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송 성당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불편함 없는 핸드폰에 카메라가 내장되어 있기에 수시로 사진을 촬영한다. 이젠 일기 대신 습관이 된 사진 찍기다. 글자로 굳이 “오늘 나는 경주에 갔다.”가 아니고 경주에서 첨성대, 반월성, 안압지 등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고, 후일 클릭하면서 찍은 날자와 시간을 보면서 ‘그래. 그 때 그곳에 갔었지.’하며 떠올린다. 포토 다리어리(Photo-diary) 즉 사진 일기다. 차분하게 앉아서 일기 쓰기 힘든 생활이다 보니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포항에 살면서 부모님 계신 고향 봉산리 솔미를 찾게 되면 으레 오송성당에 들렀다. 주일미사에 참례하기 위해서다. 서른에 포항으로 직장을 옮겼다가 예순 다섯에 다시 고향으로 왔으니 객지 생활이 인간의 시간으로 짧은 시간은 아닐 것이다. 언제까지 살지 모르는 미래의 한 시점 70살 나이에는 삶의 반을 포항에서 살았단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더 긴 생명을 유지하게 되어도 역시 가장 활동력 있을 때 바닷가 도시에서 살았던 생활을 반추(反芻)하며 추억할 것이다. 그 기간 동안 한두 달에 한 번 이상 고향에 들렀다. 대개 주말이다 보니 일요일에는 주일미사에 참례하게 되고, 미사 마치고 나오며 오송 성당을 배경으로 애정 어린 사진 한두 컷 찍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처럼 어린 시절 뛰놀던 고향 봉산리는 오송의료과학단지로 편입되면서 옛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국민소득 몇 천 달러에서 3만 불 이상이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 고향은 끊임없이 변모한 것이다. 그런 변화에도 변하지 않는 곳이 오송 성당이다. 예전보다 조금 정돈되었다고 할까 아니면 더 이상 변할 것 없는 시골 성당으로 옛 모습을 보전하는 일에 우선시하는 장소랄까. 그래서 그런지 오송 성당에 들르면 안정감이 들어 편안하다.
어린 시절 나는 첫영성체를 오송 성당에서 했다. 세례를 받기 위해 봉산리 솔미에서 성당까지 오리 길을 걸으며 주님의기도, 성모송, 삼덕송 등 기도문을 외웠다. 주일이면 가기 싫은 발길이었음에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엄한 믿음 아래 코뚜레 꿰인 송아지 마냥 성당으로 가야했다. 학교 교육보다 종교 교육을 우선시 하는 할아버지였다. 할머니는 어려운 난관에 부딪치면 ‘아이고 마리아!’라고 외쳤다. 자연스러운 청원 기도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침, 저녁으로 조과(아침기도), 만과(저녁기도)를 했다. 짧지 않은 시간 고상(십자가)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은 아직도 내게 나의 생활을 반성하게 하는 과거의 기억이며 본받아야 할 행동이라 여긴다.
스무 살 전후,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는 오송 성당은 내 기도처이면서 주된 놀이터였다. 천주교 오송교회 학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오송 성당 학생회 회원들은 청주 시내 본당 대항 학생농구대회에 참석하여 참패를 겪는 일이 해마다 반복되었다. 청주 시내에 있는 수동, 내덕동, 서운동 등 교세가 큰 성당 학생들과 시골 오송 성당 학생들과 시합은 참석하는데 의의를 둔 친교 행사였지만 학생 때는 꽤나 준비를 해야 하는 행사였다.
사실 오송 성당은 역사가 오래된 성당은 아니다. 그렇다고 짧은 성당도 아니다. 미국에서 오신 주은로 미카엘 신부님이 1960년 짓기 시작해서 1961년 축성했다. 우리 기억에 주 신부님은 미국에 꽤 넓은 농장을 부모님이 경영하였기에 성당 건축에 드는 비용을 그곳에서 가져왔다고 들었다. 오송 성당 구조와 비슷한 부강 성당도 주 신부님이 지었다. 성당 건축 이전부터 할아버지, 할머니는 하느님을 믿었고, 아버지, 어머니도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하였으며 오송 성당은 내 젊은 시절 종교적 믿음의 주춧돌을 쌓으며 형제자매와 주일에는 미사에 참례했던 곳이다.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주임 신부님은 김원택 신부님이었고, 그 뒤를 이어 윤기국, 정충일 신부님께서 부임했다. 감수성 예민했던 청소년 시절 오송 성당은 내게 세상을 읽는 돋보기였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시각을 형성하게 한 곳이다.
