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2/20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9 - 미국의 배우, 가수 브리트니 머피(Murphy, Brittany) 사망 머피 [Murphy, Brittany, 1977.11.10~2009.12.20] [오늘의역사] 09.12.20 여배우 브리트니 머피 사망 2009년 12월 20일 오전 할리우드 여배우 브리트니 머피(32)가 웨스트 할리우드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요절했다. 현지 소방당국은 오전8시께 머피의 자택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출동해 머피를 세다스-시나이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병원 측은 오전 10시께 머피가 응급조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후송 전 이미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1977에 태어난 브리트니 머피는 뉴저지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며 14세 때 토니상을 수상한 연극 '다리에서 바라 본 풍경'으로 브로드웨이에서 연기를 시작했다. 영화 '8마일', '클루리스', '처음 만나는 자유',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 및 ‘씬시티’ 등에 출연했다. 폴 오켄폴드와 함께 부른 '패스터 킬 푸시켓'이 빌보드 댄스 차트 1위에 오르는 등 만능 엔터테이너로 인정받았다. /문화일보 10.12.20 http://twar.munhwa.com/tbattle/view.php?a_id=41507&tag=2032 - 'Self-portrait' - 'The Memory'
- 'Castle of the Pyrenees' - 'Self-portrait'
2006 - '초현실주의의 거장-르네 마그리트 展' 개막 벨기에가 낳은 세계적인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흔히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라 일컬어진다. 마그리트는 당대의 초현실주의자들이 주로 탐닉했던 자동기술법이나 꿈의 세계에 대한 편집증적 탐구와는 다르게, 현실의 신비 등에 관심을 보이면서 그만의 독자적인 초현실주의적 태도라 할 수 있는 시적(詩的)이미지를 창조해 나간다. 미술 기행-우진문화재단 http://www.woojin.or.kr/sub/05_sub_04.html?class_name= 5&action=read&bbs_seq=1&div=&page=5
2006 - ‘비밀 산타’로 밝혀진 백만장자 미국 기업인, 26년동안 130만달러 기부 “사람들은 서로 돕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게 아닌가요? 내 얘기가 알려져 더 많은 비밀 산타클로스들이 나왔으면 합니다.” 지난달 캔사스시티의 타블로이드 신문에 얼굴과 신분이 공개돼버린 ‘비밀 산타클로스’ 래리 스튜어트(58)는 20일 <유에스에이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26년간 남몰래 선행을 계속했던 그는 식도암이 간까지 퍼져 암치료를 받고 있지만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몬태나주의 리스서미트에 사는 성공한 기업가인 스튜어트가 그동안 워싱턴·뉴욕·시카고·캔사스시티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익명으로 나눠준 금액은 약 130만달러. 지금은 장거리전화회사 사장으로 백만장자이지만, 그는 가난의 고통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가 비밀 산타로 나서게 된 것은 자신이 남에게서 받은 도움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1971년 겨울 휴스턴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하던 당시 회사가 망해 이틀 동안 굶어야 했던 그는 한 식당에 들어가 아침을 시켜먹고는 지갑을 잃어버린 척했다. 그 때 식당주인이 자리로 와서는 바닥에서 20달러를 주운 척하며 “이 사람아, 돈을 떨어뜨린 것 같네”라며 곤경에서 구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돈을 계산하고 나오면서 “남을 도울 수 있는 처지가 되면 돕겠습니다”고 하느님에게 맹세했다는 것이다. 그의 선행은 79년 크리스마스 무렵 한 식당에 들렀다가 거스름돈을 팁으로 받은 여종업원의 환한 표정을 본 뒤부터 시작됐다. 이후 연말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나눠주고 다녔다. 99년엔 18년 전 그 식당주인을 수소문해 찾아가 1000달러 봉투로 보답했다. 그는 지난달 이름이 공개된 뒤 많은 사람들이 편지와 이메일로 자신처럼 ‘비밀 산타를 해보겠다’는 뜻을 알려온 데 대해 크게 기뻐하고 있다. 이젠 비밀산타가 아니지만 올해에도 스튜어트는 19, 20일 캔사스시티에서 10만달러를 거리에서 나눠줬다. 그가 교육한 네 명의 비밀산타도 그의 돈 7만5천달러를 나눠줬다. 워싱턴/류재훈 특파원 hoonie@hani.co.kr /한겨레 2006-12-22 오후 06:52:56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180010.html
