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산청군은 조선시대로부터 근세까지 저항의 촛불과도 같은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조선시대 산음현과 단성현을 살펴보면 산음현은 선조 32년(1599년) 단성현이 왜란에 황폐되어 산음현에 영속되었다가 15년 후 광해군 때 단성현이 독립되었다. 영조43년(1767년 )산음현에서 7세 여아(女兒) 사건(事件)으로 산음을 산청으로 현명을 바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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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의 맑은 계곡 오봉, 산(山)이 살아야 사람이 산다. |
단성현은 정종(1398년) 때에 왜란으로 영선의 명진현 사람들이 와서 세종(1450년) 때에 명진으로 돌아갔다. 고종33년(1896년)에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고종 32년(1895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산청현과 단성현이 군으로 개편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지방 출신 한말의 거유 곽종석은 거창에 은거하다가 문인 김황과 더불어 전국의 유림을 동원하여 만국평화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를 내는 등 유림의 구국운동을 주도하였다.
산청군은 1읍 10개면으로 개편되었는데 그 내용은 산청(읍), 차황, 오부, 생초, 금서, 삼장, 시천, 단성, 신안, 생비량, 신등이다.
특별히 단성은 진주와 더불어 선비(士族)들이 남명사상에 젖어 경의주일(敬義主一)로 삼고 지행일치(知行一致)로 위선(僞善)을 매(罵)하는 선비풍이 남다르고 배일사상(排日思想)이 투철하기 때문에 엑세제재(抑勢制裁) 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라고 전해온다. 그리하여 저항의 역사는 임진왜란과 일제시대, 1948年 여순 반란사건과 1950년 6·25동란을 거치면서 쓰라린 상처를 남겼던 곳이다.
산청에서 휴(休)~ 합시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아직 휴가 낼 엄두조차 못했다면 잠시 지리산 자락아래 청정나라 산청으로 떠나보길 바란다. 산청은 대원사계곡을 비롯 내원사계곡, 선유동계곡, 중산리계곡, 고운동계곡, 거림계곡 등 수많은 계곡이 숨어있다. 산청 전체가 아름다운 계곡들로 이루어져 덕천강과 경호강을 만들고 남강을 굽이쳐 흐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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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 전체가 아름다운 계곡들로 이루어져 덕천강과 경호강을 만들고 남강을 굽이쳐 흐르게 만들었다. |
곳곳에 강이 흐르듯 역사도 흐른다. 저항의 역사가 꿈틀대는 산청은 학문을 알기만 하면 족한 것이 아니라 반궁체험(反躬體驗)과 지경실행(持敬實行)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 주장하고, 특히 경의(敬義)를 높였는데, 마음이 밝은 것을 ‘경(敬)’이라 하고 외적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을 ‘의(義)’라고 하며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힘쓴 남명 선생의 본거지다.
산청은 경상남도 북쪽 끝자락에 자리한 전형적인 산촌이다. 지난 7월25일부터 26일까지 1박2일 일정으로 산청을 방문했다. 내려간다, 내려간다, 말만 앞세우고는 실천에 옮긴 것이 석 달이 지난 후였다. 더 늦기 전에 하루하루 살맛나는 생태마을을 만들려는 의미로도 지리산에 관심이 간다.
서울에서 오락가락했던 빗줄기는 지리산을 넘자 더욱 세차게 내렸다. 이후 산청군청에 도착했을 때 소낙비로 변했다가 찾아들면서 맑은 하늘을 보였다. 요사이 산청엔 통 비가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의 비는 고마운 단비다.
산청군의 초청으로 농업관련공무원들과 허심탄회 점심식사를 하며 농산촌의 고민과 희망을 일굴 수 있는 방안들을 전해 들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농촌의 공동화로 활력을 잃고 있다는 문제다.
도시-농촌 지역 '인구 양극화' 현상이 뚜렷한 이유는 경제적인 요인과 더불어 교육과 문화 등이 대도시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농어촌에도 뉴타운과 같은 바람이 불어 건축업자의 배만 불리는 사업이 아닌,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삶과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서로에게 좋은 발전이 되는 정직한 자본과 도시의 자각한 엘리트들이 농촌으로 들어와 생태적인 문명을 만들고 문화를 이룬다면 분명한 길은 열릴 것이다.
