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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깨달음을 체험할 수 있다//완전한 깨달음은 체험할 수 없다.
고정관념 1 - 완전한 깨달음을 체험할 수 있다
전세계의 문화권이나 종교권에 따라 제각기 초월적인 실재를 지칭하는 용어들이 있다.
중국의 도가계열에서 말하는 道, 유가계열에서 말하는 理, 불가계열에서 말하는 空, 힌두이즘에서 말하는 브라만, 유대에서 말하는 야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이슬람에서 말하는 알라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제각기 이름도 다르고 사실 문화권에 따라 그 품고 있는 뜻도 약간 씩의 차이는 있다. 道나 理나 空이 비인격적인 측면이 강한 반면 야훼나 하나님이나 알라 등은 인격적인 측면이 훨씬 강하고 브라만은 중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어떤 것은 삼라만상의 根源者이자 창조자라는 의미가 더 강하고 어떤 것은 변화하는 현상계의 배후에 있는 변화하지 않는 본체라는 의미가 더 강하기도 하다.
그러나 모두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그 무엇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그 무엇은 사실 어떠한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이미지, 개념 등의 한계에 대하여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어떠한 언어나 이미지나 개념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완전히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이다.
심지어는 초월적인 개념이나 이미지들조차도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있다. 하나님, 알라, 공, 브라만, 도 등은 모두 초월적인 그 무엇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지역에 따라 용어도 서로 약간씩 다르고 이미지나 개념도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지역에서 나온 개념이라 할지라도 시대에 따라 그 개념이 조금씩 변천하는 것이다. 도라는 개념을 살펴보면 시대에 따라 상당한 변천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알라, 브라만, 공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여튼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어떠한 개념이나 이미지도 유한한 것이고 부분적인 것이기 때문에 무한하고 전체적인 그것을 완전히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것이 어떠한 언어와 형상으로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것임을 그토록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언어와 개념의 한계성에 대해 가장 철저하게 다루었던 곳은 동북아 문화권이었다. 노자 도덕경의 첫 머리에 나오는 '道可道 非常道(가히 도라고 이를 수 있는 것은 이미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는 말은 이것을 잘 밝혀주고 있다.
여기서 노자가 말하는 영원한 도란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이미지나 개념들은 모두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형성된 것이다. 이 때문에 노자는 도라는 것조차도 그것을 개념으로 떠올리는 순간 이미 본질적인 도와 거리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실로 예리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전달을 위해서는 부득이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노자 자신도 하는 수 없이 '道'라는 용어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여기서는 그것을 하나의 그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고자 한다. 새로운 명칭을 붙인 것은 道니 理니 空이니 브라만이니 알라니 야훼니 하는 기존의 명칭들이 이미 지구촌의 시대에는 걸맞지 않는 용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모든 수행체계는 바로 하나의 그 무엇을 지향하는 것이고 깨달음은 바로 하나의 그 무엇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어떠한 언어와 개념으로도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기존의 통념에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보통 때의 우리의 의식은 단지 유한하고 부분적인 현상세계만을 추구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인식의 통로도 그 세계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통하여 초월적인 인식 통로가 열리면 초월적인 세계를 인식할 수가 있다. 초월적인 인식작용도 여러 차원이 있는데 가장 궁극적인 단계에 이르면 마침내 어떠한 언어와 형상도 넘어서 있는 궁극적인 세계, 즉 하나의 그 무엇을 완전히 체험할 수 있다."
결국 문제의 관건은 초월적인 인식 작용에 있는 것이다. 실제로 수행을 해보면 여러 가지 초월적인 현상들을 체험할 수 있다. 기의 오묘한 작용을 느끼거나, 투명하고도 황홀한 빛을 보거나, 의식이 확장되는 것을 체험하거나, 무념무상 속에서 지극히 맑고 투명한 의식상태를 체험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보통의 관점에서 볼 때는 굉장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사실 그리 대단한 것들은 아니다. 답답하고 좁은 우물 속에 갇혀있다가 연못에 간 개구리의 눈에는 그 연못이 엄청나게 넓어보인다. 그리고 연못에서 놀다가 큰 호수에 간 물고기의 눈에는 그 호수가 세상에서 가장 넓은 호수로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다에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초월적인 인식 작용이 최고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마침내 하나의 그 무엇에 대한 체험이 일어난다. 하나의 그 무엇에 대한 체험은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는가?