2001 - 세네갈의 시인, 초대 대통령 셍고르(Senghor, Leopold Sedar) 사망 셍고르 [Senghor, Leopold Sedar, 1906.10.9~2001.12.20] 세네갈 정치가·시인. 구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민족·문학운동 지도자이다. 다카르의 가톨릭계 학교에서 공부한 뒤 파리대학에서 문학을 배우고 교수자격을 취득한 다음 투르 및 파리에서 교편을 잡았다. 제2차세계대전중에 프랑스군에 참가했으나 독일군 포로가 되었고 석방된 후에 레지스탕스운동에 가담하였다. 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 제헌의회의원, 프랑스 국민의회의원으로 선출되어 프랑스 사회당과 유대하면서 <아프리카사회주의>를 목표로 서아프리카의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 시기에 《그림자의 노래(1945)》 등의 시집을 발표하는 외에 1947년 파리에서 《프레장스 아프리켄》지를 창간하여 흑인문화의 창조성을 주장하는 <네그리튀드>운동을 추진하였다. 1959년 수단과 함께 말리연방을 결성하고 이듬해 독립하여 M. 케이다가 대통령, 셍고르가 연방의회 의장이 되었으나, 양자 사이의 대립으로 말리연방은 3개월만에 무너지고 셍고르가 세네갈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yahoo
오늘의 역사 (12월 20일)[1999년] 한국의 7번째 인공위성이자 국내 최초의 실용 관측 위성인 '아리랑1호'가 1999년 12월 20일 미 캘리포니아주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미 오비탈사의 토러스로켓에 실려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아리랑1호는 발사 후 13분48초 만에 상공 685㎞의 궤도에 진입하면서 로켓에서 분리됐으며, 15분 후 남극의 미 항공우주국(NASA) 맥머도 지상국과 첫 교신을 가졌다. 중량 470㎏의 아리랑1호는 지상 685㎞ 상공에 떠서 하루에 지구를 열네 바퀴 반 돌면서 지상 관측, 해양 관측, 우주환경 관측 등의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 과학기술부 차관은 아리랑1호가 성공적으로 궤도에 진입한 후 "아리랑1호의 제작과정에서 실용위성체 개발 기술 중 약 80% 이상을 국산화했다"며 "한국도 차기 인공위성을 독자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1114_0001
오늘의 역사 (12월 20일)[1999년] 식민지 마카오의 주권이 1999년 12월 20일 442년 만에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이로써 명조말 이래 계속돼 온 포르투갈의 마카오 식민통치는 종식되고, 1국 2체제하의 '마카오 차이나' 시대가 개막됐다. 유럽의 마지막 아시아 식민지였던 마카오 주권의 회복으로 서구 열강의 아시아 식민시대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중국 광둥성의 주장 삼각주 남단에 위치한 마카오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1557년 해적을 소탕한 공로를 인정받아 청조 황제로부터 '하사' 받아 건설됐다. 1887년 정식 식민지로 편입했고, 1951년 포르투갈 새 헌법에 따라 '해외주(州)'가 된 후 본국 정부가 임명하는 총독의 통치를 받았으며 1973년 '자치령 '이 됐다. 포르투갈이 중국에 마카오 반환 용의를 처음 표명한 것은 1974년 사회주의 혁명을 겪고 나서였다. 이후 양국은 1979년 외교관계 수립에 이어 1987년 마카오 반환협정에 서명했다. 마카오 주권교체식은 12월 19일 밤 11시35분부터 이날 0시16분까지 마카오 외항 신전해(新塡海)구 문화센터 광장에 임시로 설치된 식장에서 세계 60개국 귀빈 25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됐다. 주권교체식장에 나타난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부의 자세는 당당해 보였다. 드디어 20일 0시, 주권반환 기념식장에서 중국의 장쩌민 국가주석과 조르제 삼파이유 포르투갈 대통령 등 양국 고위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포르투갈 국기가 내려지고 중국의 오성홍기가 게양됐다. 마카오는 본토와의 일국양제(一國兩制) 합의에 따라 50년간 자치권을 행사하게 됐다. 중국은 이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list.jsp?hm=1220&cmd=0
