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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5월 정기답산 안내
(전북 전주지역 답사)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회원여려분 안녕하세요?
이제 완연한 신록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2018년 5월 학회 정기답산 안내입니다.
이번 답산은 전북 전주-익산-완주지역의 음택과 양택 풍수답산을 아래와 같이 실시합니다.
답산이 끝난 후 전주에서 2018년 학회정기총회를 실시 할 계획이니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1. 일 시 :2018년 5월 27일(일요일) 오전 08시 정각 출발
- 시간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 출발시간이 되면 야속하지만 출발합니다.
- 우천시에도 출발합니다.
2. 출발장소 : 지하철 2·4호선 사당역 9번 출구 앞
*간편한 복장에 운동화나 등산화 착용 및 모자를 지참하시기 바랍니다.
*개인 간식과 물은 각자 준비하시기바랍니다.
경유지 : (덧글로 꼭 체크요망)
★죽전 : 08시10분 ★신갈 : 08시15분
현지합류 : 전북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산 4(묘역)
(전북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73 재실)
3. 답산장소 :전북 전주지역 음택-양택.
1. 여산송씨 시조 송유익묘
이곳에는 여산송씨 정가공파 파조 송서의 제단(祭壇)을 비롯하여 장남 송인번(宋仁蕃)의 묘와 송윤번의 제단이 있고 송윤번의 장남 송전의 묘와 송전의 삼남 송인산(宋仁山)의 묘, 송인산의 차남 송문림의 묘와 송문림의 자손들 묘가 조성되어 있다. 묘역 면적은 132㎡이다.
천호산에서 내려온 맥이 힘찬 변화를 일으키며 혈을 이룬 곳이다.
자기안을 이룬 기룡혈로 힘이 넘쳐나는 아주 멋진 곳이다.
여산은 현 전라북도 익산이다. 여산송씨 시조 송유익(宋惟翊)은 고려 때 진사로 나라에 공훈을 세워 여산군에 봉해졌으며 은청광록대부로 추밀원부사에 추증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송유익의 선계는 중국의 경조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호부상서를 지낸 송주은의 후손 송자영이다.
송자영은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송유익은 여산송씨 시조가 되고, 차남 송천익은 은진송씨 시조가 되고, 막내 송문익은 서산송씨 시조가 되어, 우리나라 모든 송씨의 연원을 이룬 것으로 전해진다. 여산송씨 가문이 번성하는 시기는 4세손 송송례(宋松禮) 대에 와서이다. 여산송씨는 조선시대 영의정 1명과 좌의정 1명, 왕비 1명을 배출하였으며 판서급 인물을 많이 배출한 이름난 가문이다.
2. 가람 이병기선생 묘. 생가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573)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 한국 현대 시조의 중흥을 이룩한 시조 시인이며 국문학자였던 이병기가 태어난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 정자 등 여러 채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에는 승운정(勝雲亭)이라는 1칸 규모의 모정[茅亭 : 집·새 따위로 인 정자]이 있고, 그 옆으로 사랑채를 길게 배치한 후 앞에 작은 연못을 파 놓았다. 사랑채는 一자집이다.
전후 퇴집의 구조로서 전면은 툇마루를 구성하고, 안마당에 면한 툇간은 골방과 창고, 다락 등 수장 공간으로 사용한다. 칸살은 동쪽부터 방·부엌·방·방·대문간 및 헛간 순으로 이루어졌다.
진수당(鎭壽堂)이란 편액이 붙은 끝 방은 가람이 책방으로 사용했으며, 평소 기거하던 곳은 한 칸 건너 수우재(守愚齋)라는 편액이 붙은 방이다. 수우재와 책방사이는 칸 전체를 다락으로 만들었다. 밑은 양측 두 방 모두 구들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 공간을 이용하여 다락을 만든 것이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좁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마주하게 된다. 안채는 호남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ㄱ자 집으로서 잡석 축대 위에 높은 자연석 초석을 사용해 비교적 높게 지었다.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마주하며, 안방 전면으로 부엌이 돌출한 형태다.
