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도천사지의 도천사는 절일까? 사당일까? 그리고 왜 그곳의 탑이 직지사에 왜 있는 것일까?
문경 도천사는 사명에 대한 이야기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 지역 향토 사학자 말에 의하면 도천사(道川寺)가 아니라 도천사(道川祠)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당 이름이었다는 것입니다.
"옛 祠堂(사당)을 寺刹(절)로 오해하거나 왜곡한 기사가 많이 검색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지역 향토사를 올바르게 바루고 알리는 일은 우리 문인들이 앞장서야 합니다.
1974년경 산북면 서중리 웅창마을 주암정 뒤에서 김천 직지사로 옮겨간 <도천사지 3층석탑>은 본래 통일신라시대의 영원사 3층석탑이였음으로, "문경 영원사지 삼층석탑"[聞慶 鴒原寺址 三層石塔] 이라 함이 가장 올바른 표현입니다."
향토 사학자의 말에의하면 도천사는 사당이었고 그 자리에 영원사(鴒原寺)라는 절이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또 여기에 대한 사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제 때 채광진 소유의 폐사지에 있던 이 석탑들을 채국진(蔡國鎭)이라는 사람이 몰래 일본인에게 매각하려다 고소당한 사건(일명 '고탑도매사건 古塔盜賣事件 1916년')이 있었다. (사건에 나온 이 고탑들이 도천사지 3층 석탑이다)
이 때 기록된 문헌에 "이곳에 신라시대부터 영원사(永原寺)라는 절이 있었고 폐사된 후 이곳에 양반들의 집합소인 도천사(道川祠)라는 건물을 짓고 후에는 연계소(蓮桂所)라 하였다"라고 했다. "
여기서 영원사는 향토 사학자가 주장하는 영원사(鴒原寺)와 다른 영원사(永原寺)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도천사(道川祠址)이든 영원사지(鴒原寺址, 永原寺址)이든 그곳에 있던 유물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화재청에서는 도천사지(道川寺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천사지 삼층석탑 구조는
동탑(높이 9.03m, 기단너비 2.38m) 서탑(높이 8.91m, 기단너비 2.42m)이며 폐사지터에 특이하게 3개의 석탑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3개의 석탑이 함께 있었던 유일한 곳 같습니다. 대다수 사찰은 단탑 단금당의 형식을 취하거나 쌍탑 단금당 또는 쌍탑 쌍금당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탑이 3개나 된다는 것은 아주 독특했을 사찰의 모습을 가늠케 합니다.
"경상북도의 석탑"에 실린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도천사라는 사명은 道川寺, 道天寺, 道泉寺 등 다양하게 불리고 있지만 창건내력 등에 대해서 전해지는 기록은 없다. 일제강점기 때 공문서 기록인 1916년 8월 19일과 9월 20일 고탑도매(古塔盜賣) 사건 기록에 의하면 “채광진이란 사람이 서중리 수계원 폐사지내 건물부지를 비롯해 지상에 존재하는 석탑 및 부속물 일체를 60원에 매수한 것을 채국진이라는 사람이 몰래 파송관(巴城館) 호텔의 송본민개(松本民介)에게 매각하려다 고소된 사건이 발생되었다. 이 사건 취조 과정에서 채광진은 폐사지에 석탑 3기는 역사상 기록이 없지만 마을 주변의 전설에 신라시대 영원사에 있었던 탑이라고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16~17년 자료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의하면 ‘문경군 산북면 중서리 웅창마을 북쪽 금강변 밭 한가운데 탑 3기가 같이 있다. 모두 3칸이고 매우 웅장하다. 신라 도천사 보물이라고 일컫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탑 일대의 사지는 도천사 또는 영원사라 불리었으며 신라시대 유적이라고 전해짐을 알 수 있다. 또한 폐사지에는 주변 지역 양반들의 집합소인 도천사(道川祠)라는 건물이 있었으며 지역 주민들은 원래 영원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도괴된 상태로 남아있던 3기의 탑을 1974년 직지사 주지 오록원(吳綠園)이 직지사로 옮겨와 복원하였다. 3기 중 2기는 대웅전 앞 마당에 세우고, 나머지1기는 비로전 앞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3기의 탑이 모두 유사한 양식을
지니고 있어 도천사가 이례적으로 3탑 가람배치를 지닌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관련 연혁은 찾을 수가 없다.』
직지사에는 현재 4기의 석탑이 있지만 김천 직지사의 원래 석탑은 어디에?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직지사의 고승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도움으로 후백제(後百濟)와의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직지사는 국가적 비호(庇護)를 받았으며, 이후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제자들 역시 대대로 본사를 중흥(中興)하였고,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직지사는 제 2대 정종 원년(定宗元年, 1339) 정종의 어태(御胎)를 절의 북봉(北峰)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에도 줄곧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사명 대사(四溟大師)가 본사(本寺)에 출가(出家)하여 신묵 대사(信默大師)의 제자가 된 것이 유명하거니와, 이로 인하여 직지사는 배불(排佛)의 그늘 속에서도 사운(寺運)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30세에 직지사 주지(主持)가 된 사명 대사는 이후 임진왜란(任辰倭亂)이 발발(勃發)하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先鋒)에서 큰 공을 세웠음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이렇게 구국(救國) 사명 대사의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朝鮮) 8대가람(八大伽藍)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300여 소속사암(寺庵)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직지사는 사명대사가 출가한 사찰이었다는 이유로 왜구에게 완전히 소실이 됩니다. 당시에 소실되지 않은 곳이 유일하게 '비로전'과 '천왕문'이었다고 합니다.
