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강산
작사 : 신중현
작곡 : 신중현
노래 : 신중현과 더 멘
비트 전송률 : 128Kbps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풀은 내마음
나뭇잎 푸르게 강물도 푸르게 아름다운 이곳에 내가 있고 네가 있네
손잡고 가보자 달려보자 저광야로 우리들 모여서 말해보자 새희망을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풀은 내마음
우리는 이땅위에 우리는 태어나고 아름다운 이곳에 자랑스런 이곳에 살리라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태양이 비추고 하얀물결 넘치는 저바다와 함께 있네
그얼마나 좋은가 우리사는 이곳에 사랑하는 그대와 노래하리
오늘도 너를 만나러 가야지 말해야지
먼훗날에 너와나 살고지고 영원한 이곳에 우리의 새꿈을 만들어 보고파
봄여름이 지나면 가을겨울이 온다네 아름다운 강산
너의 마음은 나의 마음 나의 마음은 너의 마음 너와 나는 한마음 너와나
우리 영원히 영원히 사랑 영원히 영원히 우리 모두다 모두다 끝없이 다정해
거짓말이야
작사 : 신중현
작곡 : 신중현
노래 : 신중현과 더 멘
비트 전송률 : 96Kbps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그렇게도 잊었나 세월따라 잊었나
웃음속에 만나고 눈물속에 헤어져
다시 사랑않으리 그대 잊으리
그대 나를 만나고 나를 버렸지 나를 버렸지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안개속의 여인
작사 : 신중현
작곡 : 신중현
노래 : 신중현과 더 멘
비트 전송률 : 96Kbps
안개 속의 여인
불빛도 희미한 이 밤을 따라서
사라져가버린 그 여인
높다란 코트에 빛나는 눈동자
단 한 번 남기고
말없이 가버린 그 여인
안개가 자욱하게 내 눈에 어리어 있네
너무나 허무하여 새하얀 안개만 보네
안개 속의 여인 어디로 갔을까
스며든 안개여 내 눈을 적시며 울리네
▲신중현 기타연주 사진과 그의 그룹사운드시절
신중현 & 더 멘(THE MEN)
거짓말이야/아름다운 강산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웹진 '가슴')
1970년대 한국 싸이키델리아, 그 정점의 조각 모음
[거짓말이야/아름다운 강산]은 2002년부터 복각 발매되고 있는 '신중현 작품집' 시리즈 여섯 번째 음반이다. 앞선 음반들과 달리, 이 음반은 세 종의 LP에서 한 곡씩을 추려서 묶은 컴필레이션이다. 즉 같은 이름과 구성을 갖고 있는 오리지널 정규 LP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1972-73년 더 멘(The Men) 시절 신중현은 자신의 작사·작곡·편곡, 더 멘의 연주로 여러 솔로 가수의 음반을 만들었는데, LP 앞면은 솔로 가수의 짧은 곡, 뒷면은 더 멘의 긴 곡으로 구성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 중 각 LP의 B면에 실린 더 멘의 대표적인 롱 버전 세 곡을 복각해서 모은 게 이번에 나온 음반이다. "아름다운 강산"은 장현/더 멘의 [장현 and The Men(석양/안개 속의 여인/아름다운 강산)](유니버어살, KLS-46, 1972), "거짓말이야"는 윤용균/더 멘의 [내 곁에 있어주오/거짓말이야](유니버어살, KLS-61, 1973), "안개 속의 여인"은 지연의 [나만이 걸었네/그대 있는 곳에](유니버어살, KLS-66, 1973)에 각각 수록되었던 곡이다. 이번 음반에 담긴 롱 버전 곡들은 모두 중고음반 시장에서 각 음반을 '고가의 희귀 LP'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 이유가 단지 음반이 희귀해서이거나 혹은 '대가'로 평가받는 신중현의 '대곡'들이 존재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첫 트랙 "아름다운 강산"은 굳이 이를 커버한 이선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곡이다. 유신정권 당시 '박정희 찬가'를 만들라는 청와대와 공화당의 요청(아니 압력)을 거부하고 만든 것이란 비화도 잘 알려져 있다. 신중현은 '중앙'의 지시를 거부하고 '자기 식 국민가요'를 작곡하면서 며칠에 거쳐 테마를 확장하고 다듬었는데, 이는 탄탄한 양식미를 갖춘 명곡이란 평가로 화답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름다운 강산"이 그룹 더 멘의 연주를 전제한 오리지널 버전인 반면, "거짓말이야"와 "안개 속의 여인"은 각각 김추자(1971), 장현(1970)의 목소리로 발표되었던 곡을 그룹 더 멘의 롱 버전으로 재편곡 연주한 것이다. 그 때문인지 "아름다운 강산"은 신중현이 동료들과 함께 치밀하게 쌓아올린, 그렇지만 그 속에 미로를 품고 있는 성채(城砦) 같다면, "거짓말이야"와 "안개 속의 여인"은 이미 발표했던 단편 영화를 변주하여 롱 테이크 위주로 자유롭게 다시 찍은 디렉터스 컷 필름 같다.
세 곡 모두 긴 러닝 타임을 자랑하지만 구성은 상이하다. "아름다운 강산"은 작곡과 편곡 단계에서 이미 10분 여에 육박하는 곡으로 짜여졌기 때문에, 얼핏 들으면 분방하게 만들어진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잘 디자인되고 꼼꼼하게 만들어진 카펫처럼 짜임새가 돋보인다. 김기표의 키보드와 손학래의 오보에가 리드하는 35초 길이의 인트로는 클래시컬한 장엄미와 비장미가 느껴지는 짧은 조곡의 편린 같다. 탐미적인 인트로에 이어, 발군의 그루브를 들려주는 이태현의 베이스를 신호탄으로 메인 테마가 전개되는데, 비교적 길게 진행되는 노래 부분이 끝나면 참았던 욕망을 터뜨리듯 현란하고 환각적인 연주가 펼쳐진다. 전위적이면서 혼미한 부조화 속 조화를 들려주며.
반면 "거짓말이야"와 "안개 속의 여인"은 평범한 길이의 기 발표작을 마치 잼 하듯 맘껏 늘려 연주한 경우다. 즉흥적이라거나 라이브 같다는 수식은 그로 인해서다. 23분에 육박하는 "거짓말이야"에서 노래(신중현)는 처음과 끝을 장식할 뿐이고, 11분 30초의 "안개 속의 여인"에서는 1분 정도에 불과하다(그나마 5분 22초가 지나야 등장한다). 전자의 경우 17분 여, 후자의 경우 트랙의 거의 전부가 솔로 연주로 채색된 데서 알 수 있듯, 말이, 노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태현의 베이스와 문영배의 드럼은 꿈틀거리고 들썩거리는 가운데, 신중현의 기타, 김기표의 키보드, 손학래의 오보에가 돌아가면서 즉흥 연주를 벌인다. 이 끝없이 계속될 것처럼 이어지는 싸이키델리아 여행은 듣는 이를 무아지경에 빠뜨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음반은 한국 록 음악이 논리와 직관을 결합해 빚을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 중 일부를 보여준다. 기획자의 말대로 당대 구미의 어느 싸이키델릭 록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누구나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대중적 어법은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선입견이란 바이러스만 조심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때는 바야흐로 유신시대였다. 무아지경에 빠질 수 없는, 아니 무아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 압제의 시대에 신중현, 아니 한국 그룹 사운드의 찬란한 결실 중 하나가 꽃피었다는 것은 아이러닉하다. 그래서 30여 년이 흐른 지금 여기 담긴 음악들을 들으며 떠나는 44분 21초의 싸이키델리아 여행은 툭툭 끊긴다. 거짓말 같았던 시대, 거짓말 같은 음악이 생생하게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
“미8군 무대에서도 ‘우리 것’ 고민했다”
“미8군 무대에서도 ‘우리 것’ 고민했다” 한국 대중음악 100년, 어느새 아시아를 휩쓰는 한류 열풍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한 가요의 저력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신동아’는 대중음악계의 거인들을 만나 그들의 음악세계를 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그 첫 순서는 데뷔 40년을 맞는 록 음악의 대부 신중현(64)씨. 그는 여전히 어두운 연습실에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편집자)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www.izm.co.kr
1974년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던 TBC 텔레비전의 한 생방송 쇼 프로그램. 김세환, 송창식, 이장희 등등 포크 가수들의 아기자기한 무대가 끝나자 진행자는 출연 가수들과 함께 갑자기 숙연한 목소리로 다음 순서를 소개했다. “오늘 정말 중요한 한 분을 모셨습니다. 우리 음악에 새로운 획을 그은 분입니다. 신중현씨입니다.”
둘러메고 나온 일렉트릭 기타가 몸보다 더 커 보이는 37세의 주인공은 왜소한 체구에 얼굴 생김새도 볼품없었다. 이전까지 음악계에서는 꽤나 유명했지만 대중적으로 얼굴이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던 까닭에 시청자들은 그저 ‘저 사람이 신중현이구나’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날 그가 연주하고 노래한 곡 ‘미인’은 방송하는 순간 즉각 히트해 다음날에는 전국을 메아리치며 삽시간에 삼천만의 애창곡으로 울려퍼졌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그 여인이 누구인가 정말로 궁금하네…’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따라 불렀던 이 노래는 그러나 며칠이 지난 후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대마초 파동과 가요규제 조치로 금지곡의 철퇴를 맞은 것. 흔한 ‘애창가요 선집’ 노래책에도 이 곡은 물론, 그의 노래는 모두 쏙 빠져버렸다. 그는 졸지에 언론을 통해 ‘대마초 가수’로 낙인 찍혔고,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에게 서서히 잊혀져 갔다. 1980년 활동규제가 풀리면서 ‘아름다운 강산’을 불러 재기했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후 그가 지속적으로 펼친 음반활동 역시 대다수 팬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신중현이 모습을 드러낸 뒤 흐른 40년의 세월을 돌아볼 때 그를 오늘날 말하는 ‘스타’의 한 사람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에게는 팬들의 열띤 환호성도, 오빠부대도 없었다. 재미있는 사연과 스캔들로 신문 잡지에 오르내린 적도 없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다른 가수들이 세월과 함께 모두 사라진 지금, 그는 추억으로 묻히는 대신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재진행형’ 음악인이다.
“우리 모두는 신중현으로부터 나왔다”
아들보다 더 어린 가수들이 ‘한국 록의 대부’라고 추앙하며 그의 이름을 단골로 언급한다. 최근 월드컵 붐을 통해 상종가를 기록하고 있는 로커 윤도현은 “우리 록의 모든 시작은 신중현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한다. 1996~97년 가요계에는 갑자기 ‘신중현 바람’이 불었다. 1997년 신중현의 음악을 기리는 후배 가수들이 트리뷰트(tirbute·헌정) 앨범을 만들었을 때, 그들은 23년 전 TBC 프로의 출연가수들이 그랬듯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을 여기까지 끌고 오신 신중현 선생님께 이 음반을 바칩니다”라는 충심의 헌사를 전했다.
1960~70년대를 장식했던 음악을 기록하고 정리할 때 그는 의문의 여지없이 선두에 선다. 우리 뮤지션들, 특히 록 가수들은 그라는 산을 올라가야 진정한 뮤지션이 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갖고 있을 만큼 그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인터뷰를 위해 8월2일 그를 만났다. 어느새 머리를 뒤덮은 흰 머리카락은 단신의 체구와 어울려 거장의 풍모를 자아냈다. 처음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청하자 “내가 그런 곳에 나올 만한 인물이 되느냐”며 겸연쩍어했던 그지만, 막상 함께한 자리에서는 자신의 음악과 흘러간 시절을 마치 암기해놓은 듯 막힘 없이 술술 풀어냈다.
