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5일
큰돌개혁장로교회 주일예배 ▶목사;“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1:7) ▶회중과 함께;“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 예배부름과 송영 시편98편 *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다함께 *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제39주일 * 십계명낭독 다함께 * 참회기도 다함께 * 시편찬송 시편77편 헌 상 강성웅 집사 목회기도 인도자 말씀의 강설 요16:5-12② 요한복음강해(90) 주의만찬 고전11:27-32 다함께 * 찬 송 찬송가 536장 * 강복선언 설교자 * 교제의 인사 다함께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 표는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 헌금은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예배 전 봉헌함에 넣어주세요. *주일오후 교리공부:“72회 총회 ‘그리스도의 능동순종’관련 교수회 보고서강독 |
제3부 인간의 감사 제39주일 제104문: 제 5계명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웃어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를 훈계하고 징계할 때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시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그들의 결점까지도 참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
▣성찬본문: 고전11:27-32
▶(고전11:27-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본문/ 요16:5-12
『 (요16:5-12)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복음은 빛과 어두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칠흑 같은 인간의 죄와 비참의 현실을 뚫고 죄인의 영혼에 빛이 있으라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재창조사역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계22:16)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기쁜 소식은 언제나 세상이 직면한 죄와 비참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저주의 현실을 깨달은 자들에게 들리는 해방과 구원의 소식입니다. 그래서 참된 구원의 복음은 회개와 믿음의 이중주가 연주하는 달콤한 합주곡과 같은 것입니다. 요한의 복음은 이러한 어두움과 빛의 이중적 이미지를 탁월하게 묘사하는 방식으로 그려냅니다. 그래서 전체 요한의 상징 언어 중에 지배적인 이미지는 어두움과 빛입니다. 우리가 살피고 있는 예수님의 마지막 고별설교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밤을 배경으로 어두움(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짙게 묘사하는 시각적 특징을 갖습니다. 마치 컬러영상에서 갑자기 흑백영상으로 전환되는 영화적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빛을 보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부재상황의 위기에 처한 교회의 현실을 슬픔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즉시로 이 모든 위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가져오는 극적인 반전을 예고합니다. 이 반전은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같은 그리스도의 승귀에 있고 그 결정적인 국면에성령을 보내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요16장의 내용과 위치입니다.
▶부활의 빛은 십자가의 어두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인간의 죄와 반역을 향해 돌격하는 우주적사건이 골고다 언덕위의 십자가사건입니다. 인간의 죄, 세상의 반역이 폭로되어 정죄와 심판을 받는 일이 먼저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와 구원의 빛이 제시되지 않습니다.
▶애굽의 10가지 재앙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약속되지 않습니다. 바로가 대변하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에 따른 무지와 완고한 의지가 완전히 드러나서야 죄인의 마음에 구원의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 계시됩니다. 이것이 출애굽이 가르치는 회심과 중생의 교리입니다.1)
▶보십시오. 자신은 빛의 자녀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으나 실상은 그들의 죄와 그들 앞에 있는 구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맹인들인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반박합니다.
▶(요9: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요9: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항상 예외 없이 인간의 죄와 부패성, 무능력이 폭로되지 않는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알아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의에 대한 강력한 선포가 일어나지 않은 곳에서 빛 되신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일은 없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출애굽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일종의 애굽이고 배도한 유대주의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바로와 다르지 않았습니다.2) 즉 그들이 그들 안의 죄와 비참의 현실에 대한 진지한 깨달음이 없이 아무도 빛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믿을 수 없었다는 것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약속은 9번째 재앙인 ‘어두움’이후에 주어진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취급할 문제가 아닙니다.
▶합동총회 이단대책위원회가 다룬 헌의안 중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의 교리와 함께, 청교도 회심론에 관한 이단성조사 발표가 있었습니다. 결론은 청교도 회심론을 비성경적이고 불건전한 사상으로 규정하고 그와 관련한 출판사나 저자들과 교류금지를 결정했습니다. 과거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한 17-18세기 청교도들과 국내 자 교단의 교수들과 조엘 비키 교수를 비롯한 청교도 신학자들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이단적이라고 규정한 참담한 결정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것은 현대교회가 가진 비극 중에 하나입니다. 이 시대는 맹인입니다. 자신안의 어두움을 부정하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현대판 맹인들의 행진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교권주의자들이 공적교리를 좌우하는 세대는 교회의 타락의 전형이었습니다.
사도들과 어거스틴을 비롯한 교부들이 가르쳤고,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계승한 청교도개혁주의 신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회심신학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이 세대를 향하여 무어라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회개를 촉구하지 않는 복음은 허풍스러운 거짓선물을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혜자는 이런 기만적인 선물을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은 것이라고 일갈합니다.
