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2/08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4 - 국빈 브루나이 국왕, 전용기 직접 몰고 방한 박근혜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국빈 방문한 하싸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68)이 8일 오후 직접 조종한 전용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다.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군주로 통하는 볼키아 국왕은 영국 샌드허스트 사관학교 출신이다. 영국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윌리엄 왕자가 나온 이 학교는 미국의 웨스트포인트, 프랑스의 생시르에 버금가는 명문 육군사관학교로 꼽힌다. 이용욱 기자 woody@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4-12-08 21:54:1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2082154181&code=910100
[현장에서]15년만에 이뤄낸 ‘국경일 한글날’ 마침내 한글날이 국경일이 됐다. 국회는 12월8일 의사일정 파행 속에서도 86가지 법률안을 본회에서 통과시켰다. 거기엔 ‘국경일에 관한 법률’도 들었는데, 이제까지 삼일절·제헌절·광복절·개천절 넷이던 국경일에 ‘한글날’(10월9일)을 더한 것이다. “우리 민족사에 가장 빛나는 문화유산인 한글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현재 국가 기념일로 규정되어 있는 한글날을 법에 의한 국경일로 높여 규정함으로써 한글의 독창성과 중요성을 드높이고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고자 함”이 제안 이유다. 이는, 1990년 노태우 정권 시절 순전히 경제계의 압력에 따라 ‘노는 날’이 많다며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에서 뺀 뒤, 겨레 얼이 흐려질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서 ‘한글날을 국경일로!’ 운동을 벌인 지 15년 만에 맺은 열매다. 16대 국회 때도 같은 법이 발의됐으나 경제계의 반대와 정부 쪽의 무성의로 무산되기도 했다. 한글세계화운동본부,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 한글학회, 한글문화연대 등에서 길거리 서명운동과 청원, 공청회 등을 숱하게 벌인데다 신기남·이규택 의원 등 여야를 가리지 않고 그 뜻에 동참한 여러 선량들의 뜻이 어우러진 덕분이다. 9일 아침 김계곤 한글학회장, 이대로 겨레모임 공동대표 등 그동안 ‘한글날을 국경일로!’ 운동을 벌이다 백발이 성성해진 원로들은 “살다 보니 이렇게 좋은 날도 맞는다”며 “앞으로 이날을 온겨레의 문화 국경일로 가꿔 나가는 데 두루 힘쓰자”고 기쁨 속에서도 다짐을 잊지 않았다. 이들은 특히 ‘한글날=국경일=노는 날’로 인식되는 것을 경계했다. 뒤따를 법령에서 참고할 일일 터이다. 십수년을 곁에서 놀며 절감한 바는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외치고 앞장서는 이들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남은 일은 좀더 젊은 세대의 몫이라는 점과 함께. 최인호 기자 goljal@hani.co.kr /한겨레 2005-12-09 오후 08:16:48 http://www.hani.co.kr/kisa/section-002001000/2005/12/002001000200512092016505.html ['국경일에 관한 법률' 연혁] 2005.12.29 -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 공포 2005.12.08 -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 국회 본회의 통과 2005.11.30 -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법안심사 소위 통과 1949.10.01 - '국경일에 관한 법률' 제정 공포
오늘의 역사 (12월 8일)[1999년] '스타워즈' 20세기 최고영화로 선정 1977년 개봉돼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조지 루카스 감독의 공상과학영화 `스타워즈`가 금세기 최고의 영화로 선정됐다. `스타워즈`는 영국 BBC 방송이 시청자를 상대로 조사한 금세기 최고영화 순위에서 당당히 1위에 올랐다. 루카스 감독은 스타워즈 시리즈인 스타워즈 에피소드I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의 위협`과 `제국의 역습`을 각각 5위와 7위에 올려 톱10 안에 가장 많은 영화를 올린 감독이 됐다. 2위에는 역시 공상과학영화인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가 선정됐으며 3위에는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열연한 `카사블랑카`가 올랐다. 스코트 감독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각각 2편씩을 톱10에 올려 명성을 확인했다. 상위 100편의 영화 중 가장 오래된 영화는 지난 1939년에 만들어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12위에 올랐다. 한편 상위 10편의 영화중 공상과학영화가 5편이나 돼 공상과학영화가 시청자들에게 큰 인상을 남긴 것으로 분석됐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list.jsp?hm=1208&cmd=0
1994 -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노벨문학상 수상 오에 겐자부로(일본어: 大江 健三郎, おおえ けんざぶろう, 1935년 1월 31일 ~ )는 일본의 작가이다. 시코쿠 에히메 현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18세의 나이 때에 도쿄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도쿄로 갔다. 학생 시절이었던 1957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동시대 프랑스와 미국 문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94년 12월 8일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기념 연설문, 《애매한 일본의 나》를 통해 그는 스웨덴의 아동문학작품 《닐스의 모험》을 읽으며 꿈꿨던 어린시절, 일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일본적인 신비주의에 대한 회의, 전자공학이나 자동차 생산기술로 알려진 조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 , 한국의 김지하나 중국 작가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 아타나베 가즈오에게서 배운 휴머니즘의 정신을 말하였다. 이 연설문은 노벨상 위원회가 책으로 출판하였다. 가족으로는 아들이자 장애인 음악가인 오에 히카리와 부인이 있다. 오에 겐자부로가 아들 히카리를 작곡가로 키운 이야기는 문화방송의 예능 프로그램인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재연극으로 소개된 바 있다. /위키백과
