운 소헌왕후의 일면을 볼 수 있다.
만년에는 병이 생겨서 자주 피접을 나갔다가 1446년 52세의 나이로 둘째 아들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눈을 감았다. 그 패륜아적인 행동을 일삼은 수양대군, 즉 세조도 어머니인 소헌왕후에겐 갖은 효도를 다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도 소헌왕후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정희왕후가 장남인 의경세자(도원군)를 출산할 시각이 가까워지자, 소헌왕후가 관례를 깨고 정희왕후를 궁으로 불러들여 궁궐 안에서 출산하였다고 한다.
소헌왕후는 남편과 아들들을 상당히 잘둔 아내이자 어머니이다. 일단 남편은 세종대왕, 장남은 문종, 둘째는 세조, 셋째는 안평대군 등등 화려하다. 반면 자기로 인해 오라버니와 아버지가 사사되고 어머니는 관비로 전락되는 등 가문을 풍비박산을 냈다. 모질고 기구한 여자의 일생이다. 만약 소헌왕후가 더 오래살아서 단종의 치세 때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 있었다면 계유정난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형제와 조카를 상대로 피도 눈물도 없는 수양대군(세조)이라 할지라도 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조선 사회의 분위기상 어머니, 그것도 친 모후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영 껄끄러울 수 밖에 없다. 그냥 껄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그 수양대군도 어머니한테는 지극한 효자였다. 거기다 소헌왕후의 성정으로 봐서는 엄연히 정통성이 충분한 적통 왕세손(단종)을 놔두고 수양대군의 편을 들어줄리 만무했을 것이다. 실제로 계유정난이 성공했던 것은 어린 단종을 보살피고 대신 정사를 돌볼 수 있는 최고어른이 왕실에 전무한 탓이기도 했다.
세종이 조선시대에도 이상적인 군주의 롤모델로 꼽혔듯이 소헌왕후 역시 이상적인 왕비의 롤모델로 조선시대 내내 칭송받았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소헌왕후가 이끌었던 내명부는 조선시대 통틀어도 가장 안정적이었기 때문. 세자빈들 사건이 있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이후의 훨씬 버라이어티한 조선의 내명부 역사를 생각하면 세종 때의 내명부는 상당히 안정적인 편이었다.
애당초 세자빈들 사건도 소헌왕후가 잘못한 거라고 할 수도 없다. 세종 또한 이런 왕비를 극진히 대했으며 역대 조선의 왕비 중 왕과의 사이에서 두 번째로 많은 자녀를 둔 왕비이기도 하다.(총 8남 2녀) 이처럼 왕비가 낳은 자식이 많은 게 내명부가 안정적이었던 가장 큰 요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역대 조선의 왕비 중 가장 많은 자식을 둔 왕비는 아이러니하게도 남편과 사이가 상당히 안 좋았던 태종의 왕비이자 소헌왕후의 시어머니 원경왕후이다. 원경왕후가 태종과의 사이에서 4남 4녀를 낳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양녕대군에 앞서 세 아들을 더 낳았다. 따라서 실제로는 7남 4녀를 낳았던 것이다. 이 내용은 상왕으로 물러 앉은 태종이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남긴 말로, 조선왕조실록 세종 원년(1419) 2월 3일 기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세종 다음으로 많은 소생을 둔 신빈 김씨와도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신빈은 소헌왕후가 안평대군을 낳은 직후에는 수양대군의 유모가 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신빈의 소생들은 수양대군과 친했으며 뒷날 세조는 신빈과 그 소생의 이복 아우들도 극진히 대해 주었다.
● 강상인의 옥
1418년(태종 18) 강상인이 태종의 병권친장책(兵權親掌策)에 저촉되어 처단된 사건이다.
그 해 8월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를 하면서 양위교서에 “주상이 장성하기까지 군사는 내가 친히 청단(聽斷)하겠고, 또 국가의 결단하기 어려운 일은 의정부와 육조에 명령하여 각기 가부를 들어 시행하겠지만, 나도 마땅히 가부의 논의에 참여하겠다.”고 하여 세종의 왕권과 국기(國基) 확립을 위한 군국중사(軍國重事)에의 참여를 표명하였다.
그에 따라 병사를 관장하는 병조와 병방대언(兵房代言)의 지휘는 물론, 종래의 3군부(三軍府) 이외에 의건부(義建府)를 설치, 그 휘하에 두는 등 병권의 친장을 꾀하였다. 그 때, 강상인은 상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시종하다가 태종의 즉위와 함께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또한 태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여러 군직을 거쳐 병조참판에 올라 병조판서 박습(朴習)과 함께 병조의 일을 총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상인은 태종의 신임과 기대 및 병권친장책의 의도와 달리 병조의 일을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만 보고했으며, 동생 상례(尙禮)를 불법으로 사직(司直)에 제수시켰다. 이에 태종은 강상인의 행위와 병조가 정사를 자기에게 보고하지 않은 사유를 국문하였다.
8월에 강상인을 비롯하여 병조 관리를 중죄에 처하라는 대간의 요구가 있었지만, 특별히 강상인은 원종공신이고 그 동안 태종을 섬긴 노고를 참작해 전리귀향(田里歸鄕)에 처했다가, 그 해 9월 공신녹권(功臣錄券)과 직첩을 몰수하였다. 그 밖에 병조 관리도 경벌하여 강상인 등의 처벌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던 중 그 해 9월, 명나라의 왕세자 교체 승인에 대한 사은사로 파견되는 국구(國舅)인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심온(沈溫)을 위한 환송 인파가 외척의 득세를 경계하고 있던 태종에게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또 그 해 11월에는 평소 강상인 및 심온의 동생인 도총제 심증(沈泟)에게 혐의를 가지고 있던 병조좌랑 안헌오(安憲五)가 태종에게 “강상인·심증·박습이 일전에 사적인 자리에서 말하기를, 요사이 호령이 두 곳에서 나오는데, 한 곳에서 나오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말한 바 있다.”고 참소하여 태종의 외척에 대한 의구심을 가중시켰고, 이와 함께 강상인 등에 대한 격분을 유발시켰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26일 재추국(再推鞫)을 당하여 “태종과 세종을 이간시키려 했다.”는 죄명으로 옹진진(甕津鎭)에 충군(充軍)되었다가 의금부의 장계에 따라 모반대역죄로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박습·심증도 참살당했음은 물론, 심온도 연좌되어 사사되었다.
강상인의 사건은 그의 개인적인 과오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태종의 병권에 대한 집념 및 외척 경계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외척 세력의 제거는 1419년(세종 1)에 태종이 주도하여 단행된 대마도정벌과 함께 세종 치세의 한 토대가 되었다.
[출처] ◆ 소헌 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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