▶(잠25:14)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
참된 회개를 촉구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도록 격려하는 복음과 그런 교회는 ‘마른 상수리나무 같고 물 없는 동산 같을’(사1:30)뿐입니다.
주님은 십자가가 교회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박해가 시작되는 날에 교회는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의 죄와 인간의 부패와 반역이 갈보리에서 폭로되었고 정죄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요한복음이 언약적 기소문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씀을 드린 것처럼 예수님의 공적사역은 일종의 기소장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위에서 하나님의 판결이 시행됩니다. 십자가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판결문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행2:36-38)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어떤 이는 오순절 사도의 설교는 유대인을 향한 설교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복음은 회개를 먼저 전해서는 안 되며 믿음을 먼저 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믿음과 회개는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칼빈은 회개를 믿음과 동일한 의미로 간주하였습니다.
▶(행11: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앞에서 우리는 충분히 어두움에 관하여 이야기해야 합니다. 애굽의 9번째 재앙은 ‘더듬을 만한 흑암’이었고, ‘삼 일 동안’ 지속되었으며, ‘서로 볼 수 없을 만한’ 어두움이었기에 아무도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출10:21-22)
바울이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던 것’(행9:9)처럼 말입니다. 예수 믿는 일은 인생에 일어남직한 이벤트나 해프닝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짬을 내 결단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취미나 종교나 견해가 아닙니다. 어느 날,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경험입니다. ▶코로나로 일주일간 고생해본 분들은 그 작은 바이러스가 우리들의 일상을 어떻게 멈췄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하는 일이 우리가 지난 3년 여간 경험한 코로나 팬더믹만도 못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경박한 이해 외에는 다른 설명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질문을 멈추고 십자가앞에 서다
요13장에서 시작된 주님의 마지막 고별설교는 이제 16장에서 정점을 찍고 결론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17장은 대제사장적 중보기도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주는 무게감에 압도되었고, 정신적인 패닉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요16:5-6)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근심이 가득하다(plhrovw)’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물에 잠겨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물을 머리 위까지 부어 물속에 침잠해있는 것처럼, 제자들은 근심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근심의 문제는 단순한 두려움이나 염려의 정서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정서적으로 이미 공황상태에 처했지만 그들은 십자가 앞에서 주님이 ‘어디로 가는지’ 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을 직면하고 있었고 그 당혹감에 압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그들은 매우 구도적이고 열렬한 행동파 제자들이었습니다. 배와 그물과 아버지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좇았던 제자들(요한, 야고보, 베드로와 안드레)이었고, 평생 몸담은 세리의 길을 하루아침에 포기한 제자도 있었습니다. 품속에 칼을 품고 이스라엘의 독립과 다윗의 왕국의 회복을 위해 투신했던 열심당원 출신의 제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열정과 비전의 사람들이었던 제자들이 자신의 무능력과 무지와 비겁함을 깨닫고 절망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즐거워했지만 그 나라가 요구하는 대가와 희생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전령이 되고자했고, 다윗의 왕국의 지상적 재건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헌신과 열정을 쏟아부을 대상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과 고별설교를 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이 십자가 앞에서 더 이상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는 한계와 절망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나의 구원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곤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데 무엇인가 의미 있는 기여를 해야할 것 같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에는 자기 본위적 신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원죄적 욕망을 ‘자기애적 욕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욕망은 자기성과 가능성의 신학을 구성합니다. 예루살렘의 아들들로 태어난 제자들의 내면 안에는 자기성이 구축한 자력구원의 욕망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행복과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면 우리는 벽을 느낍니다. 우리가 확신했던 길을 잃어버립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의 길을 찾기까지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알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안에서 죽고 그분과 함께부활했음을 배울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철천지원수가 타락한 육적 본성으로서의 자아라는 사실을 점점 더 깊이 체화해갑니다. 그래서 신자로 살아가는 것은 거룩한 신적 수동태(질문없음)를 경험하고 익숙해져갑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절망할 수 록 오직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아를 사모하고 신뢰합니다.
▶(롬7:2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자, 주님은 세상의 미움과 교회의 시련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주제는 또 다른 전환을 예고하면서 교회를 위로하시는 약속들을 주십니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응전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보내심’입니다.