[전두환,노태우사면]특별사면 결정 ● 앵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2221_6188.html
1996 - 미국의 천문학자, 과학저술가 세이건(Sagan, Carl) 사망 세이건 [Sagan, Carl Edward, 1934.11.9~1996.12.20] [책갈피 속의 오늘]1996년 천문학자 칼 세이건 사망 세이건이 미국 교회협의회 사무총장인 캠벨 목사에게 물었다. “당신 같이 똑똑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가.” sec&sid1=102&oid=020&aid=0000219508
"꿈의 통신망" ISDN 시범서비스 실시 (공중전화카드)
1991 - 서울·대전·제주 지역 500여 일반가입자 대상으로 ISDN 시범 사업 개시 정보통신 20세기사 2. 분야별 연구개발 가. 정보통신망 연구개발 (1) 통신망 기술 (2) 종합정보통신망(ISDN) 기술 이와 같은 기술 개발에 힘입어 한국통신에서는 1990년 12월 서울과 대전 사이에 전시장을 벗어난 TDX-1B/ ISDN 시험 시스템을 구축하여 시범적으로 운용했다. http://20c.itfind.or.kr/20/5_3_3_2.html
역사속 오늘[1983년 12월 20일] PLO, 레바논 철수 1983년 오늘! /YTN 2012-12-20
터키는 1957년 3월 한국과 수교하였으며, 북한과는 2001년 6월 수교하였다. 1957년 6월 한국 공관, 1972년 서울 공관을 설치하였다. 1977년 12월 통상진흥 및 경제협력협정을 체결하고 이스탄불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1982년 12월 대통령 에브렌, 1991년 총리 아크불루트가 방한하였다. 1986년 이중과세방지협정, 1994년 투자보장협정, 1997년 섬유협정, 1999년 원자력협력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6·25전쟁 때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는데, 이에 앞서 러시아혁명 이후 1920년대에 러시아 군대와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탈출한 200여 명의 터키인이 집단이주, 서울과 대구·부산 등지에서 의류·담요·직물 등을 판매하였으나 8·15광복과 함께 모두 해외로 이주하였다. /naver
1982 - 미국의 아이돌 가수 쿡(Cook, David) 출생 쿡 [Cook, David Roland, 1982.12.20~ ] David Roland Cook (born December 20, 1982) is an American rock singer-songwriter, who rose to fame after winning the seventh season of the reality television show American Idol. Prior to Idol he released an album entitled Analog Heart, and his post-Idol self-titled album, produced by Rob Cavallo, was released on November 18, 2008 and has since been certified Platinum by the RIAA. Early life http://en.wikipedia.org/wiki/David_Cook_(singer)
1982 - 미국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Rubinstein, Arthur) 사망 루빈스타인 [Rubinstein, Arthur, 1887.1.28~1982.12.20]
[오늘속으로<677>(12월20일)] 루빈스타인 1982년 12월20일 미국 피아니스트 아터 루빈스타인이 95세로 작고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4&oid=038&aid=0000164652
1974 - 문세광 사형 집행 [사건 재구성] 총성은 울리는데 영부인 대피시키는 사람은 없고... 1974년 8월15일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재일교포인 문세광(당시 23살)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실패하고 영부인이었던 육영수(당시 49살) 씨를 총으로 쏴 절명케 했다. 그 해 7월30일 문세광은 오사카의 한국 총영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아 8월6일 김포공항에 입국했다. 그가 7월24일 일본 외무성으로 발급받은 여권은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1950년생)란 이름으로 되어있었다. 문세광은 조선호텔 1030호실에 묵었다. 서울 시내를 관광하는 등 시간을 보내던 그는 8월15일 아침 고급 승용차인 포드 20M을 렌트했다. 