서울 송파구 문정동 로데오거리에 있는 그의 집무실이자 개인 스튜디오 ‘우드스탁’은 16년 전 생길 때의 바로 그 자리를 변함없이 지키고 있었다. 실내에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일렉트릭 기타들과 더불어 드럼세트 등 악기와 녹음장비로 가득했다. 돈이 생기면 모조리 이곳에 쏟아부은 걸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는 “아마 국내 음악관계자치고 이곳에 와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걸요”라며 운을 뗐다.
-16년 전에 사셨으니 지금쯤 땅값이 많이 올랐겠네요.
눈부신 속도로 변하고 있는 동네가 신기해 필자가 묻자 그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산 게 아니라 월세입니다. 제가 돈에 대해선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서….”
그러면서 그는 “그 문제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고 청했다. 40년의 가요계 생활,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히트곡을 작곡한 노음악가에게는 작업실을 살 만한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필자의 입맛이 순간 씁쓸해졌다.
박정희 찬가 작곡 거부
자리에 앉자마자 그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불편할 질문일 듯합니다만 어차피 나올 얘기라서 먼저 묻습니다. 음악인으로서 신중현은 1970년대,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3공화국이나 유신시절과 분리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광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통제와 억압으로 그때를 기억하실 듯한데요, 박정희 대통령 또는 그 시대와 일그러지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불편하다기보다는 지겹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1972년이었어요. 정치적으로 평온하다가 갑자기 유신독재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이었고 저는 일련의 히트곡들을 터뜨리면서 가요계에서 최고 자리에 올라있을 때였죠. 어느날 ‘청와대’라고 신분을 밝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통화는 한 5~6분 정도로 짧았어요. ‘박정희 대통령의 새로운 통치를 내용으로 한 노래를 만들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박정희 찬가를 만들라는 거였죠.
난 대뜸 ‘그런 노래는 쓸 줄 모른다. 왜 하필 나한테 그런 주문을 하느냐’고 반문했어요. 그쪽에서 들었을 때는 내 어투가 퉁명스러웠거나 건방졌을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제 나름으로는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그런 거부의사 자체를 있을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인 듯합니다.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지요.”
-정권 차원에서 부탁한 것이라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물론 좋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어찌보면 영광일 수도 있는 일이고요. 하지만 특정인 찬가는 내 음악과 맞지 않아요. 예나 지금이나 전 순수하게 음악을 하는 사람이지, 특정인을 찬양하거나 미워하는 수단으로 곡을 만들지 않습니다. 음악성을 추구하는 처지에서 그런 노래는 해서는 안되지요.
또 내가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데, 내심 박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았던 거죠. 취임 초기 한 약속인 민권이양도 지키지 않았고. 거기에 제 자부심이 작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이래봬도 신중현인데’하며 나름대로 목에 힘주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 사건 이후 구체적으로 어떤 수난을 당하셨나요. 그에 대한 반항으로 ‘아름다운 강산’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한마디로 음악하기 힘들어졌지요. 우선 공연장에 늘 경찰이 단속을 나왔습니다. 전화 사건 이후 정치적인 상황은 매우 안 좋아졌습니다. 독재가 심화되던 때였어요. 저는 도리어 독재자가 아닌 우리나라의 강산과 국민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1972년 그룹 ‘더맨’ 시절의 ‘아름다운 강산’입니다. 그때 MBC 토요일 쇼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 곡을 불렀습니다. 출연은 제가 제의했어요.
그 방송에서 리드보컬인 박광수는 삭발을 했고 멤버들은 귀 주변에 머리핀을 꽂아 긴 머리를 걷어올려 장발을 더 부각했어요. 한마디로 강압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거죠. 그게 미웠겠지요. 이걸 본 고(故) 육영수 여사가 ‘만들라는 박대통령 노래는 안 만들고 반항한다’며 분을 터뜨렸다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그러더니 장발단속이 더 심해졌고 제 곡은 계속 금지처분되었습니다. 결정타는 말할 것도 없이 1975년에 터진 대마초 파동과 가요규제 조치였지요.”
▲ 최초의 록 그룹 '애드 훠'. 사진 맨 앞이 신중현
“대마초? 우리집에 산처럼 있어”
신중현은 가요역사상 최대 사건으로 기록된 1975년 대마초 파동과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인물이다. 최근 연예계 로비와 관련해 소동이 일기도 했지만 대마초 파동 당시에 비하면 ‘찻잔 속의 태풍’일 뿐이다. 당대 최고의 인기 포크가수들이 줄줄이 붙잡혀간(27명 구속, 9명 입건) 이 사건의 최대 희생자는 바로 신중현이다. 당시 언론이 그에게 붙인 딱지는 ‘대마초 왕초’였다.
사건이 몰고 온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에 4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기성세대들은 신중현에게서 ‘불온’과 ‘퇴폐’의 이미지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이 얘기를 꺼내면서 그가 흥분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의외로 차분하게 사건의 전모를 들려주었다. 내내 어처구니없다는 어조였다.
-어떤 경위로 대마초 왕초에 지목된 것입니까. 당시 선생님의 음악은 히피들의 음악인 사이키델릭 장르였고, 사이키델릭이 환각을 일으키는 마약관련 음악이었으니까 논리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 무렵 저는 미8군 쇼에서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AFKN 미군방송에 출연할 기회가 있었죠. 미군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보니 절 초청해 녹화를 한 거였는데, 끝나고 나서 녹화 테이프를 보았더니 화면 디자인이 찌그러지고 마구 돌고, 총천연색에 너무 현란하더라고요. 한마디로 충격을 받았죠. 꼬치꼬치 물었더니 그게 사이키델릭 수법이라는 거예요. ‘아, 이건 한번 배워볼 필요가 있겠구나’ 싶어 히피들의 사이키델릭 록을 찾아 듣기 시작했죠. 그래서그때부터 외국의 사이키델릭 곡도 연주해보고 가요로도 만들었어요.
그런데 반응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오히려 한국에 와 있는 미국인들로부터 더 빨리 왔어요. 당시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할 때는 유난히도 미국사람들, 특히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여행하던 히피들이 많았어요. 1970년대였으니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그 친구들은 예상외로 온화하고 젠틀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만드는 록 음악을 무척좋아했어요. 공연이 끝나면 갈 데가 없어서 제가 집으로 데려가서 잠도 재워주고 고기도 먹이고 했습니다.
그들이 떠날 때 감사의 선물로 준 것이 바로 대마초 마리화나였어요. 얼마나 많이 줬던지 방에 몇 봉지가 굴러다닐 정도였지요. 그때만 해도 대마초나 마리화나라는 이름도 몰랐어요. 미국 친구들이 ‘해피 스모크’라고 부르길래 그런 줄로만 알았죠. 나중에 주변의 동료 가수들이 마리화나 얘길 하길래 별 뜻 없이 ‘우리집에 산더미같이 쌓였다’고 했죠. 달라는 사람한테는 별 생각 없이 내주기도 했어요. 나중에 대마초사건 때 그들이 취조를 받으면서 내 이름을 언급했고, 저는 졸지에 ‘가수들의 대마초 공급을 책임진 왕초’로 둔갑한 거죠. 일이 그렇게 된 겁니다.”
가뜩이나 미움을 받던 차에 ‘제대로 걸린’ 신중현은 1974년 12월 마리화나 조달책으로 지목돼 당시 남대문시장 여성회관 지하 마약사범 고문실로 연행된다. 거기서 물고문 등 말못할 고생을 겪은 그는 이후 4개월간 수감되었다. 이것으로 그의 음악적 전성기는 사실상 막을 내리고 만다. 그것은 비단 신중현 개인의 고초가 아니라 이 나라 대중음악 전체의 압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중현은 “대마초사건은 그 이전까지 길을 닦아온 우리 음악의 수준과 기(氣)를 단숨에 꺾어버렸다”며 아직도 분노의 심정을 거두지 않는다. 음악가의 창작적 자유와 실험정신이 척박한 이 땅에 새로운 음악문화를 축조하고 견인해온 주체가 다름아닌 그였기에, 그가 그 길을 틀어막은 유신시대와 화해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938년 서울 신당동에서 태어난 그는, 고교중퇴 후 일렉트릭 기타 연습에 몰두하다 자신에게 기타를 배우려고 찾아온 미8군 쇼단의 한 무용수의 소개로 미8군 무대에 입성했다. 신중현 음악인생의 서막이 된 미8군 무대는, 그를 통해 한국 록 음악의 발상지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다. 록이라는 장르가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닌 만큼 미군 무대가 한국 록 음악의 시초였다는 아이러니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한국식 록으로 승부
1960년, 스물둘의 나이에 신중현은 미군 정보부 소속 ‘시빌리언 클럽’에서 최초로 기타 독주공연을 가져 미군들의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에 자신감을 얻어 마침내 당시로는 상상하기 힘든,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록 밴드 결성’을 감행한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록그룹이란 영예를 얻은 ‘애드포(Add4)’였다.
-애드포의 시작은 정확히 언제입니까. 누구는 1962년이라 하고 어떤 기록에는 1963년으로 적혀있어 자료마다 약간씩 차이를 보이는데요.
“1963년이 정확할 겁니다. 제가 기타를 쳤고 노래는 서정길, 베이스는 한영현, 드럼은 권순권이 맡았는데 주로 미8군 무대에서 연주를 했죠. 당시는 록 밴드의 바람이 전세계적으로 불 때였어요. 거기에 힘입어 밴드를 만든 겁니다. ‘그룹’이라는 개념만 볼 때 한국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상당히 앞섰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시기적으로 영국의 비틀스와 겹치는데 혹시 비틀스의 영향은 아니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룹을 만들고 나서 비틀스의 바람이 영국을 강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까요. 그때 ‘어? 비틀스가 우리랑 같네’하며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비틀스 붐에 뒤늦게 편승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시기적으로 일치했던 것뿐이죠. 물론 나중에는 비틀스를 흉내내 유니폼을 맞춰 입고, ‘I wanna hold your hand’ 같은 곡을 연주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빗속의 여인’이 실린 애드포의 첫 앨범을 만든 때는 1964년 가을, 그러니까 비틀스가 미국을 정복하고 난 뒤인 것이 맞습니다. 시민회관에서 녹음할 무렵 비틀스의 미국정복 소식을 들었으니까요. 결국 그해 겨울에 음반을 냈는데 나오자마자 시장에서는 죽을 쒔지요.”
-이후 덩키스, 퀘션스, 제로악단, 캄보밴드 등 일련의 록밴드를 결성하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밴드란 형태를 지속해나간 것은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신기할 정도입니다. 나름의 의중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밴드 생활을 할 때나 다른 가수들에게 곡을 써줄 때나 저는 명확한 개념을 세우고 있었어요. 그 시절에는 음악취향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미자, 남진, 나훈아의) 트로트가 대중음악계를 장악하고 있었고, 음악감상실에 출입한 대학생들은 팝송에, 어른들은 팻 분 류의 점잖은 스탠더드 팝을 듣던 시기였어요. 그 형편에 록 한다고 나서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전 트로트가 아니면서도 현대적인 리듬과 화음을 쓴 우리만의 대중음악이 가능하다고 확신했습니다. 미8군에서 연주하던 때부터 “나 혼자라도 이런 방향으로 나가야겠다”고 되뇌곤 했으니까요. 이를테면 ‘내가 한국인이니까 외국의 록을 해도 반드시 우리 것이 되어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었지요.