▶(요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러나 성령의 오심이 좋은 소식이 되기 위해 그들은 먼저 근심에 빠져야 했습니다. 영생을 구하는 부자청년을 주님은 ‘심히 근심하게’(눅18:23)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에 사로잡힌 절망하는 제자들에게만이 성령은 유일한 위로와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 고별설교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항상 그리스도를 앞서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아니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하나님 나라의 전위부대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래 의욕과 열정이 가득한 사람은 질문이 많기 마련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고, 하려하는 자들은 항상 질문합니다. 설교도 가끔은 그런 효과를 봅니다. 질문이 필요 없는 설교는 회중을 깊은 장탄식과 아픔을 줍니다. 그들은 쉽게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오직 기도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질문보다는 영혼의 고뇌와 필요에 목마른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그들의 활기차고 적극적인 태도에 걸맞지 않는 모습으로 깊은 슬픔과 근심에 빠져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유대문화 안에서 도제관계 안에서 질문하는 목적은 ‘행동과 실천’에 있습니다.3) 어떤 시행착오를 겪어도 끈기 있게 도달하고자하는 목적을 이룹니다. 정답은 자신이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지금 질문을 멈추고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들은 당혹해하고 있고 무얼 더 알고 행동해야하는지에 관하여 질문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요16:5-6)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십자가 앞에서 전통적인 유대인의 교육방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성을 고양하고 자기 주도적 삶을 격려 받았다면 이제는 정 반대의 상황에 직면합니다. 그들은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잃은 것같이 두려워하고 당혹해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요13장 다락방 만찬이 시작된 이후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제자들의 질문을 관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베드로와 도마와 빌립의 순서대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질문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궤를 같이합니다. 즉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려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함께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길을 홀로 걸어가십니다. 이 묘한 실랑이는 결국 마지막 지점에서 제자들로 하여금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질문들을 재구성하면 마치 성전의 입구에서 지성소에 이르는 여정을 상상하게 합니다.
① 베드로; (요13: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는 죽는 자리까지 가겠다고 결단합니다.(37절)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진노의 번제단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감당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는커녕, 오히려 그분을 세 번 부인할 것입니다.
▶(요13:38)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지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②도마; 도마는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길을 묻고 있습니다. (요14: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그는 마치 성소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 성소로 나아가는 길에서 그는 멈추어야 합니다. 그 길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 말입니다.(요14:6)
③ 마침내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구했습니다. ▶(요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그는 하나님의 현현을 구합니다. 마치 지성소적 공간을 열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현현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④ 마지막으로 유다는 질문합니다. ▶(요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절) 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면서도 세상을 향하여는 숨으시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참된 제자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자,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여야 합니다.(23절) 오직 그들에게 주님은 영원한 거처(모레이/성전의 방)를 약속하셨습니다.
▶유다가 질문하는 것처럼 기독교신앙은 세상을 설득시키고, 굴복시켜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항상 그리스도를 대적할 것이고, 정죄를 받았습니다. 오직 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찾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소명으로 받은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다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전시체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증인으로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거룩한 신적 수동태의 삶은 주님이 보내실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의 오심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세상을 향하여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입니다.(요16:8)
▶여러분은 엘리야가 승천을 앞두고 그를 붙좇았던 엘리사를 기억하십니까? 엘리사는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와 마침내 요단강까지 엘리야를 붙좇았습니다. 그 요단강에서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는 엘리야가 회오리바람과 함께 하늘에 오르자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왕하2:12) 라고 절규했던 것처럼, 이제 제자들의 침묵 속에서 그런 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무엇을 구했는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왕하2: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엘리야는 옷을 남기고 떠났습니다.(왕하2:14) 엘리사는 자신의 옷을 찢어버리고 그 스승의 옷을 취했습니다. 이미 그에게는 거룩하신 성령이 임했고, 그는 스승 엘리야처럼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이 그림이 떠나시는 그리스도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약속하시는 말씀과 놀랍게 중첩됩니다.
▶(요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사랑하는 지체여러분, 우리는 흑암의 재앙이 내리던 밤에 주님의 고별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은 그분이 남긴 ‘옷’ 곧 말씀과 성령을 유산으로 상속받은 지상의 엘리사와 같습니다. 진리 안에서 길을 찾고, 인내하며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의 승리를 증거하며 사십시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의 오심이 가져올 놀라운 반전을 경험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시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
1) 혹자는 애굽에 내린 재앙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어두움과 회개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면제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어린양의 죽음안에서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애굽에 내려진 재앙들을 통해 그들의 죄와 비참의 문제를 진지하게 숙고하고 회개와 믿음으로 나아와야만 했음을 기억하라.
2)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출애굽 모티브를 주목하라. 세례요한은 자신의 정체성과 사역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이사야40:3-4을 인용함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일종의 출애굽사건의 재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요1:22-23)
3) 유대인들의 학습방식은 질문과 대답의 형식이었다. 스승은 제자들의 질문에 답을 주는 방식으로 지식의 내용과 체계를 효과있게 전달하곤 했는데 이것을 ‘후츠파와 하브루타’ 방식이라고 한다. 학습자가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아냄으로서 지식이든 지혜이든 스스로 체화하고 실천하는 자기주도형 학습방식이었다.
▣말씀의 반추를 위한 생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