- Election of Boris Yeltsin
1991 - 슬라브3국 `독립국가공동체` 창설 오늘의 역사 (12월 8일)[1991년] 슬라브3국 `독립국가공동체` 창설 러시아, 우크라이나 및 벨로루스(구 백러시아) 등 소련의 슬라브계 3개 공화국이 1991년 12월 8일 외교, 국방 및 핵통제권 등을 공동 관장하는 한편, 수도를 민스크로 하는 독립공동체(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를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발트3국 독립 후 나머지 12개 공화국을 가능한 한 많이 끌어모아 새로운 연방을 결성하려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노력이 끝내 좌절됐으며 지난 74년간 존재해온 소련이 사실상 사라지게 됐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을 비롯한 이들 3개 공화국 지도자들은 이날 벨로루스 소재 부크강변 브레스트에서 지난 7일부터 이틀간 계속된 비공개 회담을 끝내면서 발표한 공동성명을 통해 독립국 공동체 창설을 발표했다. 성명은 독립국 공동체가 "외교-국방정책을 공동운용"하며 "역내 배치 핵무기는 궁극적인 폐기를 목표로 공동 관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비핵지대화 및 중립국 지위확보를 향한 노력에도 일절 간섭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으로 발표됐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1207_0010
1983년 국내에선 처음으로 64KD램을 개발, 시험생산에 성공하였다. 이후 1984년 256KD램, 1986년 256KS램과 1MD램, 1988년 4MD램과 1MS램 등의 개발에 성공, 반도체산업에서의 기술발전을 거듭하였다. 1993년 64MD램에 이어 1994년에는 세계 최초 256MD램(삼성전자)을 개발하여 미국IBM, 일본도시바, 유럽지멘스를 제치고 반도체메모리분야에서의 기술우위를 차지하였다. /yahoo
[삼성전자 반도체 개발 연혁] 1994-08-29 - 256M DRAM 세계 첫 개발 1992-09-25 - 세계 최초 64M D램 개발 성공 발표 1992-06-26 - 세계최초 64M DRAM 완전동작 시제품 개발 1991-05-21 - 국내최초 VGA칩 개발 1990-08-11 - 16M DRAM 개발성공 1989-12-08 - 4M DRAM 출하 1989-06-15 - 음성녹음 및 재생용 IC 개발 1989-05-03 - 4메가 마스크롬 개발 1989-04-11 - 국내최초 PC IC 개발 1988-00-00 - 4M D램 개발 1988-11-16 - 최첨단 반도체 1M SRAM 개발 1986-09-07 - 256K SRAM국내 최초 개발 1986-07-13 - 1M DRAM 국내 최초 개발 1984-00-00 - 256K D램 개발 1983-11-07 - 64K D램 개발 성공 (미.일에 이어 세계 세번째) 1983-08-03 - 64K D램 조립공정 개발 성공 1983-02-08 - 이병철 회장 도쿄 선언(반도체 사업 본격화) 1974-00-00 - 한국반도체 인수로 반도체 사업 개시
1987 - 미-소, 중단거리 핵미사일(INF) 폐기협정에 서명 오늘의 역사 (12월 8일)[1987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은 1987년 12월 8일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유럽과 아시아지역에 배치된 중단거리 핵미사일(INF) 폐기협정에 서명했다. 1985년 11월 첫 회담이 열린 후 2년 1개월만이었다.첫 회담의 의제는 공격용 전략무기 50% 감축, 유럽배치 중거리 탄도 미사일 제거, 미국이 추진중이던 전략방위구상(SDI)에 대한 협의였다. 고르바초프는 미국이 SDI를 포기하지 않을 경우 아무것도 합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답보상태에 빠졌던 군축회담의 전기는 1987년 2월 고르바초프가 유럽에 배치된 미국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제거를 다른 의제와 분리, 협상할 수 있다고 한걸음 물러난 데서 마련됐다. 이로인해 두 정상은 양국이 보유한 핵무기의 4%(소련 1천8백46기, 미국 8백46기)를 폐기하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이 협정은 미소양국이 핵무기개발경쟁 이래 처음으로 핵감축시대를 열었다는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28_0300
레넌 [Lennon, John Winston, 1940.10.9~1980.12.8] [어제의 오늘]1980년 ‘비틀스’ 존 레넌 피격 사망 ㆍ‘반전·평화 아이콘’ 역사 속으로 1980년 12월8일 오후 11시. 미국 뉴욕 맨해튼의 고급 아파트 ‘다코타 하우스’ 앞에서 네 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탄을 맞고 비틀거리다 고꾸라진 사람은 비틀스의 기타리스트 존 레넌이었다. 경찰이 출동해 레넌을 병원으로 급히 이송했지만 그는 숨을 거뒀다. 196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이자 반전운동의 아이콘이던 한 음악인의 마지막 순간은 정말이지 갑작스럽고 황망한 것이었다. 피의자 마크 채프먼은 현장에서 검거됐다. 경찰은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강도는 아니다. 아무래도 제 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총을 쏜 것 같다”고 말했다. 레넌의 피살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팬이 그의 집 앞에 꽃과 편지를 바쳤다. 지미 카터 당시 미 대통령은 “그의 정신, 비틀스의 정신은 경박하면서도 진지하고, 냉소적이면서도 이상주의적인 그 세대의 정신이 되었다”는 내용의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최희진기자 /경향신문 2009-12-07 17:31:0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2071731035
1978 - 서울대병원 신축병동 의료기기 시동식 오늘의 역사 (12월 8일)[1978년] 서울대병원 신축 병동이 11년 만에 준공돼 1978년 12월 8일 의료시설 기동식을 가졌다. 1967년 12월 7일 착공, 우여곡절끝에 준공된 신축병동은 총투자액 3백60억원이 말해주듯, 동양최대·최신의 시설을 갖추었다. 대지 2만4천4백31평, 연건평 2만5천2백87평의 14층 건물에 2만2천1백80점의 각종 의료시설이 들어찼고, 병상수 1천56개, 외래환자 진료능력은 1일 2천명이나 됐다. 이날 시동식에서 선보인 최신시설중 전산화 횡단 단층촬영기는 경희대병원에 이어 두 번째로 도입한 장비이나 가격성능은 세계최신을 자랑했다. 국내최초로 도입된 1천2백50mm암페어 심혈관 촬영기는 심장 및 혈관을 입체적으로 촬영하여 각종심장 질환을 세밀히 관찰하게 해줬다. 고성능전자현미경도 국내의학계에서는 획기적인 시설중의 하나였는데 실물의 80만배(일반현미경은 8백배)까지 확대, 1억분의 1cm까지 관찰할 수 있다. 이외에도 고에너지 전자선가속치료기, 만능마취기 등을 선보였다. 신축도중 의료계변경, 차관회사교체, 유류파동 등으로 준공시기가 4년이나 늦어졌으나 시설 및 규모는 세계 10대병원에 꼽힐 정도였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1211_0004
1978 - 포철 3기 설비확장공사 준공 전사 총력건설체제에 들어간 포스코는 1978년 12월 8일 예정공기보다 5개월이나 앞당겨 포항 3기 공사를 완공했다. http://museum.posco.co.kr/museum