좀 전문적으로 말하면 서양은 장조, 동양은 단조가 일반적입니다. 자동차 경적 소리를 들어도 외국은 장3도, 동양은 단3도예요. 전 ‘단조를 가지고 장조 기분을 낸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거기에는 한국 땅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라면 한국적 사운드가 가능할 거라는 배짱이 깔려 있었어요.”
2년 동안 작사 공부
-다른 가수들에게 준 곡은 거의 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지만, 밴드는 ‘미인’ 시절의 ‘엽전들’을 빼고는 결성한 것마다 실패했습니다. 좀 아이러니한 결과입니다.
“밴드는 아무래도 실험적인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대중성이 떨어졌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게 반드시 실패라고 여기진 않습니다. 밴드는 공동 행위라서 멤버간의 결속이 중요하죠. 그래서 한곡 한곡을 만들기가 더 힘들고 일관성이 떨어졌을 뿐입니다. 게다가 거듭 말씀 드리지만 그 시대 상황과 록이 잘 어울리지 않기도 했고요.
제가 ‘캄보밴드’ 등을 통해서 재즈를 할 때 절실히 느낀 건데, ‘역시 재즈는 미국의 것이구나’ 하는, 다시 말해 내 영역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더군요. 반면 남에게 준 곡들은 아까 말한 ‘외국 형식 - 한국 맛’의 접목이 상대적으로 잘 만들어져 나왔어요. ‘미인’이나 ‘아름다운 강산’은 그룹 때의 곡이지만 그런 점에서 대중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작사자와 작곡자가 철저히 나누어진 당시 풍토에서 작사 작곡을 다 하셨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어쩌면 국내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작곡의 지향은 알겠는데, 작사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한참 고생하고 나니 사운드 패턴은 자리가 잡혔는데, 아닌 게 아니라 항상 가사에서 걸립디다. 외국의 멋진 록에 우리 가사를 붙여 부르면 유치한 느낌이 들었죠. 그래서 작사에 대한 연구로 2년을 보냈습니다. 결국 ‘그러나’ ‘따라서’ 같은 접속사를 쓰면 안된다, 받침이 없는 어휘를 주로 고른다 등의 방법을 깨쳤죠.
하지만 가장 절실했던 것은 음(音)에 따라 잘 흘러가는 낱말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러기 위해선 되도록 쉬운 말, 내용은 없더라도 감정이 우러나는 말의 전개가 이뤄져야 합니다. 가령 ‘빗속의 여인’을 예로 들어볼까요.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그 여인을 잊지 못하네’라는 가사 한 줄만 들어도 그 그림이 떠올라야 제대로 된 작사인 셈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가사를 잘 소화해 표현하는 가수 개인의 역량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겁니다. 가수의 생명은 가사를 얼마나 리얼하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멀티’라야 음악이 산다
역시 음악가답게 음악 얘기에는 절로 흥을 냈다. 그가 고심했던 이러한 문제와 해답들은 이후 가수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아마도 그의 음악경력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점은 김추자, 펄시스터즈 등에게 곡을 써주며 당대 최고의 작곡자와 프로듀서로 풍미했던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비록 밴드 활동에서는 불우했지만 이 분야에서만큼은 ‘신중현 사단’이란 말까지 낳으며 경이로운 성공행진을 거듭했다. 심지어 앨범에 대한 호응을 유발하기 위해 펄시스터즈든 박인수든 사단 소속가수들은 너도나도 ‘신중현 작·편곡집’이란 말을 앨범 커버에 붙여야 했다. 신중현의 맹활약으로 인해 그 무렵 한국의 대중음악은 르네상스시대를 맞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중현 사단’이라는 말은 누가 처음 쓰기 시작한 표현입니까. 이른바 ‘사단 소속가수들’ 중에 선생님이 보시기에 가장 능력이 뛰어났던 사람은 누구였는지 궁금합니다.
“사단은 언론에서 쓴 표현입니다. 제가 써준 곡을 불러 히트한 가수가 잇따라 나오니까 그런 말을 썼겠지요. 맨 처음 시작은 이정화였습니다. 나중 다른 가수들이 히트시킨 ‘꽃잎’이나 ‘봄비’와 같은 노래를 불렀는데 아쉽게도 반응은 없었습니다. 얼마 후 월남에서 가수로 활동하기 위해 떠났죠.
그 다음이 바로 펄시스터즈였습니다. 실은 나도 월남전 특수를 겨냥해 월남에 가려고 했는데 마지막으로 펄시스터즈에게 써준 ‘님아’가 크게 히트하면서 월남행을 포기했어요. 이어서 ‘님은 먼 곳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로 최고가 된 김추자가 나왔고, ‘봄비’의 박인수, 리메이크를 많이 했던 장현, 임아영, 김정미 등이 이어졌죠. 김정미는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노래가 많았는데 성공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아있습니다.
가장 뛰어난 가수요? 누구랄 것 없어요. 모두 저마다의 가사 전달력과 표현세계를 소유하고 있었지요. 한마디로 ‘수준’이 있었어요. 요즘 가수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다만 이 얘기는 하고 싶네요. 제 경험으로 볼 때 가장 노래를 잘한 것은 모두 첫 앨범을 낼 때였다는 사실이에요. 아무래도 가장 집중력이 있는 때, 가장 때가 덜 묻은 시절에 낸 음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해서 조금 유명해지면 슬슬 목에 힘이 들어가거든요. 그러면 음악이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뮤지션에게 중요한 건 역시 ‘순수한 자세’라는 말입니다.”
-신중현 사단 가수들이나 그룹 시절의 음악을 찬찬히 들어보면 ‘한국 록의 대부’라는 말이 무색하게 여러 장르를 구사하고 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커피한잔’은 록 스타일인 반면, ‘봄비’는 흑인음악인 솔입니다. 더러 재즈의 냄새, 스탠더드 팝의 분위기를 지닌 노래들도 있고 컨트리풍의 노래도 있습니다. 요즘 음악가들에게선 발견하기 어려운 다양성인데, 그러한 멀티플레이는 어디서 비롯됐다고 생각하십니까.
“결국 미8군에서의 경험에 공을 돌려야 할 겁니다. 미8군 클럽무대는 한 장르의 음악 갖고는 활동이 불가능했어요. 출입하는 군인들의 출신성분에 따라 장르를 달리했죠. 가령 제가 출연한 ‘에어맨스’ 같은 클럽은 일반 병사들이 출입했고, ‘엔씨오’ 같은 업소의 손님은 상사나 병장이 많았습니다. 또 ‘업소스클럽’은 장교들이 주로 출입하는 곳이었어요. ‘에어맨스’에선 주로 로큰롤, ‘엔씨오’에선 컨트리, ‘업소스클럽’에선 스탠더드 팝을 불러야 했습니다. ‘에어맨스’에서 품격 있는 스탠더드 팝을 하면 야유를 받았거든요.
클럽이 어디에 있는지, 부대에 흑인과 백인 중 누가 더 많은가에 따라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미리 준비해야 했습니다. 부대 요구에 맞춰 급히 편곡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지요. 음악을 많이 듣지 않으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클럽활동이 뭡니까? 요즘 말로 라이브 아닙니까? 제 경험을 두고 말하지만, 많은 곡을 듣고 연주하며 라이브를 해야 다양한 음악이 나오지요. 음악은 ‘멀티’가 아니면 죽습니다.”
“지금도 히트곡 만들 수 있다”
-1960~70년대를 석권한 선생님 음악의 정체를 한두 마디로 규정한다면 뭐가 될까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감히 말하자면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은 로큰롤이고, 1960~70년대는 바로 그 로큰롤의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로큰롤은 젊음의 순수함 그리고 자유의 표현물입니다. 제가 한 작업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로큰롤로 음악의 자유를 실천했다는 것이겠죠. 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막상 말로 풀어놓고 보니 좀 딱딱하네요.”
그러나 신중현의 이름은 결코 한국 록의 시조라는 과거의 위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남긴 곡들은 후배가수들에 의해 줄지어 재조명되면서, 30년이 흐른 요즘 사람들의 귀 역시 관통할 수 있음이 확인됐다. ‘미인’은 봄여름가을겨울에 의해, ‘님아’는 신효범에 의해, ‘님은 먼 곳에’는 조관우와 장사익에 의해 되살아나 가요계에 이른바 리메이크 열풍을 몰고 왔다. 지난해에는 김건모가 4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빗속의 여인’을 다시 불렀다. 이는 단순히 가요사의 거목이라는 이름값 이외에도 독창적인 음악성이 가져온 결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천재적인 화음 전개’라는 측면에서 신중현의 음악은 클래식 음악 종사자들도 그 비범함을 인정한다.
-한편에선 요즘 선생님이 만드는 음악은 너무 어렵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과거처럼 대중적인 히트곡을 다시 쓰실 수는 없는 겁니까. ‘미인’ 같은 곡은 지금 나와도 감각적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지금도 맘만 먹으면 히트곡을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이 대목에서 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노년이 된 지금은 대중 속으로 들어갈 때가 아니라 마무리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수구(守舊)하는 것은 보기 안 좋아요. 죽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놓는 게 중요합니다. 제 음악의 결정판은 아직도 나오질 못했어요. 맘에 꼭 드는 곡, 맘에 꼭 드는 앨범을 내지 못해 여기 이렇게 쪼그리고 있는 겁니다.”
“거짓 음악이 판치는 시대”
-근래 음악 환경은 과거와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뮤지션들도 선생님 때와는 스타일, 자세, 음악의 서술방식 등 모든 면에서 판이합니다. 요즘 음악을 어떻게 보십니까.
“아무리 외국음악을 해도 한국인이라는 자각이 필요해요. 한국인이 선천적으로 보유한 정서, 고유의 얼, 가락, 장단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한국음악을 하기 위한 ‘근본’이에요. 근본을 바탕으로 하고 나서 공감할 수 있는 외국의 것을 받아들여야지요. 이 점에서 요즘 젊은 친구들은 외국의 것을 무차별로 수입해 방향감각을 상실했어요.
매스컴도 전혀 분간을 못해요. 설령 그런 음악인이 있어도 미디어가 주목하지 않아요. 시청률 높은 프로그램 제작하기에 급급해서 정작 중요한 우리의 창조적 문화는 내동댕이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국문화를 중심에 두어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로 흐르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신중현씨는 인터뷰 내내 자신의 음악세계와 지향을 설명하다가도, 한끝에서는 어김없이 근래 우리 가요와 가수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며 이 시대 음악에 대한 실망을 피력했다. “진정한 음악은 죽었다”며 요즘을 ‘거짓 음악이 판치는 시대’라고 격하게 단언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손자 또래의 후배 가수들에게는 당장의 인기에 집착하거나 안주하는 자세 대신 ‘죽기살기로 음악하는 고행(苦行)의 태도를 보여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는 올 가을을 기해 두 가지 회심의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하나는 ‘미련’ ‘떠나야 할 그 사람’ ‘늦기 전에’ ‘님아’ 등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자신의 작품 18곡을 새로 연주 편곡한 모음집을 출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야외 대형무대에서 무료 콘서트를 개최하는 일이다. 앨범은 “모든 장르가 다 나와 한 바퀴를 돌아도 천연히 가치를 발하는 음악, 그런 진실한 음악만이 누리는 영원한 생명력”을 보여주고자, 공연은 후배 음악인들에게 라이브의 중요성을 설파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음악사의 거장’이라는 찬사에 만족하지 않는 듯했다. 가만히 앉아 명예를 누리기보다는 ‘역사와 대중에 대한 서비스’를 끊임없이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제공하려는 서비스의 콘텐츠를 곰곰이 되씹어보니 마침 PR비 사태로 일그러진 우리 가요계에 대한 궁극적 처방전처럼 들렸다. 한국 대중음악의 한 시대를 열었던 이 작은 거인의 말은 인터뷰가 끝난 후에도 뇌리에 남아 메아리쳤다.
