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정체는 무엇일까.
누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까.
신앙, 종교, 神學의 관계자들은 나름대로의 유일 또는 다수의 절대 능력자를 추앙하거나 소통한다고 확신한다.
곤충이나 미세 동식물 연구에 한평생을 바치는 전문가나 빅뱅으로 시작되어 광속보다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는 우주를 탐구하는 천체물리학자들은 한평생을 극미세 한
분야에 몰입하거나 지구의 時空間을 초월하는 무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지만 有無形의 세상 만물이 어떤 질서에 의하여 탄생하고 지속되고 있는가를 궁극적으로 규명하여 물리적 실체를 드러낸 전문가들은 아직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못 본 것을 있다고 믿거나, 알 수 없거나.
세상의 모든 물리적 실체로는 무기물, 동식물, 인간, 바람과 공기, 電磁氣波와 요즘 양자역학에서 實用 목표로 연구되고 있는 量子라는 물질 최소단위는 모두 이해하기 어려운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빛은 오래전부터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입자인가 파동 인가로 분분히 논의가 나뉘어 왔으나 이제는 이중 슬릿(double slit)이라는 어려운 실험을 통하여 입자이며 파동이라는 기이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맑은 오후 뒤뜰에 앉아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해 보자.
형이하학이라는 물리학(mechanics 또는 physics)과 형이상학이라는 철학은 진리 추구의 극정점에 이르러서는 한 곳으로 만나게 된다는 결론부터 내리고 따져 보려고 한다.
또한 세상의 모든 것은 어느 것이나 이중성 또는 다중성을 가진다는 모호하나 불가피한 결말에 도착한다는 나름대로의 주장도 위와 같이 반복한다.
미추, 선악, 우열, 동전의 양면에서부터 요지경이며 벗어날 수 없는 迷窮의 영적 세계에 대한 추구와 같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복잡, 미세한 길이 있는가 하면 단도직입적 단순, 소박한 결단으로도 도달할 수 있는 양면성이 있다.
말이 또 어려워지네.
쉽게 풀어 보자.
현대 철학의 태두인 Bertrand Russell이나 칸트의 순수, 실천이성비판과 같은 수십 권이나 수백 페이지의 어려운 저서를 남기며 세상의 존재의의와 유지에 관한 깊고 미세한 연구실적을 남긴 대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성직자와 작은 토굴을 파고들어 앉아 벽곡(날 곡식 씹기)과 座眠 만으로 생존의 궁극적 의미를 캐는 佛子들도 있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누가 생명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였는지 노력해 보지 않은 자가 개입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불가에서는 인간 생명의 윤회와 환생까지 주장한다고 하는데,
식물은 땅에서 무기물과 수분, 공기와 태양의 에너지를 섭취하여 인간과 동물에게 그 몸을 공급하며 동물과 인간의 육신 또한 땅으로 돌아가니 윤회의 기초적 논리를 파악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단순 용이하다는 뜻이며 비하하는 말은 아니다).
기독교의 절대자이며 세상 창조주이신 하느님 (또는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인류의 시조 아담을 창조하셨으며 세상 만물 가운데 사람을 소통과 지배의 가장 높은 자리에 두셨다고 나는 믿는다.
또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자의 분리된 영역에 묶어 두셨으나 畏敬 또는 불경스럽게도 요즘의 인간들은 한정되지 않은 수명 연장에 더하여 단백질 구조를 완벽히 규명한 생명공학의 개척과 新생명 창조를 예고함으로써 이제 인간들은 신의 울타리를 넘어 神殿의 문을 두드리려 하고 있다.
바벨탑을 건설하려던 인류는 아마도 반세기 이내에 어떤 꾸중을 듣게 될까, 하늘의 주민등록증을 받아 天地를 無時로 왕래하는 神人이 될까.
세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