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子四十五年. 始自甲辰歲, 天下有九年之水, 遼瀋之水漲溢, 平壤沉潜, 帝遣皇子四人相土地之宜卜居于阿斯達下唐莊坪, 而結㢚盡濟平壤之民. 命彭吳治國內高山大川, 以奠民居至于牛首州【今之春州】有彭吳碑.
壬子(임자, BC2289) 45년. 처음 甲辰(갑진, BC2297)년으로부터 천하에 9년의 홍수가 있어서 遼瀋(료심)의 물들이 불어 넘쳐 평양은 가라앉아 버렸다.[28] 帝(제)는 皇子(황자)와 4명을 보내 토지를 살펴보고 마땅히 거할 땅을 점치어 阿斯達(아사달) 아래 唐莊坪(당장평)에 에 살게 하였고 곁채를 지어서 평양의 백성을 다[29] 구제하였다. 彭吳(팽오)에게 명하여 나라 안의 높은 산과 큰 하천을 다스리고 백성들로 牛首州(우수주)【지금의 춘주春州】에 거하게 하였는데 여기에 彭吳碑(팽오비)가 있다.
단군왕검 45년. 갑진년 기원전 2297년부터 시작된 홍수가 임자년 기원전 2289년까지 계속됨, 알든지 말든지, 노아의 홍수시기가 아닐까 사실이다는 것으로 지구는 둥근데, 메소포타미아만 대홍수? 멸종.??? 저렇게 사람이 많이 살았던 시절에? 멸종하고 욕단족이 왔다?? 9년 홍수에 고조선은 대처하였고 순임금은 치수를 담당하던 곤을 죽이고 그 아들 우에게 9년의 노력해도 이루지 못했다 부루태자에게 도산회의에서 양자강 범람에 대한 대책을 받아서 치수에 성공한다, 그게 다시 8년으로 26년의 세월이 걸렸다, .. 몰라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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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를 기록한 일연(一然, 1206~1289) 스님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단군이 중국의 요(堯)가 즉위한 지 50년 만인 정사년에 고조선을 세웠다고 말합니다(관련 자료).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이 기록을 근거로 단기를 계산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정작 일연 스님이 말한 정사년을 서기로 환산하면, 서기전 2333년이 아니라 서기전 2284년입니다. 그러면 왜 단기를 서기전 2333년부터 비롯했다고 할까요?
사실 서기전 2333년은 『동국통감(東國通鑑)』에 근거한 것입니다. 『동국통감』을 쓴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등 조선의 유학자들은 일연 스님과 달리 단군이 정사년이 아닌 무진년에 즉위했다고 봤습니다(관련 자료). 이 무진년을 환산하면, 바로 서기전 2333년이 됩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일연 스님은 무진년을 요임금이 즉위한 원년으로 봤으나, 서거정 등은 무진년을 요임금 25년으로 봤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이 뭔가 잘못 알았을까요?
庚寅二十三年. 帝移都于吉林之西部稱曰平壤, 改國號曰朝鮮. 平壤卽扶餘在太白山之西南地, 是爲平壤城, 卽古之粟末水, 今渤海之顯德府.
庚寅(경인, BC2311) 23년. 帝(제)은 도읍을 吉林(길림)의 서남쪽으로 옮기고 平壤(평양)이라 했으며 국호를 朝鮮(조선)이라고 고쳤다. 평양이란 즉 扶餘(부여)로 太白山(태백산)의 서남쪽 땅인데 이것이 평양성으로서 옛 粟末水(속말수)이며 지금 渤海(발해)의 顯德府(현덕부)이다.
참고사항이고, 단군 왕검 즉위 원년은 무진년 기원전 2333년으로 나옵니다, 그럼 왜 일연 스님은 무진년인데 왜 50년을 봤는가? 없다고. 갑진년 기사를 보려면 배달유기를 봐야하는데, 그 배달유기는 배달나라, 즉 제18대 천왕 단웅씨 거불단환웅 기사를 봐야 당요가 언제 즉위? 했는지 지 형 지를 벌하고 했는지 안했는지 안다고요, 시대구분이 되어 있어서 고조선기 전, 배달유기를 봐야지, 서거정은 이를 확인하고 당요 즉위년은 갑진년 기원전 2357년이다고 자신있게 확정하여 썼다고요,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역사 시대구분 왕조시대의 역사서가 두시대의 전환시점이면 누가 당요 몇 년 해서 황제 건원 년호를 썻어야 한다? 웃기고 있다 누가 천자인데 저런 쓰레기 당요 몇 년하고 써주냐고?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도적떼 왕을...