산청군청은 한마디로 아담했다. 꾸미지 않은 정이 있어 산뜻한 분위기다. 농업기술센터 소장 장사문님의 안내로 소박한 차림의 이재근 군수님을 만났다.
산청에서 나고 자랐지만 산청을 잘 모른다고 했다. 군수출마에 앞서 선거기간동안 일일이 발품을 판 것이 전부라고 하면서 우선 무엇을 하기 보다는 차근차근 배우며 지역사회에 맞는 일을 찾는 중이라며 겸손하게 말씀하셨다.
산청군은 올해 3만559명으로 같은 기간보다 10.5%나 인구가 감소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산청만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관민이 하나 되고 산학이 지역의 현안과 통하는 길을 만드는 새로운 통합적 시스템구축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산청군은 2007년도 지역혁신 평가에서 친환경한방 약초산업육성으로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되어 대통령표창, 지역혁신협의회 운영실태 평가에서 우수기관으로 선정, 행정자치부장관상을 받는 등 그 활약이 눈부시다. 또한 지리산의 생태환경덕택으로 한방약초산업의 꿈을 키우고 있으며, 청정지역을 이용한 2007년 제4회 친환경농업 대상을 수여한 곳이다.
군수실을 나오려는데 군수님이 커다란 사진을 가리킨다. 어두운 밤 산속에서 유일하게 조명을 밝힌 “산 엔 청” 브랜드, 다른 지자체와의 차별화로 경쟁력을 도모하는 지리산 청정골 ‘산엔청’은 군수님의 아이디어라며 상표등록은 물론 특허출원까지 했다고 농업기술센터소장님이 귀띔했다.
이어 농업기술센터에서 잠시 간담회를 가진 후 약초재배단지와 산청한의학박물관을 차례로 관람했다. 산청한의학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한의학 박물관으로서 지리산 자락을 끼고 문필봉과 왕산아래 천혜의 명당에 자리 잡았다. 그동안 이곳은 고령토 채취장으로서 광산이 들어섰던 곳을 한의학의 본 고장답게 한의학박물관으로 재활용 중이라 했다.
산청은 동의보감의 허준을 비롯해 류의태 선생, 진양신방을 저술한 초삼·초객 형제 등 수많은 명의들이 활동했던 곳으로 수백 가지 약초는 물론, 해구신·전충 등 희귀한 약재들이 전시된 박물관이 발길을 사로잡는다. 올해 연말까지 무료 관람이며 내년부터 유료화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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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한의학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한의학 박물관으로서 지리산 자락을 끼고 문필봉과 왕산아래 천혜의 명당에 자리 잡았다. |
또한 주변지역은 한방테마 공원 조성이 한창이다. 지명은 산청군 금서면 특리일원으로 약 30만 ㎡ 부지에 한의원·약초 체험장·대체의학 연구시설·휴양시설·한방대학원 부설기관까지 들어설 예정이란다. 특이한 것은 이곳을 관광과 치료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곳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것, 우선 본디올 한의원이 동의보감에 근거한 전통 한의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공원내 약재 판매소(산청약초협동조합 인증판매)와 기념품점, 산청한우식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특별히 이번 여름휴가는 환경과 역사 그리고 전통문화를 체험하고 나 자신을 바로 발견하는 진정한 休(휴)의 기회로 가졌으면 한다.
하늘의 뜻이란 백성들의 마음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에 있다는데 어찌 이러한 지령의 산세에서 인걸이 없을 소냐. 1501년, 소백산과 지리산은 우리 민족에게 큰 별을 두개 내려 주었다. 하나는 소백 산하의 안동향리에서 탄생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년)이요, 또 하나는 지리 산하 삼가(三嘉)향리로 내려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년)이다. 둘이 동갑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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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의 뜻이란 백성들의 마음을 주창하신 남명 조식(南冥 曺植)선생은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힘쓰셨다. |
1566년(명종 21년)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을 제수 받고 1567년(명종 22년) 5월 왕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같은 해 8월에 상서원판관에 임명되어 두 번씩이나 부르자 입조하였으나 왕을 만나 치란(治亂)에 관한 의견과 학문의 도리를 표하고 낙향하였다.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힘쓴 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남명 조식(南冥 曺植)선생이다.