각 종교와 문화에 따라 여러 가지 양상이 있지만 대체로 자신이 온 우주와 하나가 되거나, 평소 나라고 여겼던 그것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거나, 자신이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임을 확실히 알게 되거나, 다양한 현상 너머의 본체의 세계를 그대로 꿰뚫어보거나,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객체가 하나가 되어버리거나, 나와 온 우주가 동시에 사라져버리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들은 사실 모두 하나의 그 무엇에 대한 체험을 여러 각도에서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체험이 일어나면 대개 정서적인 고양이나 영적인 에너지의 각성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깨달음을 얻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기도 한다.
사실 하나의 그 무엇에 대한 체험은 깨달음을 체험하는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단지 정서적 고양이나 영적 에너지의 각성에 의해 변화된 모습을 보고 그가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간혹 주와 객이 전도되어 정서적 고양이나 영적 에너지의 각성이 깨달음으로 오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의 본질이 될 수 없다. 깨달음의 본질은 바로 하나의 그 무엇에 대한 체험인 것이다.
옛날에는 깨달은 자들이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기록을 별로 남기지 않거나 남기더라도 애매하고 상징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 실상에 대해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의 각자들은 그런 대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어 깨달음이 무엇인지 비교적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불완전한 언어와 문자로써 깨달음의 실상을 온전히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지만 그래도 그를 통해 단편적이나마 깨달음의 실상을 엿볼 수는 있다.
여기서는 한 때 항간에 크게 유행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라즈니쉬의 깨달음을 한 번 살펴보자. 다음 글은 그의 전기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에서 부분적으로 발췌한 것이다.
나는 잠들어 있었다. 그것은 아주 이상한 잠이었다. 육체는 잠들어 있었는데 나는 깨어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하나가 두 개의 차원으로, 두 쪽으로 갈라진 것 같았다. 마치 양극이 완전히 한 점에 모인 것 같았다. 마치 양극이 동시에 내 안에 있는 것 같았고, 동시에 내가 그 둘 다인 것 같았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만나고, 잠과 깨어 있음이 만나고, 죽음과 삶이 만나고 있었다. 창조자와 창조물이 만난다고 할 수도 있는 그런 순간이었다. ... 중략 ...
그날 밤 완전히 다른 실재가 문을 열었다. 새로운 차원이 열렸다. 그것이 홀연히 거기에 있었다. 완전히 다른 실재가, 그대가 그것을 뭐라고 하든, 분리된 실재, 진정한 실재, 혹은 다른 아무 것이라도.....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하든, 진리라 하든, 다르마라 하든, 도라 하든, 혹은 무어라 부르든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이름 없는 것이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었다. ... 중략 ...
처음으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나는 한 개인이 아니었고, 처음으로 나라는 물방울이 바다 속으로 떨어져 바다가 되었다. 이제 온 바다가 내 것이었고, 내가 바다였다. 거기 아무런 나뉨이 없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굉장한 힘이 나에게 솟아났다. 나는 없고, 오직 그 힘만이 있었다....중략...
거기엔 시간이라는 게 끼여들 틈이 없었다. 시간의 흐름이 일어나지를 않았다. 그것은 순수한 상태였다. 더렵혀지지 않고, 손댈 수 없고, 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무언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나가는 것이 내 속안에 생겨났다.
하나의 연속체라기보다는 밑바닥에 흐르는 샘물처럼 아직도 계속 흐르는 그 무엇이. 영원히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그것은 다시 또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매순간마다 일어나는 기적이라고나 할까.
이것은 라즈니쉬가 21살 때 겪은 궁극적인 깨달음의 체험이다. 이 체험 속에는 나뉘어진 양극이 완전히 하나로 만나고 시간이 사라지고 유한한 개체성이 무한한 전체성으로 녹아드는 현상이 있다.
이것은 일상적인 인식 작용과도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고 단순한 기감이나 황홀감 내지는 의식의 고양보다 훨씬 수준이 높은 것이다. 그는 그 체험을 '마지막 폭발'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때 이후로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마지막 폭발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라즈니쉬가 하나의 그 무엇을 완전히 알게 되었다고 확신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이 정도 상태가 되면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자신이 마침내 하나의 그 무엇을 완전히 알게 되었다고 여긴다.
