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의 굴레를 깨고 비상하는 아프락사스
엄마의 하늘 빛
내가 사랑하는 나
사랑합니다
사랑을 나눌때 노래하는 희망새
작은 사랑으로 큰 꿈을 꾸는 아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우리 엄마 파이팅!
행복은 가장 가까운 곳에
날개 잃은 천사는 우리 엄마
누나의 꿈을 활짝 펼치는 날을 기다리며
우리 가족의 간절한 꿈
잊혀지지 않는 화실
어느 부부의 살아가는 이야기
쌍무지개 뜨는 언덕을 바라보며
함께하는 학교
기쁘게 사는 법
비익조
바퀴의 자유를 위해
나의 교정
참다운 사랑을 배워요
장애편견, 우리 학교에는 없어요
마음속에 새겨둔 가슴 아픈 사연
아들의 방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다르게 보는 것에서 바로 보기까지
최우수상
장애의 굴레를 깨고 비상하는 아프락사스
홍 미 희 (서울 미림여자정보과학고등학교 학생)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던 1980년대에 태어난 후 만 18년여를 살아온 청각장애인(2급, 왼쪽 100데시벨, 오른쪽 85데시벨)이며, 현재 수능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이다.
부모님은 내가 청각장애를 갖고 있어서, 그 동안 받은 설움이 많으셨다. 결혼 후, 자식이 장애를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편견의 벽에 부딪쳐야만 했고, 또한 많은 심리적 고통을 겪어왔다고 하신다. 특히, 어머니는 고생을 참 많이도 하셨다.
시댁 식구들과의 갈등, 자식의 장애로 인한 차별, 사회의 벽, 교육문제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으나 꿋꿋이 당신의 책임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무던히도 하신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많이 완화되었지만, 80년대 시절 이루 말할 수 없이 겪은 고통은 어찌 쉽게 잊혀질 수 있을까. 내가 지금 부모님께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이라고는 그저 장애를 극복하고 본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장애를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경쟁하며 이 사회에 당당하게 진출을 하고자 학업에 열심히 매진하고 있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는 비록 학생이지만, 사회보다 더 안전한 곳인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조차 참 많은 갈등과 방황을 겪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1, 2학년 때는 장애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데다가 순수한 시기라서였는지 적응을 참 잘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받아쓰기 시험을 칠 때 입 모양을 보고 해도 만점을 곧잘 받곤 했으며, 반 아이들과 어울리는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친구에게 놀림받은 충격으로 인해서 그 이후로 계속 점점 위축되어가다가 결국 초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 비극의 왕따는 시작되었다고, 이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안타까운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한 청각장애 소녀가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서 그 어린 나이에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민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알고 보니 어릴 적 나와 같은 특수학교 유치부 출신이었던 것이다. 학예회 연습 때 나와 같이 연습하고 무대 위에서도 같이 섰던 바로 그 아이였다. 그 때 찍어놓은 비디오가 아직도 집에 있길래 혹시나 싶어서 다시 돌려봤다. 화면 속의 그 아이는 당당했다. 위축됨도 없이, 탬버린을 천진난만하게 치는 모습에서 그 애가 자살한 건지 믿겨지지 않았다. 어쨌든, 자살의 계기가 나와 똑같은 상황이어서 동병상련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도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이 가장 생생하다. 그 땐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고 다니던 시기여서 말을 잘 못했다. 결국은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이 거의 단절되었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어린 마음에 스스로 움츠려 있던 것이다. 게다가 같은 반 철부지 남자애들은 매일 나를 괴롭혔다.
점심시간 때, 내 자리를 밀치고 방과후에도 집단으로 몰려서 나를 쫓아다니며 신체적인 폭력을 가했다. 그 영향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하루 하루가 정말 괴로웠다. 학교에 등교하는 길이 두려운 나머지 매일마다 아침이 찾아오는 게 너무 싫었다. 결국은 무단결석을 감행했다.
부모님 몰래 학교에 빠졌기에 동네 집 근처를 배회하며 추운 겨울에도 옥상이나 창고 같은 데에서 서너 시간을 쥐가 나도록 계속 숨어있기도 했다.
학교에 가기 싫다고 부모님께 졸라 보기도 했지만, 그저 다니라고만 하셨다. 의무교육을 위해서라도 학교에 보내고 봐야하는데, 자식이 학교 가기 싫다고 하니 묵묵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부모님의 심정을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죄송한 마음이 든다.