광복절 행사장은 비표가 있어야 입장가능했다. 그러나 문세광에게 비표가 있을 리 없었다. 오전 8시께 조선호텔을 떠난 문세광은 차 안에서 운전사에게 5000원권 두 장(당시 쌀 한가마니 가격 7440원)을 주면서 "하차 할 때 당신이 밖에서 차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9시께 문세광의 승용차는 국립국장에 도착했다. 운전사는 밖에서 문을 열어줬다. 최고급 승용차에 운전사가 깍듯이 모시는 것을 본 경호원들은 그를 고위층 인사로 알고 제지하지 않았다. 문세광은 일제 트랜지스터 라디오 안에 권총을 숨겼다. 오사카 공항, 김포공항에서도 검색대를 통과했듯이 이번에도 걸리지 않았다. 로비에서 서성거리며 문세광은 박 대통령을 저격할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 포기했다. 9시50분이면 행사장 입장을 완료해야 했으나 문세광은 시간을 넘겼다. 10시께 박 대통령 일행이 극장 내부로 들어갔다. 10시10분께 문세광은 곁에 있던 경호계장에게 일본어로 "안에 들어가서 대통령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문세광이 10시13분께 극장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비표가 없는 그를 경찰이 제지했다. 그러나 문세광은 경호계장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들어가라 했다"며 통과했다. 문세광은 행사장 1층 뒤 쪽 가운데에 앉았다. 박 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식사를 읽었다. "나는 오늘이 뜻 깊은 자리를 빌어서 조국통일이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10시23분께 문세광은 허리춤에 찼던 권총을 뽑으려다가 1발을 오발했다. 탄환은 그의 허벅지에 박혔다. 그러나 권총이 주머니에 들어있었고 행사장의 시끄러운 마이크 소리 때문에 '퍽' 소리만 났다.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문세광은 바로 일어나 연단으로 빠르게 접근하면서 총을 쏘았다. 이미 첫발은 오발이었고 두번째는 박 대통령이 연설하던 연설대의 좌측 상부에 맞았고 세번째는 불발이었다. 문세광이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오면서 총을 쏘자 박 대통령은 방탄 연설대 뒤로 몸을 낮췄다. 연단에 있던 안춘생 광복회장, 정일권 국회의장, 민복기 대법원장, 양택식 서울시장 등도 모두 소파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연단에 있던 육영수씨를 대피시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단 12m까지 접근한 문세광은 육씨를 향해 총을 쐈고 머리에 그대로 맞았다. 육씨는 서울대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그날 오후 7시 숨졌고 19일 장례를 치렀다. 당시 명사수로 이름 높았고 대한사격연맹 회장을 지낸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이 문세광을 향해 대응 사격을 했다. 그러나 총탄은 크게 빗나가 광복절 행사 합창단원으로 왔던 성동실업여자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양이 사망하고 말았다. 육씨를 저격한 뒤 문세광은 다섯번째 총탄을 발사했으나 천장에 맞았다. 연단에 뛰어오르려던 문세광은 경호원들에게 체포됐다. 박 대통령은 문세광이 잡혀나가자 마지막 남은 연설문을 마저 읽었다. 정부는 사건 이틀 뒤인 17일 문세광이 북한의 지령에 따라 박 대통령을 저격했다고 발표했다. 문세광이 북한 선박 만경봉호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북한 공작지도원과 조총련 간부인 김호룡의 지시를 받았고 공작금으로 130만엔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문세광은 1974년 3월1일 3·1절 경축식장에서 범행을 저지르려다가 총기 입수가 여의치 않아 8월15일로 연기됐다는 점도 수사결과에 적혀있었다. 문세광은 처음에는 묵비권을 행사했으나 한국 검찰의 극진한 태도에 심경변화를 일으켜 옥중수기를 통해 범행을 자백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문세광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74년 12월 20일 교수형이 집행됐다. 그에게는 국가보안법 위반·내란목적 살인·살인미수·출입국 관리법 위반 등의 죄가 적용됐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0&oid=047&aid=0000057086
1971 - 파키스탄 대통령에 줄피카르 부토 취임 [책갈피 속의 오늘]1971년 줄피카르 부토 파키스탄 대통령 취임 부토 가문은 ‘파키스탄의 케네디가(家)’로 불린다.