요기들이 요가 수행을 통하여 삼매를 체험한 뒤에 마침내 신을 알았다고 하는 것이나, 선사들이 화두를 깊이 참구한 끝에 마침내 마음의 본체를 바로 알았다고 하는 것이나, 비파사나를 오래 한 수도승이 마침내 닙빠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이나, 기독교의 수사들이 오랜 묵상 수행 끝에 어떠한 이성이나 감성 작용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그대로 체험하였다고 하는 것이나, 수피들이 수피 수행을 통하여 자신이 알라라고 외치는 것이나, 단학 수련을 한 사람이 천지 기운 내 기운이라고 여기는 것 등은 모두 자신들이 하나의 그 무엇을 온전히 체험하였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물론 각 지역의 세계관적 특성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동양권의 수행법에는 큰 문제가 없는데 서양권의 수행법에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대교나 이슬람교같은 경우에는 인간은 신의 계시를 받을 수는 있으나 궁극적으로 신을 알 수는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 믿고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이외의 보통 사람이 수행을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 유일신교 계통에서는 야훼는 신앙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체험의 대상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들은 수행에 대한 깊은 체험이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하나의 도그마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제대로된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도그마를 극복하고 있다.
까발라의 전통에서도 수행을 완성한 사람은 에고가 완전히 사라지고 야훼와 항상 더불어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슬람의 수피의 전통에서도 수행을 완성한 사람은 자아가 완전히 사라지고 절대 유일신인 알라만이 남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수사들도 항상 교회의 간섭 때문에 표현의 문제에 많은 신경을 쏟곤 하였지만 하나님과 하나가 됨을 체험하였던 것이고 이것을 수행의 최고의 경지라고 여겼다.
하여튼 동서를 막론하고 제대로 된 수행체계에서는 인간이 수행을 통하여 언젠가는 하나의 그 무엇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대전제로 하고 있다. 즉,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그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정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존의 수행체계에서 지니고 있는 깨달음에 대한 기본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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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깨달음은 체험할 수 없다.
이전의 통념에서는 인간이 명상을 통하여 하나의 그 무엇으로 나아갈 수 있고 결국에는 그것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새로운 견해에서도 인간이 명상을 통하여 하나의 그 무엇으로 나아간다는 기본전제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전의 통념에서는 명상이 무르익으면 의식의 차원의 대전환을 통하여 하나의 그 무엇을 완전히 알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새로운 견해에서는 인간은 어떠한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의식상태가 된다 하더라도 하나의 그 무엇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너무나 간단하여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인다. 그렇지만 사실은 무척 미묘하고도 복잡한 것이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각자들은 모두 자신들이 초월적인 진리를 완전히 깨쳤음을 말하고 있다.
인도의 요가난다나 고피 크리쉬나는 요가 명상을 통하여 궁극적이고도 초월적인 우주의식을 체험하였다. 미라래빠와 같은 티벳 탄트라의 성자도 극단적인 고행과 아울러 불교 탄트라의 비법을 명상하여 마침내 궁극적인 진리를 터득하였다. 그리고 단학과 도교를 명상하였던 사람들도 마지막 단계에서는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현묘한 깨달음의 경지를 체험하였다. 참선을 명상하였던 선승들 또한 어떠한 언어와 형상도 넘어선 깨달음을 체험하였으며, 비파사나를 명상하였던 남방불교의 명상자들 또한 열반의 경지를 체험하였다.
자력적인 명상의 전통 보다는 타력적인 신앙의 전통이 더욱 강한 이슬람이나 유대교나 기독교에서도 소수의 명상자들은 자신들 나름대로의 명상법을 거쳐서 마침내 어떠한 이성이나 감성의 작용을 완전히 넘어선 상태에서 그들이 갈구하던 유일신을 체험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깨달음을 문화권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고 그 양상도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모두 자신들이 궁극적인 진리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하나의 그 무엇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과연 그 위대한 깨달은 이들은 진정으로 하나의 그 무엇을 완전히 체험하였던 것이었을까?