중학교에 원서를 낼 무렵, 혼자 검정고시 학원도 알아보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많이 위축되어 있던 나는 중학교에서도 친구를 잘 사귀지 못했다. 그럴수록 나만의 세계에 몰입되어 가고 결국은 컴퓨터라는 대안을 선택했다. 컴퓨터는 그 시절 유일한 희망이자, 재미였다. 그 취미가 이제는 특기가 되었다고 해야할까.
중학교 시절, 학교 대표로 정보올림피아드 예선에 참가하여 입상했고 우연히 만난 특수학교 동창과 함께 출전한 장애인 인터넷 서바이벌 대회에도 참가를 하며 많은 경험을 쌓았다.
PC통신에서 알게 되어 스스럼없이 친한 온라인 친구들과 내게 거리감을 두기만 하는 반 급우들 사이에서 인간관계의 미묘함을 느꼈다. 통신상에선 의사소통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내 생각들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을 느낄수록 닫혔던 나의 내면은 점차 열려갔다.
자신감도 함께 늘어났다. 어느새 나는 진로를 아예 컴퓨터 분야로 정해놓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컴퓨터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공업계 고등학교에 특수교육대상자 전형으로 소신 지원을 했다.
입학식 날, 난생 처음 보는 아이들 사이에서 과거의 위축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하리라는 결심을 굳게 하면서 앞으로의 학교 생활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던 나의 모습이 생각난다. 중학교 입학 당시의 내 모습과 많이 달라진 것에 스스로가 참 대견할 뿐이다. 이것도 다 컴퓨터를 통해 쌓은 자신감 덕분이리라.
나는 호감이 생기는 몇몇에게 추근대면서 말을 자주 걸었다. 그러자 친구는 하나 둘씩 생겼고 매일 아침 학교에 오는 게 즐겁기만 했다. 그 때 난생 처음으로 느꼈던 행복감이란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추억이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내게 인사를 하며 먼저 말을 걸어오는 친구들이 정겹기 그지 없었던 때였다. 정에 메말라있던 나는 그들이 너무 고맙기만 했다.
그저 청각장애 때문에 사람을 사귀기 힘든 것이라고만 단정해 왔는데 반 급우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그 편견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때 나는 크게 깨달았다. 내가 왕따를 당해왔던게 단지 장애 때문이 아니라 잘 안 들린다고 스스로 위축된 성격 때문이란 것을…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시험을 칠 때 노력한 결과 전교 탑의 등수에 들게 되었다. 그 때부터 반 아이들의 시선도 바뀌었고 그럴수록 나는 기세가 등등하여 2학기 때 부반장을 맡기도 했다.
내게 청각장애가 있다는 건 과연 불행일까?
원인도 모를 청각장애는 두 살 무렵 발견해서 그 때부터 어머니의 헌신적인 교육 덕분에 특수학교까지 다니면서 구화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 구화 교육이 없었더라면 지금 말을 이렇게 잘하지도 못했으리라! 심지어 장애인 대회에 출전하면 수화통역사가 내게 청각장애인이 맞는지 물어볼 정도니까 비록 혀가 약간 짧은 듯한 발음이지만 정상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이다.
어쩔 땐, “외국에서 왔어요?”라며 한국말이 서투른 교포 2세 취급을 받은 적도 있다. 그래도 보청기를 빼면 소리 없는 세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다. 공부할 때, 주변의 소음이 시끄러우면 스스로 그 소리에서 단절시키고 집중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으니까. 하지만 답답할 때가 더 많다. 바로 의사소통에서 한계를 느끼는 경우가 그렇다.
어느 날 보청기를 깜박하고 학교에 온 적이 있는데 그때서야 보청기의 존재를 절실히 느꼈다. 내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니 발음까지 이상해지는 건 당연지사.
그래서 친구는 알아듣기 힘들다고 불평을 했다. 입모양만으로는 다 이해하기 힘들어서 결국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상황에 따라 적절한 말이 필요한데 서로 의사소통이 잘 되질 않으니 간혹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보청기를 착용할 때는 더 나은 편이긴 하지만, 100% 알아듣지를 못해서 불이익이 생기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청각장애를 느끼지만 그나마 이 곳에 적응을 하고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점에 감사를 드린다.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이 바로 청각장애인일 것이다. 의사소통의 단절로 인해 극심한 소외감과 고립감은 저절로 자기 중심적이고 고집이 센 경향으로 몰고 가게 한다는 점에 나 역시 동감한다.