6인조 록 그룹 <더 맨>
대중문화에 대한 탄압과 조롱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신중현은 퀘션스를 거치며 비로서 자기 색깔을 분명하게 완성한 <더 맨>으로 거듭나며 음악적 정점을 향해 치달았다.
<더 맨>의 최대 히트곡이자 한국 록 음악 사상 최고의 명곡으로 추앙받는 <아름다운 강산>은 수많은 후배 가수들에 의해 불리어지며 불멸의 생명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강산>은 한국 포크의 대명사 격인 김민기 곡 <아침이슬>과 함께 한순간 불리어 질 수 없는 아픔을 간직한 유신정권의 이단아였다.
신중현은 그룹 퀘션스 해체이후 1971년초부터 다시 정성조와 손을 잡고 '신중현과 그의 캄보밴드'를 결성했다.
이 때는 청년 문화의 기수로 젊은 기운이 들끓었던 포크 음악과 자웅을 겨루며 명동의 살롱가를 휘어 잡았던 최절정의 상업적 성공 시절이었다.
캄보밴드와 더 맨 시절에도 수많은 가수들이 새롭게 대중들의 각광을 받으며 탄생했다. 저음의 소울 창법이 독보적이었던 <미련>의 장현과 임아영, 자매 듀엣으로 대중들에 크게 어필했던 바니걸스, 민아, 주현, 지연, 차현아, 시각장애인 윤용균, 그리고 김정미는 대표적인 가수로 손꼽힌다.
이 시절 신중현은 수많은 가수들을 관리하기 위해 20여 명이 넘는 직원들로 구성된 사무실을 운영해야 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함께 음악 생활을 했던 정성조는 '돈을 쓸어 담았을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박인수, 펄 시스터즈로부터 시작된 신중현 문하의 수많은 가수들은 이 때부터 <신중현 사단>이라는 특별 호칭으로 차별화되어 불리기 시작했다.
캄보밴드가 발표한 <신중현 사운드-프린스음반, SM7156, 71년>음반은 바니걸스의 데뷔음반으로 민아, 주현 등 여가수들이 보컬로 참여했다.
부산이 고향인 고정숙, 재숙 자매로 구성된 바니걸스의 어머니는 '독일병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맹렬여성이었다. 국악예고에 재학 중이던 두 자매는 모친의 간청으로 신중현 사단에 합류하며 70년대 중반을 풍미하는 인기 듀엣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미련>의 오리지널 가수 임아영은 청아한 목소리로 대중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신중현은 그녀의 목소리에 반하며 유달리 공을 들였지만 결혼과 더불어 미련없이 가수 생활을 접은 아까운 여가수였다. 그녀의 음반은 높은 평가를 받으며 희귀 명반으로 떠받들여지고 있다.
1971년말 상업적으로 눈코 뜰새 없던 신중현은 또 다시 타오르는 음악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캄보밴드를 해체하며 6인조 록 그룹 <더 맨>을 결성했다.
리드 기타 신중현, 베이스 이태현, 드럼 문영배, 오르간 김기표, 오보에, 섹스폰 손학래, 그리고 보컬 박광수로 구성된 라인 업이었다. 더 맨의 첫 앨범 녹음이 한창이던 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서슬퍼런 유신정권을 출범시켰다. 통행금지, 장발, 미니스커트 단속 등 삐딱한 유신정권의 잣대로 본 퇴폐스런것들 중 록 그룹은 그 중심으로 내몰리며 마녀사냥감으로 낙인찍혔다.
여지껏 록 그룹의 이미지가 퇴폐스런 이미지로만 대중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이 때 낙인 찍힌 주홍글씨탓으로 유신정권의 찌꺼기라 할수 있다. 절정의 음악적 전성기를 맞았던 신중현에게 있어 유신정권의 탄생은 좌절과 음악적 사망의 신호탄이었다.
(나무도 소장하고 있는 LP 네요 --;;)
계엄령 속에서 탄생한 총 7곡이 수록된 첫 앨범 <장현과 더 맨-유니버샬, KLS46, 1972년10월>은 불후의 명반으로 꼽힌다. 신중현, 박광수, 장현이 함께 보컬로 참여했다. 이 음반에서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선보인 대마초의 경상도 은어인 <잔디>는 묵직한 박광수의 보컬과 사이키델릭 사운드가 환각적인 숨겨진 명곡이다.
새롭게 영입한 손학래의 음악성이 돋보였던 2집 <섹소폰의 유혹-유니버샬, KLS53, 1972년 11월>은 더 맨의 연주 음반이었다.
관악기 연주자였던 손학래의 참여로 신중현은 멈추지 않는 음악적 변신을 이루며 또 다른 독특한 음악 세계를 펼쳐보일 수 있었다.
문제는 <아름다운 강산>. 1972년 '박 대통령의 노래를 만들라'는 청와대 전화 청탁을 거절한 후 온갖 통제와 장발 단속의 시달림이 뒤따랐다. 이때부터 유신정권에 강한 거부감을 품으며 항의의 표시로 리드 보컬 박광수는 삭발을 하고 멤버들은 머리핀을 꽂아 귀만 내밀고 치렁치렁한 장발 차림으로 MBC 토요일 쇼 프로에 출연했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장면을 현란한 사이키 조명으로 조롱하며 감행한 18분에 걸친 <아름다운 강산>의 연주는 시위였다.
<더 맨>은 단번에 요주의 대상으로 낙인 찍히며 모든 음악 활동에 더욱 숨통을 옥죄는 통제가 뒤따랐다. 역설적인 것은 신중현은 이 숨막히는 시절에 <아름다운 강산> <햇님> <바람> <봄> <잔디> 같은 명곡을 작곡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양희은, 서유석과 포크 록을 시도하는 음악적 실험 또한 단행했다. 이때 만들어져 서유석이 부른 <선녀>는 신중현이 추구했던 음악적 이상향을 표현해주는 최고의 명곡이다. <엽전들> 초기 시절 신중현이 직접 노래한 <선녀>와 <바람>은 신중현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정수를 이루었지만 유신정권은 금지 명찰을 달아주며 신중현을 지하토굴 속에 ‘생매장’했다.
음악적 완성기였던 <더 맨>의 음악이 유신정권의 탄압이 없이 자유롭게 펼쳐졌다면 우리가요의 꽃봉오리는 어떤 빛깔을 띠었을까? 국민들은 유신 독재정권을 비꼬며 들려준 <아름다운 강산>을 국민가요라는 사랑으로 화답하며 불멸의 생명력을 부여해 주었다.
한국 록의 거장 신중현과의 첫 대면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웹진 '가슴' 2002.10.04 )
장소: 서울 문정동 [우드스탁]
날짜: 2002년 8월 13일 오후 4시 - 5시 30분
질문자: 신현준, 이용우
참석자: 최지선, 송창훈
더위가 한풀 꺾여가던 지난 8월 중순, 송파구 문정동으로 신중현을 만나러 갔다. [weiv]를 드나드는 층과 비슷한 연령대의 젊은(어린?) 층들, 그러니까 현재 음악 수용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층들에게 신중현은 '이름 정도는 들어 본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음악을 실제로 접한 이들이 얼마나 될 지는 모르겠다. . 혹 들어봤다면 1990년대에 신효범, 봄여름가을겨울, 윤도현, 조관우 등이 그의 노래를 다시 부른 것일 가능성이 높다. 개중에는 1997년 경 그에 대한 헌정음반과 헌정공연을 경험하면서 그가 '한국 록의 대부'로 옹립되었던 분위기를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어느덧 60대 중반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점이 신중현을 인터뷰하러 간 이유 중 하나였다. 직접적인 동기는 올해에도 그와 관련된 음반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올 봄에 지구레코드사에서 나온 '신중현 지구레코드 전집' 형태의 박스세트 [Not For Rock: 大韓民國樂音樂人]은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나온 것이니 제외하더라도, 올 여름부터 나오기 시작한 '신중현 작품집'(옛 LP들을 CD로 복각한 음반들)은 그가 직접 관여하고 작업한 것이다. 그는 신중현 M&C(Music & Creation)라는 회사를 설립해 이정화(덩키스)의 데뷔(이자 유일작) 앨범(1969)과 김정미의 [바람](1973)을 필두로 복각 작품들을 차례로 발매하고 있다.
인터뷰를 하게 된 다른 동기는 한국 록의 잊혀진 황금기였던 1960-70년대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는커녕 기초 자료조차 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관련자들과의 인터뷰 없이는 1960-70년대 그룹 사운드의 음악과 활동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시절 최고의 작곡가이자 기타 연주자, 때로는 '가수'였던 신중현을 인터뷰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드스탁]에 찾아갔을 때, 그는 여러 후배 뮤지션들과 함께 음반 녹음을 위한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복각 CD 작업 외에, 자신의 히트곡들을 다시 녹음하여 음반으로 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이 음반은 최근 [Body & Feel]이란 이름의 두 장짜리 CD로 발매되었다). 원래 공연장이었던 [우드스탁]은 스튜디오로 바뀌어 있었는데, 플로어에는 각종 장비와 악기들이 놓여 있었다.
신중현 레코드(1): 복각, 재발매, 재녹음
Q: 최근 이정화와 김정미의 음반이 복각되어 재발매된 것 축하드립니다. 재발매한 특별한 동기 같은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 제가 초창기 때부터 음반이 굉장히 많아요. 근데 요새 세대들이 잘 모르죠. 근데 그 음반들이 전부 금지되고 사장되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좀 아까워요. 아까운 건 좀 개인적인 거니까(중요한 건 아니지만), 옛날 사운드를 요새 사람도 좀 알았으면 좋겠다. 왜냐면 그때 당시 1960년대, 1970년대 음반들은 사실 모노 사운드지만 인간적이었습니다. 그런 음악(성)들이 남아서 존재하고 있다면 한국의 문화 역사에 좀 도움도 되고, 앞으로 세대들한테도 뭔가 문화 유산 이런 거로 좀(기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음악성을 조금이나마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Q: 이때까지는 재발매할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나요? 판권 문제 같은 게 좀 걸려 있다는 말도 들었는데요
- 일단 (시장이) 죽어 있었고, (그나마 그 음반들이) 롱 플레이(LP) 시절(의 음반)이어서 다 없어졌지요. 근데 너무 오래된 상태니까 옆에서 자꾸 (재발매)하라고 그래서... 사실은 다 잊어버리려고 그랬었는데....판권 문제는 그때 당시 녹음을 해서 판이 나왔지만 나한테 뭐 돈 준 적도 별로 없고, 로열티를 준 적도 없어요. 내가 작사 작곡을 했고, 연주했고, 노래를 했는데 판권을 가진 분들이 그동안 나한테 뭐 해준 게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Q: 판권 문제와 관련해서는 킹 레코드의 '킹박'(박성배 사장)에 관한 이야기를 여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분과 계속 관계를 맺고 음반을 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음반을 취입하고 받으신 게 거의 없다는 말씀인가요? 양희은씨의 자서전에 보면 그 분은 음악인에게 돈을 준 적이 거의 없고 자기도 한두 번을 제외하고는 받은 게 없다고 하던데...