남명은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덕산의 물줄기 앞에다 산천재(山天齋)를 짓고서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지리산 물줄기로 마음을 씻고 정신은 천왕봉처럼 우뚝 솟아 지리산하 남명학의 기풍을 유감없이 드러낸다.(請看千石鍾/非大無聲/爭似頭流山/天鳴猶不鳴)
하늘이 무너지듯 국란이 터졌다. 임진왜란이었다. 남명의 제자들은 모두 의병장이 되어 일어섰다. 천왕봉의 칼을 잡고 지리산을 방패로 삼아 기고만장한 왜적들을 지리산하의 낙동 향리에서 쓸어 버렸던 역사에서 지리산기상의 장렬함이 드러난다.
남명선생은 퇴계와 견주어 더 내세우고 싶다. 하지만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양대 거목 중 유독 퇴계만이 동방의 성현으로 추앙받고 있는 데 반해 남명이 받고 있는 대접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합천 태생인 남명이 지리산 밑 덕산에 자리 잡은 까닭이 궁금했다. 그의 나이 61세 때의 일이다. 이곳에 산천재를 짓고 은인자중하였는데 그 명성이 자자하여 제자가 되고자 한 이가 많았다. 정구·곽재우·정인홍·이제신·김효원·문익성·하항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지리산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학풍을 진작했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의병으로 나가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남명과 덕산의 관계를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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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천재는 비록 서너 칸짜리 건물일 뿐이지만 그 속에서 남명의 예사롭지 않은 삶을 느낄 수 있다. 인근에는 남명의 묘소와 길 건너 남명기념관이 있으며, 단성중고등학교 옆에는 남명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세운 덕천서원이 멋스러움을 한껏 뽐내며 자리하고 있다. |
산천재는 비록 서너 칸짜리 건물일 뿐이지만 그 속에서 남명의 예사롭지 않은 삶을 느낄 수 있었다. 인근에는 남명의 묘소와 길 건너 남명기념관이 있으며, 단성중고등학교 옆에는 남명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세운 덕천서원이 멋스러움을 한껏 뽐내며 자리하고 있다.
산 깊고 물 맑은 곳에 조선시대 선비마을 체험
우리에게 오래된 고가만큼 정겨움을 주는 요소가 또 있을까. 초가나 한옥 그리고 흙과 돌담으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선비마을이 있어 찾아가 보았다.
단성 나들목에서 20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향해 가다가 오른 편에 고택들과 전통 돌담길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남사 예담촌이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최씨고가, 이씨고가, 사양정사 등의 고택들이 즐비한 이곳이 흡사 하회마을과 많이 닮았다. 하지만 소담스러움과 고즈넉한 풍경이 있어 정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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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사 예닮촌, 소담스러운 돌담길과 고즈넉한 고택풍경이 잘 어우러진 마을이다. |
특히 돌담길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각 성씨들의 집들을 한 집 한 집 살펴보는 재미 또한 솔솔 하다. 사양정사에서는 일반인이 직접 고택에서 하루 밤 묵으면서 시골밥상 식사를 즐길 수 있단다.
또한 곳은 단성 나들목에서 동북쪽으로 1006번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신등면사무소 바로 못 미쳐 단계 한옥마을이 있다. 예로부터 단계(丹溪)가 있는 신등면은 '등 따습고 배부른 마을'로 손꼽혔다고 한다. 자연히 세도가와 부농(富農)이 모여 살아 인물이 많이 난 마을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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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담길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각 성씨들의 집들을 한 집 한 집 살펴보는 재미 또한 솔솔 하다. |
마을 내 전통주택들은 조선 후기에서 근세에 이르는 시기에 건립된 한옥으로 규모가 크고 권위적이다. 볼만한 고택으로는 19세기에 지은 권씨(權氏)고가와 18세기경 지은 안동 권씨 외가인 박씨 고택이다. 이 고택들은 1919년 민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독립운동이 한창일 때 건립된 양반고가들로 일반 민중들의 삶과는 많은 온도차이가 난다.
