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식의 귀향 / 수필 박완서
친정 쪽은 휴전선 이북이고, 시댁 쪽은 대대로 서울에서도 사대문 안을 벗어나서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걸 은근히 으스대는 서울 토박이라 명절이 돼도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다. '돌아갈 곳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마음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아이들한테까지 그것으로 생색을 내곤 했다.
마치 집 없는 거지가 남의 집 불타는 걸 고소하게 구경하면서 제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집이 없어 불날 걱정 안 해도 좋으니 얼마나 좋으냐. 다 애비 덕인 줄 알아라" 했다는 옛날이야기 속의 거지 아범처럼 말이다.
흙에서 난 것들이 그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건 아무도 못 말린다.
사람도 설령 나고 자란 데가 흙을 밟을 수 있는 시골이 아니라 해도 추석이 되면 조상의 묘나 집안 내의 연로한 어른들을 찾아뵙고 눈도장이든 몸 도장이든 찍고 와야 사람 사는 도리를 다한 것처럼 편안해진다. 도리를 못다 한 것 같은 아쉬움이 어찌 없겠는가. 아니, 그건 도리가 아니라 그리움일 것이다. 저 지는 잎들이 어찌 섭리만으로 저리도 황홀하고 표표하게 몸을 날릴 수 있겠는가.
만추(晩秋)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는 쓸쓸함, 내 정수리를 지그시 눌러줄 웃어른이 없다는 허전함 때문이었을까. 예년에는 한 번 가던 추석 성묘를 올해는 두 번 다녀왔다. 한 번은 벌초를 겸해 대가족을 이끌고 다녀왔고, 며칠 있다 왠지 혼자 가고 싶었지만 차 없이 갈 수 없는 곳이라 운전자만 데리고 갔다. 남편과 아들이 잠들어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이다. 그들이 먼저 간 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갈 때마다 가슴이 에이는 듯 아프던 데가 이상하게 정답게 느껴지면서 깊은 위안을 받았다. 골짜기라 우리 동네처럼 아늑한 것도 마음에 들었고 규격화된 작은 비석도 마음에 들었다. 비석엔 내 이름도 생년월일과 함께 새겨져 있다. 다만 몰(沒)한 날짜만 빠져 있다. 나의 사후(死後) 내 자식들은 큰 비석이나 아름다운 비명을 위해 고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도 우리들 것보다 조금만 더 큰 봉분과 비석을 가진 김수환 추기경님의 묘소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도 저승의 큰 '빽'이다. 운구하다가 관을 놓쳐 굴러 떨어지면 혹시 저 늙은이가 살아날까 봐 조문객들이 혼비백산한다면 그건 아마 이 세상에 대한 나의 마지막 농담이 되겠지. 실없는 농담 말고 후대에 남길 행적이 뭐가 있겠는가. 나는 그 역사적인 장관에 크게 감동했지만 될 수 있으면 흥분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완행열차를 타고 개성 역에 내리고 싶다. 나 홀로 고개를 넘고, 넓은 벌을 쉬엄쉬엄 걷다가 운수 좋으면 지나가는 달구지라도 얻어타고 싶다. 계절은 어느 계절이어도 상관없지만 때는 일몰 무렵이었으면 참 좋겠다. 달라지고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들어내던 광채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부드럽게 화해하는 시간,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하고 싶다. 깨끗하게 늙은 노인의 얼굴에서 내 어릴 적 동무들의 이름을 되살려낼 수 있으면 나는 족하리라.' 나도 금강산관광까지는 다녀왔지만 개성관광엔 저항을 느꼈다. 어떻게 고작 6~7km 밖에 선영이 있는 고향 마을을 놔두고 개성 구경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개성관광을 제안받을 때 나 홀로 경로 이탈을 해서 고향 마을 박적골에 다녀오고 싶다는 소원을 말해봤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할 것 천지였다. .. . . .
박완서(朴婉緖, 1931년 10월 20일 ~ 2011년 1월 22일)
아들이 의과 대학에 다녔는데 마취과를 선택하겠다고 하더군요
저 그 쓸쓸함에 왠지 마음이 끌려요 이러는 거예요
그 아들에 그 에미 아니랄까봐
온 국민이 활기와 환희, 새로운 희망과 자신감으로 의기충천해 있을 때 그 한 해 동안에 나는 남편과 아들을 석 달 간격으로 잃었다. 남편이 먼저였다.
