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크림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들어, 아까 그여자.. 너무 차가울 것 같은데.. 막상 핥으면
달콤 할것 같은... 느낌 말이야... "
다소 엉뚱한 유진의 말에 천명은 그냥 웃고만 있었다.
참 그녀다운 발상인것 처럼..
"그럼, 내일 학교도 같이 다녀야해?"
"같이는 아니더라도, 등하교 때는 함께 하실 겁니다."
뒷짐을 지고 걸어가는 유진의 뒤를 천명이 천천히 따라가고 있다.
여느 학생들이랑 다르게 책이 제법 들어가 있어 보이는 가방이 유진의 작은 어깨를 힘겹게
하는 것 같아서 천명이 손을 뻗어 그녀의 가방을 벗긴다.
"이리 주세요, 제가 들어 드리죠-"
"아냐~ 괜찮아. 이 정도 가방 쯤이야 혼자 들을 수 있어.
자꾸 너마저 나한테 그렇게 대하면 너무 불편해져-"
싱긋이...
시원스럽게 벌어지는 그녀의 밝은 웃음이 상쾌하다.
그 웃음이 너무 예쁘게 투명해서 인지 몰라도, 천명 역시 밝게 웃는다.
"죄송해요. 다음부턴 주의하겠습니다."
"난, 약하지 않단 말이야.."
.
.
.
Aerosmisth의 dream on이 천천히 들린다.
일정하게 맞춰치는 리듬과 보컬의 목소리가 조금씩 더 애잔하게 성희의 가슴을 쿵쾅 거리게 한다.
별다른 기타 사운드와 드럼이 없이도 잔잔한 비트와 리듬만 가지고도 잘 끌어나가는
차분한 초반부..
좀 더 애잔하게 흘러나오는 보컬의 목소리와 애잔하게 흘러지는 느낌이...
deam on... deam on.... deam on....
그녀의 심장 소리 처럼 일정히 두들겨 지는 비트...
dream.. on....
그녀의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이미 그 소리는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크게 그녀를 가두고 있었다.
하얀 쇼파에 누워 밤이 될때까지도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듯이 조용히 성희는 옷에 묻은 먼지 조차 털어내지 않고 계속 눈을 감고 노래를 듣는다.
어느새 시내의 화려한 어둠속 조명들과 은근하게 비치는 달빛이 그녀의 사무실 방안으로 스며 들었다.
살짝 감겨진 그녀의 눈커플 위로 조용히 내려앉은 긴 속눈썹...
그리고 그 아래 살짝 그늘이 생긴 그녀의 얼굴.
평온하고, 슬퍼보인다...
[찰칵-]
살짝이 누군가가 성희의 방안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deam on...deam on... deams come true...'
타인의 발자욱이 조금씩 그녀에게 가까워 졌을때 까지도...
검은 그림자가 성희의 얼굴 위로 드리워 졌을 때에도...
'deam on...deam on...'
달빛에 비추어서 더 창백해 보이는 타인의 가녀린 손가락이 성희의 이어폰으로 다가간다.
"건들면 니 손가락은 부러져 버릴꺼야-"
음산한 공기를 타고 차갑게 울려퍼지는 성희의 낮은 음성...
뼈 속까지 서늘하게 만드는 감정없이 매마른 그녀의 목소리에 노란빛 달빛이
창백하게 변해 방안을 비춘다.
성희의 귀의 이어폰을 빼려는 타인의 손짓이 얼어붙었다.
"움직이지마."
그대로 눈도 뜨지 않고, 감각에 의존 해서만 누군가가 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성희였다.
이어폰에서는 계속해서 Aerosmisth의 dream on이 흘러나온다.
성희의 숨소리와, 목소리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커다란, 노래...
그리고 타인의 숨소리, 짐승의 눈같이 번뜩여 지는 음산한 하얀 달빛만 최성희의 사무실을 가득 매운다.
성희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계속해서 여유롭게 쇼파에 누워서 온몸으로 타인의 인기척을 느낀다.