앞에서 예로 들었던 라즈니쉬의 체험을 보자. 그의 깨달음의 체험은 실로 대단한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시간의 제약이 사라져 찰나와 영겁이 서로 교차하고 유한한 개체성을 넘어 무한한 전체의 바다에 하나가 되는 체험이었다. 만약 그것이 일체의 과장 없이 진실하게 기술된 것이라면 누가 보아도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의 깨달음에 대한 묘사가 과장이나 거짓이 없는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라즈니쉬의 깨달음은 완전하지 못하다. 즉, 라즈니쉬가 체험한 것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라즈니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것은 깨달음의 고하를 막론하고 역사상 모든 각자에게 다 해당되는 것이다. 물론 석가모니와 예수, 노자와 공자 또한 예외는 아니다.
역사상 유명한 각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만 남아있을 뿐 그들의 깨달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엇을 근거로 그들의 깨달음이 불완전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의식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내린 결론이다. 하나씩 설명해보자.
기존의 명상자들은 명상을 통하여 초월적인 인식 통로가 열리게 되면 일상적인 인식작용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궁극적인 하나의 그 무엇을 마침내 저절로 알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말한다. "명상의 최후의 단계에서 체험하는 그것은 근원의 세계요 본체의 세계로서 어떠한 언어와 형상도 넘어서있는 세계이다. 그것은 어떠한 감각기관이나 사유작용으로도 알 수 없고 단지 초월적인 인식통로를 통하여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체험한 그것이 언어와 형상으로 표현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체험한 그것은 절대 진리이다."
이 견해는 상당히 그럴싸하게 보인다. 그러나 속에는 미세한 착각이 있다. 그것을 살펴보자.
우선 그들의 깨달음이 절대객관의 완전한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인식작용 이 완전히 초월적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인식작용이 절대적인 초월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인식작용은 없다.
명상을 통해 얻어진 초월적인 감각이나 직관은 일상적인 감각이나 사고작용에 비하면 굉장한 것으로서 마치 모든 것을 초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자. 그것은 보통의 인식상태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월적인 것이지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 또한 인식 작용의 한 형태이다.
그렇다. 어떤 초월적인 감각이나 직관도 하나의 인식 작용에 불과한 것이다. 기존의 대부분의 깨달은 이들이나 명상자들은 이 점을 간과하였다. 이것은 중대한 착각이다.
이 말이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이번에는 다른 각도로 설명해보겠다.
어떤 사람이 인식하는 진리가 절대 객관의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 속에 어떠한 주관성도 남아있어서는 안된다. 만약 털끝만큼의 주관성이라도 남아있으면 그가 체험한 것을 절대객관의 궁극적인 실재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최고의 명상 상태에서 체험하는 그 경지에는 과연 어떠한 주관적 요소도 없는 것인가?
지금까지 많은 명상가들은 거기에는 어떠한 주관적 요소도 없다고 여겨왔다. 왜냐하면 그러한 최고의 체험을 할 때는 '나'라고 하는 것이 사라지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어떠한 인식 작용도 넘어선 인식 내지는 체험을 넘어선 체험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초월적인 인식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집단적인 주관 내지는 개인적인 주관의 흔적이 약간은 남아있다. 깨달음의 양상이 문화권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또한 개인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속에 집단주관과 개인주관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사실 주관성을 완전히 배제한 인식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 작용이란 본질적으로 항상 주체와 객체의 대립 속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는 항상 인식하는 주체인 나와 인식의 대상인 세계의 대립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안다 할 때는 그 속에는 항상 인식 주체의 주관성이 깔려 있다. 우리의 인식 주체와 완전히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산에 피어있는 꽃처럼 생긴 어떤 식물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거나 추하다고 느끼는 것은 주관적인 사실이지만 그 대상을 꽃으로 지각하는 것은 우리의 주관과 무관한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좁은 사고방식으로 보면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시야를 좀 더 넓혀서 보면 그렇지가 않다. 어떤 꽃을 아름다운 꽃이라고 보거나 추한 꽃이라고 보는 것은 개인적인 주관이고 그 대상을 꽃이라는 형태로 지각하는 것은 인류 전체의 집단 주관이다.