단계리 권씨 고가는 솟을대문 안의 경내에 안채, 사랑채, 곳간채, 대문채 등이 있으며, 맞배지붕의 대문채를 제외하고는 모두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통민가와 상류주택 요소가 적절히 변형 결합되어 근대 경상남도 서부지방의 중류 자영농가의 대표적인 살림집의 원래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권씨 고가의 뒤편에 있는 목욕탕 건물은 뒷간과 함께 특이했고, 井자 모양의 우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뒷간은 건물의 2층으로 되어 있어 계단을 올라가서야 일을 볼 수 있다. 얼핏 밑에는 똥돼지를 키웠던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는 어린염소새끼를 키우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임원경제지'에 나온 인분의 위생적이고도 효과적인 활용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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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의 고택들은 전통민가와 상류주택 요소가 적절히 변형 결합되어 근대 경상남도 서부지방의 중류 자영농가의 대표적인 살림집의 원래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
뒷간 옆 1층에는 각종 퇴비가 쌓여져 있고, 각종 재를 덮어 냄새를 줄이고 발효를 촉진시킨 흔적이 보인다. 또한 뒷간 남쪽으로 홈을 내어 소피를 보면 자연스레 흘러나와 고이도록 둥글게 구덩이를 파 놓아 인분이 가장 좋은 비료였던 그 옛날, 알뜰하고도 적절한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다.
이밖에 박씨 고택은 잘은 정비가 되지 않아 어수선 했지만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와 대문채, 곳간 채가 'ㅁ'미음자로 형성된 전통민가와 양반 채 요소가 섞여 있어 경상남도 서부지방의 중류 자영농가의 전통적인 살림집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마을의 전체적인 느낌은 산만했지만 19세기 전후의 건축은 실용적이라는 이미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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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양정사에서는 일반인이 직접 고택에서 하루 밤 묵으면서 시골밥상 식사를 즐길 수 있단다. |
왕산(王山)에는 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피라밋이 있다.
예로부터 지리산을 비롯한 산청 인근의 산에는 2,400여종의 약초가 자생하는 한약의 보고였다. 지금도 지리산과 왕산 그리고 필봉산 자락은 맑은 물과 효험이 뛰어난 수많은 약초가 자생하고 있다. 이 중 왕산은 자생 약초뿐만 아니라 가락국의 전설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유명하다.
아침나절 엄천강을 가로질러 천하절경 오봉계곡을 답사했다. 돌아오는 길에 가락국의 멸망을 지켜본 구형왕릉과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이 활쏘기를 했다는 사대가 있고 해발 923미터의 왕산 밑에 자리한 왕릉엘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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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락국 양왕릉, 산청군 금서면 왕산(王山)에는 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피라밋이 있다. |
산청읍에서 북서쪽으로 길을 잡아 30분쯤 달리면 금서면 산청한의학박물관 너머에 화계리 면소재지가 나온다. 화계리는 옛날 빨치산의 출몰이 심했던 오지이다. 그곳으로 이르는 길은 아름다운 농촌의 산수를 간직하고 있어 좋았다. 소재지 도착하기 직전 길 왼쪽으로 단아한 천축물들이 줄지어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덕양전이다. 가락국 10대왕 양왕(구형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이곳에 묻혔으니 산 이름은 당연히 왕산으로 불린다. 뿐만 아니라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별궁인 수정궁도 이곳에 있었다고 전해온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양왕은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 19년) 나라를 신라에게 선양하고 왕산의 김수로왕 별궁이었던 수정궁으로 옮겨 산 지 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곳에서 산길을 따라 약 1킬로미터쯤 올라가면 피라밋의 구형왕릉을 만날 수 있다. 차로 오르는 것도 좋지만, 걸어 올라가면 고려 충신으로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산청으로 낙향한 농은 민안부 선생을 기려 만든 망경루, 김유신이 활을 쏘았다는 사대석, 가락국 유적비 등을 볼 수 있다.
왕릉은 자연석을 모아 피라밋 형식으로 쌓다가 봉우리를 동그랗게 만들었다. 이러한 형식은 서울 암사동에 남아있는 무덤과 유사하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탑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180여년 전에 발견된 왕산사기(王山寺記)에 의해 왕릉임이 증명되었다.
왕산의 산행도 이 구형왕릉에서 시작된다. 이곳에는 유의태 약수터와 왕산사지로 알려진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별궁인 수정궁터가 있다. 화창한 날씨 덕분에 왕릉에서의 상쾌한 아침을 맞았다. 얼핏 들은 이야기지만 이곳 왕릉에는 낙엽이 떨어지지 않고, 새가 똥을 싸지 않는단다.
