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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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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자유게시판(한류) 스크랩 내 식의 귀향 / 박완서
생활정보 추천 0 조회 46 11.01.24 00: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내 식의 귀향 / 수필 박완서

 

친정 쪽은 휴전선 이북이고,

시댁 쪽은 대대로 서울에서도 사대문 안을 벗어나서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걸 은근히 으스대는 서울 토박이라

명절이 돼도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다.

금년엔 좀 덜했지만 추석 때마다 전국의 도로란 도로가 엄청나게 정체하는 광경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돌아갈 곳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마음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아이들한테까지 그것으로 생색을 내곤 했다.

 

마치 집 없는 거지가 남의 집 불타는 걸 고소하게 구경하면서

제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집이 없어 불날 걱정 안 해도 좋으니 얼마나 좋으냐.

다 애비 덕인 줄 알아라" 했다는 옛날이야기 속의 거지 아범처럼 말이다.

마당에서 한때 하늘을 뒤덮을 듯이 무성하던 나무들이 작은 바람에도 우수수 잎을 떨어뜨리고 있다.

 

흙에서 난 것들이 그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건 아무도 못 말린다.

 

사람도 설령 나고 자란 데가 흙을 밟을 수 있는 시골이 아니라 해도

추석이 되면 조상의 묘나 집안 내의 연로한 어른들을 찾아뵙고

눈도장이든 몸 도장이든 찍고 와야 사람 사는 도리를 다한 것처럼 편안해진다.

이제 많이 살아 친·인척 간에 제일 연장자가 됐으니 가만히 앉아서 자식들이나 손자들을 맞는 입장이 됐다고 해도,

도리를 못다 한 것 같은 아쉬움이 어찌 없겠는가.

아니, 그건 도리가 아니라 그리움일 것이다.

저 지는 잎들이 어찌 섭리만으로 저리도 황홀하고 표표하게 몸을 날릴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는 건 이승에서 가장 처량해진 나이이다.

 

만추(晩秋)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는 쓸쓸함,

내 정수리를 지그시 눌러줄 웃어른이 없다는 허전함 때문이었을까.

예년에는 한 번 가던 추석 성묘를 올해는 두 번 다녀왔다.

한 번은 벌초를 겸해 대가족을 이끌고 다녀왔고,

며칠 있다 왠지 혼자 가고 싶었지만 차 없이 갈 수 없는 곳이라 운전자만 데리고 갔다.

남편과 아들이 잠들어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이다.

왜 혼자 오고 싶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이 먼저 간 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갈 때마다 가슴이 에이는 듯 아프던 데가 이상하게 정답게 느껴지면서 깊은 위안을 받았다.

지대가 높아 전망이 좋은데도 산꼭대기가 아니고

골짜기라 우리 동네처럼 아늑한 것도 마음에 들었고 규격화된 작은 비석도 마음에 들었다.

비석엔 내 이름도 생년월일과 함께 새겨져 있다.

다만 몰(沒)한 날짜만 빠져 있다.

나의 사후(死後) 내 자식들은 큰 비석이나 아름다운 비명을 위해 고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긴 어떤 무덤도 잘난 척하거나 돋보이려고 허황된 장식을 하지 않는 평등한 공동묘지이다.

그래도 우리들 것보다 조금만 더 큰 봉분과 비석을 가진 김수환 추기경님의 묘소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도 저승의 큰 '빽'이다.

다만 차도에서 묘지까지 내려가는 길이 가파른 것이 걱정스럽다.

운구하다가 관을 놓쳐 굴러 떨어지면

혹시 저 늙은이가 살아날까 봐 조문객들이 혼비백산한다면

그건 아마 이 세상에 대한 나의 마지막 농담이 되겠지.

실없는 농담 말고 후대에 남길 행적이 뭐가 있겠는가.

십여년 전 고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최초로 휴전선을 넘어 고향을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역사적인 장관에 크게 감동했지만 될 수 있으면 흥분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정 회장은 정 회장답게 고향에 갔지만 나는 내식으로 고향에 가고 싶다.

완행열차를 타고 개성 역에 내리고 싶다.

나 홀로 고개를 넘고,

넓은 벌을 쉬엄쉬엄 걷다가 운수 좋으면 지나가는 달구지라도 얻어타고 싶다.

아무의 환영도 주목도 받지 않고 초라하지도 유난스럽지도 않게 표표히 동구 밖을 들어서고 싶다.

계절은 어느 계절이어도 상관없지만 때는 일몰 무렵이었으면 참 좋겠다.

내 주름살의 깊은 골짜기로 신산함 대신 우수가 흐르고,

달라지고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들어내던 광채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부드럽게 화해하는 시간,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하고 싶다.

내 기억 속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해도 어느 조촐한 툇마루,

깨끗하게 늙은 노인의 얼굴에서 내 어릴 적 동무들의 이름을 되살려낼 수 있으면 나는 족하리라.'

그 분이 철통 같은 분단의 장벽을 뚫고 낸 물꼬는 마침내 금강산관광 개성관광까지 이어졌고

나도 금강산관광까지는 다녀왔지만 개성관광엔 저항을 느꼈다.

어떻게 고작 6~7km 밖에 선영이 있는 고향 마을을 놔두고 개성 구경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개성관광을 제안받을 때

나 홀로 경로 이탈을 해서 고향 마을 박적골에 다녀오고 싶다는 소원을 말해봤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할 것 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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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朴婉緖, 1931년 10월 20일 ~ 2011년 1월 22일)


아들이 서울대 의대를 나오고 인턴 시절 연탄가스로 갑자기
사망했을 때  느끼는 그녀의 좌절... 그리고 이해와 극복.