辛丑四十年. 摯卽嚳之子也. 擧兵侵境, 帝遣兵拒守.
辛丑(신축, BC2360) 40년. 摯(지)는 곧 嚳(곡)의 아들인데 병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공하니 帝(제)가 병사를 보내 막아내었다.
癸卯四十二年. 陳克己上言曰.., 摯亂政諸侯請以可伐, 帝不許.
癸卯(계묘, BC2358) 42년. 陳克己(진극기)가 글을 올려 “摯(지)는 어지러운 정치를 하는 제후이므로 마땅히 벌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지만 帝(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甲辰四十三年. 唐堯伐其兄摯, 而卽位, 引兵來侵. 帝命橋牛遣于碣石, 練兵拒守, 堯軍自退.
甲辰(갑진, BC2357) 42년. 唐堯(당요)가 그 형 摯(지)를 벌하고 즉위하였으므로 병사를 이끌고 침략하였다. 帝(제)가 橋牛(교우)에게 碣石(갈석)에서 훈련된 병사로 막아 지키기를 명하니 당요가 스스로 물러갔다.
위서라고만 하지말고 사료로 참고만 하라고요. 배달신시본기에 나오는 이야기지 고조선 단군왕검에 무슨 당요가 중요하다고, 당요 몇 년 했다고 손가락으로 세어야 아하 25년이구나, 갑진, 무진. 24년인데? 25년 에라 주자지, 누가 당요 역사서냐요, 도리어 순임금은 고수의 아들로 고조선 신하의 아들이다가 더 중요하지.
癸丑四十六年. 高矢之親兄, 高臾有子容貌才質非凡, 故甚愛之命名曰舜【槿花】, 又曰重華,盖如國華之愛重也. 性之孝, 自幼受學於蒲衣子, 而耕歷山, 漁雷澤, 陶河濱所居, 一年成聚, 二年成邑, 三年成都. 其玄妙之化遠及四方. 是時堯聞之, 大加敬慕, 而致書厚幤, 舜遂不仕於檀朝, 欲仕隣邦堯朝. 由是父子意志相左, 高臾愛小子象欲殺舜, 舜知父意克諧以孝.
癸丑(계축, BC2288) 46년. 高矢(고시)의 친형 高叟(고수)는 아들이 있어 용매와 자질이 비범하였으므로 심히 그를 사랑하여 이름하기를 舜(순)【무궁화라는 뜻】이라 하였고 또한 重華(중화)라고 하였는데, 대개 國華(국화)의 愛重(애중)이라는 말이다. 효성이 있고 어려서부터 蒲衣子(포의자)로부터 배웠다. 歷山(력산)에서 밭을 갈고 雷澤(뢰택)에서 물고기를 잡고 陶河(도하)가에서 살았다. 1년이 지나 취락을 이뤘고 2년이 지나 邑(읍)을 이뤘으며 3년이 지나 都(도)를 이뤘으니 그의 현묘한 교화가 멀리 사방에 미치었다. 이때에 堯(요)가 이를 듣고 敬慕(경모)를 크게 더하여 致書(치서)하고 후한 禮幣(예폐)하니 舜(순)은 드디어 檀朝(단조)에서 벼슬을 하지 않고 이웃나라 堯朝(요조)에서 벼슬을 하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부자의 뜻이 서로 맞지 아니하였으니 高叟(고수)의 사랑하는 작은 아들 象(상, 즉 유상有象)이 舜(순)을 죽이고자 하였다. 舜(순)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효도로 화합함을 이루었다.
