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신발을 벗어놓고 압록강을 건넜나 탈북(脫北)할 때의 가장 큰 고민. 이민복(대북풍선단장)
총을 쏘며 공격해오는 적을 마주한 전호 구덩이 속의 병사와 북·중 국경을 넘는 탈북자의 심정은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과 잡히면 죽는다는 것의 결과는 같기 때문이다. 이 긴장감은 필설로는 다 표현 못하며 이는 겪어보아야만 이해가 다 간다. 이런 자신에 대한 모든 각오는 했다. 하지만 탈북은 이것을 끝나지 않는다. 가장 큰 고민거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 탈북하는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주게 되는 피해였다. 연좌제를 적용하는 유일 나라 북한이기 때문이다. 이를 최소화하거나 전혀 피해를 주지 않을 방도를 모색하고 또 모색해야 했다. 첫 번째 탈북은 중국에서 하루 천하로 잡혀 복송되었기에 실패하였다. 천만다행으로 미리 준비해두었던 핑계로 구사일생 살아날 수 있었다. 농업 연구원으로서 '문익점'처럼 중국에 종자를 탐문하려 갔었다는 것이 먹혀든 것이다. 한편 안내자 없이 탈북은 어림없다는 교훈을 깨닫고 중국 조선족을 끼고 두번 째 탈북하기로 하였다. 이 두 번째 탈북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이제 그 어떤 핑계가 먹혀들 여지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한 수도 남아 있지 않는 죽을 길을 강행할 정도로 저는 지능적으로 탈북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신념의 단초가 남한 삐라였고 탈북하여 남한에 와서도 이것에 매진하게 된 사연은 간략한다.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을가 생각하고 연구한 끝에 결론은 실종이었다. 국경인 압록강변에 신발을 놓고 사라지면 실종이 될까. 이것도 완벽하지 못하다. 왜냐면 관할 지역 기관의 간부들에게 책임이 물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색해낸 것이 누구도 책임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저는 당시 량강도 김정숙군 군당책임비서(군수 격)의 요청으로 현지에 적을 둔 국가 농업 연구원이었다. 현지에 적은 군 협동농장경영위원회 농산과 연구사 직이었다. 따라서 내가 탈북하여 없어지면 군당책임비서는 물론 담당 정치 보위원의 목이 날아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우선 김정숙 군의 적을 뗐다. 그리고 농업 과학원 정주 분원(평북도)에 채용증을 받아 가기로 하였다. 하지만 정주 분원에 가지를 않고 탈북하기로 한 것이다. 한편 압록강 변에 신발을 놓아 두면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된다. 연구원이 사라졌다! 그러면 책임을 물어야 하는 현지 즉 김정숙군에서는 아! 그 사람 정주 분원으로 갔습니다!. 정주 분원에서는 아! 그 사람 온다고 했지만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누구도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설사 탈북한 줄 뻔히 안다고 해도 모로쇠하는 것이 상책이 되게 하였다. 안다고 하면 - 왜 그를 잘 교양하고 통제하지 못했어!라는 책임추궁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속담에서처럼 시체 보았다면 송장 치르게 되니 서로 모로쇠하는 것이 최선이게 만든 것이다. 가족 역시 실종되어 없어졌으니 자동으로 이혼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정말 이 예측이 맞았다는 것은 중국으로 탈북한 후 1년 후쯤 동거해 있던 조선족 리룡국이 직접 북한에 방문하여 확인하였다. 누구도 나 때문에 피해 입은 간부나 주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처도 이혼 처리가 자동으로 되었고 또 본인이 있던 함흥대학에 가서 교원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또 현지에 시집와 함께 살던 여동생 역시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단지 압록강 변에 나타난 시체가 있으면 확인차 부르는 것이 다라는 것이다. 탈북하여 남한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제가 보내는 대북 전단 내용에도 절대 감정을 담은 것이 없다. 누구도 나 때문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공감하여 머리를 끄덕이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 전단 내용에는 제 본명 그대로, 또 고향과 학력, 경력을 그대로 적어 보낸다. 심지어 남한에서 쓰는 핸드폰 번호와 이메일, 홈페이지를 그대로 보낸다. 신뢰성을 주기 위해서이다. 삐라는 곧 우리를 골려 먹으려는 것이야 하는 선입견을 타파하기 위해서이다.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진정성과 신뢰가 있으면 어느 때 이건 공감할 것을 믿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