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378-양사언과 그의 어머니
고금을 통해서 위대한 인물들 뒤에는 하늘같은 어머니의 사랑이 숨어 있고 이러한 모성애의 은공으로 훌륭한 인물이 탄생 되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율곡과 신사임당. 만호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가 그렇다. 그러나 "양사언과 그의 어머니"에 대하여는 자세히 아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양사언의 아버지 '양 민'이 전라도 영광의 신관 사또로 부임해 내려가는 길에 배가 무척 고파서 밥을 먹고 싶었지만 농번기여서 사람들이 없었다. 이 집 저 집을 둘러보던 중에 어느 한 집에서 소녀가 공손하게 나와 식사 대접을 하겠노라고 아뢴다. 그리고는 사또가 어찌 거리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겠냐고 하며 안으로 모시고 진지를 지어 올렸다. 하는 태도나 말솜씨가 어찌나 어른스럽고 예의 바른지 사또는 너무나 기특하여 보답을 하게 되는데, 사또 '양 민'은 소매에서 부채 靑扇(청성)과 紅扇(홍선)두 자루를 꺼내 소녀에게 준다. 그냥 전하기가 멋쩍어 농담조로 "이는 고마움으로 내가 너에게 채단 대신 주는 것이니 어서 받아라" `채단'이라 함은 결혼 전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청색홍색의 옷감들이 아닌가, 깜짝 놀란 소녀는 안방으로 뛰어가 장롱을 뒤져 급히 홍보를 가져와서 바닥에 깔고 청선, 홍선을 내려놓으라고 한다.
어리둥절한 사또는 왜 그러냐고 묻는다. "폐백에 바치는 채단을 어찌 맨손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두 자루의 부채는 홍보 위에 놓여 졌고 소녀는 잘 싸서 안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세월이 흘렀다.
사또 '양 민'이 이런 저런 업무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한 노인이 사또를 뵙자고 찾아 왔다. 그 노인은 "몇 년 전 부임할 때 시골집에 들려 식사를 하고 어느 소녀에게 청선, 홍선 두 자루를 주고 간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사또는 잠시 생각한 후 "그런 일이 있었다.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하며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노인은 이제 서야 의문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다시 말한다. "그러셨군요. 그 여식이 과년한 제 딸인데, 그 이후로 시집을 보내려 해도 어느 곳으로도 시집을 안가겠다고 해서 영문을 몰라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또는 망설임 끝에 말한다. "그 정성이 지극하거늘 내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소. 날짜를 잡아 아내로 맞이하겠소." 식사 한 끼 얻어먹은 대가로 부채 두 자루 선물하며 농담한말이 그 소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삼류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는 실제 이야기다.
바로 이 소녀가 바로 후에 양사언의 어머니가 된다. 중요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사또는 정실부인이 있었고 이 부인과의 사이에 '양사준'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후처, 즉 소실인 이 소녀와의 사이에 士彦(사언)과 사기, 두 아들이 탄생한다.
사준, 사언, 사기 , 이 삼형제는 자라며 매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 났으며 풍채도 좋아 주변으로부터 칭송이 끊이질 않았고 형제애가 깊어 중국의 '소순, 소식, 소철' 삼형제와 비교되기도 했다고 한다.
정실부인이 죽고 모든 살림살이를 후처인 사언의 어머니가 도맡아 하게 되고 아들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그러나 아들들이 아무리 훌륭하면 무엇 하나, 서자들인데! 이 소실부인의 서러움과 한탄은 적자가 아닌 서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실부인의 꿈은 자기 아들들의 머리에서 서자의 딱지를 떼 내는 일이었다.
남편 '양 민'이 죽고 장례 치르던 날,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눈물 흘리며 말한다.
"양씨 가문에 들어와 아들을 낳았으며, 아들들이 재주 있고 총명하거늘 첩이 낳았다 하여 나라 풍습은 그들에게서 서자의 너울을 벗겨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장손인 적자 양 사준에게 울면서 부탁한다.
"이 서모의 누를 가지고 죽은 후라도 우리 큰 아드님께서는 석 달 복밖에 입지 않으실 터이니, 이리되면 그때 가서 내가 낳은 두 아들은 서자 소리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영감님 성복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복제가 혼돈하여 사람이 모르게 될 것입니다. 내 이미 마음을 다진 몸, 무엇을 주저 하오리까 만은, 내가 죽은 뒤 사언, 사기 두 형제한테 서자란 말로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죽어서도 기꺼이 영감님 곁에 누울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양사언의 어머니는 가슴에 품고 있던 단검을 꺼내 자결을 하고 만다. 아들들이 그녀를 부둥켜안았을 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아들을 서자의 멍에를 풀어주고 떳떳하게 세상을 살아가게 하고 싶었던 여인, 죽음으로써 부조리한 인간 차별화를 타파하고 싶었었던 선구자적인 신여성, 양사언이 훌륭한 문인이 되고 후에 장원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된 것은 바로 그 어머니의 죽음으로 이뤄진 것이다. 양사언은 만호 한석봉과 추사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 3대 名書藝家(명서예가)이자 文人이다. 사언의 호가 蓬萊(봉래)인데 사언이 관직에 올라 지금의 철원 사또로 부임하게 되자, 자연히 가까이 있는 금강산을 자주 찾았다. 그래서 그의 호를 봉래(금강산을 말함)라 하였다고 한다. 잘 알려진 그의 시조“태산이 높다하되”는 교훈적으로 자주 인용되는 시조로 노력만 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뜻이다. 꾸준한 노력을 강조한 뜻으로, 오늘날의 <하면 된다><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시작이 반>등과도 일맥상통하는 주제이다. 안일하고 나약하게 성장한 현대 젊은이들이 배워야할 덕목이라고 여겨진다.
▶양사언 (조선 문인·서예가)[楊士彦] 1517(중종 12)~1584(선조 17).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돈녕주부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자신의 〈미인별곡>과 허강의〈서호별곡>및 한시 등을 쓴<봉래유묵 逢萊遺墨〉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