참고만 하자고요. 위서론말고 진정한 역사를 알고 싶다면 재미있어요, 몰랐던 내용을 아는 것이 재미가 없어요, 누가 정사로 인정해다라고 한 것도 아니고, 있는데 아니라고 할 이유는? 멍청한 기리사독교인 역사학자나, 한국기독교사학자나 아니라고 아니라고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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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의 학자 소옹(邵雍)은 요임금이 실존했다고 믿고 요임금이 즉위한 해를 서기전 2357년으로 계산했는데,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소옹의 설을 한 번 인용했습니다. 후한(後漢) 말에 태어난 황보밀(皇甫謐)도 『제왕세기(帝王世紀)』라는 책에서 요임금이 갑진년인 서기전 2357년에 즉위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통감외기(通鑑外紀)』를 쓴 유서(劉恕)는 요임금이 무진년에 즉위했다고 주장했지요. 전자를 갑진년설, 후자를 무진년설이라고 한다면, 서거정 등은 갑진년설을 따랐고, 일연 스님은 무진년설을 따랐습니다. 한편 일연 스님보다 한 세대 뒤의 사람인 이승휴(李承休, 1224~1300)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일연 스님처럼 무진년설을 따랐지만,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요임금 즉위 50년이 아닌 즉위 원년이라고 했습니다.
[산] 우선 이 내용중에 중국놈이 이야기하면 마치 중국놈 사서에 갑진년 하고 쓴 줄 알아요? 어디에서봐서 썼냐고요? 천문력법을 쓴 기록이 없어요, 즉 중국사서에서 60갑자력으로 사서에 쓴 기록이 없습니다, 한무제 태초원년에 태초력을 정비하여 冊曆을 반포하였다 그게 공식책력이고 전국시대에는 古六曆으로 은력, 주력 등이 있다고 해서 정리는 했는데 殷曆은 금문등에서 확인되어, 낙빈기가 아예 정확한 년대로 주나라는 삼국유사대로 기묘년 즉 기원전 1122년이라고??? 그런데 중국은 기원전 1046년, 상나라는 기원전 1600년이라고하는데 낙빈기의 금문신고에서는 기원전 1766년?? 을미년, 이건 환단고기를 베꼈지 금문조각에서 나올 수 없는 역사기록입니다, 중국 정부 공식 당요즉위년 기원전 2,333년 재위 100년 기원전 2,224년까지, 출생 년이 기원전 2356년 즉 갑진년으로 하면 배속에서? 아니 아직 수태되기도 전에 요제로? 년대가 안맞지요, 그래서 한국론을 따라서 무진년 기원전 2,333년이라고 합니다, 당요 요제 년대 단정. 단대공정 확정, 그럼 왜 중국의 11세기 갑진년 기원전 2,357년을 못따르는지 아시겠나요? 공자의 춘주에도 재위년수법이지 간지기년법이 아닙니다, 어디에도 중국사서는 기원전에 천문력법으로 간지기년법을 쓴 기록이 없어요, 한무제 태초력이후, 전국시대 중간중간 60갑자력이 나오나 이는 사서 정사라기 보다는 고육법의 하나로 봅니다, 일정한 순서에 의해 쓴 것이 아니다입니다.
동국통감
"신들이 생각건대,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단군(檀君)이 요임금과 나란히 무진년(戊辰年)에 즉위하여 순임금·우임금을 거쳐 상(商)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에 들어가 신(神)으로 되었는데 향년이 1천 48세이시다'라고 하는데 이 설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생각해 보니, 요(堯)임금이 즉위한 것은 상원갑자(上元甲子)9)로 갑진년(甲辰年)이요, 단군이 즉위한 것은 그 뒤 25년 무진년(戊辰年)인 즉, 요임금과 나란히 즉위했다는 것은 틀린 것이다.10) 요(堯)·순(舜)으로부터 하(夏)·상(商)에 이르기까지는 세상이 점차 요리(澆漓: 요박)해서 인군(人君: 임금)으로서 향국(享國: 재위)하면서 오래 살아 보았자 불과 5, 60년이거늘, 어떻게 단군(檀君) 혼자 1천 48세를 살면서 한 나라를 향국할 수 있으리오,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겠다. 선배들이 말하기를, 여기서 말하는 1천 48세라는 것은 바로 단씨(檀氏)가 서로 대를 전하여 나라를 이은 햇수를 말하는 것이지 단군의 나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런 주장은 일리가 있다. 요즘 권근(權近)이 명(明)나라에 조근하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명으로 시를 지었는데, 단군(檀君)을 제목으로 한 시에 이르기를,11) '몇 대를 전해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속된 햇수는 이미 천 년이나 지냈다네(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라고 하였다고 한다. 