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2/13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4 - 이상화 빙속 월드컵 4연속 금메달 이상화(서울시청)가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여자 500m 레이스에서 4회 연속 금메달 행진을 이어갔다. 장미(한국체대)는 39초27의 기록으로 20위에 올랐다. 장거리 스피드스케이팅의 간판스타 이승훈(대한항공)이 이끄는 남자 팀추월 대표팀도 사상 첫 금메달을 기록했다. 2005-2006시즌부터 월드컵에서 치러진 팀추월에서 한국이 금메달을 따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디지털뉴스팀 /경향신문2014-12-13 12:11:1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2131211171&code=980701
2011 - 한국의 기업인, 정치가 박태준(朴泰俊) 사망 박태준 [朴泰俊, 1927.10.24~2011.12.13] 오늘의 역사 (12월 13일)[2011년] '철강왕(王)' 박태준 별세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1981년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육사 후배이자 당시 민정당 총재였던 전두환 대통령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120713_0007
2007 - 윈스턴 처칠의 그림 9억여원에 팔려 9억여원에 팔린 처칠의 그림 고(故)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그린 유화 '마라케시'가 13일 런던의 소더비 경매장에서 팔렸다. 처칠경(卿)이 지난 1951년 고(故)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한 이 그림은 이날 46만8천500 파운드(미화 95만5천645달러, 한화 약 9억4천만원)에 낙찰됐다. (AP) /조인스 지구촌 2007.12.14 11:44 입력 http://pic.joins.com/article/photo/article.asp?Total_ID=2979975
- 'Monogram 1959'
2006 - '팝아트 선구' 라우셴버그 작품전 (2006.12.13~2007.1.7) '팝아트 선구' 라우셴버그 작품전 세계 2차 대전 이후 서양미술의 중심은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뉴욕으로 이동했다. 이후 뉴욕의 작가들은 유구한 서양미술사의 전통과 단절한 채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등 현대미술의 굵직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로버트 라우셴버그는 바로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등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와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으로 대표되는 팝아트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1950년대 중반 캔버스 위에 침대보와 삽 등 오브제를 콜라주해서 회화가 갖고 있는 한계인 평면성을 뛰어넘으려 한 ‘콤바인 회화(combine painting)’를 발표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작가는 다른 방식으로 대중매체의 이미지를 전사하기 시작했다. 산화처리한 알루미늄 판, 부식된 놋쇠·동·구리판, 거울 처리한 알루미늄 등 다양한 금속성 재료를 캔버스 삼아 그 위에 실크스크린으로 이미지를 뜬 뒤 에나멜, 아크릴, 식물성 안료 등으로 붓질을 가미했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라우셴버그 개인전에서는 7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라우셴버그의 주요 작품 22점을 만나볼 수 있다. 현재 대규모 회고전이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에서 열리고 있어서 이번 전시에는 콤바인 회화는 빠졌다. 대신 놋쇠, 동, 구리, 종이, 적층 플라스틱 등 다양한 소재의 화면 위에 변색 약품을 이용해 옮긴 회화 연작 ‘흰 서리’ ‘어번 버번’ ‘아나그램’ ‘단편소설’ ‘시나리오’ 등이 전시 중이다. 7일까지. (02)734-6111 〈윤민용기자〉/경향신문 2007-01-02 17:34:5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1021734511&code=960100
- 박수근 '춘일' (공중전화 카드) 2006 - 박수근 '노상',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 경신 박수근이 1962년에 그린 유화 '노상'(13X30cm)이 국내 미술품 경매의 근현대미술품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
2005 - '미주 한인의 날' 지정 결의안 미국 연방 하원 통과 매년 1월13일 ‘미주한인의 날’...연방하원 결의안 통과 2006년을 시작으로 매년 1월13일을 ‘미주한인의 날’(Korean American Day)로 기념하는 미 연방하원 결의안(H.Res.283)이 13일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신용일 기자> yishin@koreatimes.com /미주한국일보 2005-12-15 (목) 2004 - 한국, 세계 최초로 와이브로(휴대인터넷) 시제품 개발 성공 시연회 휴대인터넷(WiBro) 시제품 개발 시연회 (대전=연합뉴스) /조인스 뉴스 2004.12.13 21:51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24483
언제 어디서나 이동하면서 무선으로 초고속 인터넷망에 접속할 수 있는 휴대인터넷(와이브로.wibro=wireless broad band) 시제품이 국내 기술진에 의해 세계 최초로 개발됐다. 2006년 상용화될 예정으로, 그때부터는 주행 중인 차 안에서나 길거리 등에서 노트북이나 휴대전화기 등을 이용해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이현상.이희성 기자 /중앙일보 2004.12.13 18:49
삼성전자는 손톱 크기 만한 휴대폰용 초소형 플래시 메모리카드 "MMC(멀티미디어카드)마이크로"를 개발했다고 13일 밝혔다. /중앙일보 2004.12.13 18:49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kks782&folder=14&list_id=3867334
2003 -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 생포 오늘의 역사 (12월 13일)[2003년]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 생포 2003년 12월 13일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자신의 고향인 티크리트 인근 지하에 땅굴을 파고 숨어 있다가 미군에 체포됐다. 이는 같은 해 4월 후세인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종적을 감춘 뒤 약 8개월 만의 일이었다. 미군은 후세인이 공기정화 시설이 갖춰진 지하의 소규모 동굴 같은 은신처, 일명 ‘거미 굴’(Spider hole·저격병의 잠복호를 일컫는 군사용어)에 숨어 있었으며, 후세인은 체포 당시 얼굴 둘레에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상태였고다고 전했다. 이라크 미군정 당국이 다음날 14일 사담 후세인의 생포 사실을 공식 발표함에 따라, 1979년 7월 대통령이 된 이후 2003년 봄 이라크전쟁 때까지 24년간 이라크를 철권 통치해온 사담 후세인의 독재 정권이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사담 후세인은 1937년 4월 28일, 미군의 급습 체포 작전이 벌어진 이라크 북부 도시 티크리트에서 멀지 않은 아우자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 ‘사담’은 아랍어로 ‘맞서는 자’ ‘충돌하는 자’라는 뜻이다. 유복자로 태어난 사담 후세인은 매우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20세 때부터 범아랍 사회주의를 표방한 바트당에 몸담아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쿠데타와 요인 암살에 직접 가담했으며, 31세 때인 1968년 바트당의 무혈 쿠데타 성공으로 사실상 권력을 잡았다. 이후 석유 국유화(1973년)를 성공시키고, 보안군 책임자 등의 지위를 맡으면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대해 갔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40628_0001