1968 - 미국의 소설가 스타인벡(Steinbeck, John) 사망 스타인벡 [Steinbeck, John (Ernst), 1902.2.27~1968.12.20] 오늘의 역사 (12월 20일)[1968년]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 사망 빈민계층과 소수 민족들의 이야기와 기계문명에 반대하는 글을 주로 써 온 존 스타인벡이 1968년 12월 20일 사망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교시절부터 농장일을 거들며 고학으로 스탠퍼드 대학에 진학했으나 결국 학자금 부족으로 중퇴하고 문학의 꿈을 키워야 했다.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216_0006
1963 - 한국 광부 서독 첫 파견 (20일 결단식, 21일 출발) 역사속 오늘[1963년 12월 20일] 한국 광부 서독 첫 파견 1963년 오늘! /YTN 2012-12-20 - 베를린 장벽 설치, 1961.8.13 1963 - 동서독 첫 이산가족 상봉 [책갈피 속의 오늘]1963년 동서독 첫 이산가족 상봉 매서운 바람. 회색빛 콘크리트 벽은 차갑고도 높았다. 코트 깃을 올려 세운 수많은 인파. 그들이 내뿜는 입김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가족을 만난다는 희망의 풍선처럼. http://news.donga.com/3//20061220/8387112/1 1963 - 유대인 학살 전범재판 1963년 오늘 서독 프랑크푸르트의 한 법정! /YTN 2012-12-20 http://www.ytn.co.kr/_pn/0422_201012200117252190
1962 - 서울 숭례문(남대문)을 국보 제1호로 지정 서울 숭례문(崇禮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있는 조선시대 성문. 국보 제1호.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라서 통칭 남대문(南大門)이라고 불린다. 1394년(태조 4) 창건되었으나 지금의 건물은 1447년(세종 29)에 개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中央間)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머리[龍頭], 그리고 용마루 양가에는 독수리머리를 올렸다.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짜리 목조 누각이 대부분 타버렸으며, 석축만 남았다. /naver
1962 -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국보 제76호로 지정 난중일기 [亂中日記]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진중에서 쓴 일기.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명칭은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이다. 부록으로 서간첩 1책, 임진장초 1책, 합 9책이다.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白岩里) 현충사(顯忠祠)에 소장되어 있다. (2) 서간첩 : 충무공의 서간집이다. (3) 임진장초 : 표지에 '임진장초(壬辰狀草)'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오른쪽 위에는 '만력이십년(萬曆 20年)'이라고 써 있으며, 지면(紙面)에는 여러 곳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인(全羅左道水軍節度使印)'이라는 주인(朱印)이 찍혀 있다. /네이버
1961 - 미국의 극작가 하트(Hart, Moss) 사망 하트 [Hart, Moss, 1904.10.24~1961.12.20]
하트 [Moss Hart, 1904.10.24~1961.12.20] 요약 미국의 극작가. 풍자극 《일생에 단 한 번》(1930)으로 성공,《우리집의 낙원》,《만찬에 온 사나이》등을 발표했다. 《마이 페어 레이디》의 연출자, 자서전 《제1막》으로도 유명하다. 본문 뉴욕 출생. 일찍이 연극에 뜻을 두었다. 극작가 G.S.코프먼(1889∼1961)을 설득하여 합작으로 풍자극 《일생에 단 한 번》(1930)을 발표하여 성공하였고, 그 후로 《우리집의 낙원》(1936) 《만찬(晩餐)에 온 사나이》(1939) 등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뮤지컬 《어둠 속의 여인》(1941)의 대본을 썼고, 《마이 페어 레이디》의 연출자, 또 자서전 《제1막》(1959)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네이버
- South Viet Nam NLF, 5th Anniv. 오늘의 역사 (12월 20일)[1960년]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 결성 1975년 사이공을 함락시킨 두 주역 가운데 하나인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FL)이 ‘반(反) 고 딘 디엠, 반미’를 기치로 내걸고 1960년 12월 20일 캄보디아 국경 부근 밀림지대에서 결성됐다. 각계 대표 약 60여명이 참석한 회의장 안에는 창립총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었고, 노출을 꺼리는 비밀요원 20여명이 커튼 뒤에 숨어 안건을 논의했다. 이틀간의 논의 끝에 민족주의연합정부 수립, 토지개혁 등 10개항의 강령이 채택됐다. 의장에는 이듬해 구엔 후 토가 선출됐다. 해방전선은 결성 1년 만에 해방구를 전영토의 20%까지 확대하고 군사조직도 만들어 1962년 2월경에는 무장병력이 10만명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했다. 