명나라 황제가 그 시를 보고는 괞찬은 시라고 하였고, 당시의 의론도 권근이 한 말이 옳다고 여겼는데, 잠시 의문으로 남겨 뒷날에 대비코자 한다.(臣等按: 古記云: " 檀君與堯幷立於戊辰, 歷虞夏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享壽千四十八年。" 此說可疑。今按堯之立, 在上元甲子甲辰之歲, 而檀君之立, 在後二十五年戊辰, 則曰與堯幷立者非也。自唐虞至于夏商, 世漸澆漓, 人君享國久長者, 不過五六十年, 安有檀君獨壽千四十八年, 以享一國乎? 知其說之誣也。前輩以謂其曰千四十八年者, 乃檀氏傳世歷年之數, 非檀君之壽也, 此說有理。近世權近入覲天廷, 太祖高皇帝命近賦詩, 以檀君爲題, 近詩曰: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帝覽而可之。時論亦以近之言是, 姑存之, 以備後考。)"
일연선사의 고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더 많은 내용이 그것도 을미년.. 상원 갑자 갑진세, 즉 이는 상원갑자는 왜 쓰는지도 모르니, 180년 단위로 만세력이라고 180년 즉 삼갑자가 한 세트다, 이를 알아야, 상원 중원 하원의 180년으로 100년단위가 아니고 시간은 240년 4갑자로 이루어진다 24절기의 10년은 240년.. 너무 어려운 이야기니 넘어가고 그래도 상원갑자 갑진년세, 당요 즉위로 그 상중하 갑자로 상원갑자를 섰다면 상당히 높은 천문력에 대한 내용을 알고서 쓴 고기내용입니다, 확실히 고조선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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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너무 복잡해서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순시대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요임금은 전설에서나 나오는 사람이지 실존 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요임금이 즉위한 해가 무진년이든 갑진년이든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전설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고조선의 건국 연도를 서기전 2333년이라고 본 것도 역사로서 어떤 근거가 없습니다.
[산] 아니 중국에도 나온다면서 왜 중국 당요 갑진년설도 무시? 그럼 뭘 우리역사, 즉 무진년 기원전 2,333년이라고 한 것은 역사로서 어떤 근거가 없다고? 도리어 중국사서가 쓴 갑진년은 중국정부에서도 인정을 안합니다. 왜냐고요? 기원전 2,357년 갑진년이면 원 당요 출생년이 기원전 2,356년인데 1년전에 어떻게 즉위를 해요.. 그래서 한국설, 동시대설로 무진년으로 기원전 2,333년이라고 합니다, 중국정부는 무진년 안해요, 알아요? 왜 안하는지? 무진년, 갑진년은 중국사서에 년도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시고나 말해요, 전혀 쓴 기록이 없고 한자도 상나라 기원전 1600년 갑골문인데 무슨 戊辰年하면 세상이 뒤집어지고 이는 고조선력으로 천자국만이 쓰던 천자의 천문력법입니다, 이해를 좀 해요 무조건 짱골라 만세, 짱골라 한문자 만세만 외치지 말고 당시 기원전 24세기의 중국상황과 문자, 천문력법을 쓸 고도의 문명이 있었는지? 전혀 돌멩이 들고 악악한 것이 짱골라구만, 역으로 우리는 못쓴다/ 바보 만들기 해놔서 완전 돌아버린다 우리가 그렇게 무식하고 미개하고 더러우면 기리사독교 역사학자들의 떨나라, 이 땅에서 나가서 에덴동산에서 사과나 따먹어라.
당요의 즉위년도가 갑진년(甲辰年)이라는 것은 서진의 황보밀(皇甫謐)의 《제왕세기(帝王世紀)》나 송나라 소옹(邵雍)(1010~1077)(《명심보감》의 '邵康節先生'을 말함)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확인이 된다. 또 후자가 당요의 기년을 갑진(甲辰)으로 하면서 근거로 한 주요 문헌은 바로 《상서(尙書)》의 《요전(堯典)》·《순전(舜典)》으로 하되, 따로 《세본(世本)》·《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와 《제왕세기(帝王世紀)》를 부(副)로 한 것이다.(위소생,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의 하·상·주 삼대의 세워진 연대에 대한 추정을 논한다(《論〈皇極經世書〉對夏商周三代之建年代的推定)》, 하남교육대학보, 2007년 제5기 제26권 참조)
요임금의 즉위년도는 서진(西晉)의 황보밀(皇甫謐)의 《제왕세기(帝王世紀)》에 따른 것으로 문제가 없으나, 단군이 즉위한 해를 요임금 즉위 50년(《삼국유사》설) 혹은 25년(《동국통감》설)에 즉위하였다는 것은 어느 것에 근거한 것이 아직 알 수 없다.