포항제철(POSCO) 연혁 1968-11-12 박정희 대통령 포철현장 방문(13차례 방문 중 첫번째) 1969-01-15 제철연수원 현판식 1970-04-01 포항종합제철소 1기 착공식 1970-06-23 중후판공장 설비공급 계약체결 1970-09-19 열연공장 설비공급 계약체결 1972-10-03 첫 열연제춤 출하, 박태준 사장 첫 제품에 "피와 땀의 결정" 휘호 1973-06-08 제선공장 준공식 및 용광로(고로) 화입식 1973-06-09 용광로(1고로) 쇳물 출선 시작 1973-07-03 1기 설비 종합준공식 1973-12-01 2기 설비 종합 착공식 1974-10-21 직업훈련원 개소 및 1기생 입소식 1975-11-29 1억불 수출의 탑 수상 1978-12-08 3기 설비 공사 준공 1979-02-01 4기 설비 종합착공식 1979-09-27 4본주 입주식 1981-02-18 4기 설비 종합준공, 조강 연산 850만톤 규모 1981-09-01 4기 2차 설비 착공식 1983-05-25 4기 2차 설비 종합준공식
메이어 [Meir, Golda, 1898.5.3~1978.12.8] [책갈피 속의 오늘]1978년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 사망 1973년 초 피비린내 나는 보복극이 시작됐다. sec&sid1=102&oid=020&aid=0000327235
지부티는 남북 동시 수교국이다. 1977년 12월 한국과 단독수교하였고, 1979년 2월 경제협력을 체결하였으며 북한과는 1993년에 외교관계를 수교하였다. 1991년 파라 외교부장관이 방한하였다. 1979년 경제기술 협력협정, 1980년 항공협정을 체결하였다. 주에티오피아 대사가 겸임하고 있다. 2000년 기준 대한(對韓) 수출은 7만 5000달러이고, 대한 수입은 2162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인조필라멘트, 세제, 고무제품, 인견스테풀 섬유 등이다. /naver
- Konstantinos Karamanlis 오늘의 역사 (12월 8일)[1974년] 민주주의의 요람 그리스가 1974년 12월 8일 국민투표에서 1백42년간의 왕정을 종식하고 대통령제 공화국을 채택했다. 이날 투표에서는 군주제를 반대하는 도시유권자들의 압도적 투표에 의해 공화제 찬성이 군주제 찬성투표를 전국에서 5대1의 비율로 누르고 압승을 거두었으며 공화제 찬성은 73%를 기록했다. 이같은 투표결과로 그리스정부는 12월 23일 각의를 열고 과거에 국왕이 행사했던 대권과 다른 일부권한을 대통령에 부가하는 새공화국헌법초안을 승인했다. 새 헌법은 대통령에게 수상과 각료를 임명 또는 해임하는 권한과, 내각의 건의에 따라 국가의 중대문제에 관해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날 투표로 왕정의 폐지를 결정한 그리스는 터키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뒤 1832년 런던협약에 의해 탄생한 후 지난 1백42년간 왕정을 실시해 왔었다. 왕정이 폐지될때까지 7명의 왕이 그리스를 다스렸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04_0219
[어제의 오늘]1963년 프로레슬러 역도산 칼에 찔려 ㆍ사망원인 여전히 미스터리로 1963년 12월8일 일본 도쿄 아카사카 뉴라틴쿼터 나이트클럽. 한눈에 봐도 상당히 건장한 체구의 한 남자가 술에 취한 채 화장실 입구에서 야쿠자 조직원과 시비가 붙는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던 야쿠자 조직원은 상대방의 복부에 칼을 꽂는다. 피로 범벅이 된 배를 움켜쥔 채 쓰러지는 남자. 그는 바로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아버지’로 불리는 ‘역도산(力道山)’이다. 이날 큰 상처를 입은 역도산은 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는다. 그러나 일주일 후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재수술을 받은 직후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역도산은 한국인이다. 함경남도 홍원에서 출생했지만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20년, 22년, 23년, 24년이라는 등 설이 분분하다. 공식적으로는 1924년 11월14일생으로 전해진다. 본명은 김신락. 분명한 것은 10대 후반까지는 평양에서 씨름선수로 활약했다는 사실이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12-07 19:24:3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2071924375&code=100100&s_code=ap005
Issued to publicize the Economic Conference of Afro-Asian Countries, Cairo, Dec. 8.
1958 - 미국의 프로 야구선수 트리스 스피커(Speaker, Tris) 사망 스피커 [Speaker, Tristram E. "Tris", 1888.4.4~1958.12.8] 트리스 스피커(Tristram E. Speaker, 1888년 4월 4일 ~ 1958년 12월 8일)는 역사상 최고의 수비 및 공격 중견수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는 미국 야구 선수였다. 그의 닉네임은 "스포크"(Spoke)와 "그레이 이글"(Grey Eagle)이었다. 스피커는 20세기 초반 보스턴 레드삭스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에서 활약하였으며 1937년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올라섰다. 개인 통산 최다 2루타 기록은 트리스 스피커가 792개를 기록하였다. 선수 기록 /위키백과
1953 - 유엔 총회에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연설 [오늘의 경제소사/ 12월 8일] <1570> 평화적 핵 이용 1953년 12월8일, 뉴욕. 유엔 총회에 특별 참석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핵 무기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인류가 핵 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지만 미국은 원자력에서 나오는 평화적인 힘이 미래의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국도 핵 기술로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 교육용 원자로 수출 성공이 작은 시작이기를 바란다. 권홍우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12/07 17:32:51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2/e2009120717325097490.htm
[6.25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 로버트 탈마지 장진호 생존자협회 전회장] 부산에서 근무한 그는 9월 15일 제1해병사단이 인천 상륙작전의 선봉대가 되자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탈마지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상륙작전 당시 수백여 척의 군함에서 발포된 포탄으로 인해 불바다가 된 인천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한다. 주상진 기자 /한국일보 2005-06-22 http://www.koreatimeshawaii.com/hk.nsf/307a1ea4bc39c12f0a256dcf0016e2a2 /69a61d38086cbdce0a2570d2006b4bbe?OpenDocument