그녀의 충고처럼 타인의 그림자는 미동도 없이 서있다.
"누구야!?"
그 상태로 몇초가 더 지났을까..?
더이상 이어폰에서 'dream on' 이 흘러나오지 않게 되었을때야,
성희는 손수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고 여전히 눈은 감은체 상대방이 신분을 확인했다.
"말을 안해도 니 손가락은 부러져-"
"... 유진.."
성희가 나즈막히 쿡쿡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유진이라니... 웃기는 꼬마일세..
오늘 낮에 있었던 첫 만남때와 다를것이 없는 상황이였다.
단지 밤으로 바뀌었고 어두워졌다는 사실 이외에는 별 다를바 없는 상황이였고, 말이였다.
낮에 처럼 성희는 눈을 감은체 미동도 안하고 누구냐고 여유롭게 물었고,
낮에 처럼 유진은 어이 없게도 자신의 이름을 어김없이 성희에게 말한다.
많이 놀란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렇게 엉뚱한건지, 아니면 순진한건지...
무조건 자신의 이름을 댄다.
생각해 보니 너무 엉뚱한 대답아닌가? 지금이야 이름을 안다손 쳐도, 아까 낮에는 이름도 모르는데
다짜고짜 유진이라고 하다니...
성희는 눈을 감은체 이어폰을 빼 둘둘 감더니 유리 테이블에 획 던져버리곤 계속 쿡쿡 거리면서 웃는다.
부스럭 거리는 부음 없이도 날래고 가볍게 몸을 일으켜 유진앞에 선 성희는 하얗고 창백한 달빛 때문인지
그 달빛 보다 더 여위어 보였고, 그녀의 갈색 피부는 어둠이 쌓인 공기보다 더 어두운 느낌이 난다.
성희는 물기 없이 마른 그러면서도, 유난히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꽤 짧게 쳐낸 머리가 지독치도 자연스러고 어울렸으며...
알 수 없게 계속 큭큭 거리면서 하얀 이빨이 살짝 드러나는 붉고 얇은 입술에 계속 미소를 띄우며...
아직은 커튼에 가려진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유진에게 다가간다.
성희는 유진이 보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그녀가 보인다.
"꽤 늦은 시간인데... 어떻게 들어오셨죠?"
딱딱 끊어지는 높임말에, 지극히 사무적인 건조한 목소리..
더 가까이 다가갈 수도, 더 멀리 갈수도 없는 딱 그만큼의 경계를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러일으키는 그녀 특유의 차갑고 예의 바른 음성이 유진을 향해 천천히 흘러든다.
성희는 자신의 팔목에 있는 은빛 시계를 달빛에 비추며 시계를 제차 확인했지만
분명히 시간은 11시 30분 정도였고 밖이 어두운걸 봐선 밤이였다.
그런데 청화회 건물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잠옷 차림인 유진이였다.
아무리 청화회 회장의 딸이라손 쳐도 분명히 이 시간대엔 보안 유지 때문에 잘들여보내지 않을 터,
근데 어떻게 들어왔는지가 더 궁금하다.
"들어온게 아니라, 나도 이 건물 안에 같이 살아-"
아주 당찬 목소리였다.
낮에 봤던 모범생 이미지 그대로 였다.
아직도 은테 안경을 쓰고 한갈래로 야무지게 머릴 묶은 모습이 생각난다.
"다들 여기서 살아- 다들 여기가 임시 거처 같이 여기서 살아- 그래서 사무실이 넓은거야-
필요한 침대며, 가구며 뭐든 다 들어가게 모두들 큰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거야."
"아~ 그렇군요-"
제법 당찬 목소리로 똑똑하게 말하는게 왠지 더 어려보인다.
성희는 재밌는 생각에 웃으면서 대답을 한다.
"나도 이 층이거든, 이 방이랑 얼마 차이 안져, 이 복도 끝방이 내 방이야-"
"아~ 그렇군요- 근데 왜 이렇게 늦은 밤에.."
"난,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고약한 버릇이 있으시군요- 야심한 밤에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몰래 들어오다니요.
