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한차례 전국의 산하를 붉은 융단폭격을 하고 지나갔지만 만추를 느낄 수 있는 낙엽길이 아직 남아 있다. 수도권에서 인기 높은 여행지 용문산 일대는 가을의 끝자락에 낙엽길을 감상하기 좋다. 소리 없이 지나가는 가을의 끝에서 아름다움을 잊고 지냈던 곳들로 발걸음을 옮기며 망중한을 느껴본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가을의 끝자락을 알린다. 미완성을 위한 변주곡처럼 조금은 휘청거리면서 나뭇잎의 말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리고 붉은 손바닥을 펼친 것처럼 조용히 가을 햇살을 받아내는 낙엽을 바라본다. 지나다가 슬쩍 손을 건네는 바람에게 자신의 몸을 흔들어 주는 낙엽. 성숙해진다는 건 꼭 완성된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마음일 것이다.
낙엽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감성을 슬며시 꺼내게 하는 힘이 있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살아가면서 문득 놓쳤던 것들을 다시 살려내는 매력. 조금은 느리게 걸으면서 마음을 열어본다. 낙엽여행은 시간을 들여 계획성 있게 하는 것도 좋지만 준비없이 떠나보는 것도 즐겁다. 여행을 나서기 위해 준비를 한다면 그것부터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욕심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훌쩍 떠나도 산책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양평의 용문산 일대다.
늦가을의 추억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양평 용문사는 가볍게 낙엽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용문사 낙엽길은 일주문에서 용문사까지 약 2㎞ 구간. 이 길은 계곡을 따라 가벼운 산행을 즐기는 느낌으로 다녀올 수 있다. 길 중간에 매점이 있는데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낙엽을 밟는 것도 좋다. 매점 인근에는 커다란 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 유독 낙엽이 많이 쌓여 있다. 이곳 주변에 벤치가 놓여 있어 계곡 위에 둥둥 떠다니는 단풍 낙엽을 만날 수도 있다.
매점에서 약 1㎞ 남짓 더 올라가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은행나무가 마중 나온다. 용문사 앞뜰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다. 수령은 약 1천100년, 높이 60m로 한국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다. 줄기 아랫부분에 큰 혹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의 나무 중 우람하고 당당한 위엄을 풍기는 대표적인 명목이라 할 수 있다. 이 나무는 신라 경순왕의 세자였던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고도 하고, 또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그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도 한다.
이 나무가 자라는 동안 많은 전쟁과 화재가 있었으나 이 나무만은 그 화를 면했다고 한다. 사천왕전이 불탄 뒤부터는 이 나무를 천왕목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이 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소리를 내어 그 변고를 알렸다고 할 정도로 신령스런 나무로 인식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조선 세종 때는 정삼품보다 더 높은 직위를 하사받은 나무다. 은행나무의 사연이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처럼 무성하다. 머릿속이 가지 끝에 걸친 것처럼 나무의 기세에 목이 얼얼해진다.
발걸음을 옮겨 대웅전이 있는 전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수양대군이 1447년(세종 29)에 모후인 소헌왕후를 위해 불상 2구와 보살상 8구를 봉안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절이 모두 불타버려 이 불상이 본래의 용문사 보살상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이후 어디서 어떻게 이곳에 봉안되었는지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왕 대웅전에 들어섰다면 불상에 섬세한 눈인사를 건네도 좋을 듯싶다. 불상의 양식으로 보아 전형적인 고려 후기 보살양식을 계승한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다. 얼굴에 미소가 없어 보이나 이목구비가 모두 자그마하고 양 볼에 탄력이 있는 원만한 얼굴이다. 어깨선은 완만하고 가슴은 당당하며 상체를 다소 뒤로 젖힌 모습이다.
경내에서 5분쯤 걷다 보면 마당바위 계곡 길과 상원사 방면 능선 길과의 갈림길이 나온다. 마당바위 쪽으로 방향을 잡고 오르길 20여 분. 가을이 다가왔음에도 여전히 넉넉한 인심을 자랑하는 계곡의 물소리에 맞추어 걷다 장승 하나를 만난다. 장승이 있는 곳에서 계곡 너머 하늘을 쳐다보면 용각바위가 있다. 하지만 울긋불긋 나뭇잎들에 가려 본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시원하던 바람이 차게 느껴져 눕힌 몸을 추슬러 일어난다. 마당바위를 조금 지나고부터는 경사가 다소 심해진다. 2㎞ 남짓 계곡길은 끝나 가고 너덜겅을 올라서야 하는데 허벅지가 당길 정도로 경사가 급하다. 걸을수록 몸이 힘들어져도 잡념이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머릿속을 헤집는다. 떨쳐 두고 오려 했던 일상의 짐들이 너덜겅의 바위 조각들처럼 마음을 짓누른다. 잡념과 뒤죽박죽된 몸으로 꾸준히 오르니 상원사와 정상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정상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지만 섣불리 재촉하단 부상당할 수도 있다.
