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정치인이 야당 당수가 된 것은 1965년 박순천 여사가 민중당 대표를 맡은 이후 처음이라고 하니, 박 의원은 한국 정치사에도 한 획을 그은 셈이 됐습니다. 따라서 4명의 남성 경쟁자를 당당히 물리친 박 의원의 승리는 정파적 입장을 떠나 축하를 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침몰 직전의 한나라당이 "여풍 카드"로 "탄핵 역풍"을 과연 잠재울 수 있을 것인지가 대다수 언론사의 주 관심사인 듯합니다만, 골치 아픈 "정치 셈법"은 잠시 접어두는 것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의원님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거라는 일각의 지적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인 듯합니다. 간판만 바꿔 단다고 손님이 다시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아직도 "이미지 정치"의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는 혹평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비판은 결국 박 의원을 실권 없는 "얼굴마담"으로 보고 있다는 반증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박근혜 의원님이 공화당-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졌던 구 여권세력과 협조하고 결탁하며 온갖 이권과 실속을 챙겼던 조선일보와 인연만 끊는다면, 부패한 수구 기득권 집단으로 전락한 한나라당을 진정한 보수세력의 기수로 바로 세우는 일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봅니다.
더욱이 박근혜 의원에게는 "안티조선"에 나서야 하는 운명적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박 의원은 불행한 가족사를 잊어선 안 됩니다.
올해는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8.15 광복절 행사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문세광의 총탄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사건은 너무나 많은 의혹에 싸여 있습니다. 예컨대 경찰의 현장검증 과정에서 문세광이 발사한 것보다 더 많은 총탄이 발견됐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지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비명횡사한 지도 25주년이 되는군요. 그 비극적 사건의 충격으로 유일한 남동생 박지만 씨가 마약 중독자 신세로 전락한 것도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거니와, 박근혜 의원의 일가족이 겪었던 불행은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아버지의 술과 여자에 대한 무절제한 탐닉, 그로 인한 부모의 불화와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부당한 폭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병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술과 여자에 대한 탐닉"은 물론 박정희 자신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 권력자의 "엽색 행각"을 옆에서 부추긴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의 채홍사(彩虹使) 역할을 수행한 덕분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측근들이 바로 그들이었죠.
이러한 사실은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이 저술한 <근대화 혁명가 박정희의 생애―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도 자세히 나오더군요. 조 편집장은 대통령 가족의 일상을 속속들이 지켜봤던 한 청와대 부속실 근무자의 증언을 통해 그 "일그러진 풍경"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보여준 바 있습니다.
"특히 1965년 전후로 박정희 대통령은 목숨 건 혁명 이후 국가발전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자신감이 충만해 있을 때였습니다. 업무가 끝난 뒤엔 마땅히 갈 데도 없는데, 측근인 이후락 비서실장, 박종규 경호실장, 김형욱 정보부장, 장기영 경제부총리 등이 각하를 모시고 자주 요정 같은 술집엘 드나들었지요.
육 여사는 이 분들을 미워했어요. 이 분들도 육 여사를 무서워 피하고, 2층 부속실로 올 일이 있으면 까치발로 살금살금 들어와 부속실 직원에게 속삭이듯 "사모님 계시나?" 하고 묻곤 했지요. 특히 이후락 비서실장은 거짓말을 하거나 자신이 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사, 사, 사모님 계, 계시나?" 하고 말을 심하게 더듬었어요."
월간조선에 연재되기도 했던 이 글의 소제목은 "육박전 끝에 단신으로 마닐라행"이었습니다. 1966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출국하면서 외교적 관례를 깨고 부인과 동행하지 않았던 것을 가리킨 제목이었지요.
그런데 조갑제 편집장은 "육박전"의 한자를 "육박전(肉薄戰)"이 아니라 "육박전(陸朴戰)"이라고 썼습니다. 남편 박정희와 아내 육영수의 부부싸움을 이렇게 비유한 것인데, 조 편집장이 전하는 육박전의 양상은 대략 이러했지요.
