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송정! 동북의 칼바람과 뼈를 에이는 추위에도 독야청천 푸르렀던 우리 민족의 한과 광복의 의지가 서려있는 일송정을 그렇게 뒤로하고 윤동주 시인을 만나러 하산을 하였다.
현재 시간이 낮 두시인데 기온이 영하 12도, 정말 춥다!
밤에는 영하 25도까지 내려간다.
어떻게 이런 동토의 땅에서 우리 선조들은 삶의 터전을 이루었는지..
어떠한 극한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민족은 지구상에서 위대한 한민족일 뿐이리라!
드디어 윤동주 선생의 출신학교인 용정제일중학교에 도착을 하였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다녔던 학교이다.
윤동주 선생이 이 학교를 다닐 때는 대성중학교라 하였다고 한다.
방학을 하여서 인지 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눈 덥힌 운동장과 건물들이 우리네 학교와 별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현재는 용정제일중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실제로 조선족학생들이 이 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신관과 구관으로 나뉘어져있었다.
구관 앞에는 그의 대표적인 시 <서시>가 새겨져 있는 윤동주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아, 알 수 없는 심장의 공동소리가 나의 온몸을 전율케 한다.
중학교 때 서시를 읽고 세상을 살면서 결코 한 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을 하던 내가 아닌가!
한참을 서서 시비에 새겨진 “서시”를 몇 번 되뇌어 보았다.
건물 2층에는 기념전시관이 꾸며져 있다.
기념관에는 사진, 화보, 책자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당시의 윤동주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이 곳은 재야 운동가였던 문익환 목사와 정일권 전 총리의 모교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나를 안내해준 조선족 친구는 도대체 윤동주 선생이 어떤 분이시길래 숙연하느냐고 되레 의아한 듯이 반문을 한다.
이게 웬말인가!
조선족들은 자신들의 역사조차도 모르고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지나간 역사가 만들어 낸 민족의 아픔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윤동주 선생의 사가를 가보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다.
추운데 어서 가자는 조선족 친구를 달래서 삼십분 거리에 있는 명동촌으로 출발을 하였다.
명동촌의 입구에 커다란 비석이 있었다.
바로 윤동주 선생의 사가를 알리는 비석이었다.
또 한 문익환 목사의 사가도 함께 있었다.
마을의 정경은 우리네 농촌과 다르지 않는 정겨움을 느낄 수가 있었다.
초가지붕으로 만들어진 윤동주 시인의 사가는 잘 보존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겨울이라 썰렁함이 있었지만 어느새 난 “향수”라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 백이 황소가 해설 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민족시인 윤동주는 항일운동 혐의로 1943년 일본유학 중 수감되어 29세의 젊은 나이에 꿈에도 잊지 못하던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일본의 감옥에서 생체실험으로 운명했다. 그는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얼마나 바랬던가?
`서시‘ `별을 헤는 밤`을 통하여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새겨져 있는 그는 암울했던 시대 속에서 하나의 별처럼 빛났던 그의 존재를 다시금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다.
출장을 이용해서 우리의 선조들 께서 광복의 한을 품고 살아 온 간도를 다녀보았다.
언젠가 우리가 통일을 이루었을 때 간도는 분명히 우리의 땅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글 솜씨가 부족하여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끝으로 윤동주 선생의 “서시”를 올려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젊은이 들이여!
다시 한번 윤동주의 서시를 깊이있게 느껴보았으면 한다.
서 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첫댓글 좋습니다~ 중국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제게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주시네요~~~ 集安으로 표기되는 우리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없으신가요?? 중국을 가면 꼭 거기부터 가보고 싶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