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9년 10월
지리산칠선계곡(智異山七仙溪谷)
-단풍의 오묘한 멋 칠선골 등반로를 소개 한다-
成 山
10월도 문턱에 들어서면 차가운 바람이 옷 속에 스며들고 푸르고 드높은 하늘은 칠선골 등반로와 같이 계곡 길을 택하여 오르는 등반에는 안성맞춤의 적기라 아니할 수가 없다.
장구한 시일동안 편마암과 화강암은 수정같이 맑은 계곡에 씻기고 달아 설악산 십이탕골을 능가토록 우아한 계곡의 맵시와 십 수 개의 소와 담(沼와 潭) 7.8개의 폭포 등이 장관을 이루며 홍엽(紅葉). 등엽(藤葉). 황엽(黃葉). 갈엽(葛葉)이 적지적소에 오묘한 형태로 뒤엉켜 보는 이로 하여금 황홀경으로 이끄는 지리산 최대의 계곡 칠선골 등반로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 × ×
지금까지 지리산에는 주능선에 연결된 능선이 거개가 등산로로 닦여져 능선위에 주어진 조물주의 조화는 지리 지맥만이 갖는 남성적인 수려 장엄한 경치를 보여주고 있다.
남한 최고고원으로 꼽히는 광활한 세석평전이 있는가 하면 특이한 고산 식물대에 피어난
이름 모를 고산 꽃들의 황홀한 정경이며,
어둑어둑한 잡목터널을 지나는 무시무시함이며 한길을 넘는 싸리목 사이를 넘는 통쾌함과, 수해(樹海)가 바람에 물결치는 꿈같은 경치도 가관이지만
주능선을 타고 돌면 보이는 기암기봉의 고고한 자세며 갑작스레 피어낫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운해 사이로 보이는 산악미의 웅위장엄(雄偉壯嚴)한 정경을 빠짐없이 관망 탐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주어진 지리산 주능선 코스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등산코스임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 소개하고자하는 칠선골 등반코스는 이러한 정기를 유유히 실어 내리는 계곡대로의 묘미와 장관을 위에 말한 코스에다 첨가한다면 얼마나 멋진 등산코스가 될 것 인가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더군다나 상봉 중봉간의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 대를 돌파하는 숨 막히는 스릴도 능선에서 내려 다 보아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고상한 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지금가지 각 지방별로 입산하는 코스를 볼 때 시간적으로나 경비관계상 교통편이 편리한 코스를 주로 해야 하는 입지적인 핸디캡이 주어져있기는 하나 가능한 한 한번이라도 찾아가보기를 재삼 권하며 두서없는 글월로 칠선골 등반로를 소개하고자한다.
× × ×
부산을 기준으로 함양행이나 진주행으로 버스로 출발하면 9시간 남짓 걸려 함양에 14시경 도착을 한다.(남원을 기준으로 하는 지방은 15시경 남원발).
여기서 즉시 연결되는 마천행 버스가 없으므로 16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기다리든지 함양-남원행 버스로 인월까지 가서 다시 남원서 마천 가는 버스로 마천까지 들어간다.
함양서 마천까지는 70여리이지만 길도 나쁘고 인월로 돌아가기 때문에 2시간정도 걸려 도착한다. 종일 차편에 시달리기 때문에 매우 고단하겠지만 의탄에서 2박3일로 상봉에 오를 것을 전제하여 3km를 더 올라 추성부락에서 야영하면 무난하다. 추성부락에는 20명 정도가 만약의 경우 대피할 수 있는 동사(洞舍)가 있어 좋다.
감과호두가 특산물이라 간식과 영양에도 도움이 된다.
다음날은 추성리에서 두지터를 넘어 두지동으로 가는 코스도 있으나 길을 완전히 버리고
동쪽계곡을 따라 500m정도 오르면 용소폭포가 나타난다. 폭포라면 흔히 수직폭포를 연상하지만 용소폭은 수평폭포로 유명하다.
기우제를 지낼 때나 부락에 우환이 생길 때 혹은 산신제를 지낼 때면 돼지를 통째로 집어넣어 제를 지내는 곳인데 좌우로는 암벽이 치솟아 껌껌하고 沼는 시퍼렇게 입을 벌려 비스듬히 내려붓는 급류를 받아 마시는 관경은 왈칵 전율을 느낀다.
다시 계곡을 타고 500m정도 오르면 두지동이 나온다.