"재치도 있고 고집도 센 육 여사는 직언보다 가능한 남편을 존중해 여러 가지 예를 들거나 돌려 말하곤 했는데, 때로는 이런 대화법이 박 대통령의 아픈 곳을 더 자극하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가령, 조용한 음성으로 "혁명하신 분이 혁명정신을 잊으셨어요? 케네디나 나폴레옹을 닮으시려 하지 마시고, 여자들과 술 드시는 것보다…"라고 하면 박 대통령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소실이나 두고 첩질하는 재벌들과 어울리실 시간을 조금만 양보하시고 제 민원 하나 들어주세요." 이런 말은 박 대통령의 가슴에 불을 붙이는 결과가 되어 재떨이가 날아다니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재떨이 투척, 이른바 "가정폭력"은 한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인사로부터 조갑제 편집장이 들었다는 다음과 같은 목격담에서 우리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 무렵 무슨 일로 제가 청와대 2층엘 올라가게 되었는데 대통령 침실 쪽에서 육 여사의 몹시 격한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순간 긴장이 되어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보니 방문이 조금 열려 있더군요. 눈길이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가는데 각하께서 담배를 뻑뻑 피우시다가 별안간 재떨이를 확 집어 던졌습니다."
박 대통령의 가정폭력은 육 여사가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는 1970년대 중반까지도 계속 이어졌다고 합니다. 박근혜 의원도 잘 알고 계실 문명자 여사(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과 세계여기자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던 원로언론인)에게 육 여사가 한숨을 쉬면서 털어놓았던 사연은 이렇습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였지요. 그이가 선거운동차 대전으로 내려가면서 저에게는 서울에 있으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참 어려운 선거였어요. 국민들에게 "이게 마지막입니다" 하고 호소까지 했었잖아요. 청와대에 앉아 들으니 김대중 씨 부인 이희호 여사가 선거운동에 그렇게 열심이라고 해요. "저이가 그렇게 애쓰는데 나는 왜 내 남편을 못 돕나" 싶어서 바로 대통령께서 묵고 계신 유성온천으로 내려갔지요.
도착해서 대통령 계신 방문을 탁 열고 들어갔는데 웬 여자가 그이 옆에 앉아 있다가 혼비백산을 해서 도망을 쳐요. 나도 깜짝 놀라 멈칫하는데 그이가 글쎄 "서울에 있으라면 있을 것이지 뭐 하러 왔어?" 하고 고함을 치면서 재떨이를 집어던지는 거예요."
술과 여자 문제가 거의 예외 없이 가정불화의 불씨가 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 육영수 여사는 당시 장기영 부총리가 운영하는 한국일보사가 매년 실시하고 있던 미스코리아 대회에도 매우 반감이 심했다고 합니다.
대회 참가자 중 일부가 대통령의 술자리에 참석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육 여사가 박 대통령 면전에서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던졌다는 다음과 같은 발언은 육 여사를 "안티미스코리아 운동의 시조"라 불러도 조금의 부족함이 없게 합니다.
"여자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부끄럼도 없이 나서는 건 여자들을 상품화하는 것 아녜요? 정부나 언론이 이런 걸 모범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봐요. 그걸 좋아하는 남자들 심리를 이용하는 천박한 여자들이 자기네들 신분의 상승 기회로 이용하는 걸 왜 호락호락 용납하느냐 말이에요. 그리고 꼭 세계미인대회에 한국이 나서야 하나요. 동양 여자의 아름다움은 따로 있는 것이지 쌍꺼풀 수술을 아무리 해도 서양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아요. 그런 걸 사진 찍고 방송으로 내 보내는 걸 보면 한심해요. 혁명하신 분이 그런 애들과 술을 드시면…."
물론 이쯤 되면 줄담배를 피우던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는 다시 한번 불꽃이 일어났고, 재떨이만 죄 없는 수난을 당했다는 것이 조갑제 편집장의 설명입니다. 겉으로는 마냥 행복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불치의 골병에 시달려야 했던 육 여사의 심정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곁에서 어린 나이에 이 모든 모습을 지켜봤을, 박근혜 의원을 비롯한 3남매의 마음 고생은 또 얼마나 심했을까요? 저 또한 남의 일 같지 않은 연민의 감정이 샘물처럼 솟구치는 것을 참을 수 없군요.
박근혜 의원님.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술과 여자에 탐닉하며 비극적 종말의 씨앗을 잉태하기 시작한 시점은 조갑제 편집장의 설명처럼 1965년 전후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비련의 여인" 육영수 여사가 이후락, 박종규, 김형욱, 장기영보다 더 먼저 더 강렬하게 미워했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 몇 해 전 지병으로 사망한 방일영 전 조선일보 사장(현 방상훈 사장의 부친)의 회고록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방일영은 1983년 발간한 회갑기념문집 <태평로 1가>에서 1963년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5.16 군사정부가 민정이양을 한다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서울에서 첫 번째 선거유세를 시작하던 그 때, 첫날이었다. 대통령 선거유세로 첫 대중 연설을 마치고 나서 그 기분으로 그 날 저녁에 흑석동(黑石洞)에 있는 나의 집으로 왔었다. 박 의장은 놀러 왔다고 하면서 혼자만 온 것이 아니라 민기식 참모총장과 한때 MBC 사장을 했던 황용주 씨를 대동했었다.