의사소통의 단절이 때론 고지식하게 만드는 것 같다. 자라온 환경, 성격 등에 따라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역시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걸 느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청각장애 청소년들을 위한 청음캠프에 참가했다. 나는 그 캠프에서 많은 걸 배웠다. 말도 잘하고 수화를 자유롭게 쓸 줄 아는 매사에 적극적인 활발한 언니의 모습을 본받아 청각장애인으로서의 롤 모델(role model)을 설정할 수 있었으며, 나의 장애에 대해 확실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의 내면을 알게 되고 수화를 난생 처음으로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수화에 대해 부정적이었는데 청음캠프에 참가한 이후 수화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그래서 학교에서의 수화 동아리 결성도 고려해보고, 또 수화를 적극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장애를 부정적으로 여기고 근처에 위치해 있는 특수학교를 부끄럽게 여기기만 했다. 그 곳 근처에 얼씬도 하기 싫어했던 나. 부모님이 일부러 경기도에서 서울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이 그 특수학교에서의 통학을 위해서였던 것인데, 나는 그 학교에서 받은 구화 교육에 대해 감사하기는커녕 어린 마음에 청각장애가 부끄러워서 그 학교를 멀리 했다. 길 가다가도 수화를 쓰는 그 학교 학생들이 보이기만 하면 괜히 수치심을 느끼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철이 없었던 시절이다. 이렇듯이 난 수화를 참 부끄럽게 여기기만 했었는데 스스로 수화를 배우려고 수화 강좌까지 듣는 내 모습에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요즈음, 수화는 예술적 가치로도 승화된 듯하다. 수화 공연이 곳곳에서 열리기도 하며, 청소년 센터나 학교마다 수화 동아리가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니 수화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다는 걸 실감한다.
심지어 학교 친구들도 교회나 학교에서 수화를 흔히 배울 수 있어서 수화의 기본인 지화를 쓸 줄 안다. 수화는 참 아름답고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의 몸짓으로 승화시킬 수 있고, 수화를 자주 쓰다보면 표정도 함께 연출해야 하는데, 표정을 얼마든지 변화무쌍하게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수화를 잘 쓰는 이들 모두가 연기자처럼 느껴진다.
아는 청각장애인 언니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소심했던 구화인들이, 수화를 배워서 쓰니까 어느새 성격이 활발해지더라.”나는 특수학교에서 구화 교육만 받고 초등학교 1학년 때 일반학교로 통합을 해서 수화보다는 구화를 더 많이 쓰기에, 구화인이다. 그래도 의사소통에 한계를 느끼기 때문에 위축되는 면이 없잖아 있다. 반면 수화를 쓰는 이들은 몸짓과 표정으로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기 때문에 의사 표현에 스스럼 없게 된다는 것으로 생각된다.
장애를 갖고 있다보니 교육을 받는데 불편함이 많은 만큼 학력저하로 쉽게 이어진다. 하지만 요즘 나의 사기를 올려주는 선배들이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바로, ‘한국농아대학생연합회’라는 단체이다. 그 곳에서 주최한 청각장애인을 위한 대학입시 설명회에 참가하여 많은 정보를 얻은 적이 있다.
선배들이 그렇게 수고해주시니 덕분에 걱정을 덜게 된 나는 여느 고3 수험생처럼 대학 입시만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것이다.
청각장애를 가진 것은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다소 있을지 몰라도, 내겐 더할 나위 없이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이는 다양한 경험으로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는 안목과 요즈음 청소년들같이 온실 안의 화초처럼 살아가는 게 아닌, 광야에 감히 뛰어들 수 있는 강인한 내면을 길러줬다고 생각한다.
나와 다른 모습이어도
복지수준이 높을수록 선진국이라는데, 이제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려는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을 위한 캠프나 대회가 많이 열리고 있다. 덕분에 나는 또래의 장애 청소년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럴수록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점점 없어졌다.
중학교 3학년 시절, 장애 청소년 인터넷 서바이벌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다른 팀들을 보니 다양한 장애가 있었다.
뇌성마비, 지체장애 등등. 그 때는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을 접한 적이 없었고, 아직 장애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시기라 처음엔 그들에 대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얼핏 봐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자연스러운 몸짓과 기형적인 신체, 즉 외형적인 요소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회에 참가하면서 다른 팀원들과 친해지니 어느새 정이 쌓였다. 마음이 통하니 어느새 장애는 아랑곳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 대회에서 1등을 한 팀원인 한 뇌성마비 장애인 오빠는 요즘 시대의 일반 청소년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사고방식과 항상 웃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장애는 그저 불편할 뿐,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작년 여름방학 때,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장애인 고용 촉진 공단의 고용 개발원에서 실시한 2002년도 진로지도 프로그램에 참가한 적이 있다.