- 한글학회 창립 50돌, 창립 60돌 기념
1943 - 국어학자, 독립운동가 이윤재(李允宰) 옥사 이윤재 [李允宰, 1888.12.25~1943.12.8 [오늘속으로(12월8일)] 국어학자 이윤재 기자는 옷깃을 여미고 삼가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1943년 12월8일 국어학자 이윤재가 함흥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sec&sid1=110&oid=038&aid=0000038495
모리슨 [Morrison, Jim, 1943.12.8~1971.7.3] [역사 속의 인물] 반항의 록가수 짐 모리슨 반문명적 자유주의의 대가는 뭘까. 파괴적이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록그룹 도어스(The Doors)의 리더 싱어 짐 모리슨(1943~1971) 경우는 마약과 섹스였다. 1960년대 말 베트남 전쟁의 와중에 반항과 일탈로 일관하면서 시대를 풍미했다. 그의 노래는 마약을 한 것 같은 몽환 상태(사이키델릭 록)에서 무한의 자유와 기존질서 파괴를 담고 있다. 대표곡 디 엔드(The end)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표현했다. "아버지…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어머니… 당신과 사랑을 하고 싶어요." 아버지를 절대 권력자로, 어머니를 신세계의 인도자로 봤으며 반전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삽입곡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금지곡이어서 '태양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sun)가 인기를 끌었다. 1943년 오늘, 미국 플로리다에서 해군 제독의 아들로 태어나 UCLA에 다니면서 친구들과 도어스를 결성했다. 1967년부터 1971년까지 7장의 앨범을 냈고 1971년 파리의 자기 아파트 욕조에서 사망했다. 과도한 음주, 섹스, 마약 중독의 결과였지만 반항적인 로커다운 최후였다. 파리 페르라셰즈의 무덤에는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다. 박병선 논설위원 /매일신문 2009년 12월 08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2692&yy=2009
핵분열반응은 1938년 O.한(Hahn, Otto)과 F.슈트라스만(Strassmann, Fritz)에 의하여 우라늄 238 238U을 중성자로 조사(照射)했을 때에 발견한 것이 최초의 일이었다. 이 경우 우라늄 238 238U은 바륨 139 139Ba 및 크립톤 97 97Kr 등으로 분열하여 분열파편은 170 MeV의 평균에너지를 가지고 비산하였다. 자발적(自發的) 핵분열은 1940년 발견되었다. /naver
1922 - 독일 태생의 영국 화가 루치안 프로이트(Freud, Lucian) 출생 프로이트 [Freud, Lucian, 1922.12.8~2011.7.20] 독일계 영국화가로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이다. 극사실주의적인 초상화와 누드를 그렸으며 프랜시스 베이컨, 프랭크 아우어바흐와 함께 영국 구상회화의 전통을 유지,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1922년 11월 8일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건축가이자 아마추어 화가였다. 1933년 나치즘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하였고 1939년 영국인으로 귀화하였다. 이후 센트럴 미술학교와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미술을 공부하였다.
시가 [Segar, Elzie (Crisler), 1894.12.8~1938.10.13] 미국의 시사만화가, 연재만화 〈뽀빠이 Popeye〉의 작가. 시금치를 먹으면 엄청난 힘이 솟는 우락부락한 선원 뽀빠이는 세계에 알려져 대중의 영웅이 되었다. 청년시절에 시가는 주택 도장, 간판 그림, 영사기사 등의 일을 했다. 자신이 그린 만화가 숱하게 거절당하자 그는 통신교육을 통해 시사만화 과정을 거친 후 시카고로 갔다. 그곳에서 시사만화가 리처드 F. 아우트콜트의 도움으로 〈헤럴드 Herald〉지에 일거리를 얻어 〈찰리 채플린의 희극적 장난 Charlie Chaplin's Comic Capers〉을 그렸다. 이 신문이 1917년에 발행을 중단하게 되자 그는 뉴욕으로 가서 킹피처스신디케이트사(社)를 설득하여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연재만화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1919년에 〈팀블 극장 Thimble Theatre〉이 등장했다. 이 만화는 처음에는 어리숙한 노처녀 올리브 오일과 그녀의 바보스런 동생 케스터 오일 및 올리브의 남자친구 햄 그래비의 공상적인 모험을 주로 다루었다. 이 만화의 주인공인 뽀빠이는 1929년 1월에 처음 등장했다. 그 이후 뽀빠이와 올리브 오일 간의 끈질긴 연애가 진행되었고 뽀빠이는 시금치의 도움으로 경쟁자들을 하나하나 물리쳤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아마도 햄버거광인 교활한 식객 J. 웰링턴 윔피일 것이다. 이 인물들은 맥스 플라이셔가 제작한 수많은 뽀빠이 만화영화에도 등장했다. 뽀빠이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시금치와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결국 그가 등장한 지 6년쯤 되었을 때는 대규모 시금치 재배지인 텍사스 주 크리스털시티의 중앙광장에 그의 동상이 세워질 정도였다. /브리태니커
1892 - 오스트레일리아 비행사 힝클러(Hinkler, Bert) 출생 힝클러 [Hinkler, Bert(Herbert), 1892.12.8~1933.1.7] Hon. Squadron Leader Herbert John Louis Hinkler AFC DSM (8 December 1892 – 7 January 1933) - better known as Bert Hinkler, was a pioneer Australian aviator (dubbed "Australian Lone Eagle"), inventor, first person to fly solo from England to Australia, and the first person to fly solo across the Southern Atlantic Ocean. (참고) 1928.2.7 - 호주 비행사 힝클러, 영국-호주 단독비행 1927년 5월 20일-21일 뉴욕과 파리간 단독 무착륙횡단 비행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보다 1주일 후에 더 빠른 속도로 더 적은 연료를 가지고 횡단에 성공한 버트 힝클러라는 사람이 있다. 버트 힝클러는 찰스 린다버그보다 더 훌륭한 비행사였지만 버트 힝클러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http://toku.egloos.com/1587466
