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문학 기행
조 흥 제
동작문인협회 2018년도 하반기 문학기행을 11월3일 경상북도 대구(大邱)로 갔었다. 7시30분 동작문화원 앞에서 은학표회장과 안철환 사무국장, 박숙자 차장 등 임원진과 30여 명의 회원들이 빨간 전세버스에 올랐다. 날씨는 더 없이 쾌청하고 포근하여 하나님도 우리의 장도를 축복해 주셨다.
서울을 벗어나자 천자만홍이 양쪽에서 우리를 환영해 주었고, 과수원에선 빨간 사과들이 반갑다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60년대 초 나는 대구 영천 부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거기에는 4개 특수학교가 있었다. 부관, 헌병, 정보, 경리다. 대구에서 영천 가는 80리 길 가는 온통 사과 밭이었다. 사과를 먹고 싶어 실로 짠 망에 주먹만 한 다섯 개가 들은 것을 십원 주고(짜장면 35원, 라면 끓여서 15원) 사서 먹어 보니 시어서 못 먹었다. 예정보다 30여 분 늦게 대구 어느 주차장에서 내리니 중년의 여자(백혜영) 해설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먼저 데려간 곳은 대구문학관이었다. 4층까지 있고 규모가 컸다. 250억원의 공사비를 들여 지은 것이란다. 어느 벽면에 초창기 우리 문단 어른들의 사진과 프로필이 있다. 유치환, 이영도, 김동리, 이상화 이육사……. 유치환선생이 이영도 시인을 짝사랑한 사연이 떠오른다. 그들은 통영에서 살았는데 유치환이 이영도한테 반해서 만나자는 편지를 보냈다. 이영도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유치환은 계속 보냈다. 수백 통을 빨간 우체통에 넣었지만 답장은 한 통도 받지 못했다. 그 빨간 우체통이 통영의 명물이 되어 통영을 찾은 관광객들이 단골로 들르는 코스가 되었다. 벽에 대구시민 노래 가사와 악보가 함께 있다.
팔공산 줄기마다 힘이 맺히고
낙동강 굽이돌아 보담아 주는
질펀한 백리 벌은 이름난 복지
그 복판 터를 열어 이룩한 도읍
3절까지 있는데 해설사가 곡조를 붙여 불렀다.
팔공산의 유래에 대해서 알려 주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팔공산까지 와서 후백제의 견훤과 싸우다 포위되었다. 그때 신숭겸이 왕의 옷과 바꿔 입고 탈출하다 전사했다. 역사에는 신숭겸만 희생된 것으로 나오는데 그를 따르던 사람 여덟 명이 운명을 같이했다. 그래서 팔공산 (八公山)이라는 산명이 붙었다.
서울에 없는 것들이 대구에는 있다. 바로 문학관과 노래다. 서울의 각 구청에 문화원은 있지만 정작 서울시민 이름의 문학관은 없다. 서울시민의 노래도 없다. 패티김이 부른 ‘서울의 찬가’는 있지만 대구시민의 노래 같이 서울시민의 노래는 아니다. 대구는 250만 명이 사는 큰 도시지만 전국에서 온 사람들이 사는 서울시민보다는 애향심이 짙은가 보다.
다음에 안내한 곳은 거리였다. 100여 년 동안 변하지 않은 거리란다. 낮은 단층집들이 모여 있어 인근의 고층빌딩군과 대조를 이루었다. 한국의 건물은 6․25 사변 때 많이 부서졌다. 새우젓 독만 한 폭탄이 비행기에서 떨어져 성한 데가 없었다. 하지만 대구는 거기서 비켜 갔다. 사변 때 북한군은 정면에서 낙동강까지 오고 동쪽은 포항, 서쪽은 하동까지 와서 압박하여 대구를 빼앗기면 부산까지 내리 밀리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때 국군 1사단 백선엽 사단장은 생명을 걸고 낙동강 전선을 지켰다. 어느 날 미 공군 대형폭격기인 B-29기 98대가 떠서 왜관 북방 북한군 주둔지에 폭 12㎞, 길이 4㎞ 지역에 300㎏ 짜리 폭탄 3000개를 일시에 떨어뜨렸다. 그걸 융단폭격이라고 했다. 융단폭격은 한국전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북한군의 사상자가 얼마였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원수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인천 앞바다에 261척의 함정을 정박시키고 함포 사격을 하여 월미도와 인천시내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후배가 인천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밤새도록 포 소리가 나서 잠을 못잤는데 아침에 나가 보니 전날까지 구슬치기 하면서 같이 놀던 옆집 동무네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니 얼마나 놀랐을까. 그래서 낙동강 이북은 초토화 되었다.