우린 남들이 부러워한 금슬 좋은 부부였고, 특히 나는 생활인으로 결격사항이 많은 사람이라 전적으로 의존적이었다. 다행히네 딸은 다 시집보낸 뒤였고, 막내로 아들 하나만 미혼이었지만
그런 지 석 달 만에 남편이 데려간 건 내가 아니라 아들이었다.
나는 겁 없이 그런 주문을 왼 내 입술을 짓찧어도 시원치가 않았고,
이럴 리가 없다. 제발 꿈이어라.
그러나 내 절규는 하느님의 견고한 침묵의 변죽도 울리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 하느님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깨달은 게 있다면 피조물은 길든 짧든 창조주가 정해준 수명에서 일 초도 더하거나 뺄 수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깨달음은 질책보다 엄혹했다...
물에 빠져 검부락지라도 잡으려는 노력처럼 처참하게 허위적댄다.
하다못해 남에게 흉을 잡힌 일이나 좋지 못한 버릇이라도 생각해 낼 수 있다면 다소 숨통이 트일 것 같다. 이 비참한 자구노력도 허사가 되고 만다. 그 애는 완벽했다. 그 애가 한 짓 중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단 한 가지도 없단 말인가. 그 애가 완벽했다는 확신은 그 애를 잃은 상실감 또한 천벌처럼 완벽하게 한다. 바늘 구멍만한 구원의 여지도 없다.
그 애 없이 사는 걸 견디어내야 하다니,무시무시했다…."
하나님은 진실한 기도에 응답하시는지, 박완서님이 결국 '한 말씀'을 듣게 된 사연은 감동적입니다. 지인의 주선으로 잠시 머물게 된 부산의 분도수녀원에서
수녀로 서원한 어느 앳된 자매의 고백.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촌철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한마디 말씀'이 되어 박힌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뜨거운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남에게 뭘 준 적이 없었다. 물질도 사랑도.
내가 아낌없이 물질과 사랑을 나눈 범위는 가족과 친척 중의 극히 일부와 소수의 친구에 국한돼 있었다. 그 밖에 이웃이라 부를 수 있는 타인에게 나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위선으로 사랑한 척한 적조차 없었다….
주지도 받지도 않은,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야말로 크나큰 죄라는 것을, 그 벌로 나누어도 나누어도 다함이 없는 태산같은 고통을 받았음을,
나는 명료하게 깨달았다."
물론,어느 한 인간의 죄 값으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데려가실 하나님이 아니시란 사실은 교리적으로나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같은 일반적 교리를 뛰어 넘어 새로운 깨달음으로
" 나는 남에게 뭘 준 적이 없었다, 물질도 사랑도... " . . . . .
박완서(朴婉緖, 1931년 10월 20일 ~ 2011년 1월 22일)는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경기도 개풍(현 황해북도 개풍군) 출생으로,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이주했다. 1944년 숙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교사였던 소설가 박노갑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작가 한말숙과 동창이다.
1950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그해 여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숙부와 오빠를 잃는 등 집안에 비극적인 사건들이 겹치면서 생활고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종교는 천주교로서 세례명은 정혜 엘리사벳이다.
1953년 직장에서 만난 호영진과 결혼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40대에 접어든 1970년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전에 《나목(裸木)》으로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이 소설은 전쟁 중 노모와 어린 조카들의 생계를 위해 미군부대에서 근무할 때 만난 화가 박수근에 대한 내용이다.
작품 경향은 자신의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분단의 비극을 집요하게 다루거나 소시민적 삶을 그린 내용이 많으며,
후기 작품 역시 1988년 병사한 남편을 간호하며 쓴 간병기 형식의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1991)을 비롯해 어린 시절과 전쟁 중 경험을 서술한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2) 등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주요 저서로는 《미망》, 《아주 오래된 농담》, 《잃어버린 여행가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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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그 아픔의 뜨락 원문보기 글쓴이: 내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