1890 - 체코슬로바키아 작곡가 마르티누(Martinů, Bohuslav) 출생 마르티누 [Martinů, Bohuslav Jan, 1890.12.8~1959.8.28] 보후슬라프 마르티누(Bohuslav Martinů, 1890년 12월 8일 ~ 1959년 8월 28일)는 체코의 작곡가이다. 마르티누는 프라하 콘소바토리를 다녔지만 ‘학습 태만’을 이유로 퇴학당한 이후 독학했다. 1923년에 체코슬라바키아를 떠나 파리로 이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그는 남부 프랑스로, 그리고 1941년에는 미국으로 떠나서 뉴욕에 정착했다. 후에 그는 스위스로 이주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르티누는 다작을 남겼는데, 그 수가 400여개에 이른다. 그는 같은 나라 작곡가인 레오시 야나체크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이지만 그의 작품은 끊임없이 연주·녹음된다. 그의 작품으로는 합창곡인 《길가메시 서사시》(1955), 여섯 개의 교향곡과 첼로 협주곡, 오보 협주곡, 다섯 개의 피아노 협주곡, 실내악곡 등이 있다. 마르티누의 곡은 많은 곳에서 받은 영향을 보여 준다. 《La Revue de Cuisine》(1927)같은 작품은 재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두 개의 현악 오케스트라, 피아노와 팀파니를 위한 《Double Concerto》는 바로크 시대 합주 협주곡의 경향을 띤다. 다른 작품 중에서는 체코 민요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다. 그는 클로드 드뷔시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존경했다. 마르티누의 작품 중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 중에 Lucie Bigelow Rosen의 위촉으로 작곡된 테라민을 위한 곡이 있다. 그는 1944년에 작곡을 시작하여 10월 1일에 테라민, 오보에, 현악 사중주와 피아노를 위한 《판타지아》를 작곡해서 테라민 연주자인 Rosen에게 헌정했다. 그녀는 1945년 11월 3일 뉴욕에서 Robert Boom과 Koutzen Quartet과 함께 그 곡을 초연했다. /위키백과
- 'Self-portrait' - 'Benito Juarez'
- 'Paisaje Zapatista, 1915' - 'Desnudo con Alcatraces, 1944'
- 'Juan Aldama' - "Salud y Vida" "Pureza", 1929
- 'La Paza Medical Center' - 'The People in Pursuit of Health, 1953'
- 'El Matematico', 1919
- 'Vendedoras de Slcatraces' 리베라 [Rivera, Diego, 1886.12.8~1957.11.25] 멕시코의 화가. 과나후아토 출생. 어린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나타냈으며, 10세에 산카를로스미술원에 들어가서 약 6년간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정부 장학금으로 유럽에 장기유학, 1907년 에스파냐에서, 다음해에 파리로 옮겨 1914년까지 거의 그곳에서 보냈고, 파리 체재 중 피카소, G.브라크, P.클레 등과 교제하게 되었다. 입체파(큐비즘)의 영향을 받았으나, 무엇보다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벽화에 가장 깊은 감명을 받고, 멕시코내란 종식과 함께 귀국하여 D.A.시케이로스 등과 미술가협회를 결성, 활발한 벽화운동을 전개하였다. 멕시코의 신화·역사·서민생활 등을 민중에게 직접 이야기할 수 있도록 공공건축물의 벽면에 늠름한 감각과 힘에 넘치는 벽화를 그렸다. 대표작으로 프라드호텔의 대벽화 《아라메다 공원의 일요일의 꿈》(1948) 《헬렌 윌스 무디의 초상》(1930) 《농민지도자 사파타》(1931) 등과 중앙정청, 문교부, 차핑고농업학교 등의 벽화 및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주식거래소의 장식화 등이 있다. 작품의 특색은 멕시코 민중에 대한 애정이 넘쳐 흐르며, 유럽회화의 전통을 멕시코의 전통에 결합시키려 한 점에 있으며, 멕시코 근대회화의 4대 거장, 즉 리베라, 시케이로스, J.C.오로츠코, R.타마요 중에서도 가장 멕시코적인 화가이다. /naver
- Finland, 100 Markkaa (Banknote)
시벨리우스 [Sibelius, Jean, 1865.12.8~1957.9.20] 시벨리우스는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유명한 핀란드의 교향곡 작곡가이다. 핀란드의 신화적 서사시 <칼레발라 Kaleval!!!!!a>는 평생 그에게 영감의 근원이었다. <포횰라의 딸 Pohjola's Daughter>·<루온노타르 Luonnotar> 등 많은 교향시들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핀란디아 Finlandia>는 핀란드의 민속적인 선율과 리듬을 살린 교향시로 1899년에 작곡되어 1900년에 손질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가장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되는 마지막 교향곡 3편(5번 내림 E장조, 6번 D단조, 7번 C장조)과 <타피올라 Tapiola>(1925)를 내놓고 말년에는 긴 침묵에 빠졌다. 1930년대에는 영국의 세실 그레이와 컨스턴트 램버트, 미국의 올린 다운스 등의 작가들에 의해 시벨리우스의 인기가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이러한 유행에 대한 다음 세대의 반동에도 불구하고 시벨리우스는 음악 대중에 대한 확고한 영향력을 견지했다. /브리태니커
"비평가들의 말이라면 전혀 귀담아 들을 필요 없다. 비평가를 위해 세워진 조상(彫像)을 일찍이 본 적이 있는가?"
- 얀 시벨리우스
- 'The Waltz' 클로델 [Claudel, Camille(-Rosalie), 1864.12.8~1943.10.19] 프랑스의 조각가.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오귀스트 로댕의 오랜 연인이며 그에게 영감을 준 인물로 더 알려져 있다. 시인인 동생 폴 클로델의 일기와 회고록은 그녀의 생애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제공해준다. 5~12세에 그리스도 교리수녀회에서 공부했다. 가족이 노장쉬르센으로 이주한 뒤로는 가정교사가 클로델가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때부터 그녀는 정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수많은 책이 갖추어진 아버지의 서재에서 여러 분야의 책을 읽었다. 10대에 이미 조각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대의 미술가들에게 재능을 인정받았다. 1881년 아버지가 다시 직장을 옮기면서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거기에서 그녀는 콜라로시 아카데미(지금의 그랑드 쇼미에르)에 들어가 평생 친구인 제시 립스컴(뒤에 엘보른으로 알려짐)을 만났다. 현존하는 초기 작품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클로델과 로댕은 1883년에 처음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뒤 곧 그녀는 그의 제자·협력자·모델·애인이 되었다. 