"처음 해본 연설이어서…." 박 의장은 기분이 좋은 편이었다. 저녁 7시쯤 도착하였기에 냉면을 말아서 대접하고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가, 나중에는 기녀(妓女)를 몇 명 불러 왔다. 기녀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며 한 서너 시간 유쾌하게 잘 놀았다. 놀다보니 아주 늦어지고 말았다."
군사쿠데타를 통해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집권자와 통행금지를 넘기면서까지 질펀하게 "기생술판"을 벌였다고 은근히 자랑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 "기생술판" 소식을 나중에 전해들은 육영수 여사는 크게 격분했다고 합니다. 결국 육 여사는 순진한(?) 대통령 남편이 "못된 친구"인 방일영을 잘못 만나면서부터 술과 여자에 탐닉하게 됐다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실제로 방일영 사장 스스로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모든 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변명하면서도 "육영수 여사가 다시는 흑석동의 방일영 사장 집에 대통령이 가지 않도록 청와대 비서진에게 단단히 일렀다"고 고백함으로써 "육 여사의 격분"이 사실이었던 것만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왜 그 중요한 시기에 방일영의 저택을 찾아가 "기생파티"를 벌인 것일까요? 이와 관련 이날의 "기생술판"에 동석했던 황용주 전 MBC 사장의 증언은 시사적입니다. 그는 방일영문화재단이 1999년 발간한 <격랑 60년―방일영과 조선일보>에서 그 날의 "질펀했던" 술자리 풍경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 바 있습니다.
"첫 입후보 연설을 마치고 그날 밤 방일영 사장의 흑석동 자택에서 연(宴)이 벌어졌다. 주석(酒席)에서도 좀처럼 둘레를 벗어나지 않았던 대통령이었는데 그날 밤은 자제(自制)를 하지 않았다. 만당(滿堂)이 무르익게 되자 그는 "선거가 끝나면 이런 기회도 없겠지" 하면서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를 건반을 두들기면서 불러댔다.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미꾸라지 잡기"라는 일본 민속무(民俗舞)를 멋들어지게 추었다. 본인의 주석(註釋)에 따르면 사관학교를 졸업할 때 은시계를 탈 수 있었던 것도 이 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사(大事)를 앞두고 청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가 스스로 좋아하는 노래와 춤을 추게 된 것은 방 회장이란 천하의 주도(酒徒)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황용주 씨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박정희 대통령이 흑석동 저택을 찾은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방일영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방일영 사장이 "천하의 주도", 즉 "알아주는 주당(酒黨)"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더욱이 방일영은 "천하의 한량(閑良)"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오죽하면 "카지노 황제" 전낙원 씨조차 <태평로 1가>에 쓴 "지극하고 따스하고 멋진 방 형님"이란 제목의 헌사(獻辭)에서 방일영 사장을 가리켜 "권번(券番) 출신 기생(妓生)들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분"이라고 칭송을 했겠습니까?
여기서 "기생의 머리를 얹어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미성년자 독자를 고려하여 따로 설명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방일영 사장의 동생이자 현 조선일보 명예회장인 방우영 씨가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만난 장소도 술자리였다고 합니다. 방 회장은 1998년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 <조선일보와 45년>에서 이렇게 증언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처음 박정희 대통령을 본 것은 그가 최고회의 의장 때 이후락 공보실장과 서정귀 씨(박정희의 대구사범 동창) 등을 데리고 방일영 사장과 함께 한 어느 술자리에서였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박 의장이 한 여배우의 손을 붙잡고 밴드에 맞춰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날 술자리에 동석해 "끈끈한 정"을 나눈 인물들은 나중에 대한민국의 최상류층이 되거니와, 향후 그들의 인생행로와 관련해 서울신문 1999년 10월 8일자에 "비화-3공의 실세들"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다음의 기사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후락은 자신의 아들들을 한국 재벌들과 정략결혼을 시켜 온 나라를 사돈관계로 얽어 놓았다. 첫째 아들은 서정귀(전 흥국상사·호남정유 사장)의 사위가 됐는데, 그는 김동조(전 외무장관) 주미대사 시절 대사 관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둘째 아들은 한국화약 창업주이자 전 회장인 김종희의 사위가 됐다.
