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만수회장님의 카톡에서]
🧡 최고의 축복 🧡
선청성 뇌성마비를 앓았던 중증 장애인인 최창현씨는
머리 아래쪽을 전혀 쓸 수 없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가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입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입으로 조그마한 막대를 조정해 움직일 수 있는 전동 힐체어를 개조해 세계 종단 체험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정말 놀랍게도 미국을 비롯해서 유럽과 중동 35개국 28,000km를 횡단하였습니다.
숫한 말못할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며 순방한 많은 나라들에서 그를 격려하는 의미의 격려품을 선물하고 곳에 따라서는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역사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재된 것을 기념하는 ‘최창현 기네스기념관’에 그의 기념품과 전동 휠체어 등 갖가지 전시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미국 LA에서 뉴욕으로 오는 길에 한 노숙자와 노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 노숙자의 도움으로 아침 식사까지 마치고 나서 계속 자신의 횡단을 이어가려 떠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숙자의 고마움에 보답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자신에게서 별로 줄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한참을 생각 하다 그 노숙자에게 물 두 컵을 갔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의 부탁에 노숙자는 물 두 컵을 가져왔고 가져온 물 두 컵 중 하나는 자신 앞에, 또 한 컵은 노숙자 앞에 두게 하여 노숙자에게 마시라고 권했답니다. 노숙자가 다 마신 물 컵을 보며 ‘최창현’씨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당신의 컵의 물은 없어졌지만 내 앞에 놓여진 물컵은 그대로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가 물을 먹여주지 않는다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고 너무나도 소중한 재산입니다. 많은 것을 가진 것에 감사하고 희망과 용기로서 살아가길 바랍니다.” 라고... 그 노숙자는 그의 말에 눈물을 그렁 그렸습니다.
사람들은 잃고 나서야 이미 가졌던 것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해도 이미 최고의 축복을 가진 자입니다.
☆ 말 씀 ☆
♡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로마서 12 :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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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醫聖) 장기려》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 이야기입니다.
“제가 밤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어서 집으로 가세요.”
장기려 박사는 어느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막막해하고 있을 때 이를 눈치 채고는
병원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가게 해 주었습니다.
“이 환자에게는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 – 원장”
병이 나으려면 무엇보다 잘 먹어야 하는 환자에게 장기려 박사가 써준 처방전입니다.
서울대, 부산대 의대 교수, 부산 복음병원 원장을 지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는 방 한 칸 없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재직중 6.25가 발발했습니다.
이남으로 내려온 후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과 전쟁 부상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1968년 당시 100원 하는 담뱃값만도 못한 월 보험료 60원에 뜻있는 사람들과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을 설립하여 1989년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이 확대될 때까지 20만명의 영세민 조합원에게 의료혜택을 주었습니다.
국가보다 10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그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바보.. 그는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청지기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 가난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했고, 집 한 채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고, 뇌경색으로 반신이 마비될 때까지 무의촌 진료를 다녔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했고, 자신이 칭송받는 것을 싫어 했습니다.
그는 이웃과 나누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특히 아내에 대한 그의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원의 사랑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평양의대병원 2층 수술실에서 그가 밤새워 가며 부상당한 국군 장병들을 수술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폭탄이 병원 3층에 떨어졌습니다.
국군들은 모두 재빨리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일평생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재혼을 권했지만 그는 언제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한 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나는 한 여인만을 사랑하기로 이미 약속을 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잠시 그저 혼자 살겠습니다."
그가 부인을 그리며 1990년에 쓴 망향편지는 우리들의 가슴을 에는 듯합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미국에서 북한을 많이 도운 그의 제자가 북한 당국과 합의하여 중국에서 장기려 부부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그 기회를 사양하였습니다.
"나만 그런 특권을 누리면 다른 이산가족의 슬픔이 더 커진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는 결국 빛바랜 사진을 보면서 아내를 그리워하다가 만나지 못하고,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1시 45분 85세를 일기로 소천하셨습니다.
그때 한국의 언론은 ‘한국의 슈바이처’ 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는 어두운 밤과 같은 그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병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겸손하고 가난하고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醫聖, 장기려 박사님의 "바보처럼 사는 삶", 이시대를 밝히는 등불 입니다. (받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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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살린 놀라운 선교 비사*
지금부터 100년 전 한 젊은 선교사 부부가 미국 선교부에서 한국으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이 젊은 선교사 부부는 충남 공주를 선교 기반으로 하여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공주에서 첫 아들을 낳았는데 첫 아들의 이름을 한국의 광복을 기원하면서
한국식 이름을 우광복이라고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올리브와 로저라는 두 딸을 낳았습니다.
1906년 2월 논산지방 부흥회를 인도하고 돌아오다가 비를 피해 상여간에서 잠시 쉬었는데 바로 전날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을 장례하고 그 장례용품을 보관해 두었기 때문에 선교사님이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졸지에 선교사님 부인은 과부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놀라운 사실은 2년후 선교사님의 부인이 자녀를 데리고 다시 한국 공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공주에 큰 교회들을 세우는데 기여를 하고 47년간 선교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 딸이 풍토병에 걸려 죽었는데 우광복의 여동생 올리브는 11살에 죽어서 공주땅 영면동산에 묻힙니다.
우광복은 공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나오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나오게됩니다
그때가 바로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되어 하지 장군이 군정관으로 한국을 신탁통치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영어와 한국말을 능통하게 구사할 사람이 필요 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선교사 아들 우광복입니다 우광복이 하지의 참모가 되어 한국 정부수립에 관여 합니다.
그때 하지가 우광복에게 자네가 한국 실정을 잘 아니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 50명을 추천해 달라고 합니다.
우광복은 어머니와 상의한 후 어머니가 추천해 주는 50명을 하지 장군에게 소개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중 48명 거의 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정부 수립될 때 요소요소에 기독교인들이 들어가서 나라를 세웁니다.
특별히 문교부 장관에 기독교인이 임명되어 미신 타파를 시작했습니다
국방부장관이 기독교인이 되어 군대 안에 군목제도의 토대를 마련하여 한국군을 하나님의 군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헌 국회 국회의원 거의 모두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제헌국회 속기록 첫 장을 열면 기도로 국회를 개원한 것을 알수 있습니다.
1948년 5월 30일 이승만은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로 국회를 열 것을 주문합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기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성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伸寃)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이때 기독교인이 전국민의 5프로 안 되는 때 였습니다 그런데 윌리엄 사모님이 추천해준 50명의 기독교인들이 각 분야에 들어가서 영향을 미친 결과 10년만에 500만이 되고, 20년 만에 1000만성도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것입니다
여러분 이 기적이 어떻게 가능 했습니까?
미 군정 시절 우광복이 추천한 50명부터 시작했습니다.
우광복에게 누가 50명을 추천했습니까? 바로 우광복의 어머니, 이역만리 타국에서 남편을 잃어 버리고 두 딸을 잃어 버렸는데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사모님 때문입니다.
우광복은 1994년 87세 일기로 소천했는데, "11살에 죽은 내 동생 올리브가 묻혀있는 공주 영면동산 내 동생 곁에 나를 묻어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아마도 한평생 동안 한국에서 풍토병으로 죽은 동생이 가슴에 살아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지금 우광복의 묘가 동생 옆에 나란히 있습니다.
이러한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내나라와 내민족이 깨어서 다시한번 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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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운 자료 감사합니다.
좋은곳에서 쉼 하고 갑니다^^
꽃향기 가득한 예쁜 하루 되세요^^
함께여서 행복합니다^^'
소중하고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웃음이 있는 저녁 식사 하세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