건넌방은 전면과 측면에 툇마루를 시설했는데 전면 툇마루는 대청마루 보다 높게 구성해 마루 밑에 아궁이를 만들며 입면(立面)에 변화를 준다. 또한 윗방 한쪽은 칸을 막아 찬방을 두었으며, 아랫방 뒤쪽에는 쪽마루를 달아 고방채와 장독대가 있는 뒷마당에서의 출입을 배려하였다. 3칸의 고방채는 광·헛간·안변소로 이루어졌다.
고졸하고 소박한 초가의 모습에서 담백한 선비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이 곳에서 가람은 한국 문학사에 뛰어난 족적을 남기고 말년을 맞이하였다.
3. 소세양 신도비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화곡길 24-2 )
* 조각이 매우 뛰어나고 서체가 아름다운 소세양신도비 *
소세양신도비(蘇世讓神道碑)는 1998년 1월 9일에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王宮面) 용화리 탄곡 용화산(龍華山) 동쪽 산기슭에 있으며 1564년(명종 19)에 건립되었다. 비신(碑身)의 높이는 218㎝이며 너비가 103㎝, 두께가 25㎝의 대리석으로 화강암으로 된 직사각형의 대석 위에 세워져 옥개석을 얹었다.
대석은 가로 196㎝, 세로 112㎝, 높이 90㎝의 크기로 전면과 후면은 3개의 정사각형 안에 국화문을, 양측면에는 2개의 정사각형 안에 국화문을 조각하였다. 후대에 이수가 파괴되어 도괴의 위험이 따라 현재에는 교체된 옥개석이다.
비의 전액(篆額)은 글씨 크기가 약 12㎝이며, 심전(沈銓)이 전서(篆書)하였다. 비문의 서체는 해서(楷書)로 홍섬(洪暹:1504~85)이 썼으며 비명은 크기가 약 2㎝로 소세양의 아들 수(遂)가 썼다.
소세양신도비는 임진왜란 이전에 건립되어 현존하는 비석 중 조성시기가 빠르며, 조선시대의 비석으로써 기본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각이 매우 뛰어나고 서체가 아름다워 신도비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 조선 중기의 문신 소세양 *
소세양의 자는 언겸(彦謙)이고, 호는 양곡(陽谷) 또는 퇴제(退齊)이다. 소세양은 1504년(연산군 10)에 진사가 되었고, 1509년(중종 4)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 후 직제학을 거쳐 사성(司成)이 되었으며, 이후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1530년 왜구를 방어하는 데 소홀한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등용되었다.
1545년(인종 1) 윤임(尹任:1487~1545)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했으나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다시 좌찬성을 역임하였다. 또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송설체에 능하였다. 그의 문집으로는 《양곡문집(陽谷文集)》이 있다.
소세양과 황진이 사랑
소세양이 소싯적에 말하기를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송도의 명기 황진이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소세양이 친구들에게 약조하기를 "황진이가 절색이라고는 하나 나는 그녀와 30일만 함께 하고 깨끗하게 헤어질 것이다.
만약 하루라도 더 머물게 된다면 나를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좋다" 하고 30일의 약속으로 동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황진이와 만나 30일간 애틋한 사랑을 나눈 소세양은 드디어 이별하는 날이 되어 황진이 작별시 봉별소양곡세양(奉別蘇陽谷世讓) 시 한수를 듣고 자신의 뜻을 꺽고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며칠을 더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수촌만록에 전해지고 있다.
소세양 판서를 보내며
月下梧桐盡: 달빛 아래 뜰에는 오동잎 모두 지고
霜中野菊黃: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樓高天一尺: 높은 누각 하늘과는 한자 사이 맞닿았고
人醉酒千觴: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 흐르는 물소리는 거문고와 같이 차고
梅花入笛香: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 내일 아침 눈물지며 이별하고 나면
情與碧波長: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소세양과의 사랑을 끝으로 황진이는 40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으며, 그녀의 유언대로 개성 어느 길가에 묻혔다.