2010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을 맞아 본당설정 50주년 미사를 봉헌했다. 젊은 시절 성당에서 같이 기도하며 활동했던 형제자매들도 객지에서 모여들었다. 바쁘고 피곤한 생활임에도 50주년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고향 오송 성당을 찾은 것이다. 스무 살 언저리 함께 어울렸던 형제자매들은 이미 중년을 지나 50살 전후 나이로 나처럼 세파에 많이 시달리는 모습이었다. 꿈 많은 젊은 시절 가졌던 아름다움은 세상살이 질곡(桎梏)에 시달리며 조금 변색되어 있었다. 행사 후 커피숍을 찾아 음료를 마시면서 추억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지난 세월 안에 있었던 아름다움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주일학교 행사 및 성탄 전야제 준비하고, 칼국수도 먹고, 눈길을 걸으며 깔깔거렸던 젊었을 때의 추억은 기도실을 밝히는 촛불처럼 활활 피어올랐다.
어느 겨울에는 구유에 꾸밀 나무를 구하기 위해 우리 마을 뒷산에서 시린 손으로 소나무를 잘라서 성당까지 옮긴 일도 있으며, 종각에 전구를 달기 위해 종이 있는 높은 곳까지 올라갔던 일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해마다 치러지는 여름성경학교는 물론이고 중고등학생들을 데리고 괴산 쌍곡에서 여름성경학교를 진행했던 일도 빠질 수 없는 추억이었다. 믿음 안에 한 공동체로 어울렸던 우리들은 형제자매 누구의 집에 가더라도 마냥 즐겁고, 대접 받았던 한 끼 식사는 황송하게 너그러운 시절이었다.
2021년 지난 해 교적을 포항 대잠성당에서 오송 성당으로 옮겼다. 유아세례 받았던 신앙인으로 믿음의 길이는 평생이지만 깊이는 세파에 약해진 상태로 귀향했다. 신앙의 깊이를 갖기 위해서는 성서읽기, 미사. 기도생활에 충실해야 하는데 세속적인 일에 치이다 보니 때론 주일 미사도 타 본당으로 가게 된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짧을 앞날이다. 신앙은 행동이다. 믿음은 기도며 절제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사랑이며 전교다. 오송 성당 신자로서 패기 넘쳤던 젊은 시절의 이런저런 실수도 지금 생각하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아름답기 그지없는 시간이란 생각이 든다.
나에게 오송 성당은 회귀본능의 품이다. 지금 등나무가 있는 곳에 성모상이 있었고, 그 옆쪽으로 화장실이 있었다. 강당은 공연 행사와 음식을 나누어 먹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지금은 차들이 많기에 강당 앞 공간을 주차장으로 사용하지만 예전에 밭, 운동장 등 다양하게 쓰였다. 나무가 자라 무성하게 그늘을 만들듯 무심한 세월은 오송 성당을 힘들고, 지친 자들의 쉼터, 기도터로 만들었다. 젊은 시절 본당에서 만났던 얼굴들. 사십년 가까운 세월에 잊혀지고, 떠나고, 대신 새로운 얼굴, 낯선 얼굴들이 미사에 참례한다. 나 역시 그분들에게 낯선 사람이다. 주일미사 마친 후 아직도 핸드폰으로 성당 모습을 한두 컷 찍을 때가 있다. 젊은 시절 성당 구석구석에 떨어뜨렸던 땀방울이 지금의 아늑한 오송 성당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하고 누구보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 아늑한 모습 안에는 주임 신부님과 수녀님, 평협 회장님을 비롯하여 성당 활동단체 구성원, 신자들의 노력이 꾸준히 뒷받침 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특히 큰 미사 때마다 들려주는 성가대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시골 성당의 품격을 넘어 도시 성당을 능가할 정도다. 성당을 찍는 사진 속에 성가대의 노랫소리도 담겨 있음을 찍은 사진을 볼 때 발견하게 된다.
오송 성당은 내 본당이고, 내가 앞으로 믿음을 증거하며 다녀야 할 세상 최고의 성당이다.
-2022년 7월 7일(수) 카페 ‘시월’에서
첫댓글
좋은 글에 함께 공감하는 시간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