이거, 예상 밖인 걸요?"
날카로운 성희의 말에 유진은 입을 꽉 다물었다.
오호.. 꽤 자존심도 있군...
왠지 성희는 계속 웃음이 나온다.
청화회에서 그렇게 애지중지 하는 사람이 아직도 어린티가 나는 고등학생인것도
우습고, 청화회를 잡고 있는 한성구룹 회장 자제라는 아이가 너무나 평범하고 평범한 여고생의
모습인것도 우습고, 다른 대기업 자제들이랑 파티나 즐기는 그런 번지르르 하고 건방지고,
어리광이나 피고 기름기나 줄줄 흐르는 그런 약해 빠진 곱게 자란 사람을 생각했는데
때묻지 않는 것처럼 순수하고, 자존심도 제법 부릴줄 알고, 이로 저로, 예상치와 너무 빗나간
유진의 모습에 성희는 계속 웃음이 나온다.
"오... 오해하지마- 난 그런 애가 아니..."
"희야- 나왔어-"
갑자기 어두운 방에 불이 딸깍 하면서 켜졌고, 성희의 목소리도 아닌, 유진의 목소리도 아닌.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느새 하얀 달빛은 없어지고 방안은 아이보리 색의 부드러운 주황빛 조명으로 가득 차오른다.
커다란 창문, 그리고 고풍스런 잿빛 커튼과 방분위기는 어울어 져 있는데,
왠지 모르게 커다란 하얀색 쇼파랑 벽에 그림 겔러리 처럼 잘 정리되어 걸려있는 영화 포스터들은
고급스럽고 단조로운 느낌을 세련된 분위기로 바꿔준다.
그리고, 그 창문 앞에는 야경에 녹아 들은 듯한 성희가 서있었다.
유진은 처음으로 자세히 성희 본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련되어 보이는 갈색 피부에, 훌쩍 마르고 큰키를 가지고 있었고,
회색 나시티에 얼룩무늬 바지를 입은 모습은 스포티한 느낌을 주었는데
머리는 흑단색에 층을 많이 져서 이리저리 밖으로 뻗쳐 있었는데 절대 지저분 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위한 머리 인것 처럼, 매우 자연스러웠고, 한쪽 눈을 살짝 덮은 그녀의 앞머린,
한번 쓸어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머리 아래 있는 검은 눈동자, 물기가 없어 마르고
냉정해 보인다고 느꼈지만 제대로된 불빛 아래서 보니 오히려 슬픈 느낌을 준다고나 할까...
곡선 없이 일자로 곧게 뻗은 콧날과 냉소가 어울리는 얇은 입술이...
그녀는 전체적 검은 색과 짙은 붉은 색이 어울리는 느낌을 주었다.
한참을 멍하게 성희를 쳐다보았을까...
문득 성희의 목소리가 밝게 울렸다.
"어서와 최유리-"
"성은 빼고 불러 줄수 없어?"
"어서와 유리야- 이제 됐니?"
"집에 전화했더니 없드라, 그래서 여기 있나 찾아왔어-
이 한겨울, 추운데 나시티만 달랑 입고 나대는 너 감기걸릴라 걱정도 되구.
배고플거 같아서 먹을 것 좀 사왔는데..."
"맥주는 없고?"
"안돼-_-! 넌 금주야! 어.. 근데.. 누구야?! 성희야?"
성희야.. 희야...
왠지 그 발음이 부드러운것 같다. 입을 그렇게 많이 안벌려도 되고,
혀를 많이 안움직여도, 바람만으로 나는 듯한 그 발음...
유진은 문득 성희에게서 눈을 땐다.
그리고선 불을 켠 장본인을 그제서야 뒤 돌아본다.
"아. 인사 드리지 그래, 유리야, 니가 그렇게 보고싶어 마지 않는 한성구룹 회장님 자제분이시다."
"정말?! "
그제서야, 유리는 유진을 쳐다보며 다가온다.
유리도 성희가 했던 것처럼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자신을 소개 했다.