2채의 초가와 4~5동의 담배건조장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다시 500m를 오르면 칠선동의 3~4동의 초가들이 경사 45도쯤 되는 비탈 중턱에 서 있고, 밑은 본격적인 칠선골 입구를 말해주듯 우렁찬 개울물소리에 선녀탕이 입을 벌린다. 직경8m정도의 탕(소)에는 알지 못할 물고기들이 유유히 줄달음치고 좌우양쪽의 비탈에는 구골참나무. 노각나무등 활엽수가 울창이 서있어 다람쥐들의 귀여운 자태들이 보인다. 좌측에 있는 국골은 도토리를 먹으러 내려오는 곰들의 소굴이라 꺾기사냥(곰들이 도토리를 따먹으려고 나뭇가지를 꺾는 소리로 곰의 유무를 알고 추적하여 곰을 잡는 사냥)을 하는 사냥꾼들에 의해 64년도에는 34마리,65년도에는 18마리나 잡힌 유명한 곳이다.
다시 조금 올라가면 옥녀탕이 나온다. 계속해서 소의 명명식을 하던 모 인사가 하도 수효가 많고 올라갈수록 더욱 아름다운 소가 발견되기에 나중에는 질려서 "모르겠다! 내가 어디 작명대가냐"하고만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이다.
소는 올라갈수록 아름답고 훌륭하다. 도중 물이 불면 도저히 계곡을 탈수 없을 정도의 곳이 있으나 도벌꾼들이 다니든 계곡옆길이 있으니 안심할 수 있다.
칠선동에서 약 500m 오르면 비선담이 나타난다. 화강암과 편마암의 딱딱해 보이는 바닥이 거센 물결의 흐름에 의해 울퉁불퉁 기기묘묘한 형태로 시야를 도취시키는가 하면
거울 같은 수면은 푸른 하늘과 주위의 아름드리나무들의 영상을 여실히 반영시켜 한없는 자연의 조화 속에 감화되어 무상무념의 경지에 놓여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좀체 자리를 뜨고 싶지 않으나 다시 륙색을 메고 오르노라면 몰지각한 인충(人蟲)들의 상처가 여기까지 스며들었는가 싶어 아연해진다.
세 사람이 손을 잡고 안아야만 겨우 안기는 거목이 빨래할 때 쓰는 함지로 둔갑되기 위해 쓰러져있는가 하면 헤일 수 없을 정도의 목기 제작소가 당국의 눈을 피해 바위사이나 음침한 곳에 위장되어 있으며,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공공연히 조출되어 무자비한 도벌이 아직도 성행하여 여전히 도벌의 전성기를 이루고 있는 실정에 산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뜻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비선담에서 다시 1km오르면 계곡에서 유일한 캠프사이드가 나온다.
이곳도 이상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계곡 옆은 급경사이고 수목도 많으며 돌밭이기 때문에 좀체 캠프지가 없는 관계상 칠선골 루트에서는 훌륭한 캠프지라 아니할 수가 없다.
이곳을 놓치면 다시 3km정도 올라야 하기 때문에 강행할 수 없을 경우 여기서 야영을 하는것이 좋다. 산죽지대이므로 짜르지 말고 그냥 옆으로 자빠뜨려 쿠션으로 사용하면 좋다.
장비만 훌륭하다면 화목은 수없이 굴러져있기 때문에 캠프파이어 주변에서 노영하는 것도 재미있겠으나 다음날의 컨디션도 고려해야한다.
여기에서 다시 1km를 더 올라가면 부일폭포를 발견한다. 높이 7m 넓이 7m 정방형 같은 폭포이지만 폭포의 수량이 많을 경우 오를 수 없기 때문에 우측능선으로 20m정도 가로질러 오르면 폐로를 발견할 수 있다.이 길을 따라 200m전진하면 합수골에 이른다.
상봉, 중봉, 하봉에서 흘러내리는 6개의 물줄기가 합한다는 곳이다. 처음에는 어떻게 합수가 된다는 말인가 하고 부정도 했지만 좀 더 높은 곳에서 관망한 후 무궁무진한 신의 조화에 다시금 느낌을 얻었다.