그녀는 계속 자신의 작품을 제작하면서도 당시 로댕의 작품들, 특히 〈지옥문 The Gates of Hell〉 등에 삽입될 많은 조상과 그 일부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1888년 라폴리뇌부르에 있는 로댕의 작업실 근처로 숙소를 옮겼으나 1892년경 로댕과의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1898년까지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1893년경에는 독립하여 작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끊임없이 일을 했지만 가난해지고 점점 세상과 등지게 되었다. 그녀는 때때로 작업실에 있는 모든 작품을 완전히 부수기도 했으나 공인된 미술전람회들(살롱 도톤과 살롱 데 앵데팡당) 및 뱅 화랑과 외젠 블로 화랑 등에 작품을 계속 전시했다. 로댕이 자신에게 부당한 처사를 저질렀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그와 그의 '무리'에게 학대를 받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회를 멀리하고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가까웠던 동생 폴과도 멀리 떨어져 살았으며 이러한 사정이 그녀를 더욱 짓눌렀다. 1913년 3월 10일 그녀는 강제로 빌레브라르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1914년 9월 몽드베르그의 정신병원으로 옮겨져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브리태니커 영화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로댕의 연인이며 조각가인 카미유 클로델(1864~1943)의 비극적인 삶을 그린 프랑스 영화. 1988년 촬영기사 출신인 브뤼노 뉘탱(Bruno Nuytten)이 감독 데뷔작으로 연출하였으며, 이자벨 아자니(Isabelle Adjani)와 제라르 드파르디외(Gerard Depardieu) 등이 출연하였다. 상영시간은 175분이다. 19세기 말의 파리, 예술에 남다른 재능을 지닌 20세 처녀 카미유 클로델(이자벨 아자니)은 예술계의 거목인 오귀스트 로댕(제라르 드파르디외)을 찾아간다. 로댕은 카미유의 재능과 미모에 끌려 《지옥의 문》 제작팀의 조수로 고용한다. 이후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이며 작가와 모델인 동시에 공동 제작자 그리고 24년의 나이 차이를 넘어선 연인 관계가 된다. 클로델은 로댕의 아내가 되어 예술의 동반자가 되길 바라지만, 그녀의 재능에 경쟁심을 갖게 된 로댕은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클로델은 결국 로댕의 불성실한 여성 편력에 분노하며 그의 곁을 떠나 불꽃 같은 예술혼을 사르면서 조각 활동에 몰두하지만, 로댕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서서히 정신과 육체의 균형을 잃게 된다. 우울증과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거리를 방황하면서 밤마다 로댕의 집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던 클로델은 결국 정신병원으로 보내져 30년 동안 폐인처럼 살다가 비극적인 삶을 마친다. 이 영화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파국을 맞는 여성 예술가의 삶을 밀도 있게 그리고 있다. 보통 여성으로 머물 수 없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클로델이었지만 19세기 후반의 사회적 상황은 독립적인 여성 예술가가 마음껏 재능을 펴도록 허용하지 않았으며, 결국 클로델은 이러한 사회적 억압을 넘지 못하고 오히려 보통 여성보다 못한 비극적인 삶을 마쳐야 했던 것이다. 이자벨 아자니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사랑에 대한 분노로 격정과 광기에 휩싸인 삶을 살아간 클로델 역을 훌륭하게 소화하여 1989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받았다. 이 밖에 프랑스의 세자르상에서 작품상·여우주연상·촬영상·편집상 등 7개 부문을 석권하였다. /naver
- 'Mediterranean' - 'Air'
1861 - 프랑스의 조각가 마욜(Maillol, Aristide) 출생 마욜(마이욜) [Maillol, Aristide, 1861.12.8~1944.9.27] 프랑스의 조각가. 알찬 마스(masse:量塊)와 신선한 정감표출로 단아한 나부상(裸婦像)이 유명하다. 1882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회화와 태피스트리 디자인을 희망하였으나, 시력장애로 정밀작업을 단념하고, 1897년경부터 조각으로 바꾸었다. 1900년, 살롱 도톤에 첫 작품 《샘[泉]》을 출품하였지만 낙선되었다. 그러나 그 후 A.로댕의 후원을 입어 차차 유명해졌으며, 1905년의 《지중해》로 조각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906년 그리스를 방문하여 그리스 고전기의 조각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10년부터 《세잔의 기념비》(1912∼1925), 《흐름》(1939∼1943)을 비롯한 많은 걸작을 발표하여 국내외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삽화와 목판화 작업도 하였다. 그 밖에 《세 미(美)의 신》(1936∼1938), 《일 드 프랑스》(1910) 등이 대표작이다. /naver
멜리에스 [Méliès, Georges, 1861.12.8~1938.1.21] 프랑스의 영화감독. 파리 출생. 아마추어극에 열중한 취미인이었다. 특히 요술을 좋아하여 로베르우댕극장이라는 만담 흥행극장을 스스로 꾸려나갔다.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하자(1895), 즉시 카메라를 구입하여 촬영을 배워 단편물을 만들다가 1896년 M.브와가 만든 세계 최초의 영화 스튜디오에서 자신이 기획 ·각본 ·장치를 도맡아 이른바 트릭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이때 카메라 고장으로 우연히 ‘이중노출’ ‘페이드 인’ ‘페이드 아웃’ ‘조리개’ 등의 기술을 발견하여 큰 공적을 세웠다. 이를 원용하여 《로베르우댕극장에서의 한 부인의 증발 Escamotage d’une dame chez Robert Houdin》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달나라 여행 Le Voyage dans la lune》(1902) 《걸리버 여행기》(1902) 《해저 20만리》(1907) 등을 계속해서 발표하였고, 세계 최초의 종합적인 촬영소를 세우는 한편, 영화의 흥행체제도 확립하였다. 영화를 현실의 모사라고 생각하던 대중들을 놀라게 하여 1900∼1910년대의 영화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변화없는 트릭 기술의 반복과 개인적인 기술자 기질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부진하여 만년은 빈곤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 공상적 우주여행을 그린 《불가능 세계의 여행 Le Voyage