- 저도 돈 받으러 청계천(필자주: 킹 레코드사는 당시 청계천에 있었다)에 몇 번 갔었지만 못 받았어요. 하지만 그때 시절이 뭐 그렇게 인간적으로 돈 안주면 안 한다, 뭐 이런 시기는 아니었어요. 사람을 믿고 살았던 때니까.
Q: 킹박 선생님은 돈은 별로 주지 않았지만 음반에 대한 수완 같은 건 좋으셨다고 하던데요.
- 그건 사실이죠.
Q: 그렇다면 현재 마스터테이프는 그분이 가지고 계신 건가요?
- 그 사람이 다 가지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있는 게 별로 없을 거예요. 그 당시엔 (마스터)테이프 값이 비싸다 보니까 그 위에다 자꾸 녹음했어요. 한번 레코드 마스터를 딱 땄다 하면 테이프는 지워버려요. 거기다 다른 녹음을 재탕을 하는 거지. 그러니까 마스터테이프는 없고, 뭐 판에 찍어내는 원본, 그러니까 마스터 디스크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테이프는 없을 거예요. 그때는 원판을 눌러서 찍는 식이었는데, (LP가 나오지 않은 지도 오래 되었으니) 그거 지금은 다 없어졌을 거예요. 그게 뭐 남아 있겠어요?(필자 주: 당시에는 마스터테이프를 재활용하는 게 관행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자본이 많은 방송국의 사정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방송 프로그램을 녹화한 원본 테이프를 지우고 다시 다른 프로그램을 녹화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Q: 유니버어살 레코드와 킹 레코드는 어떤 관계였나요? 마장동 스튜디오가 유니버어살 스튜디오로 알고 있는데 이 스튜디오와 음반사와의 관계도 복잡해 보입니다
- 유니버어살은 그때 당시 생긴 음반사구요. 킹 레코드는 킹박 개인이 하던, 허가도 안난 곳이예요(필자 주: 1968년 음반법이 시행되어, 음반사로 정식 등록하려면 시설 요건을 갖춰야 했는데 정식 등록을 한 곳은 지구, 신세기 등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이전부터 음반을 기획 제작하던 영세 레코드사들은 등록된 음반사의 이름을 빌려 발매하는 방식으로 생존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스튜디오는 스튜디오죠, 녹음실 말입니다. 초창기는 킹박의 회사가 거기 같이 있었어요. 스튜디오와 같은 건물 안에 있었죠. 그런데 자꾸 이름이 바뀌는 건 나도 이상해요.
Q: 그런데 이정화(덩키스)의 음반은 '신향 레코드'나 '대지 레코드'같은 레이블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건 킹 레코드와 어떤 관계인가요?
- 아마도 그때는 레코드사들이 세금을 물지 않으려고 이름들(주: 레이블을 말한다)이 자꾸 바뀌고 없어지기도 한 것 같아요... 신향이나 대지는 당시에(있다가) 다 없어져버렸던 것들이에요.
Q: 노재명님이 쓰신 책을 보니 '킹 레코드사는 유니버설 녹음실을 개방해놓고 신중현이 언제든지 녹음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아무 거나 좋으니 녹음해라. 왜냐하면 나오면은 그 앨범은 히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사실인가요?
- 나오면 히트했다는 말은 좀 과장이지만, 내가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지 즉시 개방을 해주는 건 있었어요. 딴 스케줄이 있어도 우선권을 줬고.
'신중현 작품집' 복각 CD 시리즈 1편으로 나온 이정화(덩키스)의 음반. LP 커버의 축소판으로 만들어져 LP의 느낌을 잘 살렸다.
Q: 이번에 재발매 작업하는데, 상태가 양호한 LP가 없어서 고충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앞으로 재발매를 위해 필요한 음반들은 어떤 것들인지요? 일본에서는 LP 복각해서 재발매할 때, 여러 장의 LP를 갖다 놓고 상태 좋은 부분만 골라서 편집한다고 들었거든요.
- 그거 지금 여기저기 얘길 하고 있는데, 좋은 상태의 LP를 구하기가 힘듭니다. 가지고 있는 사람도 빌려준다고 말은 그러는데 빌려주지 않는 경우가 많구요. 일본처럼 복각하는 게 좋은데... 필요한 건 내가 초창기에 냈던 것들을 전부죠. 애드 훠, 펄 씨스터즈, 김추자... 나도 음반들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상태가 더 좋은 걸 구하려는 것이죠.
Q: 실례겠지만 재발매 CD의 판매는 어떠신지요?
- 음반 발매한 쪽에서 그런 소리는 하지 않네요. 뭐.. '잘 팔린다'고 그러면 돈 달라고 그럴 것 같으니까 그 소리를 안하는 건지...(웃음)
Q: 어떤 사람들이 이 음반들을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나요? 옛날 이 음반을 들었던 분들인가요?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음반을 잘 사지 않는 것 같아서 드려보는 질문입니다.
- 그렇죠, 뭐. 옛날 분들이 들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옛날 분이래 봐야 사실 음악하곤 거리가 멀어진 상태고... 그냥 이런 게 있다는 것만 알리는 거죠. 꼭 사라는 것도 아니고.
Q: 제가 전에 독일에서 나온 [Love, Peace and Poetry: Asian Psychedelic Music]이라는 편집음반을 보니 더 맨 시절에 녹음된 "아름다운 강산"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그리고 저작권료 문제 같은 것은 어떻게 된 것인지요?
- 네. "아름다운 강산"이 독일 해적판이 나와있다고, 자꾸 얘길 하는데 나는 본 적이 없네요. 근데 그거 저작권 침해인데, 그걸 낸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야 달라고 그러죠.
Q: 재발매된 김정미의 CD는 원판 LP에 비해 주행속도가 느린 것 같습니다. 직접 작업을 하신 사람으로서 견해는 어떠신가요?
- 그때는 롱 플레이(LP)이고 뭐고 제 속도가 하나도 없어요. LP는 플레이어(턴테이블)에 따라서 빠르고 느리기 때문에... 똑같은 33(33과 1/3 LP를 일컬음) 회전수도 각각 달라요. 그건 그렇게 문제는 되지 않아요. CD 경우에는 디지털이기 때문에 정확하죠. LP는 재판 틀리고 원판 틀리고 그래요. 뭐, 느리면 빨리 틀면 되죠.(좌중 폭소)
신중현 레코드(2): '히키 신'부터 '엽전들'까지
신중현의 첫 레코딩인 연주 음반 [히키-申 키타-멜로듸(경음악 편곡집)](1959). 민요, 동요 등을 재즈 풍으로 연주했다.
Q: 미8군 무대 시절에는 재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자료에 많이 나오는데 정작 1958년에 나온 음반은 '히키 申'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당시 어떤 이름을 사용하신 게 맞는 건지요?
- 네. 그땐 이름이 많았어요. 그때가 미8군 무대에서 연주하던 때라서... 1958년도거든요. 미8군에서 연주할 때는 오디션 볼 때마다 이름을 바꿨어요. 왜냐하면 미국 이름으로 써야 심사위원들이 빨리 알아보는 면이 있기 때문이죠. 한국 이름으로 신중현이라고 하면 복잡하니까 그 사람들이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미국인들이 많이 쓰는 이름을 사용했죠.
Q: 애드 훠의 음반을 발매한 엘케엘(LKL) 레코드사라는 곳은 어떤 데인가요? 방금 말한 그 음반이나 이동기 악단 등의 음반을 발매한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음반을 내자고 제안하거나 기획한 사람이 있었을 것 같은데 누구였는지요?
-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에 전부 트로트 풍의 음반들을 내던 때인데 몇몇 레코드사는 조금 다른 음반을 내려고 했죠. 그 중 하나인 엘케엘 레코드사 사장이 음악을 좋아했고, 내가 미8군에 있을 때 나를 찾아와서 음반 하나 만들자고 해서 만든 거죠.
Q: 그때는 취입한 곳은 어디였고 취입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셨나요?
- 그건 장충동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이에요. 남산 올라가는 중턱에 있는 곳입니다. 거기 응접실에 차려놓고, 이쪽 한 귀퉁이에 녹음기 갖다 놓고, "자, 합니다!" 쫙 누르고 딱 하면은 그냥 하는 거죠. 삥 둘러서서 마이크 하나 놓고 드럼 세트 차려서 거기다 대고 들입다 하는 거죠. 열두 곡 정도 (녹음)하면 아침부터 저녁이면 끝나요. 동시에 하니까. 더빙도 없고 마이크 하나 딱 놓고. 빨간색 군대용 녹음기가 있는데, 녹음기가 딱 요만해요. 릴 모노이고, 마이크 하나밖에 못 꼽는 것이었죠.
Q: 베이스 드럼같은 소리는 잘 들리질 않는 것 같습니다
- (드럼의) 세팅은 다 되어 있는데 그냥 (소리가) 날라서 마이크 하나로만 들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실제 연주하는 그 소리로 하는 거죠. 그러니 잘 안 들리고... 그리고 제일 큰 문제가 뭐냐면 한번도 안 틀려야 된다는 점이었죠. 그 많은 곡을....
Q: 연주를 틀린 사람은 혼났겠네요.(웃음)
- 아, 그때는 연주하다 틀리면 그건 음악인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열 몇 곡을 한번도 안 틀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야돼요. 그래야 실력자로 인정을 받았어요.
Q: 한 곡 녹음이 끝난 다음 스톱 버튼을 누르지도 않고 다음 곡을 연주했다는 말씀인가요?
- 그건 아니고 한 곡하고 쉬었다고 또 한 곡하고...이런 식이었죠.
Q: 그게 녹음 방식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언제쯤입니까? 또 모노에서 스테레오로 바뀐 건 또 언제쯤...
- 히키 신 이름으로 나온 음반을 모노로 녹음한 게 58년도이고... 애드 훠(The Add 4)이름으로 "빗속의 여인" 등을 녹음한 게 1964년인데, 그때만 해도 스테레오는 스테레오였죠. 마이크가 두 개가 되었고 더빙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애드 훠는 더빙하지 않고 그냥 동시에 했고, 그 후 1967년도 "봄비"를 레코딩할 때 쯤 해서는 더빙도 할 수 있었어요.
Q: 이정화 음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마지막 트랙 같은 경우 더빙을 한 것 같은 느낌을 주던데요.
- 네. 이정화... 그때가 1967년도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때 더빙이란 걸 잘 몰라 가지고 그냥 동시에 다 했어요. 마이크 두 개 그냥 놓고 했어요. 이정화 음반도 더빙 없고, 김정미 것도 더빙 없어요. 그냥 동시에 했던 거야. 김추자와 펄 시스터즈의 음반도 한번에 간 거구요.
Q: 그렇다면 기타 소리가 두 개가 나오는데 그건 다른 분이 동시에 연주하신 건가요?