"안녕하세요, 전 유리입니다. 성희의 gun master죠. 성희만큼 자주 뵐 일은 없겠지만요."
(gun master: 총기의 종류와 다루는 법을 이론적으로 섭렵하고 있는 사람. 총을 직접 나루는 건오너의 총을
관리하며, 그 오너에게 맞는 총기를 선정한다.)
사뭇, 성희와는 다른 느낌이다. 예의는 갖추었지만, 그것이 딱딱하거나
차가운 느낌을 주진 않는 유리였다.
굉장히 귀엽고 예쁘장한 외모에 싱긋 웃는 밝은 웃음까지.
사람들에게 호감가는 미모이다.
유리가 인사를 마치자, 성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가볍게 유리의 어깨를
살짝 안더니 유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장면에..
알수 없는 기분이 유진의 온몸을 쓸고 지나간다는걸...
성희는 알고 있었을까...
.
.
.
"음, 너무 어리잖아-"
"그래?"
성희는 아까부터 쿡쿡거리고만 있었다.
그런 그녀를 유리는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성희는 개입치 않고 계속 웃기만 했다.
유진은 이미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지 오래였고,
성희는 유리가 가져온 음식들을 천천히 먹기 시작한다.
"저렇게 어린 아이를 우리 최성희가 직속상관 만치 깍듯이 따라다녀야 한다니..."
"편하잖아- 할일도 별로 없을 것 같아-"
천천히 주섬주섬 먹는 성희에게 음료수를 따주는 유리는 옷에 먼지 좀 털고 먹으라고
야단이였지만 성희는 지금으로썬 깔끔을 떨고 싶은 기분은 아니다.
"꽤 당찬 꼬마던걸? 또 재벌집 티도 않내고 말이야."
"몇살 쯤 됐을까? 고1, 2 쯤은 된거 같아. 그치? 성희야."
"응.-"
"히야.. 우린 완전히 아줌마 아니야? 만약에 17살 이면,
우리랑 나이 터울이.. 8살이다-_-;
우리 진짜 아줌마 아니야? 우린 그래도 25밖에 안됐는데 말이야..."
"아직 나이는 정확히 몰라."
"어려 보이잖아-"
"아까 천명이가 얘기하는걸 좀 듣자 하니, 원서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걸
들으니까, 고 3인거 같은데?"
"그래 더 어려 보이던데...."
"야, 최유리.. 관심꺼, 남 일은 알고 싶지 않아. 난 그애를
잘 보호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거야. 그게 계약 조건이고,
내가 앞으로 노후까지 먹고살 돈이 마련되는 길이야."
"너무 냉정하게 굴지마, 남한테 무심한것도 병이야."
"병이 아니야, 관심을 가져야할 이유가 없어져서 그래..."
그래.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어져서 그래..
그 아이가 음악을 좋아해서, 나도 음악을 좋아하고,
그 아이가 영화를 좋아해서, 나도 영화를 좋아하고,
그 아이가 흰색을 좋아해서, 나도 흰색을 좋아하고,
그것 뿐이야...
그것 뿐이라고..
"그럼, 최소한.. 나한테 만은, 무심하지 마..."
"유리야."
"최소한, 나한텐.. 그럼, 소흘하지 말라고.. 니 그늘 아래 있으니까, 최소한..
물이라도 주고, 햇빛이라도.. 쬐일수 있게.. 해."
"유리야."
성희가 손을 뻗어 유리를 감싼다.
유리의 작은 어깨가 차갑다.
이제 유리는 성희 앞에선 울지 않는다.
하지만 속으로는 가슴 찟어지게 아플 거란거, 성희는 모른다.
그렇지만, 성희는 그녀를 감싼다.
"미안해."
"동생으로 안으면, 난 더 시들어 갈꺼야..."
말이 없다.
더이상 성희는 말이 없다.
유수영, 너 없이 2년, 그리고 또 1년..
3년...
그래도.. 사랑하는 걸...
그래도.. 널 놓아 주지 않아..
내가 널 아직 보내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