조선 중기 시인 겸 문신이었던 임제(林悌, 1549~1587)가 평양감사가 되어 평양으로 내려오던 도중에 개성에 있는 황진이 무덤을 지나며 읊은 시조를 적어본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은 어듸 두고 백골만 무첫난이,
잔(盞) 자바 권하리 업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황진이가 만난 인물 중에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8~1546)과의 일화중 송도삼절(松都三絶)의 이야기가 유명한데 황진이가 별의별 수단을 다하여 화담을 유혹하였으나 곧은 지조를 흔들어 놓을 수 없어서 황진이는 화담선생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송도의 삼절을 아십니까? 하나는 박연폭포(朴淵瀑布)이고, 다른 하나는 화담(花潭)선생이며, 또 하나는 황진이(黃眞伊)입니다 했더니 화담 선생은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한다.
4. 익산향교
전북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389-1
1398년(태조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 뒤 중건하였으며, 1976년 서재(西齋)를 해체,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교직사(校直舍)·제기고·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반의 맞배지붕에 겹처마지붕으로 된 다포집이며, 명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다 동쪽 후면 2칸의 방을 이어붙인 겹처마 건물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5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경장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5. 포옹 송영구 묘(음택). 망모당(양택)
(전북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산2)
표옹 : 표주박을 들고 다니는 늙은이. 재물에 관심 없는 늙고 보잘것없는 청렴한 늙은이)
망모당(望慕堂) 송영구가 작고하신 아버님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 입니다.
개설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인수(仁叟), 호는 표옹(瓢翁)·일호(一瓠)·백련거사(白蓮居士). 송세웅(宋世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송억수(宋億壽)이고, 아버지는 송영(宋翎)이다. 어머니는 사온서영(司醞署令) 하세준(河世濬)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4년(선조 17) 유학으로서 친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注書)·사과(司果)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이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충청도관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완산에 살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599년 충청도도사를 거쳐 지평이 되고 문학을 겸하였다. 이듬해 이조정랑·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사간원사간을 지내고 청풍군수·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을 역임하였다.
1607년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곧 권신 정인홍(鄭仁弘)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사간에 임명되고 이어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으로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에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613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일본과 수호한 사실이 없음을 밝힌 공으로 지중추부사가 되고, 1616년 행사직(行司直)으로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1618년 폐모론에 반대하며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고 또 낙서 등으로 비방한 것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풍채가 단아하고 언행이 바르며 성격이 강직했으나 남의 잘못은 너그럽게 용서해 주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인조반정 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에 제향 되었다.
선조의 뜻대로 송강 정철은 "정여립의 모반사건"인 기축옥사로 동인세력들을 형장에 보내고 당대 실권자로 부상한다. 그리고 곧 명나라에 성절사로 떠나게 되는데 그 사신단에 서장관(외교적 실무관리)으로 익산 출신인 강직했던 선비 표옹 송영구도 함께 가게 된다.
그는 명나라 숙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젊은 청년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청년이 글 읽은 모습을 보고 범상치 않음을 안 송영구는 그에게서 딱한 사정을 들은 뒤 그에게 공부지도를 해 준다.
조선으로 떠날 때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여러 서책과 함께 여비까지 주고 온다.
후에 그 청년이 바로 후일 명나라에서 과거에 장원급제 후 큰 벼슬에 오른 "주지번"이다..
그 "주지번"이 황제국의 성절사(외교사절단)로 조선에 사신으로 오게 된다.
조선에 사신으로 오게 된 주지번은 송영구를 잊지 않고 전라도 까지 찾아가게 된다.
당시 명나라 사신이 제후국의 일개 신하를 만나기 위해 몇 백 리길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지번"은 송영구와 재회할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몇 칠을 걸려 달려와 전주객사에 하루를 머물고 전주객사 현판인 "풍패지관"(우리나리에서 가장큰 현판) 이 네 글자를 써주고 익산 왕궁으로 간다.