 

아들이 의과 대학에 다녔는데 마취과를 선택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왜 하필이면 마취과냐고 물었더니 아들 대답이 이래요


어머니 마취과 의사는 주로 수술장에서 환자의 의식과 감각이 없는 동안 환자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가 무사히 수술이 끝나고 의식이 돌아오면 별 볼일이 없어지기 때문에 환자나 환자 가족으로부터 고맙다든가 애썼다는 치하를 받는 일이 거의 없지요

 
자기가 애를 태우며 생명줄을 붙들어 준 환자가 살아나서
자기를 전혀 기억해 주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이겠어요


저 그 쓸쓸함에 왠지 마음이 끌려요 이러는 거예요

 

그 아들에 그 에미 아니랄까봐
나 또한 그 아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아 쾌히 승락했었지요



88서울 올림픽으로

온 국민이 활기와 환희, 새로운 희망과 자신감으로 의기충천해 있을 때 그 한 해 동안에 나는 남편과 아들을 석 달 간격으로 잃었다.

남편이 먼저였다.

 

우린 남들이 부러워한 금슬 좋은 부부였고, 특히 나는 생활인으로 결격사항이 많은 사람이라 전적으로 의존적이었다.
 

다행히네 딸은 다 시집보낸 뒤였고, 막내로 아들 하나만 미혼이었지만
그 아들도 제 앞가림을 하고도 남을 만한 전문직으로 키워놨겠다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혼자서 살 자신도 없었다. 극도의 무력감은 슬픔보다 더 나빴다.


아들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전혀 신경을 안 쓰고 남편의 영정을 머리맡에 두고 여보 나 좀 데려가 줘요. 하는 소리만 주문처럼 외고 살았다.

그런 지 석 달 만에 남편이 데려간 건 내가 아니라 아들이었다.

 

나는 겁 없이 그런 주문을 왼 내 입술을 짓찧어도 시원치가 않았고,
내 소원에 그런 어깃장으로 답한 남편이 꼴도 보기 싫어 당장 영정사진을 치워버렸다.

 

이럴 리가 없다. 제발 꿈이어라.


방을 헤매며 온몸을 벽에 부딧치는 난동도 부려보았지만 악몽은 깨어나지지 않았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벌을 주셨나 항의도 해보고 나도 아들 곁으로 데려다 달라고 처절하게 기도도 해보았다.
 

그러나 내 절규는 하느님의 견고한 침묵의 변죽도 울리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 하느님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깨달은 게 있다면

피조물은 길든 짧든 창조주가 정해준 수명에서 일 초도 더하거나 뺄 수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깨달음은 질책보다 엄혹했다...

 


"아들이 내 속을 썩이거나 실망시킨 일을 생각해 내려고 애쓴다.

물에 빠져 검부락지라도 잡으려는 노력처럼 처참하게 허위적댄다.

 

하다못해 남에게 흉을 잡힌 일이나 좋지 못한 버릇이라도 생각해 낼 수 있다면 다소 숨통이 트일 것 같다.
 

이 비참한 자구노력도 허사가 되고 만다. 그 애는 완벽했다.

그 애가 한 짓 중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단 한 가지도 없단 말인가.

그 애가 완벽했다는 확신은 그 애를 잃은 상실감 또한 천벌처럼 완벽하게 한다.

바늘 구멍만한 구원의 여지도 없다.

 

그 애 없이 사는 걸 견디어내야 하다니,무시무시했다…."

 

하나님은 진실한 기도에 응답하시는지, 박완서님이  결국 '한 말씀'을 듣게 된 사연은 감동적입니다.

지인의 주선으로 잠시 머물게 된 부산의 분도수녀원에서
우연한 기회에 '구원의 실마리'를 발견합니다.

 

수녀로 서원한 어느 앳된 자매의 고백.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촌철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한마디 말씀'이 되어 박힌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뜨거운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남에게 뭘 준 적이 없었다. 물질도 사랑도.

 

내가 아낌없이 물질과 사랑을 나눈 범위는 가족과 친척 중의 극히 일부와 소수의 친구에 국한돼 있었다.
 

그 밖에 이웃이라 부를 수 있는 타인에게 나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위선으로 사랑한 척한 적조차 없었다….

 

주지도 받지도 않은,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야말로 크나큰 죄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 벌로 나누어도 나누어도 다함이 없는 태산같은 고통을  받았음을,

 

나는 명료하게 깨달았다."

 

물론,어느 한 인간의 죄 값으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데려가실 하나님이 아니시란 사실은 교리적으로나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같은 일반적 교리를 뛰어 넘어 새로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순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게 다가옵니다.

 

" 나는 남에게 뭘 준 적이 없었다, 물질도 사랑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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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朴婉緖, 1931년 10월 20일 ~ 2011년 1월 22일)는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경기도 개풍(현 황해북도 개풍군) 출생으로,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이주했다.

1944년 숙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교사였던 소설가 박노갑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작가 한말숙과 동창이다.

 

1950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그해 여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숙부와 오빠를 잃는 등 집안에 비극적인 사건들이 겹치면서 생활고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종교는 천주교로서 세례명은 정혜 엘리사벳이다.

 

1953년 직장에서 만난 호영진과 결혼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40대에 접어든 1970년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전에 《나목(裸木)》으로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이 소설은 전쟁 중 노모와 어린 조카들의 생계를 위해 미군부대에서 근무할 때 만난 화가 박수근에 대한 내용이다.

 

작품 경향은 자신의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분단의 비극을 집요하게 다루거나 소시민적 삶을 그린 내용이 많으며,

 

후기 작품 역시 1988년 병사한 남편을 간호하며 쓴 간병기 형식의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1991)을 비롯해

어린 시절과 전쟁 중 경험을 서술한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2) 등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주요 저서로는 《미망》, 《아주 오래된 농담》, 《잃어버린 여행가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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