1855 - 러시아의 작가, 언론인 블라디미르 길랴롭스키(Gilyarovsky, Vladimir) 출생 길랴롭스키 [Gilyarovsky, Vladimir Alekseyevich, 1855.12.8~1935.10.1] 블라디미르 알렉세예비치 길랴롭스키(러시아어: Владимир Алексеевич Гиляровский, 1853년 12월 8일 볼고그라드 — 1935년 10월 1일,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작가이자 언론인이다.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작품 목록 * 《트루쇼브니예 사람들》 (Трущобные люди) (1887) * 《모스크바와 모스크바 사람들》 (Москва и москвичи) (1926) * 《나의 바람》 (Мои скитания) (1928) * 《극장의 사람들》 (Люди театра) (1941년 출판됨) * 《모스크바는 신문이다》 (Москва газетная) (1960년 출판됨)
/위키백과
1854 - 교황 비오 9세, 동정녀 마리아의 완전하고 순결한 개념에 대한 교리 <성모무원죄회태(聖母無原罪懷胎)>를 선언함 이른바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의해 1859년 교황령 로마냐, 움브리아 등을 잃고, 1861년의 국가통일 이후로는 교황이 보유하던 로마와 라치오도 1870년부터 이탈리아 왕국에 통합되어 세속권을 빼앗기고, 교황은 바티칸궁에 칩거(蟄居)하며 계속 이탈리아 왕국과의 타협을 거부하였다. 교리(敎理)에 있어서는 <성모무원죄회태(聖母無原罪懷胎)> <교황 무류성(無謬性)>을 선언하였다. /naver
비외른손 [Bjørnson, Bjørnstjerne Martinius, 1832.12.8~1910.4.26] 노르웨이의 극작가, 소설가, 시인. 1832년 12월 8일 노르웨이의 동부 산악지대인 크비크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시절을 롬스달렌이라는 농촌마을에서 보냈으며, 어린 시절의 추억이 어린 이 마을은 훗날 그가 발표한 농촌소설의 무대로 등장한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고 사회운동에도 관심이 커 중학교 때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퇴학 당하기도 했다. 대학을 다닐 무렵에는 헨리크 입센(Henrik Ibsen), 요나스 리(Jonas Lie) 등과 교류하며 연극개혁운동을 펴고, 신문을 창간해서 국민정신 고양에 힘쓰기도 했다. 1852년 왕립 프레데릭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후 노르웨이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국민적 자긍심을 자극하고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려는 교훈적 의도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1857년 중세 북유럽의 영웅담에서 취재한 역사 희곡 《전투와 전투 사이 Mellem Slagene》를 첫 작품으로 발표했으며, 이어서 유년시절의 시골생활에서 영감을 얻은 농민소설 《양지바른 언덕 Synnøve solbakken》을 발표해 노르웨이 신문학의 기수로 평가받았다. 또 계속해서 북유럽의 전설과 자신이 유년기를 보낸 시골생활을 소재로 삼아 소설 《아르네 Arne》(1859), 《행운아 En glad gut》(1860), 희곡 《절름발이 훌다 Halte-Hulda》(1858) 등을 완성했다. 그는 이 두 분야를 소재로 해 소설과 희곡을 번갈아 작품화했는데, 이러한 집필방식을 가리켜 '윤작체제'라고 불렀다. 스칸디나비아 연합운동과 청년민주당 창당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국민적 지도자가 되면서 작품이 급진적·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경향을 띠었다. 특히 1875년에는 문학 이외의 일에서 벗어나 작품에 전념하기 위해 망명생활을 택하고 희곡 《파산 En fallit》과 《편집자 Redaktøren》를 발표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밖에 후기 대표작으로 소설 《항구도시에 깃발은 펄럭인다》(1884)와 돈의 위력을 다룬 사회극《장갑》(1983), 2부작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Ⅰ Over Ævne Ⅰ》(1883),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Ⅱ Over Ævne Ⅱ》(1895) 등을 비롯한 많은 희곡들이 있다. 만년에는 사회주의자로서 드레퓌스사건의 규명을 비롯해 핀란드와 폴란드 등 피압박 민족의 자유를 위해 분투해 '인도(人道)의 전사'로 칭송되었다. 1903년 유럽문학에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점이 높이 평가되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10년 4월 26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하자, 노르웨이정부는 그의 유해를 본국으로 맞이해 국장(國葬)을 지냈다. 헨리크 입센, 요나스 리, 알렉산더 헬란과 함께 19세기 노르웨이문학의 4대 거장으로 평가되며 그의 시 《예, 우리는 이 땅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Ja, vi elsker dette landet》는 노르웨이의 국가(國歌)로 불려지고 있다. /naver
1831 - 백악관을 건축한 미국의 건축가 호번(Hoban, James) 사망 호번 [Hoban, James, 1762(1758)~1831.12.8] 미국의 건축가. 워싱턴 D. C.에 있는 백악관을 설계하고 지었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조지 양식으로 훈련받았으며 건축가로서 활동한 기간 내내 조지 양식을 구사했다. 미국 독립전쟁 후 미국으로 이주해 필라델피아를 거쳐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컬럼비아에 있는 구(舊)의회의사당(1791~1865년 화재로 소실됨)을 설계했는데, 정면과 포티코는 미국에서 널리 발표되었던 랑팡의 뉴욕 시 연방청사(1789)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조지 워싱턴의 제안으로 호번은 1792년 연방 수도로 가서 대통령 관저 계획안을 제출했다. 그는 전국적인 설계 경기에서 당선되어 500달러와 컬럼비아 특별구의 건축부지를 상으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백악관의 건축을 위촉받았다. 1793년 초석이 놓이고 1801년까지 공사가 계속되었다. 그는 남북전쟁으로 백악관이 파괴된 뒤에 그 건물의 재건축을 감독했다. 백악관의 디자인은 대체로 더블린의 렌스터 하우스와 제임스 기브스의 〈건축서 Book of Architecture〉(1728, 런던)에 나오는 도판 51의 주정면에서 영향을 받았다. 1793~1802년에는 윌리엄 손턴이 설계한 의사당 건축공사의 책임 감독관 중 한 사람으로 일했다. 또한 워싱턴 D. C.의 그랜드 호텔(1793~95), 리틀 호텔(1795),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방정부로부터 위촉받은 국무부 겸 육군부 청사(1818)를 설계했다. /브리태니커
- 'Joseph Joachim', 'King Frederick the Great, The Flute Concert'
멘첼 [Menzel, Adolf (Friedrich Erdmann) von, 1815.12.8~1905.2.9] 독일의 화가. 브레슬라우 출생. 베를린에서 활약하였다. 석판공(石版工)의 아들로 태어나 공방을 계속하면서 판화가 ·삽화가로서 출발하였다. 선천적으로 몸집이 작아서, 완고한 독신주의자였으며 비관론자였다. 실내,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침실, 옥외의 풍경 등 자기 주위의 것들을 소재로 삼아서 그렸고, 광선의 미묘한 뉘앙스를 포착한 풍경화(風景畵)는 인상파(印象派)의 선구가 되었다. 3회에 걸쳐 파리에 잠깐씩 머물렀으며, 그 동안 G.쿠르베를 만났다. 《짐나즈극장》 《취를리공원의 일요일》 등은 그 동안의 작품들이다. 볼테르를 비롯한 실존인물의 초상화로 메운 《상 수시궁전에서의 플루트 연주회》(1850)는 8점 시리즈 중의 하나인 그의 대표작이다. 판화로는 쿠글러의 《프리드리히 대왕전(傳)》의 목판 삽화 400점(1840)이 유명하다. /naver