처음엔 낯설기만 했던 우리들은 비록 장애의 종류나 정도가 달라도 ‘장애인’이라는 공통분모 덕분이었는지 유대감이 형성되어서, 프로그램 수료 날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아쉬워할 만큼 많이 친해졌다.
카피라이터를 꿈꾸는 발랄한 소녀 세이, 최근 재활복지대학에 진학하여 적응을 잘하는 중필, 어떨 땐 어린애 같은 현희, 욕심이 많아 항상 적극적이고 모든 일을 주도하려는 경민, 선화 예술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그림을 잘 그리는 영익, 평범한 청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순수한 원희, 여성스럽고 착한 은지 등등 모두 13명인 친구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새록새록 떠오른다.
지금도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고민을 나누고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등 마음을 터놓고 연락을 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프로그램에 참가한 친구들 중 커플이 생기기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를 통해 자신이 겪는 장애로 인한 아픔만큼 타인의 마음의 상처를 비장애인보다 이해할 수 있고 잘 보듬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애인이라 해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실현시키며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몸의 움직임이 불편함에 불구하고 많은 컴퓨터 대회에 적극 출전하여 실력을 인정받는 ‘컴퓨터 도사’, 불편한 몸을 이끌며 타인을 위해 봉사를 한 결과 전국 청소년 봉사활동 대회에서 대상을 타고 또 공부도 잘해서 서울의 4년제 대학에 당당하게 진학한 뇌성마비 장애인, 장애인 학습권 신장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는 서울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인 (前 한국농아대학생연합회 회장)청각장애인, 방송 기술직으로 진출하는 꿈을 갖고 있는 아마추어 PD 20대 청년 등이 있다. 그 아마추어 PD는 며칠 전 지방 장애인 기능 경기 대회에 참가했을 때 우연히 만났다.
전국 청소년 방송 대회에서 거의 상을 휩쓸었다는 인터뷰 기사를 본적이 있기에 내가 얼굴을 알아보고 반가워서 먼저 말을 걸었다. 휠체어에 타고 다니는 그에게서 항상 밝은 모습이라는 인상이 느껴졌다.
짧은 대화를 나누다가 마지막으로 “열심히 하세요.”라고 격려를 한 후 대회장을 빠져나왔다. 나도 중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마냥 호기심에 이끌려 YMCA에서 방송 제작 교육을 수료한 후 청소년 방송국에서 근 2년여간 활동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활동 중 팀원들과의 의사소통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그저 촬영이나 편집 같은 기술적인 일만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아마추어 PD는 도리어 위축되지 않고 자신만의 꿈을 펼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어 당당하게 입상을 하지 않았는가.
중학교 시절 청소년 방송국에서의 나의 모습과 비교되어 참으로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 언론에 많이 나오고 교회에도 강연을 활발하게 다니는 이지선 언니가 생각난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듯이 살던 평범한 이화여대생이었던 그 언니는 교통 사고 후, 화상을 입어 외형이 변한 것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다고 해야할까. 위축되어 숨어있는 부정적인 삶이 아닌, 또 하나의 개성으로 치부하여 당당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도리어 유명해져서 유명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화상으로 인해 일그러진 얼굴은 좀 꺼려질지 모르나 사고전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정말 놀랍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교통 사고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하긴 교통 사고로 갑작스레 장애인이 되어 인생이 바뀌는 경우도 많으니까. 처음에 그 언니의 화상 입은 얼굴을 보고 은근히 편견을 가졌다. 하지만 사고의 내막과 그 언니의 당당한 내면을 알고 난 후 감동을 받아서 존경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역시 외면적인 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될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장애인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외모 지상주의 시대라고 해도, 내면의 미학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청각장애는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청각장애로 위축되는 마음이 더 장애가 되는 것뿐이다.
서로 돕는 삶
나는 지금까지 이 세상에 태어나 받은 혜택이 많다.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 사회의 복지제도, 그리고 학교에서의 교육 등등. 지금도 특수교육대상자로 선정되어있어서 학교에서 무상교육을 받고 있다.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내가 이 세상에 과연 필요한 존재인지 의문이 들기도 해서 결국 봉사활동에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순히 복지시설만 전전하는 게 아니라 가능한 한 더 많은 활동을 효율적으로 하며 소중한 경험을 쌓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 겨울 방학 때, 봉사활동에 뛰어들었다. 이제 고3으로 진급하기 때문에 수능시험 공부도 해야한다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지금 아니면 제대로 못할 것 같아서 적극적으로 참여를 시도했다.
