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봉수대지
조흥제
서울시 기념물 제 15호인 아차산 봉수대지는 함경도 경흥에서 시작하여 강원도를 거쳐 남산으로 연결하는 제1 봉수로의 마지막 봉수대가 있던 자리다. 현재의 봉수대는 1994년 서울시에서 복원한 것이다.
아차산 봉수대는 봉화산 봉수대라고도 하는데 봉화산 위에 봉수대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봉화산은 봉우재라고도 한다. 한동안 아차산 봉수는 광진구 광장동의 아차산 위에 있었다고 믿어 왔으나. 조선시대에 만든 대동여지도 등에는 봉화산을 아차산으로 적고 있어서 아차산 봉수대도 이곳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7년에 서울이야기라는 문화재를 다루는 책을 간행하면서 봉화산 봉화에 대해서 쓰려고 가 보았다. 6호선 봉화산역에서 내려 1㎞ 정도 가서 산에 올랐다. 산정에 2중으로 쌓은 토성 위에 봉화대가 있었다. 해발 160m 밖에 안 되는 봉화산에 봉수대를 설치한 까닭은 인근에 높은 산이 없어서 봉화를 올리면 눈에 잘 띄었기 때문이다.
봉수제도는 변경의 급한 사정을 불이나 연기를 이용하여 중앙이나 변경의 다른 요새에 알리는 동시에 해당지역의 주민에게도 알려 빨리 대처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 실시된 제도이다. 신호 방법은 홰의 수로 한다. 봉화는 평상시에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접전하면 5개를 피워 보고하도록 했다.
봉화와 봉수는 다르다. 봉화는 캄캄한 밤에 불을 이용한 것이고, 봉수(烽燧)는 봉화를 포함하여 낮에는 연기로 보내는 것이다. 봉수는 수십리의 간격으로 서로 바라보고 살피기 쉬운 산꼭대기 요지에 설치하였다.
봉화로는 다섯 군데의 통로를 통하여 최후로 남산에 전달되었다. 제1로는 함경도 경흥에서 강원도를 거쳐 서울로, 제2로는 경남 동래에서 경북, 충북을 거쳐 서울로, 제3로는 평안도 강계에서 황해도를 거쳐 서울로, 제4로는 평안도 의주에서 황해도 서해안을 거쳐 서울로, 제5로는 전라도 순천에서 충남을 거쳐 서울로 전달되었다. 남산에 봉화 탑이 다섯 개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각각 외방에서 올라온 봉수를 담당하는 탑이 달랐던 모양이다.
봉화의 관리는 병조에서 주관하며 다음날 승정원에 보고토록 했고 이상이 있으면 밤중에도 했다. 봉화로는 함경북도 종성에서 서울까지의 500여㎞를 5~6 시간이면 알릴 수 있었다. 봉수대는 중요지역에 배치하였고 경남에만도 60여 개소가 있었다.
봉수대에는 하급 장교인 오장과 봉졸이 같이 생활했다. 그들은 인근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큰 데는 10명, 작은 곳은 6명이 있었다. 봉수제도는 조선 전기에 많이 사용하였으나 임진왜란 후에는 제구실을 하지 못하다가 고종 31년에 폐지됐다.
봉화는 날이 좋아야 연락이 가능했고, 날씨가 흐리거나 비 오는 날은 파발제(擺撥)을 이용했다. 파발제는 말을 이용하는 기발(騎撥)과 사람에 의해서 전달되는 보발(步撥)이 있었다. 파발 망은 3개의 노선이 있었다. 서울에서 황해도를 거쳐 평안도로 가는 노선이 서발, 서울에서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로 향하는 노선이 북발, 서울에서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로 가는 길이 남발이었다. 이 가운데 중국과의 연락로인 서발만이 기발이었고 나머지는 보발로 운영되었다. 서발과 북발에는 대로(大路)와 간로(間路)의 구별이 있었다. 기발에는 25리, 보발에는 60리마다 각각 참(站)이 설치되어 있어 거기서 파발을 교대하였는데 기발의 참에는 발장 1명과 군정 5명, 색리 1명이 말 다섯 필을 관리했으며 보발의 참에는 발장 1명과 군정 2명을 두었다. 이러한 제도로 볼 때 전국의 봉수와 파발에 종사하는 인원도 엄청나게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고종 이후 전화나 통신이 도입되면서 봉화나 파발제도는 필요 없게 되었다. 이제 서울에는 남산에나 올라가야 다섯 개의 봉수대를 볼 수 있는데 이곳 봉화산에도 봉수대가 복원되었다니 반가운 일이다.
서울의 봉화대는 서대문구 무악재 옆에 있는 안산에도 있고, 은평구 봉산에도 있다. 봉산에는 봉화대가 2개 있는데 평안도와 황해도 쪽을 담당하였으리라고 추측된다. 봉산에서 안산으로 연결되고 안산에서 최종적으로 남산에 전달되었다.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온 봉화대는 어디에서 남산에 전달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