1996 - 유엔 사무총장에 코피 아난 피선 오늘의 역사 (12월 13일)[1996년] 유엔 사무총장에 코피 아난 피선 제7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가나 출신 코피 아난 유엔 평화유지군담당 사무차장이 1996년 12월 13일 선출됐다. 유엔 안보리는 사무총장 선출을 위한 투표를 실시, 5개 상임이사국을 포함 15개 이사국의 만장일치로 아난 차장을 차기 총장후보로 총회에 추천키로 결정했다. 아난 총장은 24세에 유엔에 발을 들인 후 줄곧 유엔무대에서만 활약해왔다. 아프리카경제위원회, 세계보건기구, 유엔고등난민판무관실, 제네바 유엔사무소, 본부 국장 등을 역임한 뒤 사무차장보-차장을 거쳤다. 아난은 가나출신이지만 대학교육부터 미국에서 받아 사실상 미국적 사고와 행동을 한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매칼레스타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MIT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했다. 아난은 유엔내에서 오래전부터 업무능력과 인품을 고루 인정받아 왔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503_0001
- 남북정상회담 개최기념, 2000년
1991 -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역사속 오늘[1991년 12월 13일] '남북한 화해·불가침 합의서' 채택 1990년 9월부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고위급 회담을 개최해온 남한과 북한! /YTN 2012-12-13 [오늘<1288>(12월13일)] 남북기본합의서 서문과 4장 25조로 이뤄진 남북기본합의서는 1972년 7월4일의 남북공동성명 얼마 뒤 서울과 평양의 체제가 극도로 경직화하면서 오래도록 얼어붙었던 남북 관계에 새로운 물꼬를 튼 역사적 문건이다. 합의서는 7ㆍ4공동성명보다 한결 구체적인 언어로 상호체제 인정을 통한 남북 화해, 대립되는 의견ㆍ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무력 불사용, 교류와 협력을 통한 민족 전체의 복리 향상 등을 규정했다. 남북한은 이 기본합의서 채택으로 민족 공동의 발전과 점진적ㆍ단계적 통일을 이룰 실천의 큰 틀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공안 정국과 부패 이미지로 얼룩진 탓에 제 나름대로 이룩한 과도 정부적 긍정성이 흔히 간과되는 노태우 정권은 이 합의서 채택으로 민족 화해에 작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도 할 만하다. 남북기본합의서는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와 이듬해 김일성 주석 조문 파동에 이어 남북 관계가 다시 얼어붙으면서 현실 규정력을 잃었지만,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과 6ㆍ15공동선언으로 남북 사이에 훈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조명된 바 있다. 남북기본합의서의 산파 격인 남북고위급회담은 1988년 11월 16일 북한 총리 연형묵의 제의를 계기로 삼아 남북 양측이 정례화한 총리급 정치ㆍ군사회담이다. 1989년 2월의 첫 예비회담과 1990년 9월 서울에서의 제1차 회담 이래 1992년 10월까지 모두 8차 회담이 이뤄졌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4/12/12 18:41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 life/200412/h2004121218400025340.htm&ver=v002
한·소 관계가 본격적인 정치관계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89년 12월 영사처(領事處)를 설치하기로 합의한 때부터이다. 이후 1990년 6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통령 노태우와 서기장 고르바초프 간의 한·소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그후 9월 국제연합 본부에서 가진 양국간 외무회담을 통해 대사급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이어 10월과 12월에 양국의 초대 대사가 각각 부임하였다. 그해 12월에는 대통령 노태우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무역협정·과학기술협정·이중과세방지협정·투자보장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1992년 9월 러시아 대통령 옐친이 한국을 공식방문하였고, 1994년 6월 대통령 김영삼이 러시아를 공식방문하였다. /naver
- Lech Walesa, 1983 오늘의 역사 (12월 13일)[1981년] 폴란드 전역에 계엄령 선포 1980년 7월 1일 고기값 인상을 계기로 그다니스크에서 발생한 파업은 8월 전국으로 확대, 레흐 바웬사가 지도하는 솔리다니스치라는 자주관리독립노조운동이 전개됐다. 8월 31일 정부대표자와 노동자대표 회담에서 자주관리노조결성의 허용과 파업권이 보장되는 등 소련권에선 전례없는 민주화조치가 취해졌으며 독립노조산하회원은 1,000만명에 달하는 큰 세력이 됐다. 자유노조운동이 확대되자 사회주의 이탈이라고 비난해온 소련은 이를 분쇄하기 위해 폴란드에 개입, 정부당국에 강압책을 쓰도록 압력을 가하자 폴란드정부는 이에 굴복하여 1981년 12월 13일 전국에 계엄을 선포했다. 야루젤스키 당 제1서기는 그와 동시에 독립노조의 활동을 정지시키고 바웬사 등 노조지도자, 지식인, 반체제인사 1,000여명을 체포했으며 노조측은 이에 항거했으나 독립노조운동은 1년여만에 정지됐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list.jsp?hm=1213&cmd=0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12월 13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해제했다. 13일 오후 중앙청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전국에 선포된 비상계엄을 계엄법 2조 규정에 따라 13일 24시를 기해 해제키로 의결했다. 또 계엄군법회의에 계류 중인 재판사건은 계엄법 23조의 규정에 의해 1973년 1월 13일까지 군법회의 관할로 한다는 내용의 대통령령도 의결했다.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은 계엄해제를 발표하면서 “지난 10.17 대통령특별선언에 의한 비상조치로 정치활동이 중지된것이기 때문에 비상계엄해제와는 관계없이 정치활동은 당분간 계속 중지된다”고 발표했다.