- 아, 그것만 더빙을 하죠. 그러니까 노래가 있을 때는 다 같이 한번 연주해서 녹음하고 나중에 몇 개만 더빙을 하는 식이었죠. 그건 아마 김정미 때부터, 한 1971년인가 1972년인가 때부터 했어요.
Q: 그게 흔히 말하는 멀티트랙 레코딩이 시작되었다는 말씀이시죠?
- 네. 그때 4트랙이 나왔어요. 1970년도에 4트랙이 나왔고, 그러면서 급속도로.. 16트랙, 24트랙 발전하는 게 거의 6개월 단위로 발전해 온 거죠. 기계들이 새로 착착 들어오니까.
Q: 더 맨 시절인 것 같은데, 길게 녹음하신 롱 버전들, 예를 들어 윤용균 음반 뒷면에 있는 "거짓말이야", 지연 음반 뒷 면의 "안개 속에 여인"같은 것들을 모아서 재발매할 계획은 없나요?
- 난 사실 하고 싶은 게 딱 그런 건데. 지금도 재발매를 내가 직접 하는 것도 아니고, 동업자가 하나 있어서 그 양반이 하자고 그래서 하는 건데. 그 양반이 또 내 생각하곤 좀 다르니까. 사실 그런 걸 하고 싶어했던
Q: 더 맨 시절의 음반들을 보면 앞면은 가수들의 짧은 노래들이구요, 뒷면은 밴드의 긴 연주가 들어 있습니다. 특별한 의도나 기획이 있었던 것인지요?
- 그게 왜 그러냐면 나는 독집 외에는 안 내주거든요. 뭐 중간에 누가 끼어 들고, 이런 식의 옴니버스 음반같은 건 안 하고 독집만 내 줬는데, 한 가수의 독집을 내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잖아요. 그러니까 앞면만 가수의 노래를 취입을 해주는 거예요. 뒷면은 내가 애드립을 하는 것으로 채우는 거죠. 그러니까 독집을 내려니까 앞의 네다섯 곡은 해볼 수가 있는데 시간상, 즉 뒷면까지 그 가수의 노래로 채우려면 너무 시간이 걸리니까, 뒤에다 내가 한 거 하나 삽입해서 내다보니까 그런 것들이 많이 있어요.
Q: 그럼 장현과 더 맨이란 건, '장현과 더 맨'이 밴드 이름인가요, 아니면 장현 앞면, 뒷면 더 맨인가요?
- 장현이 자기 이름을 더 맨의 앞에 넣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더 맨은 다 반주를 맡아서 다 해 줬어요, 나는 음반 제목이 그렇게 나온지 몰랐고 요즘에 와서 알았어요. 원래는 그냥 더 맨이었죠. 물론 장현이 노래 부른 게 앞면에 있으니까 자기가 (앞에다) 쓴 거라면 나도 할말이 없는데.. 묘하네요. 장현과 더 맨이라...허허.
Q: 엽전들 경우에는 기타 소리가 2개 이상 들립니다. 그건 오버더빙하신 건가요?
- 네. 더빙을 했죠. 근데 그걸 굉장히 후회합니다. 더빙을 하지 않았어야 작품이 되는 건데, 그때는 주위에서 자꾸 더빙할 수 있다고, 스테레오로 해야 한다고... 그래서 하기는 했는데 내가 그때 착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땐 잘 몰랐으니까.
Q: 원래 엽전들 1집의 초반 경우는 조금만 나오고 발매가 안 된 것으로 압니다만...
- 그렇죠 초반은 그런 게(더빙이) 없어요. 그냥 한번에 녹음했는데 그 다음부터 레코드사에서 자꾸 상품화를 해 달라고 그러니까... 내가 맨 처음에 한 것들은 상품화가 아니거든요. 음악적인 면으로 취입을 했는데. 사람들이 듣고는... (초반은) "미인"이 첫 번째 트랙도 아니었고. 5분 이상으로 길었어요. 그걸 듣더니 짧게 해서 넣어 달라고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건데... 그건 뭐 상업성으로 치우친 거죠.
신중현 라이브(1): 미 8군 무대와 1960년대
Q: 엽전들 이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여쭤 보고 지금은 애드 훠 시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애드 훠의 활동은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들었는데요.
- 예. 그게 왜냐하면 그때 처음 그런 풍을 했으니까 그런 것이었죠. 미8군에 있다가 일반(무대)에 한번 진출을 하자, 이래 가지고 큰맘을 먹고 연습을 해서, 녹음을 해 가지고 나왔는데, 기대에 어긋났죠. 그때는 일반적으로 (전부) 트로트 풍이었으니까...
Q: '블루즈 테트'라는 밴드의 멤버도 비슷하셨나요?
- 아뇨. 그건 달라요. 그 후에 다시 그 애드 훠 깨져 가지고 다시 8군에 들어가서 했던 밴드죠. 8군에서 나올 때는 큰소리치고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려니까...(좌중 웃음)
Q: 애드 훠가 주로 섰던 무대는 동두천 쪽이라고 들었습니다
- 그게 아니고... 동두천은 그때 애드 훠가 잘 안 되는 바람에 동두천에 갔는데 곧바로 미 8군 들어가기 힘들고, 8군에 다시 들어가려니까 창피하고 그러더라고... (웃음) 그래서 동두천에 가서 '야메 쇼'라고, 비밀로 하는 거죠. 허가도 없이, 직접 미 8군 애들하고 얘길 해 가지고, 싸게... 왜냐면 그렇지 않으면 공연을 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동두천에 있었죠.
Q: 당시 미 8군 쇼 기획사들이 많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화양, 대영, 유니버설 같은... 어디에 소속되어서 활동하신 것이죠?
- 대영은 나중에 생겼고, 화양과 유니버설 두 군데가 제일 컸죠. 나는 화양에 있었고, 화양은 내가 애드 훠를 만든 1964년 이전이 전성기였어요. 내가 애드 훠를 만들어서 나온 이유는 미 8군(무대)가 사양길에 들어섰기 때문인 면도 있었어요. 그 후에는 그룹 사운드 형태로 많이 생겼죠. 근데 그때 미 8군(무대)은 그 전에 비해서는 빈약한 거죠. 그 전에는 한 단체가 20-30명씩 빅 쇼로 운영했으니까.
미8군 쇼 무대 시절 신중현은 손꼽히는 기타리스트였다. AFKN에 출연하기도 했고, 미국 레코드사로부터 음반취입 제의를 받기도 했다(기획사가 레코드사에서 보낸 편지를 전달해주지 않아 음반 취입은 무산되었다). 사진은 영자 신문(국내 발행으로 보인다)에 기사화된 것.
Q: 선생님은 미 8군 무대에서는 4-5인조의 기타 밴드가 아니라 빅 밴드에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애드 훠 같은 4-5인조로 미8군 무대에 서신 적은 없으셨던 것인지요? 물론 앞에서 야메쇼를 하셨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걸 제외한다면...
- 우리는 플로어 쇼라고 그래서 쇼단 멤버가 한 30명 돼요. 밴드가 한 열 몇 명이 되기 때문에 풀 멤버죠, 브라스도 있고 다 있었죠. 왜냐하면 쇼 반주도 해대고, 댄싱 뮤직도 해대니까 대형이죠. 그때 우리 할 때가 쇼단 규모가 가장 컸고, 무용수부터 코미디하는 사람까지 전부 데리고 다녔어요. 그리고 애드 훠를 하면서도 사실은 미 8군 오디션을 나중에 다시 봤어요. 근데 그때는 패키지 쇼로 오디션을 보았죠, 한 5-6명 정도로 축소를 해서. 그래야 가격이 싸니까.
Q: 그럼, 블루즈 테트로 활동하시고 펄 시스터즈로 대박 터지는, 그 사이 기간 동안에는 동두천에 잠시 계시다가 다시 미 8군 무대로 들어가셨다는 말씀이군요.
- 그렇죠. 동두천은 당분간 있었고...한 3개월 있었고. 곧바로 미 8군 오디션을 다시 봤죠.
Q: 미 8군 무대는 백인 장교 클럽, 하사관 클럽, 사병 클럽이 따로 있었고 사병 클럽도 흑인 중심인 데가 있었고 백인 중심인 데도 있었다고 하는데 주로 어떤 클럽에서 연주하셨는지요?
- 그때는 다 가죠. 왜냐면 미8군은 2가지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하우스 밴드라 그래가지고 한 장소에 전속으로 밴드하는 그런 형태가 있고, 하나는 아까 말한 플로어 쇼라고 그래서 그건 전국에 돌아다니는 쇼 단체죠. 그러니까 그건 클럽마다 다 다른데, 그건 클럽 성격에 맞춰서 (연예기획사에서) 레퍼토리를 바꿔 줘요.
Q: 앞의 질문은 '신중현의 음악'이 록 음악인데 소울 같은 흑인 음악의 영향도 강해서 물어본 것입니다만...
- 아, 그 소울이란 말은... 백인들은 로큰롤을 하지만 흑인들은 리듬앤블루스를 한다고 그러죠 소울이란 음악은 없고. 소울이란 말은 '음악 자체가 멋있다', '음악 자체가 영혼이 있다'할 때 나오는 말이에요. 그래서 '야 이건 소울 뮤직이다', '너는 좀 소울이 있다' '너는 좀 필(feel)이 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죠. 그러니 백인 음악도 소울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영적으로 무언가 느끼면 미국인들은 '소울...' 이런 식으로 반응을 해요. 그런 음악이 존재하던 시대라서... 우리는 장교 클럽이면 장교들에 맞는 스탠더드 음악을 해 주고, 사병이면 로큰롤을 많이 해주고, 그리고 서전트 클럽, ACO라 그러는데 거기 가면 상사들이기 때문에 촌놈들이 많아요. 그래서 컨트리, 카우보이 음악같은 것도 연주했죠.
Q: 이것저것 다 하셨단 말씀이시네요. 그렇게 이것저것 하면서 신중현 특유의 연주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의아합니다.
- 그건 이것저것 하면서도 각각의 맛을 내주면서 사실은 내 음악을 하는 거죠. 미국인들은 그렇게 하는 걸 좋아하지, 그대로 이미테이션(모방)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개성을 가지고 있어야 오디션도 점수가 많이 나오죠. 미국인들은 음악적 재능이 있는가 없는가를 많이 따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우리나라는 모방, 그러니까 그대로 흉내내는 걸 좋아하는데, 미국 사람들은 그런 걸 싫어하더군요.
▲ 1974년의 신중현
신중현 라이브(2): 1970년대와 '일반 무대'
Q: 그 뒤 펄 씨스터즈나 김추자 같은, 선생님이 말씀하신 '내 우먼들'을 키우게 된 이유가 밴드로 하시다가 잘 안되어서 그렇게 하신 건지요? 그러니까 애드 훠처럼 밴드로 음악을 하는 게 당시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별 호응이 별로 없으니까, 작곡과 연주는 직접 하고 가수는 외부에서 키운 것인가요?
