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가는 길-가족여행-
일주문 앞 종각에서 타종했어요.1000원 이상 봉헌금 내면 타종할 수 있구요.
입장료는 4000원, 65세 이상 무료입장
해발 745m 토함산 중턱 석굴암 가는 길
1300년 전에 석굴암에 사용되었던 돌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751년에 창건 혜공왕 774년에 완성되었다는 석굴암
당시 재상이었던 51세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한 불국사와 함께
전생의 부모를 위한 석불사(석굴암)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삼국유사)
조선말기까지 보호를 받았지만 이후 세인에게 잊혀 방치된체 묻혀있던 석굴암
1907년 한 일본인 우편배달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
1910년 한일합방 체결후 석굴암을 해체 일본으로 반출 시도
석굴암 내 유뮬을 도굴하던 중 본존불을 깨뜨리는 등 문제 발생
현지인들의 강력한 반발로 일제의 석굴암 반출 시도는 무산 (-SBS-)
"영국에 세익스피어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석굴암이 있다"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자 고유섭-
참고 자료
일제시대, 1912~1915년에 걸쳐 일제에 의한 대규모 보수공사가 있었다.
첫 번째 수복때 석굴암은 붕괴 직전의 상태였다. 천장이 새서 불상에 직접 비를 맞고,
주변의 불상의 배치도 불분명했으며 전체의 반이상이 흙에 파묻혀 있었다. 최초의
보수후에 비가 새는 것이 발견됐고, 그 후의 보수에 콘크리트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제시대의 복원공사는 석굴암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건축원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채로 콘크리트를 덮어버렸기때문에 외면상 수리는 되었지만, 석굴암을
복원불가능한 형태로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본존불 아래, 석굴내
지하수가 모여 밖으로 배출되는 수로장치는 일본에는 없는 독특한 장치로, 일본인들이
이것을 막아버렸기 때문에 지하수로 차가워진 돌에 수분이 맺히는 현상이 발생했다.
해방 이후 혼란한 사회속에서 방치되어오다가, 1961-1963년 문화재관리국의 주도로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다. 일제가 바른 시멘트로 인해 습도와 온도 유지가 어려워지고,
석굴내에 맺힌 물이 시멘트를 녹여 결과적으로 화강암으로 된 조각상들을 침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기존의 시멘트 구조물 위에 약간의 공간을 두고
그 위에 돔을 덧씌웠다.
그리고 이때 외부 습기를 차단하기 위해 유리로 봉인하고, 습기제거장치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렇게 밀폐된 공간 속에 관람객들이 배출한 이산화탄소와 이물질이 갇혀
화강암을 손상시키는 점이 지적되었다.
1961년에 목조에 기와를 덮은 전실이 설치되었다. 이것 또한 석굴암의 통풍을 막는
요소라고 지적되고 있다.
2011년 현재, 입구는 유리로 봉해져 실내의 습도가 항상 조절되고 있다. ( 위키백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