좀 더 넓게 바라다보자. 이 우주는 원래 하늘이니 땅이니 산이니 강이니 꽃이니 돌멩이니 등으로 나뉘어져있지 않는 것이다. 다만 우리 인류의 눈에 그렇게 보일 따름이다. 초광학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면 전혀 그러한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초정밀 현미경으로 보면 거대한 우주는 수많은 미립자와 소립자들의 소용돌이 춤일 따름이다. 아니 미립자 소립자들의 춤이라는 견해 또한 완전히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현미경의 힘을 빌렸지만 그것을 관찰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눈이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주관성을 완전히 배제한 100% 객관적인 우주의 모습을 알 수는 없다.
고전물리학자들은 과학이 더욱 발달하고 더 정밀한 장비가 발명되게 되면 인간은 언젠가는 우주의 궁극적인 실상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에 와서는 이러한 생각은 부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물리학자들은 아무리 정밀하고 객관적인 장비를 동원하더라도 거기에는 항상 관찰자의 관점이 개입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우주의 100% 객관적인 실상은 결국은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무리 정밀하고 객관적인 관찰을 할 수 있는 장비를 동원한다 하더라도 관찰자의 입장마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관성을 완전히 배제한 우주의 객관적인 실상은 영원히 관찰될 수 없다. 이것은 자연과학에만 통용되는 진실이 아니라 명상에도 통하는 것이다.
명상을 하다 보면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초월적인 인식의 통로가 열리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초광학 현미경을 통하여 대상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초월적인 인식의 통로가 열린다고 해서 주관성을 100% 배제한 상태에서 하나의 그 무엇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명상을 통하여 초월적인 의식상태가 되면 하나의 그 무엇에 훨씬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이전의 의식 상태에서는 전혀 체험할 수 없었던 현상들, 예컨대 자신의 개체성이 녹아져 내려 무한한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하거나, 인식의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을 경험하거나, 인식의 주체와 객체가 동시에 사라져버리는 현상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런 상태가 되면 주관성은 완전히 0%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주관성이 0%가 아니다. 이러한 상태는 주관성이 0.5%, 0.1%, 0.05%, 0.01% 남아있는 상태이다. 이것은 주관성이 50%, 10%, 5%, 1% 남아있는 것에 비하면 거의 없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대부분의 깨달은 이들은 그것을 간과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좀더 정밀하게 보아야 한다. 0.0000000001%라 하여도 그것은 0%가 아니다.
주관성의 흔적이 약간이라도 남아 있는 한 완전한 절대진리를 알 수는 없다. 결국 어떠한 언어와 형상으로도 하나의 그 무엇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초월적인 깨달음으로도 하나의 그 무엇을 완전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노자는 '도를 말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다.'라고 말하였지만 나는 여기서 '하나의 그 무엇을 체험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진정한 하나의 그 무엇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자연 과학은 외부의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고, 명상은 내면의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다. 또한 자연 과학은 아무리 고도의 장비를 동원한다 하여도 결국은 오감의 세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지만 명상은 오감을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연 과학과 명상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자연 과학에서 100% 객관적인 관찰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명상의 세계에서 100% 절대 객관의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물론 자연 과학과 명상은 관찰 대상도 다르고 관찰 방법도 서로 다르다. 그러나 우주의 궁극적인 실체가 무엇인지를 탐구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아울러 더욱 중요한 것은 관찰 대상이 다르고 관찰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인식의 본질이 다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외면의 세계이든 내면의 세계이든 무엇인가를 인식할 때는 인식 작용의 본질상 반드시 그 속에 주관적 틀이 숨겨져 있다.
사실 내면의 세계를 관찰함에 있어서는 현재 자연 과학적 관찰에 비해 주관적 틀이 훨씬 더 많이 작용하고 있다. 그 속에는 다양한 층의 집단주관의 틀과 개인주관의 틀이 작용하고 있다.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주관성이 점차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100% 사라지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지닐 것이다.