- 아니, 그건 아니고 나는 계속 그룹을 갖고 있었어요. 펄 (시스터즈)은 유니버설에 있었고 난 화양에 있었는데, 신인으로 등장할 때 나한테 사사를 받았어요. 노래 공부를 하겠다고 날 찾아와서, 내가 레퍼토리와 창법 등 여러 가지 기초적인 공부들을 많이 도와주었죠. 그러다가 1968년도에 내가 베트남에 군예대로 가서 8군 무대에 서려고 계약을 해서 헤어지게 되니까 기념으로 음반을 만들게 된 것이죠. 그때 기념으로 내어 준 게 "님아"인데 그게 터지는(히트하는) 바람에 킹박이 잡아서 베트남에는 안 갔죠. '가면 안 된다' 자꾸 그러고 또 한국에서 히트하니까 굳이 내가 뭐 월남까지 갈 이유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해약을 해버리고 여기 남아 있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계속 작곡 생활을 한 거죠. 그룹은 그룹대로 그룹 음악을 하면서. 가수들에게는 계속 곡을 주는 일을 병행한 것이죠.
Q: 그렇지만 일반인은 신중현을 그룹의 리더라기보다는 작곡가로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룹을 직접 한 것은 의외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씀드리기 죄송한 말씀인데 직접 노래까지 부르실 필요가 있는가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나는 미 8군 무대부터 그룹을 하면서 노래도 계속 했었어요.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부터 시작해서 로큰롤을 노래했죠, 미 8군의 그룹 활동을 그렇게 했었고. 일반 무대에서는 노래를 안 하고 가수만 내보냈지. 그리고 엽전들 때 이제 내가 처음 노래를 한 거죠. 물론 애드 훠 때 중간에 몇 곡을 했지만 본격적으로 노래를 하겠다는 건 엽전들 스타일의 곡이었죠. 엽전들 때의 한국적인 록은 가수(를 위한) 곡이 아니거든요. 이제 그룹 곡이기 때문에. 내가 천상 해야 될 형편이었고, 그래서 한 거죠.
Q: 애드 훠 때는 정규 보컬이 서정길 씨였던 것 같은데, 고정적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엽전들 이전까지 덩키스나 퀘션스의 경우에는 보컬이 정규 멤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객원 보컬 개념이었는지요?
- 네. 애드 훠 때는 많이 바뀌었어요. 그때는 마음이 예민했었잖아요. 예민하다 보니까 조금 이상하다 그러면 바꿔치우고 이런 일이 흔했죠.(좌중 웃음). 덩키스나 퀘션스 때는 그런 것도 있었지만...가수들이 노래가 히트하고 스타가 되면 나오지도 않아요. 연습도 공연도 펑크내고, 뭐 하고 있나 보면 다른 데 가서 돈 받고 노래하고 있고... 가수 위주로 곡을 만들고, 반주도 가수 위주로 만들어서 연습하고 녹음했는데 가수가 없어져 버리면 남은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가수들이 그런 걸 잘 몰라요. 그래서 결국 최초로 3인조로 엽전들을 만든 것이죠. '다 필요 없어, 베이스하고 드럼만 뒤에 있으면 된다', 이러면서 한 거죠.
Q: '명동에 사무실이 있었을 때 직원이 20명이 있었고 돈을 쓸어 담았다'는 말도 나오던데요.
- 돈을 뭐 쓸어 담아, 술로 다 먹어치웠는데...(좌중 웃음)
Q: 쓸어 담은 다음에 술값으로 다 갔군요.
- 그러니까 장안에서 내 술 안 얻어 먹으면 PD도, 기자도, 음악인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엄청 먹었어요. 하루에 다섯 가지 종류를 쉴 새없이 먹었으니까.
Q: 선생님 밴드가 애드 훠는 4인조, 덩키스와 퀘션스는 5인조, 더 맨은 6인조, 엽전들은 3인조 식으로 발전해 왔는데, 이런 변화에 어떤 의도가 들어 있는 건가요?
- 대개 음악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하다 보면은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게 되고. 멤버도... 멤버 때문에 또 음악이 발전 안 할 수가 있어요. 연습들도 안 하고 그러면, 그땐 가차없이 해산해버리고 다시 만들고 그랬죠.
Q: 그 중에서 본인 생각에 가장 싸이키델릭했던 밴드로는 어떤 그룹을 꼽으시나요?
- 더 맨 시절이거든요. 그때 그러한 컬러로 만들었던 멤버인데. 그게 인제 1972년도, 1973년도... 더 맨의 멤버들은 좀 발전한 멤버들이죠('발전한'이라는 표현은 '연주력이 뛰어나고 연습도 잘 하는'이라는 뜻으로 들린다). 덩키스 때도 "In-A-Kadda_Da-Vida" 같은 것을 시민회관에서 자주 연주하곤 했죠. 맨날 하고 그랬죠. (필자 주: "In-A-Kadda_Da-Vida"는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곡 "In-A-Gadda_Da-Vida"를 말한다. 당시 그룹 사운드들이 반드시 커버했던 싸이키델릭 록 넘버이다.)
사진은 1970년 공연 모습. 시민회관 리싸이틀에서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Q: 그때 제일 기억나는 공연 같은 게 어떤 것이었나요?
- 지금 세종문화회관 자리가 그때 시민회관이었거든요, 거기밖에 설 자리가 없었어요. 제일 큰 무대가. 거기서 주로 많이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이트 클럽 음악도 많이 하고.. 로얄 호텔이라든가, 타워 호텔...(필자 주: 당시 손꼽히던 고고 클럽을 말하는 것이다.). 닐바나같은 곳은 나는 안 했지만 당시 그쪽에도 밴드가 많이 나왔었죠.
Q: 1969년 10월 19일 일간스포츠를 보니까요. '신중현 리싸이틀 / 해괴한 쇼 / 환각 조명 속에 가수들의 광란이 / 곡마다 간주에 무용 / 객석을 계속 긴장시켜 / 의상은 판탈롱 일색' 이런 기사가 나오는데요. 10월 17일부터 20일까지 시민회관에서 하셨다고. 관중들은 많이 왔나요? 그 공연을 담은 자료 같은 건 남아 있는 게 없나요? 영상자료 같은 거.
- 그때 시민회관에서 많이 했어요. 자료는 뭐 [In-A-Kadda_Da-Vida] 같은 건 판도 나와있죠.(필자 주: 이 답변은 시점이 혼동되어 있다. 질문은 1969년 덩키스 시절 시민회관 '신중현 리사이틀'을 말하고 있는데, 신중현은 퀘션스 시절인 1970년 시민회관 공연 실황을 담은 [In-A-Kadda-Da-Vida]를 말하고 있다.)
환각 조명이란 스트로브 조명이라는 팍팍팍팍 튀는 조명이고 우리가 제일 처음 시도한 거예요.
Q: 1960년대 말 그리고 1970년대 초반에 쭉 밴드들 계속 하실 때 그때 선생님 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궁금하거든요.
- 난 팬이 없었어요(좌중 웃음). 내 음악을 좋아하는 팬이 몇 사람 있었는데, 나는 뭐 내가 좋아서 음악을 한 것이지...
Q: 이런 말은 좀 여쭤보기 곤란하지만 1970년대까지 주 수입원은 무대 수입이었습니까? 또 연주인들의 수입은 일반인에 비하면 나았던 편인가요?
- 그렇죠. 1970년대는 무대수입이었고, 일반인에 비하면 나았던 것 같네요. 매일 연주하니까 그런 것이고, 조금 유명해지면, 주가가 올라가니까... 오비스 캐빈 같은 데서도 하고, 고고 클럽, 나이트 클럽 같은 데. 나이트 클럽은 좀 늦게 하고. 하여튼 초저녁에 종로부터 시작해서 명동으로 들렸다가 무교동까지 갔죠. 엽전들 때는 매일 세 군데를 돌면서 일했죠. 그런데 한 번은 매니저가 6개월치 출연료를 매니저가 중간에서 받아먹고 튄 적이 있어요. 우리는 6개월 동안 공짜로 일 하면서 그걸 다 물어주느라 고생했죠. 하여간 음악인들이 참 순진하니까 매니저들이 착취하는 게 있어요. 우리가 인기가 있으니까 계약은 되죠. 그러면 미리 6개월치 돈이 나오는데 그걸 받아먹고 도망 가서 자기는 회사 차리고 있어요. 내가 이름은 얘기하지 않지만 그 친구는 참 머리가 좋은 사람이예요. 겉으로는 유명하니까 돈 많이 버는 줄 알았는데 세 명이서 쫄쫄 굶었죠. 다 떼어 먹히고, 허허허.
Q: 선생님, 신문기사 이런 거 보면은 1970년 초반에 명동에 코스모스 살롱에 고고클럽을 개업하셨다고 그런 기사가 나있는 걸 봤습니다. 혹시 이름만 빌려주신 건지요?
- 그런 거 안 했는데. 오비스 캐빈에서 연주한 것을 그렇게 생각을 한 거죠. 내가 그런 거 차릴 돈 있었으면 이러고 있겠어요, 지금? 이름 빌려준 것도 없었어요.
Q: 당시 그룹 사운드는 현충일 빼고 매일 연주했다고 그러던데 만일 그렇다면 음반 취입은 언제 하셨던 건가요?
- 예, 맞아요. 음악하는 사람 노는 날이 현충일 밖에 없었어요. 음반 취입은 낮에 해야 했죠. 우린 밤에 일하고 낮에는 녹음실에 가있죠.
Q: 요즘은 음악하는 젊은 친구들이 설 무대가 그때보다도 적은 것 같습니다.
- 그렇죠. 지금은 없는 편이에요. 그때는 술자리가 그런 데 밖에 없었고...
인터뷰 도중 한 컷.
Q: 선생님 음악 관련해서 많이 얘기하는 게 지미 헨드릭스이지 않습니까. 그 얘기 좀 해주시죠. 선생님이 라이벌로 생각하셨던 건가요?
- 라이벌이 될 수 없죠. 지미 헨드릭스는 정말 천재죠, 음악의 천재. 나는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고, 뭐 상대도 안 되는 거고... 단, 그 사람은 그 사람 음악이고, 난 내 음악이지. 그 사람은 서양적으로, 미국적으로 록 음악을 펼친 사람이고, 난 한국적으로 펼친 사람이니까. 그러니 라이벌보다는 내가 인정을 하는 것이죠. 그 사람의 음악성이랄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기타 주법이랄까 이런 것들을. 최초로 싸이키델릭 기타를 친 사람이 지미 헨드릭스니까 기타리스트들한테 영향을 많이 줬죠. 나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어떠한 영향을 주었냐면... 우리 20세기가 낳은 전체적인 문화, 그러니까 우리가 현재 조명을 한다든가, 사진을 찍는다든가, 디지털을 한다든가, 뮤직 컴퓨터라든가, 이펙트라든가, 이게 다 지미 헨드릭스에서 나온 거예요. 그 사람이 없었으면 그러한 게 나올 수가 없어요. 근데 우린 그걸 잘 모르지. 왜냐면 지미 헨드릭스는 드럭, 그러니까 약물, 그러니까 LSD나 퍼플 헤이즈(Purple Haze)나 이런 약을 먹으면서 클레어된 정상세계를 벗어난 다른 세계에 들어갔던 거죠. 그 세계에서 그림을 그려서 그 세계에서 느꼈던 것을 다시 클레어로 옮겨서 펼친 사람이 지미 헨드릭스죠. 그런 면에서 우리가 내추럴적인 면을 지속한다면 클래식 음악, 베토벤같은 음악이 그대로 발전하는 클레어적인 음악이 하나 존재할 것이고, 이와는 다른 파격적인 음악이 지미 헨드릭스 때문에 탄생한 거예요, 싸이키델릭이라는 것은 록이란 음악을 발전시켰던 것이죠. 20세기 전 클래식 음악이란 어쿠스틱 음악, 그러니까 전기가 없는 시대의 음악이잖아요. 바이올린이고 뭐고 다 내추럴한 악기인데, 록 음악에서 전기로 과학적인 문명을 같이 받아들여서 발전시키면서 음악을 만들었던 것이죠. 이게 20세기의 그룹들의 음악이죠. 그것이 록(로큰롤)이란 시초를 만들어내면서 발전을 하다가, 1967년, 1968년 요 때에 지미 헨드릭스가 싸이키델릭 록으로 반전 데모를 하면서 동양을 캐기 시작했어요.