태조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대패하여 야반 도주를 하면서 지금의 왜관 정도에 도착하였을 때, 왕건의 수하에 의해 당시 직지사 능여조사의 만남를 만나 재기를 하게된 일화가 전해지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주군, 제 고향 김천 땅 직지사 주지 능여 스님을 만나보십시오. 그분이라면 반드시 이 위기를 타개할 비책을 가지고 계실 겁니다.” 공산 전투에서 견훤의 역공으로 대패하여 8,000명에 달하는 부하들을 잃고 인동현까지 밀려나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한 왕건(王建)은 한 장수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동고동락했던 부하 장수 김락과 신숭겸도 전사하고, 그 자신 군졸의 복색으로 바꾸어 입고서야 간신히 탈출한 처지였기에 더욱 그랬다. 왕건과 마주앉은 직지사 주지 능여조사 (能如祖師)는 일찍이 왕건의 사람됨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으나, 남루한 행색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패장을 이 시점에서 도와야 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사찰의 운명이 좌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으음.”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고민에 잠겼던 능여는 기울어 가는 신라 왕실을 대신하여 옛 고구려의 기백으로 국운을 다시 일으키고 불교를 진흥시키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히는 왕건에게 서 저 옛날 중국 대륙을 호령했던 광개토대왕의 기상을 보았다.
“반드시 살아 돌아가 대업을 이루소서.”
927년(태조 10), 감나무 꽃이 땅을 하얗게 물들였던 어느 봄날 직지사에서의 왕건과 능여조사 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고려 태조 왕건은 927년 견훤이 경주를 급습하자 경애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사 1만명으로 경주로 향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대구 팔공산에 진을 친다.
맹장 견훤은 이를 간파했고, 역습을 당해 대패한 왕건은 남은 군사 2,000명을 수습하여 구미 인동현까지 밀리고 말았다. 이때 휘하 장수의 권유로 직지사의 능여조사를 만나게 되는데, 당시 능여는 왕건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급히 퇴각하는 과정에서 신발도 신지 못한 군사들에게 짚신 2,000켤레를 삼아 주고, 또 큰 짚신을 만들어 사방에 흩어 두는 심리전을 구사하여 왕건이 불리한 전세를 만회해 개경으로 귀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936년(태조 19)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오늘날로 치면 991만 7355.37㎡[300만 평]에 달하는 전답과 임야 1천 결을 직지사에 내려 은혜를 갚았고,4대 광종 때까지 매년 전답 10결과 노비를 하사했다.
이후에도 고려 왕실에서는 왕조를 개창하는 데 기여한 사찰이라 하여 계속해서 직지사를 받들었으며, 이러한 왕실의 지원 속에 직지사는 고려 후기까지 사세를 크게 확장했다. 정종 원년인 946년에는 동평현 염전 7결과 곡식 7만 석을 내렸고,광종 원년인 950년에는 신라 후기 경순왕때 조성된 『금자대장경』과 장판각을 중수하고 50일간 법회를 열어 낙성을 경축했다.신종 대의 권력자인 문하시랑평장사 임유(任濡)는 곡식 500석을 들여 직지사 경내에 13층 석탑을 조성하기도 하는 등 불사도 끊이지 않았다. 당시 승려로서 직지사를 거치지 않은 국사가 없을 만큼 직지사는 고려 불교에서 중요한 위치 를 차지하고 있었다. "
위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직지사에는 지금의 해인사 팔만대장경보다 더 일찍 신라에 "금자대장경"이 있었다는 것이고, 또 13층 석탑이 있어다고 하는데 지금 그 흔적도 제대로된 기록도 찾을 수 없습니다. 흔적이 없다는 것은 당시 13층 탑은 아마도 석탑이 아닌 목탑으로 추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창건기에 직지사 대웅전도 2층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면 아마도 황룡사 9층 탑보다 높았을 것 같은 주관적 생각도 해봅니다.
직지사 대웅전 앞 문경 도천사기 석탑 3기 중 2기 모습(보물)
직지사 비로전 앞 도천사지 석탑 3기 중 석탑 1기 모습(보물)
직지사 성보박물관(청풍료) 뒤편 또 다른 폐사지인 강락사지의 삼층석탑 모습(보물)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보물)
김천 직지사 대웅전 후불벽 삼존불탱화 뒤편으로 돌아가면 선인 벽화가 있습니다.
대웅전 서쪽벽 중앙에 있는 기룡관음도
대웅전 서쪽벽 보현동자상(흰 코끼리를 타고 있으면 보현보살 임)
대웅전 서쪽벽 문수동자상(문수보살 혹은 동자는 청사자를 타고 있는데 익룡을 타고 있는 것이 다름)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 조각은 은해사 백흥암 수미단, 하양 환성사 수민단, 파계사 원통전 수미단과 함께
맥을 잇는 아주 빼어난 아름다운 수미단입니다. 위에 열거한 각 사찰의 수미단은 대웅전에 포함 또는 단독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수미단(須彌壇)은 절의 불전 안에 불상을 모셔 두는 단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