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1967 - 그리스에서 군부가 입헌 왕정을 전복시키고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가 망명하다. 콘스탄티노스 2세 [Constantinos Ⅱ, 1940.6.2~ ] (영)Constantine Ⅱ. 그리스의 국왕(1964~74 재위). 제2차 세계대전 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망명생활을 한 뒤, 1946년 그리스로 돌아왔다. 1947년 아버지가 그리스 왕위에 올라 파울로스 1세가 되자 콘스탄티노스는 황태자가 되었고, 1964년 3월 6일 아버지가 죽자 왕위를 물려받았다. 좌익이 군대에 침투하는 것을 두려워한 그는 1965년 7월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를 해임하고 임시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1967년 4월 21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그해 5월에 실시할 계획이었던 선거마저 무산되었다. 1967년 12월 13일 그리스 북부지방에서 역(逆)쿠데타를 시도했지만 동조자를 거의 얻지 못했고, 그는 가족과 함께 로마로 탈출했다. 군사정권은 왕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고, 도망친 콘스탄티노스를 대신할 섭정관을 임명하는 한편, 왕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다고 허락했다. 1973년 6월 1일 군사정권은 공화국을 선포하고 군주제도를 폐지했다. 이 조치는 1973년 7월 29일에 실시한 국민투표로 확정되었다. 1974년 11월 선거에서 민간정부가 들어선 뒤, 12월 8일 군주제도에 대한 국민투표가 다시 한번 실시되었는데, 이때도 그리스 국민들은 군주제도를 거부했다. 1973년 투표결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던 콘스탄티노스도 1974년의 선거결과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브리태니커
모제스 [Grandma Moses, 1860.9.7~1961.12.13] 본명은 Anna Mary Robertson Moses. 미국의 민속화가. 19세기말과 20세기초의 미국 시골생활을 천진난만하게 기록한 작품으로 국제적으로 인기를 누렸다. 그녀는 12세 때 부모의 농장을 떠나, 1887년에 토머스 모제스와 결혼할 때까지 농가의 가정부로 일했다. 모제스 부부는 처음에는 버지니아 주 스톤턴 근처에 있는 셰넌도어 계곡에서 농사를 짓다가, 1905년에 그녀의 고향과 가까운 뉴욕 주 이글브리지에 있는 농장으로 이사했다. 토머스는 1927년에 죽었고, 그녀는 막내아들의 도움을 얻어 계속 농사를 짓다가 1936년에야 농사일을 그만두고 딸의 집으로 갔다. 어린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고 딸기즙이나 포도즙으로 색깔을 칠하곤 했던 모제스는 남편이 죽은 뒤 소모사로 수를 놓은 그림을 창조했다. 관절염 때문에 바늘을 움직이기가 어려워지자 그림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38년경 제작된 그랜드마 모제스의 첫 작품은 커리어아이브스그림엽서회사에서 인쇄한 그림엽서를 베낀 것이었다. 그랜드마 모제스는 곧 뉴욕 주와 버지니아 주에서 겪은 농장생활,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운 옛날'의 추억을 그리는 일에 몰두하여 〈추수감사절용 칠면조 잡기 Catching the Thanksgiving Turkey〉·〈크리스마스 트리에 쓸 나무를 구하러 Out for the Christmas Trees〉·〈강 건너 할머니 댁으로 Over the River to Grandma's House〉·〈단풍나무 농장에서 설탕 만들기 Sugaring-Off in the Maple Orchard〉 등 미국의 지나간 생활을 그리워하는 회고적인 그림들을 그렸다. 그녀가 처음에 그린 그림들은 후식폴스의 잡화점에서 팔렸다. 그러나 1939년에 이르자 미국과 유럽(그랜드마 모제스는 유럽에서 15차례의 개인전을 가졌음) 전역에서 그녀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1952년에 그랜드마 모제스는 그녀의 그림처럼 활기찬 문체로 〈내 삶의 역사 My Life's History〉라는 자서전을 썼다. /브리태니커
그랜마 모제스 미국 어느 촌구석, 가난한 집의 평범한 아낙네로 살던 안나 모제스는 http://www.yaohouse.net/house/bbs/board.php?bo_table=essay&wr_id=737
에가스 모니스 [Egas Moniz, Antonio, 1874.11.29~1955.12.13] [이 주일의 역사] 에가스 모니스 사망 13일 포르투갈의 신경과 의사 에가스 모니스(Egas Moniz)가 작고했다. 향년 81세. 모니스는 신경학자이면서도 정치가로 활발한 활동을 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1903년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 뒤 주스페인 공사, 외무장관을 거쳐 1918년에는 파리평화회의의 포르투갈 수석대표를 역임했다. 정신외과술은 전 세계로 급속히 보급되어 1950년대까지 미국에서만 4만여 명이 수술을 받았다. 특히 월터 프리먼은 모니스의 방법을 개선(?)해 얼음송곳처럼 생긴 도구를 망치로 쳐서 뇌 속에 밀어 넣는 방식으로 2천400여 명의 환자를 집도했다. 정광용 기자 kyjeong@ /부산일보 2008. 12.08. 09:40 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8/1208/040020081208.1030094031.html
- 'Murnau with Rainbow'
- 'Abstract' - 'Untitled Abstract'
- 'Study for Composition II' 칸딘스키 [Kandinsky, Wassily, 1866.12.16~1944.12.13] [오늘속으로(12월13일)] 칸딘스키 1944년 12월13일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가 작고했다.향년 78세. 칸딘스키는 현대 추상미술의 창시자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4&oid=038&aid=0000115517 1939 - 독일 전함 그라프 슈페호 침몰 (17일 자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을 대표한 독일의 전함 그라프-슈페(Graf Spee)호! /YTN 2012-12-13 http://www.ytn.co.kr/_pn/0422_201012122132536863
파리의 미국인[An American in Paris] 미국의 작곡가 G.거슈윈의 관현악곡. 1928년 그는 라벨과 스트라빈스키에게 사사하려고 파리를 방문하여 체류 중 이 곡의 대부분을 작곡, 그 해 12월 뉴욕필하모니의 연주회에서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그 이전의 《랩소디 인 블루》 《피아노협주곡 F장조》와 함께 재즈의 독특한 감각과 선율적 특색을 효과적으로 도입하여 미국인이 본 파리의 인상을 랩소디풍으로 구성한 뛰어난 작품이다. /네이버
- 'Darkness and Cracks' - 'Abstract Painting' 타피에스 [Tapies, Antoni, 1923.12.13~ ] 1923년 바르셀로나에서 출생하였다. 15세부터 예술과 동양 사상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1946년부터 회화에 전념하며 에스파냐내란으로 인한 상처와 억압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1948년에 《Dau al Set》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잡지를 발행하였다.