서울미술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같은 청각장애인 친구와 함께 정신지체 고등학생을 위한 캠프에 참가하고, 또 장애인 부모회 강동지부에서 주관하는 발달 장애아들을 위한 겨울방학 프로그램에 함께 하기도 했다.
담당 사회복지사들은 우리가 청각장애인임을 알고도 우리를 믿어주셨기에 봉사자로서의 자부심은 한껏 더했다.
또한 같은 반 친구와 함께 장애인 퀴즈 방송 프로그램의 현장 스태프로 참여하여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촬영보조를 하는 봉사를 한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보청기를 끼고 있는 것을 본 작가는 촬영이 끝난 후 내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
나는 그저 봉사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청각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주목을 받으니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프로그램의 제작의도를 생각하여 곧 인정하고 그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첫 촬영이라 떨리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몇 주 후, 청각장애인 친구의 권유로 그 프로그램에 다시 참여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장애인 퀴즈 프로그램의 봉사자가 아닌 참가자로 입장이 바뀌니 이색적인 느낌이 들었다.
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 중에 참으로 허탈하고도 안타까웠던 경험도 있다. 재가 장애인을 위한 정보요원이 되어서 찾아간 그 장애인의 집엔 뇌성마비 장애인 여성이 혼자 있었다.
그런데 몸의 움직임이 너무 불편해 보였다. 뇌성마비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심한 경우는 처음 봤다. 또 심한 뇌성마비로 인해 의사소통도 잘 안되어서 힘들었다. 그녀는 내게 필담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데 떨리는 손으로 어렵게 쓰는 모습이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나보다 나이 많은 30대의 그녀의 모습에서 온갖 만감이 교차했다.
컴퓨터 교육을 어떻게 해드려야 할지 처음엔 어쩔 줄 몰라하다가 결국은 그냥 내가 알아서 기본적인 걸 가르쳐 드리기로 했다. 그 첫 만남은 이젠 마지막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첫 방문 후, 연락이 아예 두절되는 바람에 그 활동은 흐지부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허탈했다. 하지만 그 계기로 재가 장애인의 현실을 알게 되었고, 그나마 사회 활동이 가능한 나의 가능성에 대해 감사를 느끼게 되었다.
사회에서는 과연 재가 장애인을 위해 많은 배려를 해주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학교라는 곳을 졸업만 하면 곧 사회에서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방치하기 때문에, 취업의 가능성도 발견하지 못한 채 집에서만 지내는 그들은 과연 행복할까? 형식적으로 장애인을 위한 행사를 열면서 돈을 지출하는 것보다, 밖에선 잘 보이지 않는 장애인들을 위해 투자를 좀 더 해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요즈음 열리는 장애인 관련 행사를 보면, 장애인을 위한 게 아니라 꼭 행사 자체를 위해 열리는 듯한 생각을 배제할 수 없다. 어느새 사회의 오락적인 요소로 전락해 있는 것 같다.
국가에서는 안으로 꼭꼭 숨어있는 장애인들을 사회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더 많은 배려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장애인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능력껏 일하는 모습에서 어느덧 장애는 개성으로 인식될 뿐, 동등한 사람으로 대접받을 것이다.
어쨌든 나 역시 사회에서 핸디캡을 느끼는 장애인임에 불구하고 타인의 또 다른 핸디캡을 줄여줄 수 있다는 점은 크나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장애인을 돕는 일 말고도 얼마든지 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낄 수 있었던 컴퓨터 수리 봉사활동도 기억에 남는다.
맞벌이 부모님의 무관심 하에 방치된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의 컴퓨터를 고쳐주는 일이었는데 힘들기도 했지만 고치고 나서 아이들이 맘껏 그 컴퓨터를 사용하는 모습에서 보람을 느꼈다.
치맛바람이라는 말이 나돈 지가 10년도 더 되었는데 학원도 못 다니고 있는 저소득층 아이들이 아직도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청각장애를 갖고 있음에 불구하고 어려운 형편에도 피아노, 미술, 검도 등을 배우게 학원에 보내주신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사회
가정이 국가의 초석이자 기본이 되는 가장 작은 사회라고 하는데, 부모님의 헌신으로 장애인들은 더 큰 사회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질수록 부모들은 장애를 갖고 있는 자식을 더 이상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리라. 또한 복지제도가 발달될수록 자식을 키우는데 더 이상 어려움을 겪지 않으리라.
