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립커피 삽화(揷話)/ 시인 하재영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향을 맡는다. 커피 향속으로 음악이 흐르듯 추억이 잔잔하게 물결친다.
커피! 그래 커피였지. 알라딘 요술 램프처럼 나를 빨아들이는 향과 맛이 이어진다.
커피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면 어슴푸레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어린 시절 면소재지 남의 집 셋방에 사는 젊은 부부의 집에 부모님을 따라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맛보았다. 유리병에 담긴 커피와 프리마를 스푼으로 커피 잔에 붓고 그 위에 끓는 물과 설탕을 넣어 휘휘 저었다. 1960년대 후반으로 기억되지만 그 맛에 대한 기억은 달콤하면서 약처럼 썼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집에도 커피를 들여놓게 된 계기였을 것이다. 어머니도 찬장 한 구석에 커피와 프리마, 설탕을 사다 놓은 것이다. 어린 나에게는 신기했지만 입에 당기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왜 그런 것을 먹을까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집에도 커피가 있는, 문화적으로 수준이 있는 집이라는 자부심을 어머니는 갖게 된 것 같았다. 손님이 오시면 술상 대신 커피를 대접했으니 말이다.
1970년대였다. 청주 소재 대학에 다니면서 종종 커피를 마셨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상당공원과 가까운 화문당서점(?) 앞까지 걸어간 후 그곳에서 시내버스를 탈 때가 많았다. 하교할 때 종종 찾았던 선술집, 다방 그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없지만 당시엔 그런 곳에서 시화전을 하곤 했다. 학교 공부보다 문학에 관심을 가졌던 나는 종종 그런 행사장을 기웃거리며 막걸리를 마셨고, 커피를 마셨다.
사실 젊은 시절은 커피보다 술을 즐겼다. 80년대가 그랬고, 90년대도 그랬다. 술과 담배에 찌든 몸으로 늦은 밤 휘적휘적 걸어서 집에 들어가서는 그냥 쓸어진 적도 숱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모습이고, 자라는 아이들에게도 미안한 일이었다.
그러던 습성이 술과 커피를 번갈아 마시며, 그 둘의 관계가 천칭 상태에서 대등하기 시작한 것은 온 국민이 그렇게 원하던 ‘마이카(My car) 시대’가 도래하면서다. 추측하건데 술보다 커피를 즐기기 시작한 시기는 21세기가 열리고 난 뒤였다. 늘 문학판 모임에 쫓아다니다보니 저녁은 외식이 잦은 편이었다. 식후에 벗들과 전문 커피숍을 찾기 시작한 실질적 이유도 음주단속이 심했기 때문이다. 음주운전이 불법이라는 개념이 희박했던 시절이라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도 운전을 했다. 직장 동료 중에는 음주 단속에 걸려서 벌금을 내고 운전면허도 취소되어 다시 따야 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소주의 도수도 지금보다 높았던(독했던) 시절이다. 술을 마시고 음주 단속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든지, 깊은 호흡으로 숨을 몇 번 내쉬면 된다든지, 한약을 먹으면 된다든지 등등의 비법 아닌 처방전이 나돌기도 했다.
모락모락 김이 돋던 커피 잔 속 커피가 식어간다. 커피 한 모금을 다시 입에 댄다. 눈물 한 방울, 추억 몇 조각, 어둠 한 움큼……. 씁쓰레하면서 뒤끝으로 많은 것들이 달려오며 달콤한 커피 맛이 뱃속을 따뜻하게 한다.
2010년 전후다. 으레 찾던 단골 커피숍 이 사장(바리스타, 건축설계사)은 나보다 몇 살 위로 멋쟁이 바리스타였다. 일본 동경의 골목골목 커피숍을 견학하기도 했고, 세계 곳곳의 커피 산지를 발로 찾아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기행문을 잡지에 발표했다. 커피숍 바 테이블에 앉은 나는 이 사장이 내리는 드립커피 장면을 종종 바라보았다. 넋을 높고 바라보게 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커피의 종류도 다양했다. 코스타리카, 브라질, 예멘, 케냐, 과테말라, 에티오피아 그것뿐이 아니었다. 이따금 특별한 커피라면서 조금 비싸게 파는 커피가 있었다. 게이샤, 르왁 같은 종류였다. 일 년에 아니 몇 년에 한 번 정도 마셔야 하는 귀하되 귀한 커피였다.