여기서 부터는 계곡이 갑자기 협곡이 되는 것과 동시에 양옆은 거대한 절벽을 이루고 개울은 깊어 요소마다 대륙폭포 동아폭포 등 폭포를 형성하며 계곡을 들어서면 절경을 이룬다. 그러나 특수 장비가 불충분하면 계곡을 타기가 불가능하며 시간도 상당히 소요됨으로 합수골에서 좌측 비탈을 거슬러 올라 다시 우측으로 트레바스하는 길을 찾아서 행동함이 무난하다.
합수골에서 300m오르면 절벽 밑으로 칠선계곡에서는 제일 큰 대륙폭포가 있으나 찾기가 힘이 들고 길을 따라 계곡을 나아가면 절벽 밑으로 다시 계곡이 입을 벌린다.
절벽을 타고 내려가는 길을 따라 계곡으로 들어서면 자일 3층폭포가 반겨 맞는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영롱한 무지개가 피로를 들러준다.
여기서 부터는 계곡을 다시 탈수 있으나 계곡을 버리고 길을 타면 1km정도에서 거대한
모개바위를 보게 되고 계곡이 훤히 나타나면서 동남쪽으로 멀리 상봉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인기척은 물론 산새들의 노래 소리 조차 듣기 힘들 정도로 적막한 산속에 미미하게 흐르는 개울물소리가 침묵을 깨뜨려줄 뿐이다.
간혹 동남풍이 내려불때면 상봉에서 지르는 야호소리가 가냘프게 들릴 정도이다. 여기서부터는 지리산 최고의 원시림지대가 형성 되어 잣나무 전나무 등의 침엽수들의 늘 푸른 나무들이 빽빽이 둘러쳐져서 계곡좌우 비탈은 무시무시할 만큼 음침한 기분에 휩싸이게 하지만 계곡을 타는 길은 항상 밝고 맑아서 좋다.
1km정도 다시 오르면 놀라울 정도로 엄청나게 큰 산사태가 나서 계곡을 가로막아 버티고 있는 곳에 닿을 수 있다. 높이 100m정도의 우측비탈이 무너지면서 직경3~4m의 커다란 바위들이 넓이 20m가량의 계곡을 건너 뛰어 반대편 비탈 40m 높이까지 수없이 뛰어 오른 것을 볼 때 산사태의 위력에 간이 서늘해 진다.
여기서 부터는 계곡은 좁아지고 볼 것도 없어 좌측으로 희미하게 그려진 폐로를 헤치고 800m정도 오르면 캠프지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상봉까지 직선거리는 불과 2km이지만 하늘을 뒤엎은 처녀림과 급한 경사와 톱날능선의 넝쿨 및 고산철쭉은 유달리 보행속도를 늦추고 길을 잘못 택하면 뺑뺑이를 돌아야 하는 실로(失路)의 위험도 있을뿐더러 자칫하면 중봉이나 상봉으로 빠지고 마는 고된 코스로 들어가고 말게 됨으로 주의해서 성급한 계획이나 신중성이 없는 진로 결정을 해서는 않된다. 물론 상봉이나 중봉으로 나아가지 말란 법은 없으나 톱날능선을 타는 통천문으로 빠지려고 여 태 올라온 코스를 다시 뒤로 돌아간다는 것도 우습지만 세발자국 오르고 두발자국 미끄러지는 급경사로 올라 시간적으로 체력적으로 손해를 보는 어리석은 행동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영지에서 완전한 피로를 푼 후 물 준비를 착실히 하여 4시간을 소요시간으로 잡고 오르기 시작해야 한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없기 때문에 폐로가 끝나는 대로 우측능선을 붙들고 톱날능선을 타고 통천문으로 바로 올라서지 못했다 할지라도 주능선에는 뚜렷한 등산로가 있기 때문에 이 길을 따라 15분정도 걸려 상봉에 도착할 수 있다.
다음부터는 종래의 코스를 따라 마음대로 하산하는 것이 무난하겠지만 가능하면 중봉과 상봉사이의 중봉계곡을 따라 신선너들을 거쳐 순두류로 하산하여 지리산 마지막 공비 정순덕이 숨어살던 국사봉 언저리의 산죽터널을 뚫고 대포리로 빠지는 장장 24km의 코스도 흥미를 돋우는 코스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1969년 10월
<대륙산악회대표위원> 成 山
서정가득한 비선담에서
영특하신 우리 산신령님
성 산 (대산련 부산직할시 연맹 자문위원/대륙산악회 고문)
● 1959년 10월 * 일
추석을 전후해서 어렵게 시간을 내었다.