사람들이 중화문명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보통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곧 삼대(三代) 이전이다. 그러나 연대가 아득히 오래인데다 동시에 또 문헌 증거의 결핍으로 후인들은 삼대 이전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대부분 그 사실을 기록하지만 기년(紀年)을 할 수 없었다. 사마천은 《세본(世本)》과 《제계(帝系)》를 근거로 《사기(史記)·삼대세표(三代世表)》를 엮었으나, 겨우 제왕의 세계(世系)만 기술하였을 뿐 기년(紀年: 연대기록)이 없기 때문에 "有世無年"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 바로 좋은 예증이라 할 것이다. 서진의 태강(太康) 연간에 출토된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삼대 이전의 사실을 기술하면서 기년은 황제(黃帝)로부터 시작하였다.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는 간지기년(干支紀年)의 방식으로 당요 갑진으로부터 후주 세종 현덕 6년(959)까지의 중국역사를 기록하였는데, 기년은 당요의 갑진(甲辰)으로 시작하고 있다.(위소생, 전게 논문 참조)
[산] 이 소옹의 "황극경세서"는 중국정부에서 정사나, 당요즉위년에 대한 참고사료이나 채택이 안되었다 낙빈기의 금문신고도 당요즉위 갑진년 기원전 2,357년, 그러나 출생년도가 기원전 2,356년이 된 상태에서 이를 갑진년으로 하면 출생년도를 확인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황극경세서는 마치 간지기년의 방식으로 당요 갑진년부터 후주 세종 현덕 6년까지 즉 기원전 2357년 ~ 기원후 959년으로 기년을 당요의 갑진을 사용하였다. 이는 베낀 것이다, 어디에서 환단고기 및 고조선사에서 간지기년으로 된 고조선사를 베껴야 가능한 소리다.
"간지기년법은 그러하지 아니하다. 그래서 해당하는 월의 초하루의 간지가 반드시 기록되어야만 어느 정도 특정이 가능하다. 옛날 제사 지낼 때 제문에는 반드시 초하루를 뜻하는 삭(朔)이 들어간다. 그래야만 60년마다 돌아오는 무한괘도에서 어느 정도 특정할 수 있어 그 제사 날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산] 웃긴 이야기로 太歲력으로 이는 당나라 도교로, 朔을 일진으로 적어서 월의 일을 기재하는 방식인데 일본서기가 그러하다, 바보냐고/ 누가 일력을 쓰냐고? 2016년 9월 21일하면 되지, 9월 21일은 음력 ... 하고 쓰고 오늘을 음 8월이니 정유월로 삭, 갑진/ 21일이니까 하고 쓴다고 미쳤냐고? 세종실록에 훈민정음 창제 세종 25년 12월 30일 경술 [명나라 년호]
무슨 이야기냐고? 누가 저런 당나라 태세법을 사서에 쓰냐고? 아니 이해가 안가요? 무진년 꼭 쓰고 싶다면 9월 21일 하면되지, 누가 맞지도 않은 태세력을 가지고 태세간지법, 웃기고 있다 그래서 기원후 601년 신유년?을 올려서 기원전 660년, 신유년 건국기념일, 완전 똘아이다, 朔.. 갑자일/ 무진일 5일인데, 정말 그렇게 사서에 기록하는 것이 맞아요? 웃기고 있다네. 쪽발이와 당나라 사서기록법라네, 조선왕조실록이나 한번 보고 이야기하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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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에서 통용되는 《중국역사기년표(中國歷史紀年表)》 상으로 요임금의 즉위년이라는 갑진년이서력기원으로 언제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왜나하면 중국의 역사는 기원전 2070년에 하(夏)나라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공인되어 있는데다 그 이전의 역사인 요·순(堯舜)은 물론 그 이전의 역사인 삼황오제의 역사는 전설시대라고 하여 그 기년에 관하여 전혀 기술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산] 당연한 것으로 요임금 기록이 전설이지 갑진년 하여 쓴 사서는 한국의 역사서밖에 없지요. 내롱한다니까.. 하나라 우임금이 기원전 2070년?? 200년 날려먹었다. 안가르쳐 준다. 중국은 간지기년법으로 쓴 기록이 금문 정도지, 기원전 그래서 '년호법"을 쓴 것이라고요, 황제국은 건원칭제, 우리는 미쳤냐고/ 건원법을 쓰게? 천문력법, 달력이 아니고 년도만 쓰면 되요, 그리고 9월 21일이라고 하든가, 아니면 그냥 무진월 초사흘, 3일, 이렇게 쓰지 누가 일일이 오는 일진은? 점쳐요? 거짓말이라고요. 당나라 태세력으로 쓰는 방식은 후세에 유교왈, 하는 도교왈 하는 7-8세기이후 도교인들이 안다고 쓴 것인지 그렇게 하면 매번 책력법이 바뀔 때마다 각 朔을 바꿔야지요, 누가 사서가 책력, 달력법을 연구하는 역사인가요? 년도지, 년도 기입법이지요, 그러니 무식빵통하다는 것이고 중구사서의 갑진년은 중국사서에 나올 수 없는 당요즉위년도표입니다, 이유는 쓴 적이 없다,한국사서이외에는 황제건원이 기원전 221년이고 책력과 달리 간지기년법으로 년도 기재를 한 적이 없다고요.