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품은 적상산 사고
전통 먹거리 체험, 장안마을 삼굿구이 적상산을 한눈에 조망하는 적상산 전망대 진묵도예에서 체험하는 도자 예술
적상산 전망대 가는 길. 사진제공|무주군청© 경향신문 무주는 구천동이다. 대세 여행지는 오히려 무주의 맛을 식상하게 만든다. 이 구절양장의 33경은 무주를 향한 여행객의 진입장벽을 낮췄지만, 끝내 구천동 밖의 풍경은 순삭시켰다.
적상산의 깊어진 가을. 사진제공|무주군청© 경향신문 구천동의 유혹을 뿌리치면 무주의 미혹을 마주할 수 있다. 눈호강 풍광이란 킬링포인트를 내려놓으면 잊혔던 이야기가 다시 샘솟고 발길을 잡는 여운이 힐링포인트로 부활한다. 무주공산을 꽉 채울 비방은 멀리 있지 않다. 적상산 사고
적상산 사고와 적상호. 사진제공|무주군청© 경향신문 말씀은 중요하다. 하나님 말씀이나 부처님 말씀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모님 말씀이나 친구들의 조언이라고 하찮게 버릴 수는 없다. 무주에는 말씀의 기록이 있다. 이곳의 적상산 사고는 조선 왕조의 왕들이 내뱉은 말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왕이라도 쉽게 열어 볼 수 없는, 내뱉은 그것들은 고스란히 역사로 남았다. 대개 사화의 출발이 왕이란 자가 그것을 훔쳐보고, 보복하면서 벌어진 일이니 어찌 보면 판도라의 상자일 수 있다. 하지만 저 기록이 분노 조절 장애자의 분풀이용으로만 쓰인 것은 아니다.
적상산 사고 드론샷. 사진제공|트래블팀© 경향신문 대부분은 치세의 잣대가 됐고 난세의 약방문이 됐다. 그래서 그 보존에 사관은 물론 백성과 승병의 분투가 끊이지 않았다. 소실과 산실의 걱정에 이곳 저곳에 이치 됐고, 망실분은 다시 필사해 역사의 구멍을 메웠다. 그리하여 세계사에 유래를 찾기 힘든 기록유산이 여태껏 우리 삶의 좌표가 됐고 국가 존망의 백년지대계가 됐다.
적상산 사고 내부 전시공간. 사진|강석봉 기자© 경향신문 적상산 사고는 강화 정족산 전등사, 평창 오대산 월정사, 봉화 태백산 각화사 등에 설치됐던 사고와 함께 조선 후기 5대 사고 중 하나다. 원래 묘향산 사고에 있던 실록을 광해군 6년(1614)에 적상산(해발 1034m)으로 옮겨왔다. 인조 19년(1641)에 이르러서는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을 소장한 선원전을 세워 사고의 온전한 모습도 갖췄다. 아쉽게도 일제 강점기 폐지됐고 실록은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적상산 사고의 전시물 중 조선왕실의 족보인 선원록. 사진|강석봉 기자© 경향신문 원래 적상산 사고가 있던 곳은 적상호 물 아래였다. 1990년대 무주양수발전소 상부 댐이 들어서면서 사고 터는 수몰됐고 현재 위치에 선원전과 실록전 건물을 복원했다. 지금은 사고라기보다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