베트남 노동당의 남부지부로 남베트남 인민혁명당을 결성(62년 1월)하고, 베트남 임시혁명정부를 수립(69년 6월)하는 등 세력을 키워 결국 1975년 남베트남을 점령한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04_0531 1941 - ‘플라잉 타이거즈’ 첫 공중전 [역사 속의 인물] ‘플라잉 타이거즈’ 클레어 첸노트 1941년 오늘 중국 윈난(雲南)성 쿤밍(昆明) 상공. 중화민국 공군 마크를 단 미제 P-41전투기 2개 대대가 일본의 99식 경폭격기 10대를 공격, 3대를 격추시키고 1대에 큰 손상을 입혔다. 중일전쟁 중 중화민국 공군 소속으로 싸운 제1차 미국인 의용대(AVG) ‘플라잉 타이거즈’의 첫 공중전이다. 이를 조직하고 지휘한 이가 클레어 L. 첸노트(1893-1958)이다. 육군 항공단에서 전역한 뒤 중국 공군 조종사 교관으로 있다가 장제스의 군사고문이 됐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장제스의 부탁을 받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요청, 전투기 100대, 조종사 100명, 지상요원 200명으로 AVG를 결성했다. 1942년 7월 미 공군에 흡수될 때까지 플라잉 타이거즈는 최소한 115대 이상의 일본기를 격추해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에 연전연패하던 연합국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렸다. 비결은 ‘일격즉탈’(一激卽脫). 높은 고도에서 급강하해 적기를 공격하고 격추를 못해도 선회해 다시 싸우지 않고 바로 내빼는 전법이다. 이는 선회력이 좋은 일본 전투기의 장점을 무력화시켜 큰 성과를 거뒀다. 이런 공로로 미 공군의 명예 중장 계급을 받았다. 대만은 타이베이에 기념비를 세워 그의 공을 기리고 있다. 정경훈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0년 12월 20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1011&yy=2010 1935 - 미국 DC-3 여객기 첫 운항 1935년 오늘! /YTN 2012-12-20 김영삼 [金泳三, 1927.12.20~] 경남 거제(巨濟) 출생. 195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무총리 장택상(張澤相)의 비서가 되었다. 1954년 26세의 최연소자로 3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5·6·7·8 ·9·10·13·14대 의원에 당선됨으로써 9선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 사이 민주당 대변인 2번, 민중당 등 야당 원내총무 5번을 역임하고 1974·1979년의 신민당과 1987년의 통일민주당 등 야당총재를 3번 지냈다. 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 총재가 되고 그해 12월 1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9년 6월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한국 정치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였다. 1990년 민주정의당 총재 노태우(盧泰愚),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金鍾泌)과 통합, 민주자유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멘지스 [Menzies, Robert Gordon, 1894.12.20~1978.5.16] 빅토리아주(州) 제파릿 출생. 멜버른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활약하였다. 1928년 빅토리아 주의회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34년 연방의회 의원이 되었다. 1939∼1941년 총리를 지냈으며 1939∼1940년 재무장관, 1940년 상공장관, 1939∼1941년 국방장관 등을 겸임하였다. 1941년 총리직을 사임하고 자유당을 결성하였다. 1949년 12월 자유당 지방당과 연립하여 총선거에 승리하여 총리가 된 후부터 1966년 1월 사임할 때까지 연속 일곱 차례나 총선거에서 이겨 정권을 잡았다. 1950년 수에즈동란 때 영국정부를 지지하고, 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를 강력히 지지하였다. /naver
헤이로프스키 [Heyrovsky, Jaroslav, 1890.12.20~1967.3.27] 프라하에서 출생하였다. 프라하대학교에서 화학·물리학 등을 배운 후 런던대학교에서 유학하였다. 1918년 프라하대학교, 1921년 런던대학교에서 각각 학위를 받았다. 프라하대학교 교수, 물리화학연구소장을 거쳐, 1950∼1963년에는 신설된 중앙 폴라로그래피연구소(현재는 이로프스키 물리화학·전기화학 연구소로 개칭) 소장을 지냈다. 적하수은전극(滴下水銀電極)을 이용하여, 용액 중에 흐르는 전류의 세기와, 거기에 가해진 전압 사이의 관계를 자동적으로 그리게 하는 폴라로그래피를 발명, 그것을 이용한 여러 물질의 산화환원반응을 밝히기 위한 연구를 하여, 분석화학·용액화학 등 다른 분야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폴라로그래피 발명의 업적으로 1959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주요저서로는 《Oszillographische Polarographie mit Wechselstrom》(1959, 共著) 《Principle of Polarography》(1966, 共著) 등이 있다. /naver