포르스테르 [Vorster, John, 1915.12.13~1983.9.10] 본명은 Balthazar Johannes Vorster.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가 국가주의적인 우파 정치가로서 1966~7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총리를 지냈다. 1978년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듬해 정치적 스캔들로 인해 사임했다. 포르스테르는 양을 목축하는 부유한 보어인 가정에서 13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는 스텔렌보스대학교에 다니면서 국가주의적인 학생지도자로서 주목을 받았다. 1938년 대학교를 나와 케이프에서 재판장 기록원으로 일했고, 이듬해에는 포트엘리자베스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반영(反英) 조직인 오세와 브랜드웩(Ossewa Brandwag)의 창설을 도왔으며 이 조직 내 과격파의 '대장'이 되었다.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과 독일에 대한 존경을 표하다가 1942년에 전쟁수행을 방해한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14개월 후 석방되어 변호사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그는 정계진출을 시도했으나 처음에 국민당은 그의 후보공천을 거부했다. 1948년의 의원선거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낙선했다. 그러나 1953년 포르스테르는 국민당에 의해 트란스발 나이젤 선거구의 후보로 공천되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국민당 우파의 주도세력으로서 그는 H. F. 페르부르트의 정권장악을 도왔고, 페르부르트는 1958년에 총리가 되는 데 성공했다. 포르스테르는 조력의 대가로 같은 해 10월 교육·예술·과학·사회복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곧 강경한 인종차별정책(apartheid)을 실시하여 명성을 얻었다. 1960년 3월 샤프빌에서 심각한 인종분쟁이 발생하자 이에 대한 강경대응책의 필요성을 느낀 페르부르트는 포르스테르를 사법·경찰·교도 장관으로 임명했다. 포르스테르는 강화된 법적 권한을 사용하여 정부의 인종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억압·탄압했다. 1966년 9월 페르부르트가 암살된 지 1주일 후 국민당 간부회의에서 포르스테르는 그의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후임권을 둘러싸고 많은 경쟁자들이 있었으나 그들 중 누구도 당내의 강력한 우파 연합세력과 네덜란드 개신교회, 그리고 보어인 비밀단체인 브루더본드(Broederbond)의 지원을 받는 포르스테르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총리로서 그는 인종차별정책을 지지할 것을 선서했지만, 실제로는 전임자들보다 진보적인 정책을 실시하여 분리정책의 상징과 심한 인종차별정책을 어느 정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1974년 포르투갈 식민제국이 붕괴한 이후 포르스테르는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권력의 변화를 재빨리 감지했다. 그는 계속되고 있는 로디지아와 나미비아(남서아프리카)에서의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흑인 지도자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앙골라 해방인민운동(Popular Movement for the Liberation of Angola/MPLA)을 지원하는 소련과 쿠바를 저지하기 위해 앙골라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군대를 파견했으나 실패함으로써 자신이 점유한 유리한 입지를 상실했다. 그는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와 함께 로디지아의 이언 스미스에게 흑인 지도자들과 권력을 공유할 것을 설득했다. 하지만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과 권력을 공유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1978년 9월 포르스테르는 건강을 이유로 총리직을 사임했고, 10월에는 의례적 직위인 대통령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몇 개월 동안 가열되어오던 밀더게이트 스캔들, 즉 엄청난 정부자금의 횡령과 의회제도의 악용에 관련된 사건이 마침내 폭로되었다. 스캔들의 전모가 속속 밝혀지자 국민당은 동요했다. 1979년 6월 4일 조사단에 의해 포르스테르가 공금남용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 남용에 대한 은폐기도를 도왔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브리태니커
1911 - 노르웨이의 경제학자 호벨모(Haavelmo, Trygve) 출생 호벨모 [Haavelmo, Trygve Magnus, 1911.12.13~1999.7.28] 노르웨이의 경제학자. 경기예측 분야에서 선구적 업적을 남겼으며, 1989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호벨모는 제2차 세계대전중 노르웨이를 떠나 1941년 하버드대학교에서 논문 〈계량경제학의 확률적 접근 The Probability Approach in Econometrics〉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미 오슬로대학교에서 2개의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논문의 혁신적인 주제가 노벨 위원회의 인정을 받아 1944년 미국의 정기간행물인 〈이코노메트리카 Econometrica〉에 게재되었다. 호벨모는 1947년 노르웨이로 돌아가기 전까지 시카고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1950년 후반에 객원교수로 시카고대학교를 다시 방문했다. 1979년 오슬로대학교의 정교수직에서 은퇴하고 명예교수가 되었다. 호벨모의 통계기법은 경제의 한 측면에서의 변화가 다른 측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예측하는 계량경제학 모형을 발전시켰다. 즉 그는 통계적 확률이론이 경제학 모델들에 통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계량경제학 분야에 대한 호벨모의 업적으로 국민경제의 경로에 대한 예측이 쉬워졌으며, 보다 정확한 경제정책 입안이 가능해졌다. /브리태니커
1903 - 미국의 인권운동가 엘라 베이커(Baker, Ella) 출생 베이커 [Baker, Ella Josephine, 1903.12.13~1986.12.13] Ella Baker Ella Josephine Baker (December 13, 1903 – December 13, 1986) was an African-American civil rights and human rights activist beginning in the 1930s. She was a behind-the-scenes activist, whose career spanned over five decades. She worked alongside some of the most famous civil rights leaders of the 20th century, including W. E. B. Du Bois, Thurgood Marshall, A. Philip Randolph, and Martin Luther King Jr. She also mentored such then-young civil rights stalwarts as Diane Nash, Stokely Carmichael, Rosa Parks and Bob Moses. Early life and career of Ella Baker http://en.wikipedia.org/wiki/Ella_Baker