[기원전 841년 이전에 전무하다.] 금문 기록, 즉 은나라는 번한조선가로 고조선력을 쓴 동이계 제후국이라서 殷曆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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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에서 국가가 탄생한 것은 청동기 시대 이후의 일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한 때는 학자마다 조금씩 의견이 엇갈리지만, 보통 아무리 일러도 서기전 10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는 게 통설입니다. 이 말은 고조선도 서기전 10세기가 지난 뒤에나 건국했음을 뜻합니다. 중국 문헌에서 고조선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등장한 때는 그보다 더 뒤인 서기전 4세기 무렵입니다. 그런데도 옛사람들은 역사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좋다고 생각했기에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실제보다 일찍 잡았던 것이지요. 이것은 세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근대인인 우리가 단기를 쓰고 개천절을 기념하는 것은 단군을 우리 역사의 시조로 인식했음을 알려 줄 뿐입니다.
며칠 전 『중앙일보』는 동북아역사재단이 동북공정을 인정하는 지도와 자료를 미국 의회에 보냈다는 내용의 기사를 단독으로 보도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큰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기사에 나온 근거를 살펴보니 터무니없는 소리였습니다. 취재원인 새누리당 이상일 의원은 한반도에 한(漢) 군현이 있었다고 하면 동북공정을 인정하는 것처럼 주장했지만, 이미 조선 시대 실학자들도 한 군현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견해를 밝혔으며, 그것은 근대 이후 고고학 발굴로 충분히 증명했습니다. 또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서기전 2333년으로 설명하지 않은 것에 딴죽을 걸었으나, 앞서 설명했다시피 서기전 2333년은 진짜 역사의 시간이 아닌 전설의 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상일 의원이 역사학을 얼마나 공부했는지 저로서는 알 도리가 없고, 고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으나, 전설의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권리가 이 의원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의원이나 해당 기사를 쓴 기자나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동북아역사재단과 역사학자들에게 훈계를 늘어놓는 것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관련 글). 비전문가가 전문가에게 큰 소리 치는 이 난장판을 바라보고 있자니 언젠가 이기백(李基白, 1924~2004)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 문득 떠오릅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역사의 진리인 것이다. 한국 민족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생존의 토대가 되는 것은 진리이다. 진리에 얼마나 충실한가 아니한가에 따라서 개인이나 민족의 위대함과 열등함이 결정되는 것이다. 즉 진리에 충실하는 것만이 위대한 민족을 만드는 기본 요소인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이 아닌 건국의 연대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배반하는 것이며, 그것은 학문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민족이 진리의 터전 위에 서는 것을 방해하는 죄악이기도 하다."
현재 진리를 배반하고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이 정녕 누구인지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첨언 하나. 참고 문헌은 다음과 같습니다.
박은봉(2007),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책과함께
송호정(2004), 『단군, 만들어진 신화』, 산처럼
이기백(1988), 「고조선의 국가 형성」, 『한국사 시민강좌』 제2집, 일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