윤인진 군과 이명선군(작고)과 셋이서 지리산을 찾았다. 오랫동안 별러 오던 중산리-순두류-법계사로 오르는 길을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지도가 있을 리 없다. 지난밤에 상중산리 홍순표씨댁에 민박하면서, 길을 잘 안다는 나무꾼들을 모아 얘기를 듣고 개념도를 만들어 조심조심 오르기 시작했다.
면이 있는 논길과 밭길을 돌면서 중산리 윗 계곡에 도착했다.
왼쪽에 있는 민가는 칼바위로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 논길을 따르면 순두류라했다.
사람이라도 있으면 물어볼 텐데 답답한 마음으로 약도만 들여다보며 올랐다.
중산리에서 1시간40분 정도 헤매고 나니 지붕이 보인다.
날아가고픈 심정으로 순두류에 닿으니 집이라고는 다 찌그러져가는 초가집 네 채가 고작이다. 중산리 보다는 작겠지 생각은 했지만 이토록 초라한 부락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주인은 安氏라고 했다. 안씨로부터 한 번 더 상세한 설명을 듣고도 안심이 안되었는데, 길이 빤히 나 있으니 안심하고 가란다.
큰 위안을 받고 다음을 기약했다.
아는 사람들은 길이 빤 할런지 모르지만 우리는 첩첩이 들어선 잡목 때문에 동서남북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다시 돌아설까 생각도 여러 번 해 보았지만 이왕 내친걸음이다.
생각 끝에 판쵸를 한 장 잘게 찢어 길 표시를 하기도 했다.
만약의 경우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군용대검으로 나무를 자르고 잔가지는 꺾으면서 길표시를 하기에 소홀하지 않았다.
벌써 단풍이든 큰 나무들에선 한 잎씩 낙엽이 떨어지고 있는데, 수림 속에 갇힌 우리 신세는 적막강산이었다.
계곡이 빨리 어두워진데다가 적당한 캠프지가 없어 잡목위에다 A형 텐트를 덮어씌우고 잡목사이로 발을 겨우 뻗어 새우잠을 잤다.
10월 * 일
아침식사를 하면서 작전을 바꾸기로 하였다.
무거운 짐을 한 없이 지고 다닐 것이 아니라 500m단위로 길을 개척한 다음 짐을 운반하자는 작전이었다.
간식과 수통만을 주머니에 챙긴 다음 칼과 도끼 등을 들고 길을 뚫기 시작했다. 길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쓰러진 고목 때문에 완전히 차단되기도 했다.
우회하기도, 좌 회 하기도, 엉금엉금 기기까지 했다. 단지 초조한 마음은 금물이었다.
4시가 넘었다. 어디서 야영을 해야 하는지 걱정이 되는 시간이다.
그런데 산 밑에서 쇳소리가 들려온다.
모두가 자동적으로 조용해졌다. 땡 땡 땡. 얼마나 반가운 소리인가.
그러고 보니 법계사 뒤편을 돌아 법계사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명선군이 나는 듯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헤집고 나가더니 법계사 초막이 저만큼 보인다고 고함을 지른다.
일시에 피로가 싹 가시고 개선장군처럼 되어 밑으로 향했다.
손보살님의 따뜻한 손길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10월 * 일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올 때 마다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던가.
더위에, 추위에, 비 올 때나 바람 불 때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맹세에 맹세를 거듭하면서도
또 다시 찾아오지 않고는 베기지 못하는 줏대 없는 인간임을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을 욕해 왔던가.
그러면서도 또 다시 법계사에서 일박하고 만 내 자신이 한없이 미웠지만 법계사까지만 오면 이런 생각이 스르르 지워지고 여기까지 고생고생하면서 오른 걸 생각하면 내려가기 싫어지는 게 또 다른 마음이다.
무거운 륙색으로 정상에 올라가서 꼭 필요한 1박2일의 주부식과 간식, 그리고 장비만 챙기고 나머지는 법계사에 두고 출발했다.
한결 가벼워 경쾌하리라 생각했지만 체력이 차츰 떨어지더니 어제와 마찬가지로 힘이 든다.
애써 오른 보람이 있어 또 다시 천왕봉에 올랐다.
올라서면 언제나 좋은 것. 이것이 나를 미치도록 만들었단 말인가.
올라온 것이 아까워 또 1박 하기로 했다.