- Lenin and 'ISKRA' 1900 - 러시아 레닌 등, 주간지 <이스크라(불꽃)> 제1호 발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기관지 '이스크라 Iskra'는 '불꽃'이라는 뜻으로, 데카브리스트(12월당)를 찬양한 A.S. 푸슈킨의 시에 대해 A.I. 오도예프스키가 응답한 시의 한 구절 <타오르는 불길도 한 점의 불꽃에서부터>에서 따 온 것이다. 최초의 편집위원으로 V.I. 레닌·L. 마르토프·A.N. 포트레소프 외에 <노동해방단>의 G.V. 플레하노프·V.I. 자술리치 등이 참여하였다. 창간호는 1900년 12월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2호부터는 뮌헨·런던·제네바 등지로 옮겨다니며 발행하였으며, 평균 발행부수는 8000부였다. 레닌은 창간호에 게재한 논문에서 러시아에서의 마르크스주의정당 창립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전국적인 신문의 사상적·조직적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 이르러서는 볼셰비키적인 당의 강령과 규약을 준비하는 등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03년 11월 멘셰비키계(系)로 편집권이 넘어가 52호부터 1905년 10월의 112호까지 발행되고 중단되었다. /Yahoo
1887 -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영웅 앨빈 C. 요크(York, Alvin C.) 출생 요크 [York, Alvin Cullum, 1887.12.13~1964.9.2] [역사 속의 인물] 용감무쌍한 병사, 앨빈 C. 요크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1918년 10월, 미군은 프랑스 동부의 뫼즈아르곤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독일군 기관총 진지로부터 완강한 저항을 받던 미군은 앨빈 C. 요크 상병 등 17명의 분견대를 보내 파괴 작전에 나섰다. 분견대는 대원 절반을 잃고서도 독일 병사들을 포로로 잡으며 방어선을 돌파했지만 격렬한 소총과 기관총 세례를 받아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때 지휘자로 나선 요크 상병은 동료들에게 포로들을 감시하도록 하고 혼자서 공격을 감행했다. 그가 접근하며 백발백중의 속사로 적 25명을 사살하자 겁에 질린 나머지 독일군들은 항복했다. 그는 미군 진지로 돌아오는 도중 더 많은 독일병을 잡아 포로의 수가 132명에 달했다. 요크의 대담무쌍한 용기는 독일의 힌덴부르크 라인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고 독일은 결국 한 달 뒤 항복했다. 1887년 오늘 태어난 요크는 애초에 종교적인 이유로 징집을 꺼렸으나 양심적 병역거부자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전선에 나서게 됐다. 원치 않는 군인이 되었지만 빛나는 활약을 펼쳐 상사로 승진했으며 수많은 훈장을 받았다. 그의 무공담은 1941년에 '요크 상사'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다. 전쟁 후 테네시주 정부가 준 고향의 농장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1964년에 생을 마감했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2년 12월 13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5640&yy=2012
브류소프 [Bryusov, Valery Yakovlevich, 1873.12.13~1924.10.9] 모스크바 출생. 프랑스 상징파에 영향을 받아 1893년 시문집 《러시아 상징파》를 출판하여 러시아 상징주의의 시조가 되었다. 1904년 러시아 상징파 최대의 잡지 《천평칭(天平秤) Vesy》을 창간하여 이후 상징파가 쇠퇴하기까지 그 중심에 있으면서 벨리, 블로크를 키워냈으며, 나아가서는 미래파(미래주의) 를 육성하였다. 대표적 시집으로는 《도시와 세계》(1903) 《화관(花冠)》(1906) 등이 있다. 소설 작품으로는 두 편의 장편 역사소설 《불꽃의 천사》(1907∼1908) 《승리의 제단》(1911∼1912)과 단편집 《지축(地軸)》(1911) 등이 있다. 그 밖에 평론과 희곡 작품도 다수 남아 있다. /naver
- 'Big Raven' - 'Forest, British Columbia' 1871 - 캐나다의 화가, 문필가 카(Carr, Emily) 출생 카 [Carr, Emily, 1871.12.13~1945.3.2] 캐나다의 화가·문필가. 서해안의 인디언과 풍경을 다룬 작품으로 유명하다. 카는 브리티시컬럼비아의 밴쿠버에서 미술을 가르치면서 종종 인디언 마을로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작품으로 경제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작업을 중단해야 했다. 건강이 나빠지면서 여행을 할 수 없게 되자 저술로 방향을 바꾸어 풍자적인 인물 연구로 활기에 넘치는 6권의 자서전적인 책을 저술했다. 인디언을 다룬 〈Klee Wyck〉(1941)과 하숙집 주인과 개 사육사로서 겪은 빅토리아에서의 경험을 담은 〈모든 것을 갖춘 집 The House of All Sorts〉(1944), 자서전인 〈커지는 고통 Growing Pains〉(1946), 영국 요양소에서의 생활을 그린 〈휴식 : 스케치북 Pause : A Sketch Book〉(1953) 등이 바로 그것이다. /브리태니커
- Norway, 200 Kroner (Banknote)
1867 - 노르웨이의 물리학자 비르켈란(Birkeland, Kristian) 출생 비르켈란 [Birkeland, Kristian Olaf, 1867.12.13~1917.6.15] 크리스티안 비르켈란(Kristian Birkeland)은 1867년 12월 13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태어났다. 노르웨이 우주선 연구소 http://www.norwayhus.com/kultur/kultur_1.asp?flo=%B9%AE%C8%AD
- 고종황제 어극기념 우표 1863 - 고종 즉위 [책갈피 속의 오늘]1863년 고종 즉위 1863년 조선왕조 26대왕 고종(高宗)이 즉위한 날이다.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아버지 흥선군과 익종비(翼宗妃) 조대비(趙大妃)와의 묵계에 따라 겨우 열두 살에 왕이 되었다. 물리적 연령으로 따지자면, 요즘 초등학교 5학년의 나이로 국사를 책임지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 'Portrait of Otto von Bismarck', by Lehnbach
1836 - 독일 화가 렌바흐(Lehnbach, Franz von) 출생 렌바흐 [Lehnbach, Franz von, 1836.12.13~1904.5.6] 슈로벤하우젠 출생. 1857년까지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하였다. 후에 뮌헨의 K.T.필로티에게 잠시 사사한 뒤 로마로 가서 A.뵈클린 및 H.마레 등과 친교를 맺었다. 로마 체류 중에는 후원자를 위해 많은 작품을 모사하였는데 이 덕분에 그는 많은 거장(巨匠)들의 기법을 익히게 되었다. 1868년 뮌헨으로 돌아와 O.E.L.비스마르크를 알게 되고, 그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당시의 황제 빌헬름 1세와 H.몰트케 등 초상화도 그렸다. 사람의 용모묘사에 예리한 관찰력을 보였지만, 깊은 심리묘사에는 미흡하다는 평을 받았다. /naver