1765 - 미국의 조면기(繰綿機) 발명가 엘리 휘트니(Whitney, Eli) 출생 휘트니 [Whitney, Eli, 1765.12.8~1825.1.8] 미국의 기계발명가. 매사추세츠주(州) 웨스트버러 출생. 소년시절부터 기계에 대한 재능을 발휘, 남북전쟁 때는 침대 제작공장을 운영했다. 1792년 예일대학교 졸업 후, 남부를 여행하였을 때 목화씨 제거의 필요성을 느끼고, 1793년 간단한 구조의 조면기(繰綿機)를 발명하여 1794년 특허를 얻었다. 이 기계는 2hp의 수력시설을 이용하면 하루에 5,000lb의 솜을 처리할 수 있어 1,000~1,500명분의 작업량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발명에서는 소송에 말려들어서 이익을 올리지 못하고, 1798년 소총 생산으로 전환, 정부에 1만 개의 머스컷총(銃)의 납품을 계약, 호환식(互換式) 생산법을 채택함으로써 대량생산의 기초를 마련했다. 또한 이를 위하여 1818년 최초로 프레이즈반(milling machine)을 만들었다. /네이버
잉겐호우스 [Ingenhousz, Jan, 1730.12.8~1799.9.7] 네덜란드 태생 영국의 의사·과학자. 녹색식물이 햇빛을 받아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방출하는 광합성과정을 발견했다. 1765~68년 의사로 런던에 있는 동안 에드워드 제너의 천연두 백신법에 대한 초기 지지자의 한 사람이었고, 1772~79년 빈에서 궁정의(宮廷醫)로 있는 동안에는 오스트리아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족을 예방접종했다(→ 인두접종). 1779년 런던으로 돌아와 식물생리학에 있어 화학물질의 영향에 대한 기발한 연구 결과를 〈식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 햇빛에서 대기를 정화하는 힘 및 밤과 그늘에서 대기를 손상시키는 힘〉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영국의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이미 식물이 동물의 생활에 필요하며, 동물들이 파괴하는 것을 대기 중으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었다. 잉겐호우스는 ① 빛은 이 복구작용인 광합성에 필요하다, ② 광합성은 식물의 녹색부위에서만 일어난다, ③ 식물체의 모든 살아 있는 부위는 공기를 손상시키나(이를 호흡이라고 함) 녹색식물에 의해 공기에 복귀되는 양은 그 손상되는 양을 훨씬 초과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러 방면에 과학적 관심을 가졌던 잉겐호우스는 1766년에 많은 양의 정전기를 발생시키는 증진장치를 발명했고, 1789년에는 금속막대의 열전도 정량측정법을 최초로 확립했다. /브리태니커
크리스티나 [Christina (Kristina)][Christina, Alexandra, 1626.12.8~1689.4.19] 스웨덴의 여왕. 구스타브 2세의 외동딸로, 아버지가 죽자 6세(歲)로 왕위에 올랐다. 재상(宰相) 옥센셰르나의 섭정시대를 거쳐 1644년 친정(親政)에 들어가자 부왕의 정책을 답습하는 동시에 뻗어나가던 국내 귀족의 세력을 누르고 30년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여왕으로서의 공적은 수도 스톡홀름에 문화적인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한 점에 있으며, 자신이 높은 교양인이었던 그녀는 R.데카르트를 궁중으로 초청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나 예술가와 교신을 하여, 학예를 보호 ·장려하였고 알카디아 아카데미를 창설하였다. 후에 왕위를 사촌오빠인 카를 10세에게 양위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로마로 이주하였다. 사교계에서 활약하며 루이 14세를 비롯한 유럽의 군주들과도 교섭을 갖고, 만년에는 오로지 학문 ·예술에 몰두하였다. /naver
이황 [李滉, 1501~1570] [책갈피 속의 오늘]1570년 퇴계 이황 별세 율곡 이이와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성인으로 추앙받았던 퇴계 이황이 1570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단양군수로 재직할 당시 단양팔경을 지정해 사람들이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했으며, 다양한 산세 등을 기록해 어떻게 산을 오르면 좋은지에 대한 등산법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남녀간의 사랑은 비도 오고 바람이 부는 만물의 생성(‘퇴계언행록’)”이라는 ‘성리학적’으로 로맨틱한 발언도 남겼다.
1542 -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출생 메리 [Mary, 1542.12.8~1587.2.8] 스코틀랜드의 왕(재위 1542~1567). 제임스 5세의 딸이며, 생후 1주일 만에 아버지가 사망하여 즉위하였다. 1548년 6세 때 프랑스 황태자와 약혼하였으며, 그 후로는 프랑스궁정에서 구교도(舊敎徒)로 양육되어 1558년에 결혼하였다. 이듬해 남편(프랑수아 2세)이 왕위에 올랐으나 1년 후 병사하였기 때문에, 1561년에 모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신 ·구(新舊) 양교 귀족의 대립이 격심하였는데, 1565년 그녀가 구교도인 사촌동생 단리경(卿)과 결혼한 것이 신교파의 반감을 격화시켰다. 남편과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던 중 남편이 보스웰 백작에게 암살되고, 그녀가 보스웰과 재혼하자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녀는 아들 제임스 6세(영국왕 제임스 1세)에게 양위(讓位)하고, 로크리븐성(城)에 갇혔다. 이듬해 탈출에 성공하여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영국에 피신하여 엘리자베스 1세의 보호를 받으려 했지만 도리어 감금되었다. 그녀는 구교도로 헨리 7세의 증손녀뻘이었기 때문에, 에스파냐의 펠리프 2세와 영국의 구교 귀족들이 엘리자베스를 폐위하고 그녀를 옹립하려고 책동하여, 1586년 배빙턴의 음모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사건이 발각되었을 때 그녀가 음모자와 내통한 사실이 드러나, 19년 간의 유폐생활 끝에 참수형을 받았다. /naver [이 사람] 메리 스튜어트 순간의 정열과 평생의 영광을 맞바꾼 여왕이 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1542~1587)의 격정적인 사랑과 극적인 몰락은 위대한 작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독일의 문호 프리드리히 실러는 희곡 ‘마리아 슈트아르트’(메리 스튜어트의 독일식 발음)를 썼고,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 ‘스코틀랜드의 여왕’을 집필했다. sec&sid1=102&oid=112&aid=0000036604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