마리화나같은 것은 인디언에서 나온 건데, 인디언 영화 보면 인디언들이 삥 둘러앉아서 대마초를 한 대씩 피우잖아요? 그걸 마리화나라 그러는데, 그걸 한 대씩 돌리잖아요. 그게 해피 스모크인데 그게 뭐냐면 추장들이 평화를 유지하는 그런 해프닝을 갖는 동안에 나오는 것이죠. 그걸 받아들인 게 미국의 히피에요. 히피족이 베트남 전쟁에서 젊은이들이 많이 죽다 보니까 반전 데모를 시작하면서 평화를 부르짖었던 거죠. 'Love & Peace'를 부르짖으면서 손을 이렇게 들었던 거죠(손을 들어 V자를 만들어 보인다). 이건 어디서 나온 거냐면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에서 나온 건데, 2차 대전 때 처칠이 손가락으로 빅토리 사인을 사용했어요. 세계 평화, 빅토리를 해야 평화가 온다고 처칠이 손가락으로 빅토리 사인을 했는데 히피들이 그걸 이용해서 로고로 썼어요. 'Love & Peace다', 'Peace를 하기 위해선 우리도 싸워야 된다'는 식의 사상이 들어오면서 그것이 록 문화에 접목되고, 이런 록 문화를 만들어낸 사람이 지미 헨드릭스예요. 그 사람의 기타 주법이나 이런 것들이 전부 이런 클레어를 떠난 세계를, 즉, 인간의 정신세계는 그만한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죠. 물론 약물의 힘을 빌었지만, 인간 체내에는 그만한 정신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죠. 그 사람이 만들어낸 정신세계가 바로 싸이키델릭 음악입니다.
Q: 선생님은 그런 것을 어떻게 접하셨나요. 음악도 음악이지만, 히피 사상이나 히피들의 문화 같은 것들을 주로 어떻게, 어떤 분들을 통해서 접하셨는지. 그런 얘기들을 어떻게 접하셨는지.
- 그건 내가 우리 초창기 음악을 계속 발전시켜오면서 히피들하고 내가 생활하면서 알게 된 거죠. 내가 록 음악을 하다 보니까. 시민회관, 지금 사진이 없어서 좀 그렇지만, (거기서 공연할 때) 앞에는 전부 히피들이 앉아 있었어요. 무대에 걸터앉아 있고. 조명도 싸이키델릭 조명을 쓰고.... 히피들의 사상이 나쁜 게 아니에요, 정말. 'Love & Peace', 평화를 부르짖는 반전 데모를 하는 친구들이라 굉장히 온순하고 모두 젠틀하고 멋있었어요. 띠 두르고 머리 여기까지 내려오고 인디안 무늬로 된 옷을 입고. 청바지 찢는 것도 그 사람들이 그때 다 한 거에요. 지금 사람들 청바지 찢고 다니지만은, 그때 청바지 찢은 게 히피들이예요. 그런 문화를 벌써 옛날에 다 했던 거예요.
여기 지금 카메라도 찍고 있지만 카메라의 오목 렌즈의 그 휘는 것이나, 거리감을 주는 것이나, 뒤집어엎는 것이나, 이게 다 그때 싸이키델릭 문화에서 나온 겁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모든 문화를 발전시켰고, 그래서 헤어스타일부터 의상까지 다 바뀐 거예요. 그 문화가 없었으면 지금은 그대로 클레어적인 문화를 계속 고수할 거예요. 지금은 발전해서 20세기의 문화가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은, 그 문화가 어디서 나왔냐면 바로 음악 문화, 록 문화에서 나온 거죠. 사람들은 이런 걸 모른다고... 왜냐하면 그 과정을 모르기 때문에. 근데 알고 해야 돼요, 알고...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문화수준을 모른다고. 정치가부터 문화계에 있는 사람부터 마인드가 없고, 머리에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 뭘 하니까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정말 창피해요, 창피해. 외국 나가보면 창피해요. 외국 사람들은 벌써 옛날에 저 수준에 가있는데 우린 이제 이 밑바닥에서 어쩌고 저쩌고 헐뜯기나 하고, 알지도 못하는 게 아는 척하고. 이런 것들은 정말 없어져야 돼요.
Q: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 스타일과 비해서 신중현 스타일은 또 다른 것 같습니다. 기타 이펙트도 많이 쓰지 않고 안 쓴다는 점도
- 그럼, 물론이죠. 그니까 지미 헨드릭스는 지미 헨드릭스 스타일이고, 나는 내 스타일이 있죠. 이펙트 문제는... 그때는 이펙트가 거의 없었어요. 잘 나오지도 않고 나와도 쓸만한 게 없었어요. 이정화 음반 마지막 트랙에 나오는 것처럼 와와 페달 정도나 사용했죠.
Q: 같이 활동하셨던 음악인들 중에서, 음악적 동료나 후배로 아끼는 분이 어떤 분이 있을까요. 선생님 밴드 말구요.
- 뭐, 다 아끼죠. 우리 음악인들은 그때는 다 한 식구 같았어요.. 그룹 사운드 협회를 내가 또 만들었고, 같이 협조도 많이 했구. 우리 조기축구회도 있었으니까.
Q: 그룹 사운드 협회 분실에 대해 조금 더 여쭤 보겠습니다. 이 단체는 1972년도에 만들어졌고, 신중현님은 2대 회장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뒤에는 유명무실해진 듯합니다.
- 지금은 그냥 연예협회 소속이 되어 있죠. 지금 누가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협회라는 게 음악인들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협회라는 게 음악인을 돕겠다는 게 아니라 음악인으로부터 무언가 뜯어가는 면이 많아요.
Q: 국내 음악인 중에서는 어떤 분을..
- 국내요? 국내는 창작성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어요. 음악이라는 것은 창작성이 없으면 그건 음악이 아니에요. 그냥 흉내나 내서 잘 치고 잘 하고... 뭐 이거는 옛날에, 저 미국애들이 더 잘 해요.
신중현은 1972년 포크 가수 양희은, 서유석에게 곡을 주어 독집 음반을 만들었다. 그것은 양희은과 서유석의 디스코그래피에서 매우 독특한 음반이 되었다. 사진은 서유석의 음반을 녹음하던 중 스튜디오에서 찍은 것.
Q: 1972년 경에는 양희은, 서유석 등 포크 가수들하고도 작업하셨잖아요. 양희은 씨나 서유석 씨 이런 분들. 그때 선생님이 보신 포크송이나 통기타 문화 이런 것들에 대해 얘기해주시다면.
- 1970년도 전후로 나왔던 포크 가수들의 자세는 굉장히 겸손했어요. 음악을 할 수 있는 자세를 구비하고 있다고 할까. 그러니깐 생각부터 시작해서 음악에 대한 지식이랄까 이런 것이 아주 정도를 밟고 있던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정말 아껴야 될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하여튼 그 당시에 통기타를 들고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 음악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냥 뭐 남이 기타 치니까 자기도 치고, 남이 노래부르니까 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고, 자기 음악성을 들고 나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Q: 일반적으로 통기타 계열과 그룹 사운드 계열은 좀 다르게 보는 것 같습니다만...
- 그게 잘못이죠. 그건 참 잘못이에요. 그때 당시에 내가 뮤지컬 영화 [푸른 사과]라든지 같은 음반에서 그런 사람들을 다 출연시켰어요. 그리고 공연할 때도 다 같이 하고. 그러니까 그런 사실들을 당시 잘 인식을 못했는지,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서 그런 건지... 정말 분위기가 기가 막혔어요. 콘서트를 자주 하고, 남이섬 같은 데서도 콘서트하고, 많은 활동을 같이 했죠. 영화부터 시작해서.
Q: 대마초로 음악 활동을 못하시게 된 다음 그룹 사운드 출신들 일부에서는 트로트로 전향한 경우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 그때가 어떤 말이 나왔냐면. '뽕 록'이라고 그랬어요. 아니 '록 뽕'이라고 그러던데. 난 그 소리 듣고 그냥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우리가 죽어버리니까 뭐 남은 후배들은 살판 났죠. 난 그때 정말 죽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어요.
▲ 1988년 자신의 작업실 '우드스탁' 에서
앞으로의 근황과 계획
신중현은 '우드스탁'에서 음반 작업과 공연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Q: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몇 가지만 더 여쭤 보고 마치겠습니다. 혹시 재발매 음반을 LP로 발매하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아니 중고시장에서 LP가 하도 비싸서 저도 좀 싸게 사볼까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일본 사람들이 와서 싹쓸이를 해가서 비싸졌다고 그러기는 하는데...하지만 그럴(LP를 다시 낼) 생각은 없습니다.
[한겨레21] 기자(잠깐 질문): 지금 복각 작업하시는 거는 몇 장까지 계획이 되어 있는 건가요? 정해졌나요?
- 아, 그건 아직 정해진 건 없구요. 원판 좋은 걸 구하면 내지만, 그렇지 않으면 못 내죠. 지금 새 앨범을 녹음하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은 그게 우선이고...
Q: 방송 계획은 어떠신지요? 몇 년 전에 한 케이블 TV에서 신중현 스페셜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는데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 1999년에 힐튼 호텔에서 '너희가 록을 아느냐' 공연을 했잖아요. 그런데 기획사하고 케이블 TV에서 내 의견을 하나도 묻지 않고 찍어간 거예요. 의사라도 물어 봐야 되는 건데, 협의가 잘 되지 않았어요. 겉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이겠지만, 나도 음악인이고. 권리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항의를 했던 것이죠. 방송이 음악인 알기를 너무 우습게 알 때가 많습니다.
Q: 앞으로 공연 계획도 있으신가요? 지금 연세에도 무대 서기 괜찮으신지요?
- 네. 그렇죠. 공연은 9월말부터 여기 [우드스탁]에서 서 정기적으로 하고. 밖에 나가는 거는 지금은 장소를 알아보고 있는데 확정이 되면 바로 시작할 거예요. 아직까지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한은 무대에 올라갈 수가 있죠.,
Q: 여담이지만 아드님 중에서 장남인 (신)대철씨보다는 차남인 (신)윤철씨를 더 아낀다는 느낌을 받는데 어떠신지요?(웃음) 이번 작업도 윤철씨와 함께 하고 계시고...
-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앞으로 대철이와 같이 할 작업이 있습니다.
Q: 발표하시는 음반과 계획하시는 공연 모두 잘 되길 바라겠습니다. 나중에 또 귀찮게 하더라도 시간 내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네네. 얼마든지. 오늘은 좋은 이야기를 할 기회를 많이 가졌습니다.
Q: 고맙습니다.
첫댓글 음악은 아주 귀한걸 구해 오셨는데 글이 좀 너무 길다 ㅋㅋ 안 읽어보자니 뭔가 좀 찜찜하고...
신중현씨 대단함은 부인할수가없네요...그시절 이런 차원높은 곡을 만들수 있다니...지금들어도 독창성은 대단한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