지리산 주능선들의 낯익은 봉들이 한없이 펼쳐져있고 계곡이며 능선들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다.
이 계곡은 이름이 무엇이며 저기 봉들은 이름이 무엇일까?
산 일지를 쓰는데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하산하면 선배님들을 찾아뵙고 산 이름이며 계곡 이름이며 중요한 지점들의 이름을 새로 만들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며, 이틀을 산꼭대기에서 약도를 그리며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아서 삽입하기 바빴다.
10월 * 일
이틀간의 천왕봉생활을 마치고 법계사로 내려오니 약속대로 손보살이 팔선주로 환영한다.
팔선주는 8가지 나무껍질과 뿌리로 빚은 술인데 청주처럼 노르스럼 한 것이 굉장히 독했다.
상봉답사의 무사고를 축원하면서 축배를 들었다. 얼음만 얼지 않았다 뿐이지 바깥 날씨는 매우 차가운 날이었지만 얼마나 군불을 때었는지 엉덩이가 뜨거워오고 술기도 도도하게 올라 흥이 절로 일어난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처럼 쏴하고 바람이 불 때면 신문지나 돌가루푸대 같은 것으로 도배를 한 천정이며 벽이 벌렁벌렁하고 동시에 흙먼지가 촛불 속에서도 뿌옇다.
내일 아침 코라도 풀라치면 새카맣게 나오겠지만 그래도 좋다.
내가 사랑하는 지리산의 품에 앉겨 좋은 벗들과 진미의 팔선주를 대작하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나눈 다는 것은 확실한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방문 밖에서는 상제가 아까부터 장작 팬다고 뚝딱거리고 있다.
헌데 3시경이나 되었을까? 상제가 호랑이 보라고 소리친다. "와, 크다. 송아지만 하다"하고 혼자 중얼대고 있다.
호랑이 발자국은 많이 보았지만 실물은 본 일이 없었는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겨우 기어 드나드는 자그마한(줄을 당겨 여닫는 문)문을 왈칵 열고 내다보았다.
정말 말로만 듣던 호랑이가 대웅전(서까래만 세워둔 곳)앞을 어슬렁어슬렁 지나고 있지 않는가.
좀 더 자세히 볼 요량으로 양말 신은발로 마당에 내려섰다.
굉장히 컸다. 대웅전 앞을 유유히 지나 바위위의 3층 석탑을 지나고 있었다.
마당이라야 폭 3~4m길이 5m정도인데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든 말든
산중왕답게 자세를 흩트리지도 않고 앞만 보고 조용히 걸어갈 따름이었다.
한번이라도 뒤돌아보았으면 하는 소망도 헛되이 실고랑을 건너 능선 잡목 속으로 사라져갔다.
얼굴이라도 한번 봤으면 하는 했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상견례에 궁둥이만 보여준 채 아쉽게 헤어지고 말았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는 우리에게 상제가 이러쿵저러쿵 아는 척 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놈 상제야! 냉큼 들어오너라!" 벼락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항상 조용하기만 했던 손보살이 대노를 했던 것이다. 어디에서 이런 쇳소리가 나는가?
멀쓱해진 우리도 상제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이놈 상제야 우리 산신령님을 보고 호랑이가 무엇이냐?"준엄한 꾸지람이 있었다.
상제가 나가고 나니 손보살은 예전의 손보살로 돌아와 있었다.
큰소리를 쳐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고는 하늘같은 영특하신 우리 산신령님을 호랑이라고 해서는 되겠느냐고 반문을 했다.
빨래를 할 때나 식사를 할 때나 자주 나타난다고 했다.
어쩌다 마주치게 되면 합장을 조용히 한다고 했다.
그러면 모른 척 지나가 버리고 절대로 해꼬지를 안 한다고 했다.
영특하신 우리 산신령님, 영특하신 우리 산신령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이 대단했다.
60년대 초 법계사와 손보살님(좌측 두번째)
호랑이의 안내로 지리산을 오르다
● 1962년 6월 * 일
두꺼비 걸음으로 뚜벅뚜벅 걷는다.
그러나 용솟음치는 희열과 즐거움이 몸 가득히 솟아오른다.
6월의 날씨치고는 너무도 맑고 청명하고 산 전체를 물들이는 연초록 신록이 눈부시게 화사하고,
들판의 풍경 또 한 싱그럽기 한량없다.