커피숍은 늘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 주인은 주문한 커피를 손님에게 그라인더로 갈게 하였다. 지금이야 자동으로 드르륵하면 분쇄된 커피가루가 나오지만 그 때만 해도 그라인더로 가는 그 자체가 멋이었고, 커피의 풍미를 느끼게 하는 한 방법이었다. 이따금 주변 행사장에서는 운치 있는 공간을 연출하기 위해 오래된 나무절구에 커피콩을 빻아 커피를 내리는 특별한 이벤트를 진행하는 곳도 있었다. 내가 드립 커피를 처음 마시기 시작할 그 당시 일반인들은 드립 커피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일반 커피보다 값이 비싼 드림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은 마치 해외여행을 떠나는 특별한 기분이었다. 어제는 케냐로 했으니 오늘은 중미로 가볼까? 그러면서 코스타리카 커피를 주문했다.
단골 그 커피숍에서는 봉지 커피뿐만 아니라 커피 용품도 팔았다. 드립커피를 내리는 도구는 일본 칼리타와 하리오란 회사에서 만든 제품이었다. 국산은 없었다. 수입품이라 그런지 구입하는데 수월치 않는 돈이 들었다. 방짜 형식의 300밀리리터 동주전자 하나를 구입하는데 20여 만 원이 들었다. 핸드밀, 커피필터, 드리퍼, 드립포트 등 하나하나 구입했다. 주말 아침이면 집에서 폼나게 커피를 내렸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처럼 그간 커피숍에서 바리스타가 내리는 드립커피 장면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예전 어머니가 처음으로 커피를 시골집에 사왔을 때의 풍경처럼, 삶의 질이 업그레이드(upgrade) 되는 기분이었다. 봉급을 받은 주에는 봉지 커피를 구입하기 위해 퇴근하면서 커피숍에 들리기도 했다. 그라인더로 커피를 갈 때 풍기는 커피향이 집안을 가득 채웠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딘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커피 한 잔 배경으로 내 과거는 영화의 흐름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음악과 그림과 문학이 커피 향 안에서 어울려 춤을 췄다. 드립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은 독백의 시간이면서 수많은 대화가 있는 공간이었다.
드립커피는 급속도로 일반화 되었다. 드립커피가 대중화 되다 보니 직장 동료들도 이따금 드립커피를 내렸다. 커피 한 잔을 건네며 자신의 솜씨를 은근히 자랑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렀다. 커피를 마시는 시간의 흐름 앞으로 자연스럽게 직장도 그만 둘 나이가 되었다. 은퇴였다. 은퇴 후 35년간 정이 들었던 포항에서 고향 청주로 이사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른 시간이었다.
이사 후 드립커피를 내리고,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그 자체를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사한 내 집 일층에 카페 ‘시월(詩月)’을 운영하다 보니 의도적으로 행해야 하는 드립커피보다 커피머신으로 내리는 커피를 마시게 된 거였다.
“한 달에 한번 정도 드립커피 좋아하는 사람들을 초대해 커피를 마시며 예술 이야기를 나누려고 해요.”
카페 문을 열며 내가 오래 사귄 문우들에게 했던 말이다. 하지만 아직 시기상조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이 겨울 지나 꽃피는 봄이 오면 커피 ‘게이샤’를 주문하려 한다.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드립커피를 앞에 두고 시를 꽃처럼, 커피 향처럼 피워보려 하기 때문이다.
커피와 시. 두 단어는 서로 궁합이 잘 맞는 단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오늘도 시를 읽으며, 시를 쓰며 커피를 옆에 두고 커피 향에, 시향에 젖으며 어디론가 여행하듯 ‘설렘’이란 단어를 끌어안는다.
- 2023년 1월말 카페 ‘시월(詩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