간간이 로프를 잡고 올라야 하는 구간이 나온다. 경사가 30~40도 이상 되는 바위에 올라서면 또다시 바위를 만난다. 힘이 든다. 팔도 다리도 잔뜩 긴장한다. 하지만 바위에 올라서면 모든 걸 잊게 만드는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어느새 잡념도 붉은 단풍처럼 불타 사그라진다. 갈림길에서 한 시간 가까이 오르니 드디어 정상이다(실제 정상은 군부대 안에 있어 오를 수 없다). 진짜 정상이 가로막고 있는 서쪽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확 트였다.
하산은 올라왔던 길로 되돌아가 상원사 갈림길 쪽으로 향했다. 마당바위 계곡 길과는 달리 상원사 쪽 능선 길은 가파른 길의 연속이다. 로프를 부여잡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려간다. 산행이 고행임을 푸념처럼 말하지만 그 보람은 몸이 먼저 느낀다. 땀을 흘리며 불꽃처럼 타오르는 용문산의 가을산을 마음에 담으면서 세상의 잡념을 불태워버리는 지혜를 몸과 마음이 먼저 느끼고 반응하기 때문이다.
보통 용문사에 가면 은행나무와 절만 구경하고 돌아오는 일이 많은데 용문사 주변의 바위와 암자를 찾아 낙엽 산행을 즐겨도 좋다. 대웅전이 있는 경내에서 3㎞ 이내에 용각바위, 마당바위, 정지국사 부도 등이 있고 오솔길을 수북하게 덮은 낙엽이 사람의 발길을 타지 않아 늦가을의 서정을 더해준다. 하지만 주말엔 사람에 치일 정도로 북적거린다. 낙엽 밟는 소리를 제대로 듣고 싶다면 아침 일찍 다녀오거나 주중이 훨씬 낫다. 경내의 감로수 한 잔은 산책 뒤의 갈증을 씻어내기 충분하다. 경내 입구의 전통찻집에서 차의 깊은 향을 음미하는 것도 좋다. 용문사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따끈한 찻잔을 손에 쥐고 있으면 센티멘털한 시심이 솟구친다. 수많은 시 중에서도 최영미 시인의 용문사 계곡에서가 제격이다.
서러움 녹아 진저리치다 / 문득, 울음 그친 곳 // 가을 계곡에 안기면 / 굳이 잊어야 할 사람도 / 잊지 못할 사랑도 없는데 // 누가 걸어가고 있는지요 / 지는 해, 참혹한 투명 속을… // 저 먼저 멍든 단풍만 잎잎이 / 물굽이 돌아 두런두런 떠오릅니다 - 최영미의 <용문사계곡에서>시 구절을 되뇌면 마음을 움직이는 운율처럼 낙엽이 두런두런 속삭이며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다. 땀을 뻘뻘 흘리다 보면 머릿속이 텅 빈다. 풍경에 빠져 있다 보면 잡념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없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잠시 망각으로 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산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잊고자 하는 현실을 떠오르게 만들 수도 있다. 시인이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지치고 멍든 마음을 치유한 것처럼 말이다.
여행수첩/
■ 가는 길=서울~홍천간 6번 국도를 타고 가다 용문 터널을 지나 '용문사' 입간판을 보고 빠지면 된다. 이후 331번 도로를 따라 용문사 입구까지 약 6.5㎞ 정도 가면 된다. 차는 주차장에 세워두고 휘영청 허리 굽혀 인사를 건네는 솔숲을 걸어보자.
■ 맛집=용문사 입구의 중앙식당(031-773-3422)은 30년 이상 대를 이어온 산채전문점이다. 20여 가지에 이르는 산채정식의 반찬은 기본이고, 음식 맛이 깔끔하고 정갈해 한번 찾은 손님은 결코 이 맛을 잊지 못한다. 맛의 비결은 된장. 실제로 간장과 된장을 담은 항아리가 엄청 많다. 또한 산채 고유의 투박한 맛과 향을 지속시키기 위해 들기름을 살짝 두르고 주문을 하면 그때그때 산채를 무쳐낸다. 산채정식 7천원, 산채비빔밥 5천원, 용문사 관광단지 내에 위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