곡점을 출발하여 동당리 부락으로 들어서니 손에 잡힐듯 가까운 천왕봉의 자태가 한없이 아름답다.
어제 밤 막차로 곡점에 닿아 막걸리 도가에서 1박하고 무사히 성공하라며 마신 막 거른 막걸리 한 사발이 흥을 돋우는지 모른다.
혼자서 오르는 단독 등산이라 해도 신명이 났다.
한 발 한발 오를 때 마다 엉덩이에 찬 수통과 오른쪽 옆구리의 군용대검, 왼쪽의 야전삽이 덜거덕거리고
목에건 카메라의 쌍안경이 거추장스럽지만,
가고프면 가고 쉬고프면 쉬고 밥이나 잠도 마음대로 하는 자유스럽기 짝이 없는 등산이었다.
다만 륙색의 무게가 부담이라면 부담이었다.
자연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고독은 이겨낼 수 있겠고,
체력은 이만하면 걱정될게 없고 길은 아홉 번째 오고 있으니 눈감고도 오를 수 있다(이 바보 같은 생각을 왜 했을까?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친다.)
흥얼거리며, 노닥거리며 2시간 만에 8km를 걸어서 상중산리에 도착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6월의 태양이 제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옷은 물에 빠진 것 같이 흠뻑 젖었다.
내가 걸어오는 것을 논밭에서 보았다면서 친지들이 몇 명 모였다.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있으니 홍순표씨가 막걸리 한 동이를 내어 왔다.
오늘은 법계사까지만 가면 되는 일정이고 또 바쁜 일도 아니라 안 되면 내일 출발해도 상관이 없는 일이다.
권하는 대로 마시기 시작했다. 떠들고 마시기를 얼마나 했을까.
거울같이 맑던 하늘이 깜깜해 오면서 후두 둑 비가 쏟아진다.
좀 더 있으니 뇌성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거짓말처럼 쏟아진다.
"보이소, 잘됐심더. 오늘 여기서 묵고 가라고 하늘이 말리는 거 아니요" "맞심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심더." 하다말고 깜짝 놀랐다.
비가 많이 와서 중산리~순두류의 계곡이 넘쳐버리면 도강이 안 된다는 것이 생각이었다.
삽시간에 먹은 술이 확 깸을 느끼고 부랴부랴 서둘러 비가 기세를 조금 꺾을 즈음 만류도 뿌리치고 법계사로 향했다.
걱정과는 달리 개울물은 아직 불어나지 않았지만 비는 줄기차게 내렸다.
판쵸를 뒤집어썼기 때문에 륙색이며 옷은 젖지 않았지만 상의는 땀에 젖어 더욱 떱떱했고 판쵸 앞자락이 발에 밟혀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다.
가까스로 도강을 마치고나니 생각이 달라진다.
칼바위~망바위의 몸서리쳐지는 급경사며, 문창대~법계사의 급경사를 생각하니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이왕 도강을 했으니 길은 좀 더 돌아가더라도 순두류에서 자고 내일 법계사로 오르면 되겠다. 생각하고 순두류로 향했다.
이젠 순두류코스도 잘 알기 때문에 지름길로 올랐다.
순두류에 도착을 해서 반가움에 앞서 고함을 질러보지만 빗소리 때문인지 내다보는 사람이 없다.
방문 앞에 서야 소리를 듣고 내다보던 안씨(필자가 매번 신세를 지는 분)가 반가이 맞아준다.
륙색을 받아 주며 어서 들어오라고는 하지만 비 때문에 밖에서 놀지 못하고 방안에 오골오골 모여 있는 얘들을 보니 일박은 커녕 궁둥이 붙일 자리도 없다.
옆에 있는 집도 사정은 똑 같았다.지난번에 여기서 자고 갈 적에 자기부인은 마당에서 돗자리를 깔고 자게 하던 것이 생각났다.
비가 올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는 것을 왜 생각 못했던가. 바보스러움과 후회가 교차되어 오지만 오도가도 할 수 없는 처지다.
시계를 보니 4시 15분, 비는 계속 내리지만 안개비로 바뀌어 있었다.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6km만 더 가면 법계사.
밤을 세어서라도 오르리라 굳게 다짐하며 과감히 안씨와 손을 잡고는 헤어졌다. 이제는 굼벵이처럼 행동할 때가 아니다.