- 'Dear Me.. It's a Shower' 다케우치 세이호 [竹內栖鳳, 1864.12.20~1942.8.23] 근대 일본화의 대표적인 화가. 본명은 다케우치 고키치[竹內恒吉]. 14세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17세에 고노 바이레이[幸野楳嶺]의 제자가 되었다. 1889년 교토 시립 미술공예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1900년을 유럽에서 보낸 뒤 인상파의 영향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자연 묘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중국화와 서양화의 기법도 자유롭게 활용했다. 대표작으로 〈고도의 가을 古都の秋〉과 〈비와 우박 雨霽〉 및 〈베네치아의 달빛〉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 'Landscape with Canal'
1858 - 네덜란드의 화가, 그래픽 미술가 토로프(Toorop, Jan) 출생 토로프 [Toorop, Jan, 1858.12.20~1928.3.3] 본명은 Johannes Theodoor Toorop. 네덜란드의 화가, 그래픽 미술가. 유럽 북부에서 유행한 아르 누보 양식의 주요한 인물이다. 암스테르담과 브뤼셀에 있는 미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특히 마네와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그의 양식의 발전은 후기인상주의 및 신인상주의의 점묘화법으로부터 당시 순수미술뿐만 아니라 디자인의 모든 분야에까지 퍼진 아르누보 양식을 낳은 상징주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양식 발전을 반영하고 있다. 1887년 그는 상징주의 미술의 정신성을 강조하며 브뤼셀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들의 그룹인 '20인(人)회'(Les Vingt)에 가입했다. 말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그뒤로는 자신의 독특한 '선(線)이상주의' 양식에 따라 종교적인 주제를 자주 다루었다. /브리태니커
뷔송 [Buisson, Ferdinand-Edourard, 1841.12.20~1932.2.16] 프랑스의 교육자. 프랑스 초등교육체제를 재조직하고, 1927년 독일 평화운동가 루트비히 크비데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나폴레옹 3세 때 프랑스 제2제국에 충성한다는 교사의 서약을 거부하고 스위스로 망명하여 1866~70년에 뇌샤텔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했다. 1867년 제1회 제네바 평화회의에 참여해 유럽 연방을 주창했다. 1870~71년의 프랑스-독일 전쟁 기간중 파리가 함락된 후 그는 전쟁고아 수용소를 조직했다. 프랑스 제3공화정 시기중 1871년 파리 공립학교 장학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종교교육 철폐를 제안했다는 이유로 사임을 강요당했다. 초등교육 국가감독관(1879~96)으로 있으면서 1881, 1886년 공립학교를 교회의 통제로부터 해방시키는 법을 기초하는 데 총리 쥘 페리를 도왔으며, 1882년에는 초등교육을 무상의무교육으로 만들었다. 1896~1902년 소르본대학교에서 강의한 후 하원의원이 되었다(1902~14, 1919~23). 1898년 뷔송은 인권연맹 창립에 기여했다. 1913~26년에, 특히 제1차 세계대전중에 인권연맹 의장으로서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전후 프랑스와 독일의 친선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브리태니커
1815 - 중국고전을 번역한 영국 선교사 레그(레게)(Legge, James) 출생 레그(레게) [Legge, James, 1815.12.20~1897.11.29] James Legge (理雅各; December 20, 1815 – November 29, 1897) was a noted Scottish sinologist, a Scottish Congregationalist, representative of the London Missionary Society in Malacca and Hong Kong (1840–1873), and first professor of Chinese at Oxford University (1876–1897). In association with Max Müller he prepared the monumental Sacred Books of the East series, published in 50 volumes between 1879 and 1891. http://en.wikipedia.org/wiki/James_Legge
... 논어를 처음 영어로 완역한 제임스 레그는 1840년부터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중국의 고전을 연구해서 사서 삼경을 모두 번역했는데, 원문뿐만 아니라 주요 주석서들까지 참고하여 세세한 주를 덧붙였어요. 레그의 작업은 감탄을 자아낼 만한 방대한 작업인데 그가 선교사로서 자기의 직책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이룬 이 업적을 보면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학자는 많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 ... {논어}의 최초 영문 번역자인 제임스 레그(James Legge)는 중국을 서양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중국의 고전을 전부 번역한 훌륭한 학자인데도 공자를 싫어했다고 해요. 