합천 해인사에 공비들이 숨어 있을 때 미군이 폭격하려는 것을 동승했던 한국군 장교가 막았다. 거기에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변 때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훼손되었는지 헤아릴 수도 없다. 서울에서는 학자들의 서가에 보관되었던 희귀본들이 엿장수들이 엿을 싸 주는 휴지가 됐고, 간송미술관에서는 논밭을 팔은 돈으로 사 모은 귀중한 책들을 주민들이 가져다 아궁이에 때서 밥을 해 먹었다. 문화재 급 유물들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됐다. 일제 때는 그들이 얼마나 많은 문화재들을 가져갔는가.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박물관에 보관해 놓은 문화재들은 어떻게 지킬 것인가. 걱정이 되어 중앙박물관에 전화 했더니 대외비라 알려 줄 수 없단다. 거기에 대한 대책을 세워 놓은 모양이다.
그 마을은 폭격을 안 맞아 오래 된 건물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개발 붐이 일어 때려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유행하던 때에 옛 건물을 보호하려고 애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비난을 받았을 터이지만 이제는 관광 상품이 되었으니 혜안이었다. 프랑스 파리 시내 전체가 세계문화유적으로 지정되어 있어 개발할 수 없다고 한다. 회색 석조 5~6 층짜리 집들이 주종을 이루어 단조로운 면도 있지만 유럽 문화 보존에는 파리만 한 도시가 없다.
‘씨 뿌린 사람들의 집’, 일제 때 조선 땅을 빼앗기 위해서 세운 식산은행에는 그때 쓰던 지폐들이 있다. 5백 원 권 지폐는 상장(賞狀)만 했다. 알이 굵은 주판도 있다. 가게에서, 은행에서 돈 계산 하던 주판이다. 이제는 돈만 넣으면 따르륵 하고 세어 주는 기계가 나와 퇴출되었다. 국채 보상운동도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단다. 국채보상은 한말풍운 때 조정에서 일본에게 빚을 많이 졌으나 갚을 길이 없어 일본에게 넘어가려 하자 전 국민이 나서서 돈을 마련하여 갚았다. IMF 때도 금 모으기 운동을 벌였었다. 우리 민족은 평소에는 흩어졌다가도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똘똘 뭉치는 기질이 있다. 그 기질이 약소국이면서도 5000년 동안 국토를 지켜 온 원동력이 아닐까?
대구의 명물인 약령시장(藥令市場)도 그 안에 있다. 한약재를 파는 서울의 경동시장과 같은데 전국에서 제일 오래 된 2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약재를 경동시장과 같이 거리에다 내놓고 파는 것이 아니라 한약국 집들만 모여 있어 다소 김이 빠졌다. 문을 연 한약 재료를 파는 상점은 한 군데였다. 아주머니가 있어 양해를 받고 사진을 찍었다.
이육사 문학관은 철문에 264라는 숫자가 붙어 있는데 들어가지는 않고 지나쳤다. 이상화 고택에 들렀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떠올렸다. 부엌 부뚜막에 시꺼먼 솥들이 걸려 있고 마루에 뒤주와 당시의 생활용품이 있었다. 방에는 글을 쓸 때 사용하던 문방사우 등 손때 묻은 자료들이 있다. 안마당이 넓었다. 한쪽에 울굿불굿한 두루마기 같은 내리닫이 옷이 많이 걸려 있는데 뭐할 때 쓰는 건지 모르겠다.
경상도 감영은 식사 예약시간이 임박했다면서 안내자가 내 달리는 바람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지나쳤다.
점심을 먹고 김광석 거리에 들렀다. 김광석은 30대에 자살(1964~1996)한 가수다. 그의 고향이 대구였던지 어느 골목길을 김광석 거리로 만들었다. 그와 관련된 조형물을 많이 설치하고 음악회를 여는 무대와 둥근 계단식 관람석도 있는데 무대에는 악기를 들은 가수들이 많이 앉았고 관람석에도 사람이 많다. 사람은 살았을 때보다도 죽어서 유명해진다는 것은 알았지만 30여년 남짓 살았던 가수가 죽은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고향에서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은 생각 밖이었다. 김광석 거리도 관람객으로 붐벼 어깨를 부딪칠 정도였다.
4시30분 경 귀경길에 올랐다. 차 안에서 소머리 고기를 얼큰한 배추 겉절이에 싸서 김길연 부회장이 준비한 떡과 함께 먹는 맛은 환상적이었다. 김도희 회원의 3년 동안 배웠다는 전통 창(唱)을 들으면서 박수 치고 지루하지 않게 와서 9시 경 문화원 앞에서 내렸다. 차 안을 종종걸음치면서 바쁘게 봉사하느라 수고한 박숙자 차장님, 조형은 회원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