서둘러야 한다.점점 가팔라지는 산길을 헉헉 거리며 올랐다.
두 시간쯤 올라왔을까, 아무래도 길이 이상하다 했는데 딱 끊어지고 말았다.
륙색을 풀어두고 여기저기를 아무리 헤매어도 길을 찾을 수 가 없다.
길에 대해서는 큰 소리 치던 놈이 이게 무슨 꼴이냐.
욕을 하면서도, 조용히 앉아서 담배를 피어물고 어디서부터 길을 잃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안개비가 내리는 주위를 천천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뒤가 이상하다.
이런 것을 예감이라고 하던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12~13M정도의 거리에 있는 바위위에서 커다란 호랑이가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지 않는가. 아뿔싸!
큰일이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큰짐승을 만나면 인기척, 불, 금속성으로 위험을 피하라는 경구가 생각났다.
돌을 주워 륙색 사이드포켓에 들어있는 항고를 두들겨 금속성을 내며, 노래도 부르고 담배를 세대를 한꺼번에 물고 연기를 뿜었다.
등허리에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땀방울이 줄줄 흘러 내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아주 짧은 시간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랜 시간이 경과한 것 같기도 하였다.
뒤를 흘끗 쳐다 보았다. 없다. 호랑이가 없어진 것이다.
탁구공보다 좀 더 크다고 느껴지던 가만히 내려다보던 눈도 그곳에 없었다.
륙색을 둔 채 호랑이가 있던 바위로 올라갔다. 커다란 발자국이 안개비에 씻기고 있었다.
손바닥을 쫙 펴고 크기를 비교해 보니 손바닥보다 좀 더 컸다.
네개의 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직선상에 발자국을 남기는 눈으로 쭉 추적하다가 아, 이게 길이 아닌가.
호랑이가 나에게 길을 가르쳐주려고 나타났다는 말인가.
기쁘기도 하지만 섬뜩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제 길을 찾았으니 방심하고 있을수 만 없었다.
다시 륙색을 짊어지고 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한 시간도 안 걸었는데 계곡이 어두워졌다.
플래시를 켜고 길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바위틈이라도 있으면 피곤한 몸을 누일생각밖에 없다.
쏴아 쏴아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비가 그치려나 보다. 아무리 보아도 칠흑 같은 어두움 뿐 인데 법계사는 나타나지 않는다.
시간을 봐도 벌써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사람 참 미칠 지경이다. 쏴아쏴아 바람이 또 지나간다.
큰 나뭇잎에 붙어있던 물방울이 후두두둑 떨어진다. 젖은 옷은 관심도 없다. 잡목에 걸리적 거리던 판쵸도 벗은 지 오래이다.
물방울이 떨어지니 오히려 시원해서 좋다. 그때 멀리서 빤짝하는게 보였다.
그런데 불빛이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는 보이지가 않는다. 허기가지고 피곤해지니 헛것이 보이는가.
바람이 다시 쏴아 하고 한 차레 지나간다. 나무둥치가 잎을 따라 춤을 춘다.
그때 다시 빤짝하는 걸 분명히 보았다. 법계사다. 법계사가 아니면 불빛이 있을 수가 없다.
아니 법계사가 아니라도 좋다. 사람이 있는 곳 이면 족하지 않는가. 피로도 잊은 채 정신없이 올라갔다.
법계사. 그토록 고대하던 정든 법계사였다.
깜짝 놀라는 손보살을 보는 둥 마는 둥 방에 드러누워 버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손보살이 깨운다.
인삼을 다려 왔으니 마시고 쉬란다.(손보살은 법계사 모퉁이에 비밀리에 인삼 2~30포기를 재배해 왔다)
정성이 고마워서 한 모금 마시면서 찬찬히 몰골을 내려다보니 숫제 말이 아니다.
옷은 찢어지고 거미줄과 풀잎 나뭇잎이 붙어 있는가 하면 신발 뒤창도 어디로 갔는지 행방조차 묘연하다.
밥 생각도 없고 오직 잠을 자야했다. "실컷 자도록 내버려 두이소!". 말도 끝나기 전에 잠이 들어 버렸다.
호랑이 만났다는 얘기는 하지도 못했다.
길을 가르쳐 주더라는 얘기도 못했다.
그래서 "우리 산신령님 영특하시다"는 칭찬도 듣지 못했다.
< 우리들의 산 1991년 6월호 게재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