그러나 선교사 생활에서 은퇴하고 런던 대학에서 동양학 강의를 하면서는 읽을수록 공자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공자가 정직하지 못했고 중국인들이 정직하지 못한 것도 공자의 영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그가 기독교 선교사로서 기독교 사상이 유학 사상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의무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공자를 현존했던 생생한 인물로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해요. 그는 공자가 정직하지 못했다는 증거로, [양화편] 20장에서 유비가 찾아 왔을 때 공자가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고는 그가 돌아갈 때 그에게 들리도록 거문고를 탄 일화를 지적했습니다. 물론 공자는 유비에게 자신이 그를 일부러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거문고를 탄 것이었지요. 그러니까 그것은 매우 정직한 '알림'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고지식한 선교사였던 레그는 그런 정직함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레그와 같이 초기 영역자들 중에는 기독교에 대한 충성심에서인지 공자를 오해하고 폄하한 사람이 몇 명 있었던 것 같아요. ... /국민대학교 목요특강(서양의 학자들이 본 공자의 생애와 신념) 서지문(고려대 영문학과 교수) http://www.kookmin.ac.kr/site/ecampus/perfor/thu.htm?mode= view&num=154&page=14&pPart=&pKeyword=&pGroup=
1812 - 미국 서부 탐사단을 도운 인디언 여인 새커거위아(Sacagawea) 사망 새커거위아 [Sacagawea, 1788?~1812.12.20] [역사 속의 인물] 미국 서부 탐사를 도운 사카가위아 19세기 초, 미국 정부는 서부지역 탐사를 위해 메리웨더 루이스와 윌리엄 클락이 이끄는 원정대를 구성했다. '루이스`클락 원정대'는 1804년 5월에 세인트루이스에서 출발, 태평양 연안에 도달했다가 되돌아오는 2년 4개월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원정대의 성공에는 도중에 만난 '사카가위아'라는 인디언 여인의 역할이 컸다. 사카가위아는 이웃 부족에 납치됐다가 결혼해 16살의 나이로 임신한 상태였다. 그는 원정대의 안내자 겸 통역을 맡아 인디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나아가도록 했다. 식량이 떨어졌을 때에는 풀뿌리를 찾아 굶주림을 면하게 했고 다친 대원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현명한 여성이었던 그녀는 수개월 동안 함께하면서 원정대의 성공에 이바지했다. 원정 도중에 아들을 낳는 어려움 속에서 한 마디도 불평하지 않을 정도로 인내심도 강했다. 그녀의 이름은 인디언 말로 '배를 띄우는 여인'이라는 뜻이었는데 그녀의 역할과 딱 들어맞았다. 1788년경에 태어나 1812년 오늘, 24세에 숨졌다. 포카혼타스와 함께 잘 알려진 인디언 여인으로 미국인들은 동전에 그녀의 얼굴을 새겨 기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자신이 탐험을 안내한 후 인디언들이 고향에서 쫓겨나는 등 고통받는 현실을 보고 슬퍼하고 괴로워했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2년 12월 20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6716&yy=2012
1803 - 미국,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매입 [오늘의 경제소사/12월20일] 루이지애나 매입 신의주항과 압록강의 자유이용권을 요구했는데 만주 전체를 사가라고 제의한다면? 비슷한 일이 있었다. 뉴올리언스항과 미시시피강의 항행권을 보장받으려는 미국에 프랑스가 루이지애나 전체를 사가라고 역제안한 것. 1803년 12월20일, 프랑스군의 철수로 루이지애나는 미국 영토로 들어왔다. 한반도 면적의 10배에 해당하는 광대한 땅이다. 야심가 나폴레옹은 당초 미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황제를 꿈꿨다. 매각은 안중에 없던 그를 코너로 몰고 간 것은 1801년 프랑스 생 도밍구(요즘 하이티)에서 발생한 흑인노예들의 반란. 2만명의 정예 병력을 파견했지만 끈질긴 저항에 봉착할 즈음 루이지애나를 위임 통치하던 스페인 총독이 미국 배의 운항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린다. 물동량의 40%를 미시시피강에 의존하던 미국은 다급해졌다. 항구 기착권만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이 준비한 돈은 2만달러. 프랑스의 역제안 금액은 2,250만달러에 달했다. 최종 가격은 1,500만달러. 에이커당 3센트에 불과한 헐값이었지만 미국 조야가 들끓었다. 일부 주는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작은 정부’를 신봉했던 제퍼슨 대통령은 평소 신념과 달리 의회의 비준도 없이 서둘러 승인도장을 찍었다. 희대의 거래 이후 두 나라의 행보는 극과 극이다. 골치 아픈 식민지를 팔아 넘겨 영국과 완충지대를 형성하겠다던 프랑스는 쇠락의 길을, 미국은 서부 대개척이라는 융성가도를 달리게 됐다. 협상주역들의 여적도 흥미롭다. 미국 측 전권대사 제임스 먼로는 5대 대통령에 취임, ‘먼로 독트린’를 남겼다. 프랑스 공사였던 리빙스턴은 증기선의 아버지 로버트 풀턴의 후원자로 유명하다. 미국의 비공식 대사로 활약한 듀폰의 아들은 세계적인 화학그룹 듀폰을 세웠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5/12/19 17:15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512/e2005121917125763820.htm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