지멘스 [Siemens, (Ernst) Werner von, 1816.12.13~1892.12.6] 프로이센 렌테 출신. 그의 집안은 발명가 ·전기기술자 ·공업가 등으로 유명하다. 하노버와 렌테의 귀족소유지 소작인 아들로 태어났으나, 포병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자연과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1838∼1848년 조병창에 근무하던 중에 병기의 개량에 두각을 나타냈다. 지침전신기(指針電信機)의 개량과 구타페르카(gutta-percha)를 감은 지하 케이블의 발명으로 자신을 얻어, 전신사업의 장래성을 예상하였다. 1847년 기계공 J.G.할스케와 함께 전신기 제작과 부설을 하는 지멘스-할스케 회사를 베를린에 창설하였다. 러시아에서 대규모 전신망을 창설하였고, 영국에서 동생 빌헬름과(영국에 귀화 윌리엄으로 개명) 협력하여 해저 케이블 부설에 성공하는 등, 그의 업적은 유럽 전기 제작업계에서 그의 회사 지위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1857년 그는 발전기의 실용화도 꾀하여 전기자(電機子)를 개량하였고, 1867년 자동발전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이 원리는 발전기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서, 그 선취권에 관해서는 영국 회사 등과의 사이에 문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지멘스의 발전기 및 그것과는 가역적인 전동기를 급속히 보급시켰다. 1866년 프로이센 하원의원이 되어 독일 공업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실현시켰다. 또한 특허법의 공포, 물리공학, 국립연구소의 창설, 공과대학 내의 전기공학강좌의 독립 등에 힘썼다. 그의 《회상록 Lebenserinnerungen》(1892)은 전기기술 성립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naver
하우 [Howe, Joseph, 1804.12.13~1873.6.1] 캐나다의 정치가, 신문발행인. 노바스코샤 총리(1860~63)를 지내면서 노바스코샤에 책임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으며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연방 성립에 반대했다. 1827년에 하우는 비정치적인 주간잡지 〈어캐이디언 Acadian〉을 창간했다. 이듬해 그는 〈노바 스코션 Nova Scotian〉을 인수했는데, 이 신문은 뒤에 〈모닝 크로니클 Morning Chronicle〉에 통합되어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유력지 가운데 하나로 부상했다. 1836년 하우는 노바스코샤 의회에 핼리팩스 대표로 선출되었고. 1840년부터 집행위원회에 참여했는데, 1943년에 사임했다. 그는 자신의 신문을 통해 노바스코샤에 내각책임제를 수립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며, 총독대리인 포클런드 경을 비판했다. 1848년 포클런드를 사임시키는 데 큰 몫을 했으며, 그해에 마침내 내각책임제를 승인받았다. 1854년에 하우는 노바스코샤 철도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863년 노바스코샤 정치에서 물러나 영국 어로장관(1863~66)의 직책을 맡았다. 노바스코샤에서 연방 반대세력을 지도하고 1867년 영국에 가서는 캐나다 자치령의 법적 근거인 영국령 북미법을 폐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기정사실을 받아들여 핸츠 대표로 캐나다 의회에 진출했다. 그는 존 맥도널드 경의 내각에 참가하여 국회의장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1873년 5월에 그는 노바스코샤 주의 총독대리로 임명되었다. /브리태니커
하이네 [Heine, Heinrich, 1797.12.13~1856.2.17] [오늘속으로(12월13일)] 하이네 1797년 12월13일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났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10&oid=038&aid=0000039504
"모든 것이 참을 수 없이 음울하고,
- 하인리히 하이네, <나의 마음 우울해지면>
1784 - 영국의 시인, 비평가 새뮤얼 존슨(Johnson, Samuel) 사망 존슨 [Johnson, Samuel, 1709.9.18~1784.12.13] [역사속의 오늘] 영국 문인 새뮤얼 존슨 사망 ‘지난 1천년간 가장 위대한 문인’. 1995년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지는 영국의 문인 사뮤엘 존슨을 이렇게 평가했다. 시인이자 수필가, 전기작가, 사전편집자, 그리고 최고의 영국 문학 비평가로 활약한 사뮤엘 존슨이 1784년 12월 13일 숨졌다. 존슨이 1747년 만들기 시작해 1755년에야 완성된 ‘사뮤엘 존슨 영어사전(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은 존슨 혼자 힘으로 완성한 역작이다. 이전에도 사전은 많았지만 ‘개’에 대해 ‘잘 알려진 동물’이라고 설명하는 식이었다. 존슨의 사전은 제대로 뜻풀이를 하고 실생활에 쓰이는 문장 10만여 개를 예로 들어놨다. ‘영국에도 제대로 된 사전을 하나 만들어보자.’는 요청에 의해 존슨이 불과 38세 때 시작한 일이다. 선수금 1천575파운드를 받고 3년을 약정해 달려든 작업이 길어지면서 존슨은 빚더미에 앉게 됐다. 작업 와중에 병행한 산문지(산책자, The Rambler) 독자의 지원이 아니었으면 끝나지 못할 대작이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6년 12월 12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5460&yy=2006
되베라이너 [Döbereiner, Johann Wolfgang, 1780.12.13~1849.3.24] 예나 근처의 호프 출생. 14세 때부터 약국의 도제(徒弟)로 일하면서 화학 논문을 발표하였다. 몇 가지 사업에 실패하였으나 그의 연구가 인정되어 예나대학 화학 조교수로 추천되었다. 리비히보다 일찍 분석화학의 실험교육을 실행하여, 1819년에는 정교수까지 승진하였다. 1829년 3조원소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화학원소의 계통적 분류를 밝혀, 주기율 발견의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가장 유명한 발견은 공기 중에서 백금해면(白金海綿)에 수소를 불어 대면 발화하는 현상으로서, 이것을 응용한 것이 되베라이너등(燈)이다. 이 밖에도 수많은 촉매작용의 연구를 하였으며, 또한 T.그레이엄의 기체확산 연구의 출발점이 된 실험 ·연구 등을 하였다. /naver