(풍패지관은 한고조(유방)의 고향인 중국 풍패현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다.)
익산 왕궁 망모당에 도착한 주지번은 송영구가 없음에 크게 실망합니다.
당시 송영구는 정권에 미움을 받아 미관말직(찰방:역참의 관리)로 재직하고 있던 중이어서 주지번의 명성에 누가 될까봐 일부러 피했다고 한다.
(혹은 "죽었다"고 잘못 전해 들었다는 말도 있고, 또는 만났다는 설도 있던데 당시 송영구의 상황을 보아 만나지는 못한 것 같다.)
송영구를 만지지 못해 실망한 주지번은 망모당에서 송영구를 그리워하다 망모당 현판과 서책 80여권과 송영구가 묻힐 명당자리를 잡아주고 떠났다 한다.
이 망모당을 백대에 이르러도 폐하지 말고 망모당 뒤 전체 산자락에 타인 및 자손의 묘를 쓰지 말고 이곳에서 함부로 강학하지 말며 자손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거주하지 마라 하였다 한다.
6. 총회 및 만찬
장소 함벽정(063-832-4681)
전북 익산시 왕궁면 호반로 83
매기탕, 새우탕
★ 풍수현장 답산이 끝난 후 2018년도 정기총회를 실시합니다.
(총회 참석은 2018년 연회비 납부하신분만 참석 가능합니다)
**** 일정은 사정상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
4.회 비 : 50.000원 (차량, 아침간식, 중식)
*자차 현지합류는 40,000원
*부부 참석시 1인은 35,000원
* 2018년 연회비 미납회원은 답산비 6만원입니다.
(답산 당일 연회비 납부 가능합니다.)
5. 현장강의 및 안내 :
겸산 최명우 박사, 현암 이용성, 중산 류호기. 현지안내: 법철스님
문의: 010-5335-1899 :류호기 / 010-2086-1168 :이용성
6. 신청방법 :통장 입금 후 덧 글 달아주세요.
[회비입금:국민은행: 9186-8186-851
예금주: 류호기(학회정기답산)]
좌석 배정
운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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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산교수님 | 홍회장님 | 1-4 | 류호기 | 이용성 |
유용석 | 박봉식 | 5-8 | 황문숙 | |
임주완 | 조성복 | 9-12 | 권도훈 | 윤동호 |
강구인 | 강희만 | 13-16 | 양해용-죽 | 정영모 |
김기오 | 정우영 | 17-20 | 민광욱 | 박건이 |
조광훈 | 김형락 | 21-24 | 손진수 | |
김윤중 | 김정웅 | 25-28 | 안준형 | 최건욱 |
이찬호 | 29-32 | 김호용 | 유화종 | |
임자영 | 33-36 | 정종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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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신 | 류기찬-신 | 3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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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44 | 전혜주 |
현장합류
1.김강수1, 2.김강수2, 3.양정양1, 4.양정양2, 5.정경섭, 6.강시남, 7.송수철, 8.김양춘,
9.홍사비, 10.
*가능하면 입금순으로 좌석 배정합니다.
“행사 중에 발생하는 모든 제반사고(손해)는 학회 및 현장안내 측에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각자의 안전사고 및 손해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여행자 보험 등의 대비는 각자 해주시시기 바랍니다."
2018년 5월 8일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회장 홍윤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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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찬호신청합니다
넵
좌석 배치하였습니다.
답산 신청 입금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넵
좌석 배치하였습니다.
입금했습니다..
넵
좌석 배치하였습니다.
정우영 답산 신청 합니다
넵
좌석 배치하였습니다.
조광훈 김형락 답산 신청 합니다 [정우영 ]
넵
좌석 배치하였습니다.
답산신청합니다
넵
좌석 배치하였습니다.
죽전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