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린 기억 속의 그대
“저 사람 가엾어 보이네.” 하지만 꽤 잘나갔던 사람인 건 맞는다. TV 화면에서 연예인이 퇴장해야 하는 순간이 바로 그때라고 가늠한 적이 있다. 지금은 달라졌다. 그를 불쌍하게 보는 건 내 마음이 초라해져서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런 생각은 교과서가 못 가르친다. 묵은 지혜야말로 세상과 세월이 가져다주는 선물이다. 7월 첫 주 ‘콘서트 7080’에는 단출하게 3명의 가수만 나왔다. ‘디스코 여왕’ 이은하, ‘힙합 전사’ 현진영, ‘댄싱퀸’ 김완선(사진). 한때 음악동네를 휘저은 가수들이다. 무대는 화려했고 관객들은 환대했다. 객석은 음악을 즐기면서 동시에 추억을 소환하는 자리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관객들은 복합적인 감정에 시달렸을 거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인생도 돌아봤을 거다.
첫 번째로 등장한 이은하는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이름도 생소한 쿠싱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한다. 방송사에서 PD로 일하면서 그를 볼 때면 헬렌 레디가 부른 노래 ‘킵 온 싱잉(Keep on singing)’이 오버랩되곤 했다. 계속 노래를 부르면 넌 언젠가 스타가 될 거라고 말한 사람은 아버지였다(He said Keep on singing. Don’t stop singing. You’re gonna be a star someday).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면 세상의 여왕이 된 것처럼 느꼈다(I felt just like the queen of the world when I was with my dad). 그러나 아버지는 가난했다(He didn’t have much money).
이은하는 평생 아버지 그늘에 있었다. 무대의 빛으로 인도한 사람도 아버지였고 현실의 빚으로 내몬 이도 아버지였다. 이런 정도면 아버지를 원망할 법도 한데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를 용서했습니다.” 돈 때문에 갈라서는 부모 형제가 수도 없는데 이 분은 어찌 이리 너그러운가.
디스코 여왕답게 ‘밤차’도 부르고 ‘아리송해’도 불렀지만 마음을 후벼 판 노래는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었다. “날 위해 울지 말아요/날 위해 슬퍼 말아요… 날 사랑하지 말아요/너무 늦은 얘기잖아요’. 본인이 가사를 썼고 장덕이 작곡한 노래다.
장덕은 지난 4월 1일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남북합동공연 무대에서 최진희가 열창한 ‘뒤늦은 후회’의 작곡자다. 북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애창곡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사가 애잔하다. ‘외로운 나에겐 아무것도 남은 게 없고요/순간에 잊혀져갈 사랑이라면 생각하지 않겠어요/이렇게 살아온 나에게도 잘못이 있으니까요’.
시간이 흐른 후에 노랫말이 가슴속으로 스며들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전까지는 귓가를 스치는 소리의 즐거움(음악)이었을 뿐이다. 노래를 만든 장덕은 요절했고, 김정일도 저세상 사람이 됐다. 그런데 노래는 여전히 울려 퍼진다. 노래는 연결고리다. 죽지 않는 노래는 뜻밖의 장소에서 ‘잊고 산 나’를 만나게 한다.
현진영은 한류의 산실 SM엔터테인먼트가 주목한 첫 번째 가수다. ‘안개빛 조명이 흐트러진 몸’을 감싸기도 했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을 스스로 부정하기도 했다. ‘싸늘한 밤거리를 걷다가 무거워진 발걸음’을 견뎌내야 했다. 지금은 노래 제목처럼 ‘흐린 기억 속의 그대’로 남은 처지다. 그는 부활할 수 있을까. 탄성은 작아졌고, 함성은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그를 응원하는 소수의 골수 팬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는 X세대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분명해졌다. 절망의 나락에서 희망의 불씨를 키워내야 한다. 팬들에게 보은하는 길은 여전히 열려 있다.
이은하의 뒤에 아버지가 있었다면 김완선의 곁에는 늘 이모(한백희)가 있었다. 유력한 쇼 PD들은 기억할 것이다. “우리 완선이를 불러주세요.” 그 옆에서 방울토마토 몇 개로 끼니를 때우던 김완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전 살찌면 끝이에요.” 그러나 그는 끝나지 않았고 그의 노래 역시 죽지 않았다. 그는 실력으로 존재를 증명했다. 한때 이은하와 현진영은 파산신청까지 했다. 현실은 그만큼 참혹했다. 이은하는 고백한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남은 희망은 오직 노래뿐”이라고. 희망은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찾아가는 것도 아니다. 희망은 항상 뒷줄에 앉아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서울문화재단 대표 노래채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