그래서 이들 사돈기업을 포함해 이후락의 후원으로 기업을 성장시킨 다섯 개 기업의 회장을 세칭 "이후락의 5인방"이라 불렀다. 신진자동차의 김창원, 극동건설의 김용산, 대농의 박용학, 한국화약의 김종희, 호남정유의 서정귀가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빠진 내용이 있습니다. 이후락의 또 한 아들이 SK(당시 선경)의 창업주인 최종건(최종현의 형이자 최태원의 백부)의 넷째 사위가 됐다는 내용과 최종건 장남의 장인과 방우영이 사돈지간이라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선경직물의 최종건은 극동건설 김용산, 조선일보 방일영과 절친한 친구였고, 그 인연으로 군사정권의 최고실세였던 이후락과 사돈지간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최종건과 방일영이 처음 만난 곳도 1958년 "춘추관"이라는 요정에서였습니다. 그 사연은 최종건의 일생을 정리한 <재벌24시-최종건편>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수원지역의 별 볼일 없던 직물회사인 선경이 박정희 정권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급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도, 최종건의 동생 최종현 SK그룹 전 회장이 노태우 대통령과 사돈을 맺은 뒤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도, 최종현 회장이 지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조선일보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었던 것도 모두 박정희 시절 맺어놓았던 "술자리 인연"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나온 모양입니다.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과 이후락 비서실장, 조선일보의 방일영 방우영 형제, SK그룹의 최종건 최종현 형제의 특수관계(?)와 관련, 현 조선일보 사주 일가와 소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방재선 씨(원사주 방응모의 장남)의 다음과 같은 증언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방일영, 방우영 형제는 해방 이후 역대 정권과 밀착하면서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권세를 누려왔다. 특히 1960∼70년대에 이후락을 매개로 한 박정희와 방일영의 뜨거운 친분관계는 천하가 다 아는 일 아닌가. 요정에서 맺어진 두 사람의 우정(?)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입대장 친구"라는 말까지 생겨났겠는가."
조선일보 족벌사주의 권언유착은 5공 당시에도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이 방재선 씨의 "체험적 증언"입니다. 그의 증언을 계속 들어볼까요.
"순진했던 나는 그런 사정도 모른 채 전두환 정권이 내건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구호만 믿고 1982년 방일영 형제의 비리와 소유권 강탈을 고발하는 탄원서를 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방일영 형제는 건재했고, 도리어 나만 정보기관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그리고 이러한 행태는 문민정부 때까지도 이어졌습니다. 1992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가 제일 먼저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 인사를 한 곳도 바로 방일영 사장의 흑석동 대저택이었던 것입니다.
방재선 씨는 "방일영 씨가 박정희를 비롯한 역대 권력자와 술자리에서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격랑 60년―방일영과 조선일보>에는 방일영 사장이 자랑삼아 털어놓은 무용담(?)이 다음과 같이 정리돼 있습니다.
"호텔 방에 조촐한 주안상이 차려지고, 방일영은 박정희와 독대로 마주앉았다. 대통령의 체통상 요릿집에 자리를 마련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무르익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작이 시작되자마자 방안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복도까지 새어나온 것이다."
당시 복도를 지키던 경호원들은 아연 긴장한 채 청각과 시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을 터입니다. 왜냐하면 방안에서 다음과 같은 "불경스런 대화"가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형님, 한잔 쭈∼욱 드십시오."
"내가 좀 과한 것 같은데…."
"아니, 제가 대통령 형님 술 실력을 모르는 사람입니까?"
"대통령 각하"로 시작한 호칭은 어느새 "대통령 형님"으로 바뀌어 있었고, 젓가락 장단에 실린 노래 소리가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뒤섞여 방문 밖으로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그런 분위기에 눌려 경호원들도 감히 문을 열고 그 안의 정황을 살필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튿날 대통령의 오전 스케줄이 모두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날 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일국의 대통령이 다음날 일정까지 취소하게 됐을까요? 그것은 방일영 자신만의 독특한 주도(酒道)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방일영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여러 사람과 술을 마실 때 좌중을 휘어잡는 비결을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소개한 바 있습니다.
"어디서나 술상을 받으면 시작한 지 30분 이내에 좌중의 모두를 취하도록 마시게 하여서 분위기부터 흥건하게 만들어 놓고 술을 즐기는 방식이다. 맥주 컵에다 위스키를 따라서 돌리면 얼마 안 되어서 모두가 취기에 흥건히 젖게 된다. 이렇게 해놓고 놀기 때문에 좌중은 거의 예외 없이 금방 다 취흥에 따라 어울리게 된다."
