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산책자
김연아
잠 못 드는 밤이면 당신은 텅 빈 도시를 걸었지 꿈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진 안개 낀 해변을 걷는 느낌으로 누군가 손을 잡는다고 상상하면서 거대한 구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듯이 당신은 내 꿈의 재료로 만들어졌고 성스러운 정액을 내 시에 뿌렸지 시간의 척추를 통해 강렬하게 사랑이 치솟을 때 자신의 고독으로 구원받은 자 당신은 밤의 왕 나는 생각하지 않고 말을 쓰지 않기 위해 산책하는 달이 되었지 이것이 우리가 대화하는 방식 우리는 불꽃 위에 떨어지는 두 눈송이 내 입속의 우주를 당신의 입속으로 옮겨놓은 첫 키스 나는 본다, 내 꿈속에서 당신이 꿈꾸는 걸 인동꽃 위에 떠 있는 벌새처럼 당신은 떨면서 말했지 네 목소리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네 이름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죽은 피부를 걷어내고 새 피부가 빛날 때까지 당신과 내가 서로를 관통할 때 거기 우리 영혼의 자리가 있다 평생 동안 눈멀었다가 처음으로 눈을 뜬 사람처럼 나는 침묵 속에서 확장되는 중이다 진동하는 어둠 속으로 당신은 걸어가겠지 소리 없는 종소리를 들으며 텅 비어 차가운 밤을 수태시키며
—격월간 《현대시학》 2022년 9-10월호 -------------------- 김연아 / 1959년 경남 함양 출생.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200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달의 기식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