"그렇지만 깨달음을 체험하는 순간 분명히 '나'라고 하는 개체의식이 거대한 우주의식의 바다에 녹아내리거나,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이 하나가 되거나, 보는 주체도 보이는 대상도 사라져버리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가? 주체가 사라진다는 것은 분명 주관성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것은 무척 까다로운 문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차분히 따져보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보통 때 우리의 의식은 항상 육체 안에 갇혀 있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낀다고 하는 것은 항상 육체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우리의 관념이나 상상이라고 하는 것도 육체의 오감을 통해서 쌓아올린 정보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명상을 통해 깊은 의식상태에 들어가면 우리의 의식은 점차 육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러다가 아주 깊은 상태에 들어가면 육체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되는 것도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시간과 공간의 틀마저도 벗어난 세계를 체험할 수도 있다. 이럴 때 우리는 '나'라고 하는 개체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나'라고 하는 개체성은 분명히 사라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에 알고 있던 '나'라고 하는 개체성은 사라졌지만 '나'의 뿌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상태는 기존에 알고 있던 조그만 '나'가 훨씬 크게 확장된 것일 따름이다.
즉 예전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육체 안에 구속되어있었지만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되면 '나'라고 하는 것이 우주적으로 확장되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우주적인 확장의 단계 마저 넘어서 아예 '나'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소멸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경지에서도 여전히 무엇인가를 느끼는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개아의식이 우주의식 속으로 융해된 상태에서도 그 우주의식을 인식하는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아예 개아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절대무의 상태에도 그 절대무를 인식하는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물론 이 때의 '나'는 이전의 '나'와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여전히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있는 인식주체임에는 틀림없다. 이렇게 인식 주체가 있는 한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이 나누어지기 이전의 궁극적인 본체, 하나의 그 무엇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비유로 설명해보자. 원래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공간을 양파껍질이 감싸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양파껍질이 두꺼울수록 안과 밖은 확연히 나누어진다. 명상이란 양파껍질을 벗겨나가는 작업이다. 명상이 깊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에 양파껍질이 다 벗겨지면서 안과 밖의 구분이 없어지는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에고가 소멸되는 듯한 느낌으로서 이 때 명상자는 하나의 그 무엇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바로 궁극적인 깨달음이라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양파는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외곽으로는 두텁고 불투명한 껍질이 있고 속으로 들어갈수록 얇고 투명한 껍질이 숨어있다. 이 두텁고 불투명한 껍질은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지만 얇고 투명한 껍질은 쉽게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그래서 대부분의 깨달은 이들은 얇고 투명한 껍질이 숨어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자신이 모든 껍질을 다 벗겨버렸다고 착각하였던 것이다.
이제 인간은 명상을 통하여 하나의 그 무엇에 가깝게 다가설 수는 있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도 하나의 그 무엇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는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어떠한 깨달음도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다. 라즈니쉬, 크리쉬나무르띠, 라마크리쉬나, 라마나 마하리쉬 등의 근래의 요가 명상자들의 깨달음도 완전한 것이 아니고, 틸로빠, 나로빠, 마르빠, 미라래빠 등의 고대의 위대한 딴뜨리까들의 깨달음도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고, 달마, 혜능, 마조, 황벽, 조주, 임제 등의 고대 중국의 선사들이나 경허, 만공, 전강, 용성, 경봉, 구산, 성철 등의 근래의 한국의 선사들의 깨달음도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 외 단학 수련을 통하여 불생불사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람들이나 신과 온전하게 합일하였다는 카톨릭의 성자들이나 이슬람의 성자들의 깨달음 또한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양파껍질을 거의 다 벗긴 상태에서 얇고 투명한 껍질을 간과하고 자신이 껍질을 완전히 다 벗겼다고 착각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류 정신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석가, 예수, 노자, 공자의 깨달음조차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나의 깨달음 또한 마찬가지고 미래의 모든 각자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이 말은 기존의 종교나 명상 체계 속에서 자신의 교주나 스승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면서 신앙심을 키우거나 깨달음을 향해 명상하는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들릴 것이다.
원래 고정관념을 깨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수천년간 계속 그러하리라 믿어온 법칙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아무리 견고하고 오래된 것이라도 그것이 착각이라면 반드시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명상을 한다는 것은,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착각에서 벗어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입관을 버리고 차분히 따져보면 사실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출처-http://www.jongsu.pe.kr/dol/technote7/board.php?board=dolnote&command=body&no=53
첫댓글 ㅡ()ㅡ.감사히.잘읽으음니다.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