리빙스턴 [Livingston, Robert, 1654.12.13~1728.10.1] 미국 초기의 지주·정치가·상인. 뉴욕 주에서 손꼽는 집안인 리빙스턴가(家)를 세웠고 가문의 기틀을 이루었다. 1663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으로 이주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673년 젊은 나이에 혼자 뉴잉글랜드로 이주하여 이듬해인 1674년 뉴욕 식민지의 개척촌인 올버니에 자리잡았다. 영어와 네덜란드어에 모두 능통한 그는 두 나라 사람들 사이를 중재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되었으므로 곧 마을 서기로, 이어서 뉴욕 식민지의 인디언 문제행정위원회 서기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매우 조건이 좋은 결혼을 했으며 뉴욕 총독들에게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허드슨 강 유역의 광대한 인디언 땅을 사들였고 마침내 뉴욕 식민지에 6만 5,000㏊에 이르는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1686년 자신의 소유지를 장원(莊園)으로 만들 수 있는 특권을 받아 '리빙스턴 장원'을 만들었다. 한편 그는 뉴욕 정계의 주요인물로서 인디언 문제를 다루는 서기관(1696~1721), 총독자문기관인 상원(1698~1702), 뉴욕 식민지 의회 의원(1709~26) 및 의장(1718~25)으로 활동했다. 그의 손자 윌리엄과 증손자 에드워드, 로버트 R.과 헨리 브로컬스트도 저명한 정계인물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오늘의 경제소사/12월13일] <1267> 뉴질랜드 네덜란드 항해가 아벨 타스만(Abel Tasmanㆍ당시 39세)이 흥분에 몸을 떨었다. 1642년 12월13일, 남태평양에서 뛰어난 경관과 천혜의 항구 조건을 갖춘 땅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기쁨에 찬 그는 새로운 땅에 고향의 이름을 붙여 ‘새로운 제일란트(Nieuw Zeeland)’라고 불렀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8/12/12 17:23:31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812/e2008121217232697490.htm
[책갈피 속의 오늘]1577년 英해적왕 드레이크 세계일주 출항 16세기 대항해 시대. 카리브 해 연안에는 해적이 들끓었다. 보물지도, 파묻은 약탈품, 앵무새, 나무 의족, 안대, 관 속에 들어간 선원들…. 수많은 소설과 영화 속에서 해적은 공포영화에 나오는 흡혈귀와 영웅적인 중세 기사가 반반씩 뒤섞인 신비로운 존재로 그려졌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동아닷컴 2006-12-13 03:01 http://news.media.daum.net/today/serially/today/200612/13/donga/v15038787.html
쉴리 [Sully, Maximilien de Bethune, Duc de, 1560.12.13~1641.12.22] [오늘의 경제소사/12월13일] 쉴리 채무 3억리브르에 연간 실질 재정수입 700만리브르. 쉴리 공작(1553. 12.13~1641)이 재정총감에 임명된 1696년 프랑스의 상황이다. 수입은 이자를 갚기에도 벅찼고 국민들은 굶주렸다. 11년 후인 1607년, 프랑스는 모든 빚을 갚았다. 대규모 토목공사와 군비증강에도 해마다 1,000만프랑 이상의 현금이 국고에 쌓였다. 국민들의 삶도 펴져 일요일마다 닭고기와 야채에 포도주를 넣은 조림 요리인 ‘코코뱅’을 즐기는 음식문화가 생겨났다. 쉴리의 마술은 조세제도 개혁과 적극적인 농업ㆍ산업장려책의 결과다. 우선 농민들에 대한 세금을 내리고 금리도 인하해 직물산업ㆍ유리공업을 키웠다. 대신 귀족과 영주들이 국가에 군대를 제공하는 대가로 세금을 면제 받는 제도를 축소해 부유층에게 거둬들이는 세금을 크게 늘렸다. 반발하던 귀족들은 얼마 안 지나 세금을 오히려 더 냈다. 관직매매를 늘리고 관직 보유자에게 일정액을 세금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관직매매제도는 훗날 프랑스의 병폐로 굳어졌지만 신구교도 간의 오랜 내전을 겪은 프랑스로서는 이만큼 빠르게 재정 건전화에 도움을 준 제도도 없었다. 쉴리는 새벽4시부터 밤9시까지 일하며 무수히 많은 유산을 프랑스에 남겼다. 근대적인 도로망 정비와 운하 개보수, 퀘벡 식민지 건설이 그의 작품이다. 프랑스의 임업ㆍ관광자원인 삼림을 계획적으로 가꾼 것도 그가 처음이다. 연인들의 장소라는 ‘퐁뇌프’도 세웠다. 군인 출신이었던 쉴리는 ‘재무장관이 포병대를 맡아야 대포가 반짝거린다’며 재정총감이면서도 군의 핵심 전력인 포병대를 직접 지휘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앙리 4세의 암살 직후 공직에서 물러난 뒤 저술한 ‘왕실 재정’에서 쉴리는 이런 말을 남겼다. ‘경작과 목축(노동)이 금광이나 보물보다 소중하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7/12/12 18:11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712/e2007121218111863820.htm
앙리 4세 [Henri IV, 1553.12.13~1610.5.14] [오늘속으로(12월13일)] 앙리4세 1553년 12월13일 프랑스 왕 앙리4세가 태어났다. 1610년 몰(沒). 앙리4세가 죽은 곳은 궁정이 아니라 파리의 페론리 거리였다. 그는 프랑수아 라바야크라는 이름의 전직 교사에게 척살되었다. 시해자는 능지처참을 당하기전에 받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혼자 계획한 일이라고 버텼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왕비 마리드메디시스를 비롯한 국왕 반대파의 음모가 개입했을것이라고 믿고 있다. 마리드메디시스는 남편이 죽자 어린 아들 루이 13세의 섭정으로 프랑스를 다스렸다. 고종석 /한국일보 2003-12-12 16:3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3&oid=038&aid=0000211385
파울루스 3세의 메달 : Vatican Library의 주화 모음집에 들어 있다. /브리태니커
- Pope Paulus III (1468~1549) 오늘의 역사 (12월 13일)[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 개최 1545년 12월 13일 북이탈리아 트리엔트(현재의 트렌토)에서 이른바 트리엔트 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는 18년이 지난 1563년 12월 4일에야 폐막됐다. 공의회는 당시 프로테스탄트가 가해오는 비판을 가톨릭이 어떤 방법으로 피해가며 교회를 통일할 것인가를 목적으로 개최됐다. 자기 개혁을 모색하고 선언한 중요한 공의회였다. 교황 파울루스 3세(바오로3세)가 제안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동의해 처음 소집된 공의회는 정치 군사적인 문제로 두 차례 중단되었으나 교황 피우스 4세(1559-1565)때 마무리됐다. 프로테스탄트가 참여하지 않아 가톨릭 교리를 다시 확인하는 식으로 공의회의 결론이 나오자 신구교간의 분열은 더욱 심화됐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철학자 ·신학자의 공허한 논의, 성직자의 위선 등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서술한 `우신예찬`으로 이 공의회에서 `불경스런 이단`으로 정죄당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421_0007
식스토 5세 [Sixtus V, 1520.12.13~1590.8.27] 본명 Felice Peretti(추기경 시절에는 Montalto). 안코나의 그로타마제 출생. 콘벤투알 수도회 수도사. 반종교개혁기(反宗敎改革期)의 교황이다. 뛰어난 설교사(說敎師) ·논객(論客)으로 두각을 나타냈는데, 1552년 로마에 파견되어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1557∼1560년 베네치아공화국 종교재판소 소장, 1565년에 에스파냐에 교황사절로 나갔으며, 1566년에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총회장 ·대목(代牧)으로서 주교(主敎)에 임명되었으며, 1570년에 추기경이 되었다. 교황이 되자 전임교황 때의 어지러운 질서를 회복시키고 잃었던 교황령(敎皇領)을 되찾아 재정을 튼튼히 하였다. 1586년에는 추기경의 수를 70명으로 정하였으며, 1588년에는 교황청의 정비를 완료하여 15 성성(聖省)으로 조직을 확대 개편하는 등 많은 제도 혁신을 단행하였다. 성베드로대성당의 원개(圓蓋)와 오벨리스크, 수많은 궁전과 수도(水道) 등을 건설함으로써 로마의 근대화에도 힘썼다. 또 학문연구에는 몸소 《불가타역 성서 Vulgate》의 식스토판(版)(1590)을 낼 만큼 열성적이었다. /naver