여기서 방일영이 말하는 "흥건한 취흥"의 필수요소는 물론 기녀(妓女), 즉 "술 따르고 몸 파는" 여성을 의미합니다. 방일영에게 기녀는 "주석(酒席)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으며, 그들이 있어야만 방일영은 "그윽한 주연 분위기에 젖어들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아울러 기녀들은 "깨끗한 옷맵시는 물론이려니와 속옷까지도 정결해야 하는 것이 절대적"이라고 방일영은 회고록에서 특별히 강조해 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그런 "주도"를 이해하고 도움을 줬던 "청운각(靑雲閣)의 조 마담", "장원(莊園)의 주 마담", "대하(大河)의 김 마담"을 한 명씩 주어 섬기기도 했지요.
현재는 고인이 된 방일영 씨를 정계와 언론계에선 흔히 "밤의 대통령"이라 부릅니다. "언론권력"으로 성장한 조선일보를 상징하는 표현이 된 이 말은 1992년 11월 당시 조선일보 회장이었던 방일영의 고희연에서 사원 대표인 신동호 당시 스포츠조선 사장이 했던 다음과 같은 헌사에서 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방 회장님을 남산으로 부르고 싶다. 남산에 있는 옛날의 중정과 현재의 안기부 못지 않게 회장님이 계신 태평로 1가에는 모든 정보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낮의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분이 계셨지만 밤의 대통령은 오로지 회장님 한 분이셨다."
그러나 사실 "밤의 대통령"이란 말을 제일 먼저 만들어낸 사람은 "낮의 대통령" 박정희였다고 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박 대통령이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을 때만 해도 정치의 무대는 주로 요정이었습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요정에는 항상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들로 넘쳐 났습니다.
그런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의 박정희 대통령이 요정에 가보면 항상 뛰어난 화술(話術)과 주량(酒量)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방일영이었던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보기에 최고 권력자인 자기에 대한 요정 마담이나 기생들의 대접은 깍듯하기는 해도 거리감이 있었지만, 방일영에 대해서는 대접이 극진하면서도 정감이 넘쳐났다고 합니다. 하긴 방일영은 술이 거나해지면 동석자들의 지갑까지 털어 기생들에게 듬뿍 돈을 쥐어주었다니 누군들 싫어했을까요.
나이는 박 대통령이 다섯 살 위였지만 술집 출입의 경력으로 보나 여자들 다루는 솜씨로 보나 "경상도 문둥이 촌놈" 박정희보다 "서울 깍쟁이 한량" 방일영이 한참 위였던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술자리에서 자신을 "대통령 형님"이라 부르는 방일영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팔자가 좋은 사람"이라며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 말이 바로 "낮에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밤에는 임자가 대통령이구먼"이었다고 합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당대의 풍류객이라는 것이고, 좀 진하게(?) 이야기하면 최고의 "×입대장"이었다는 말입니다.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에도 자세히 나와 있는 이 비사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을 "주야(晝夜)로 이끌었던" 권력자들의 추한 알몸을 다시 한번 목도하게 됩니다. 아울러 개발독재, 정경유착, 권언유착을 신봉했던 마초들의 발길질에 짓밟히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비련의 여인" 육영수 여사의 한 서린 아픔을 다시 한번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박근혜 의원이 지금 제일 먼저 할 일은 한나라당 간판을 떼어 매고 천막당사로 걸어가는 "이미지 정치"는 아닐 터입니다.
그렇습니다.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을 부패와 기득권 정당의 나락에서 건져내어 진정한 보수 정당으로 거듭나게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입에는 달지만 몸에는 해로운" 조선일보와 인연을 끊어야 합니다.
1972년 10월 17일 언론사에 대한 사전검열 조치가 포함된 유신쿠데타가 일어나자 "구국의 영단"(12월 28일자 사설)이라고 보도했던 조선일보. 원칙과 기준도 없이 유불리에 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세에 편승하며 자신의 이익을 관철해 왔던 사이비 보수주의자인 그들과 결별하는 것이야말로 한나라당이 진정한 보수로 거듭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너무나 힘들고 두려운 일이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박근혜 의원에게 "신(臣)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 있다는 충무공의 비장한 각오를 되새기면서 이 자리에 섰다"는 취임사 연설 때의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만 있다면, 대한민국을 더 이상 "한국의 르펜과 매카시"의 농락에 맡겨놓지 않겠다는 지도자의 도덕성과 통찰력만 지니고 있다면,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를 반공과 친미라는 저열한 이데올로기로 오염시킨 자들을 청산하겠다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역사적 사명감만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박정희의 딸"인 동시에 "육영수의 딸"이라는 실존적 자각만 있다면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어쩌면 근혜에겐 소의 귀에 경 읽기 일 수도..왜? 왜긴, 그녀의 곁엔 머저리들이 모여 있으니.
이런 일들이 또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데.어서 빨리 x선을 없애야 겠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