내가 읽어본 소설 중 기억에 남는 책은 ‘벙어리 삼룡이’와 ‘백치 아다다이다. 그 소설들에서 등장하는 그 벙어리들이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다면 소설의 스토리 전개가 확 바뀌어 있을 것이다. 단지 의사소통이 잘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삶을 살던 그들의 모습은 내겐 그저 상상일 뿐이다.
요즈음은 보청기라는 보조기구가 있어서 그나마 들을 수 있고 재활 교육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으며, 또 청각장애인들은 대개 손재주가 좋다고들 하는데 도자기, 목공예, 만화, 미술 등의 분야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고, 자기 나름대로 스스로 노력을 하면 국가의 인재와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현재 특수학교나 농아인 교회 그리고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주축으로 한 농인 사회와 문화가 정립되어 있다.
나는 그 곳에서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 옛날에 비해 참으로 세상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아는 청각장애인들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분들이 몇몇 계시다. 특히 내가 아는 분인 청각장애인 화가 아저씨는 동국대 서양화과 출신으로, 개인전을 열 정도로 그림을 꽤 잘 그리신다. 30대 중반이었는데,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인생을 참 멋지게 사는 듯했다.
이처럼 청각장애를 갖고 있음에 불구하고 얼마든지 내재된 면을 표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손’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은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세상사람들에게 청각장애인으로서의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주신 운보 김기창 화백, 나는 지금도 그분을 기억한다. 지난 달, 학교의 양호실에 들렀다가 우연히 운보 김기창 화백의 인생과 대표작들을 정리한 화보집 비슷한 책을 접한 적이 있다. 그저 그림을 잘 그리시는 화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운보의 삶을 그 책을 통해 자세히 들여다보니 참으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 청음회관을 세우시는 등 그 동안 쌓으신 사회적 공로가 많으셨다.
그 때 나는 그분의 청각장애가 단지 특징으로만 느껴질 뿐 한 개인으로서 소신껏 살아오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몇 년 전 작고하셨을 때, 언론에서 그분의 삶을 기리며 일제히 추모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예전보다 장애인의 삶의 질이 대체적으로 높아지고 인식이 나아진 편이긴 하나, 복지가 잘 발달한 미국, 스위스, 독일 같은 선진국처럼 되기엔 아직은 멀었다고 생각한다.
곳곳에서 보이지 않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인권 신장을 위해 투쟁을 하는 장애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국가 인권 위원회 앞에서 시위도 했다던 한 농인의 글을 인터넷 상에서 읽은 적이 있다. 또 인터넷 신문에서도 서울대에서 장애인 학습권 신장을 위해 일인시위를 하는 청각장애인 언니의 굳은 표정을 찍은 사진을 보기도 했다. 그때서야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살아온 나는 현실의 벽을 느꼈다. 앞으로 나는 얼마나 더 살아야 장애를 더 이상 느끼지 않게 하는 사회를 볼 수 있을까. 마치 유토피아처럼 느껴진다.
그 유토피아가 실현되려면 국가 역시 힘써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이에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본다. 현재 그 국가인권위원회에서 5급 연구원으로 일하는 뇌성마비 2급 장애인 여성분이 계시다.
미국에서 힘들게 공부하신 후 복지관에서 근무하시다가 인권위에 정식으로 채용된 분인데, 그 곳 과장으로 일하시는 내 친구의 아버지께선 ‘그 분은 장애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참 일을 잘 하더라’고 하신다. 앞으로 관료주의에 물들지 않고 혁신적으로 일을 주도해서 장애인들을 위한 배려를 좀 더 해주는 인권위가 되었으면 하는 절실한 바램이다.
향긋한 봄, 이제 새 출발을 의미하는 계절이다. 나긋나긋한 새싹들이 많이 보인다. 어차피 저 새싹들도 자연의 풍파를 견디며 흙과 공기를 제치고 어느덧 몰라보게 아름다운 꽃으로 자라나지 않는가. 이를 본받아서 그 청각장애라는 핸디캡을 내 ‘꿈’을 이루기 위한 또 하나의 계기이자 과정이라고 생각해야겠다.
장애의 굴레를 깨고 멋진 아프락사스가 되어 꿈을 향해 크게 비상하고싶다. 다시 한번 외치리라. ‘날개야 돋아라, 한번만 더 날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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