제르송 [Gerson, Jean de, 1363.12.13~1429.7.12] Johannes Arnaudi de Gersonii라고도 함. 본명은 Jean Charlier. 프랑스의 신학자,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 사이에 일어난 대분열을 종결지은 교회개혁을 위한 공의회 운동의 지도자이다. 파리대학교에서 유명한 신학자이자 뒤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함께 동료로 일했던 피에르 드 아이에게서 배웠고, 1395년 그의 뒤를 이어 파리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당시 중요한 신학적 논쟁은 교회에서의 교황직 역할에 관한 문제였는데, 이 문제는 2명의 경쟁적인 교황후보자들이 교황직을 놓고 분쟁했던 대분열(1378 시작)의 결과로 제기되었다. 처음에 제르송은 이 문제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제한된 개혁을 원했고 경쟁하는 교황들을 폐위시키기 위한 공의회 소집을 반대했으며, 1398년에는 대립교황 베네딕투스 13세에 대한 순명(順命)을 철회하자는 제안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점차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현직 교황 베네딕투스 13세와 그레고리우스 12세를 폐위시키고 알렉산데르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한 피사 공의회를 옹호하며 거기에 참여했다. 베네딕투스와 그레고리우스는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3명의 교황이 동시에 교회를 통치하려고 했다. 1414년 제르송과 다이는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열린 제2차 공의회에서 개혁자들을 주도했다. 그들의 지도에 따라 공의회는 알렉산데르 5세를 계승했던 요한네스 23세를 해임시켰고, 그레고리우스 12세에게 압력을 가해 사임하게 했으며, 마침내 1417년 베네딕투스 13세가 공의회의 승인을 얻었다. 그뒤 교회는 마르티누스 5세 치하에서 통일되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보헤미아의 개혁자 얀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기도 했다. 제르송은 부르고뉴의 무법자 장의 게릴라들이 1407년 11월 23일 오를레앙의 공작 루이를 암살한 사건을 폭군살해로 정당화한 신학자 장 프티를 반박했으나, 공의회는 공개적으로 프티를 정죄하지 않았다. 1418년 콘스탄티노플을 떠났을 때 제르송은 요한의 방해로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었고 독일로 추방당했다. 1419년 요한이 죽자 제르송은 프랑스로 돌아와 리옹에 정착했다. 여러 저서에서 제르송은 그리스도가 신앙인의 모임인 교회의 수위권(首位權)을 제정했고 교황은 교회의 대리인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제시하여 공의회의 조치들을 변호했고, 그때문에 교황은 신앙인의 공의회에 의해 해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뒤에 〈교회의 권한에 관하여 On Ecclesiastical Power〉를 썼는데, 이 책에서 그는 교황을 입헌군주로 묘사하고 공의회는 교황권의 합당한 역할을 회복시켰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종교교육자로서 제르송은 성 보나벤투라의 가르침을 모델로 삼아 옛 신비주의 신학에 기초한 교과과정을 정립했다. 그에 따르면 영혼은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합일될 뿐만 아니라, 영혼과 하느님은 동일한 것이 되었다. 〈신비주의 신학에 관하여 On Mystical Theology〉라는 연구서에서 제르송은 하느님과 종교에 대한 신비주의적 접근과, 신앙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성에 의존하면서 성서와 교회사의 연구를 강조한 스콜라주의적 접근을 대조시켰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는 자신의 마음에서 하느님의 증거를 발견해야 하며, 사랑은 이성보다 더 멀리 나아가며, 신비주의적 접근은 본질적으로 보다 자기성취적이라고 주장했다. 전통적으로 토마스 아 켐피스가 썼다고 하는 유명한 경건주의 작품인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 Christi〉를 제르송의 저작으로 보는 몇몇 학자의 견해도 있지만, 이런 주장을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브리태니커
1048 - 11세기 이슬람을 대표하는 학자 알 비루니(al-Biruni) 사망 알 비루니 [al- Bīrūnī, Abū al-Raihān Muhammad ibn Ahmad, 973.9~1048.12.13] [오늘의 경제소사/12월13일] 알 비루니 빛은 동방에서 왔다. 동방의 문화가 없었다면 근대문명의 발달이 더뎠을지도 모른다. 유럽이 종교 이데올로기에 빠져 암흑기를 보낼 때 중동에서는 학문의 꽃이 피었다. 알 비루니(Al-Biruni)는 11세기 이슬람을 대표하는 학자. 수학과 천문학ㆍ철학ㆍ의학ㆍ지리학 분야에서 12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연산을 뜻하는 알고리듬(algorithm)의 어원이 된 알 코와리즈미, 시인으로도 유명한 오마르 하이얌과 더불어 3대 이슬람 수학자로 꼽힌다. 973년 페르시아(이란) 호라즘 제국에서 태어난 비루니는 전공격인 물리학과 수학은 물론 아랍어와 페르시아어ㆍ그리스어ㆍ히브리어에도 통달했다. 22세에 제작한 지도가 18세기까지 지도제작법의 기본으로 쓰일 만큼 측량과 기하학에도 밝았다. 27세 때는 삼각함수를 이용해 측정한 지구둘레가 4만1,550㎞라는 학설도 내놓았다. 현재 기술로 잰 4만120㎞와 비슷한 수준이다. 최대 업적은 고대 그리스와 이슬람 학문에 인도를 융합시켰다는 점. 44세부터 57세에 이르기까지 인도에 머물며 고대 힌두수학을 연구해 인도숫자를 아라비아숫자로 정착시키고 시그마(Σ) 공식을 만들었다.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의 원류가 비루니라는 주장도 있다. 학문적 업적을 존중한 황실에서 은화상자를 가득 단 코끼리를 주자 바로 돌려줄 만큼 청렴했던 비루니는 공직 제의도 거절하고 1048년 12월13일 75세로 사망할 때까지 학업만을 낙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비루니의 업적은 상업에 일찍 눈을 뜬 이탈리아를 거쳐 온 유럽에 퍼졌다. 확률 이론과 리스크 관리, 계량경제학의 기본인 수학의 원산지도 인도와 아랍이다. 거꾸로 아랍은 교조주의에 빠지며 쇠락의 길을 걸었다. 무덤 속의 비루니가 통탄할 일이지만 역사는 돌고 돈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6/12/12 17:30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612/e2006121217302163820.htm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