아늑한 곳, 검은 속살을 내비친 왕릉은 신비감을 더해준다. '구형왕릉'은 경사진 지형에 수 만개의 잡석으로 모두 7단을 쌓아올려 타원형의 봉분을 만든 높이 7.15m의 거대한 돌무덤으로 전면 4 단째에 폭과 높이 각 40㎝, 깊이 68㎝ 크기의 감실(불상, 신주 등을 안치시키기 위한 공간) 형태의 시설이 있다.
돌무덤은 1m 높이의 담장이 에워싸고 있으며 무덤 앞에 '가락국양왕릉(가락국은 가야, 양왕은 구형왕)'이라고 적힌 비석과 석등 및 석단 좌우에 문인석, 돌짐승이 한 쌍씩 세워져 있으나 모두 20세기 들어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 무덤을 구형왕릉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왕산은 현의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산중에 돌을 포개서 만든 둔덕이 있고, 사면이 모두 층계로 돼 있는데 왕릉이라는 전설이 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근 200여m 떨어진 곳에 왕산사터가 위치해 있고, 왕산사 법당에서 구형왕과 왕비 영정, 옷, 활, 칼 등 관련 유물이 나온 것으로 전해지면서 구형왕릉이라는 심증이 깊어졌다.
조선시대 문신 홍의영(1750~1815)이 지은 '왕산심릉기'에도 "무덤 서쪽에 왕산사가 있고 절 위쪽에는 왕대(王臺)가, 아래쪽에는 왕릉이 있으며 신라에 멸망하자 이곳으로 와 살다가 세상을 떠나 장사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대한민국 옥새 전각장인 민홍규
산청한의학박물관을 들러보고 박물관 뒷길로 조금 올라가니 광산의 잔재로 이미 파헤쳐져 있어 커다란 돌들이 이리저리 쌓여있는 황량한 들판 입구에 아담한 한옥 한 채가 외로이 서있다.
누가 살고 있는 집인지도 모르고 방문한 집에는 뜻밖에 스스럼없이 일행을 맞는 주인장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대한민국 옥새장인 민홍규님 이었다. 지난해 새로운 국세가 제작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그 장본인을 이렇게 뜻밖에 장소에서 만나다니 감회가 깊다. 그의 스승은 1대 국세를 제작했던 석불(石佛), 정기호 선생으로 스승이 돌아가시기 1년 전 후계자임을 정하는 글과 함께 스승의 망치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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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에서 대한민국 옥새 전각장인 민홍규님을 만났다. |
스승 밑에서 17년간 동양철학을 비롯해 조각·서예·전각·회화와 주물까지 두루 익히고, 그렇게 사라져가는 문화재를 붙들고 씨름한 것이 올해로 40년째란다. 2006년 말 행정자치부의 ‘4대 국새’ 응모에서 인문(印文·도장 글씨 부분)과 인뉴(印鈕·도장 손잡이 부분) 두 부문 모두 당선된 것이 시발이 되어 4대 국새 만들기를 총괄한 국새제작단장의 영광을 얻었던 것이다. 이번 4대 국새의 글씨체는 훈민정음체, 모형은 봉황, 제작방식은 진흙 거푸집을 사용한 전통적 방식이다.
국새 작업은 이곳 산청에서 이루어졌는데 예로부터 그 지방의 흙으로 국새거푸집을 만들던 전통에 따른 것이다. 국새는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국가를 대변하는 문화언어로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그의 말에 힘이 실린다. 국새를 만드는 데 있어 개인의 성취욕이나 사욕을 부리지 않을 민홍규님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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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4대 국새의 글씨체는 훈민정음체, 모형은 봉황, 제작방식은 진흙 거푸집을 사용한 전통적 방식이다. |
조선 고종 때까지 내려오던 국세는 일제 강점기 때 많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그 후 맥아더원수가 약 7~8점 가량의 옥새를 찾아와 반환시키지만 6.25전란 후 다시 소실되어 대한민국 이전의 국새는 현재 3개만 남아있다.
그동안 경기도 이천에서 꾸리던 일들을 접고, 그의 소망인 대한민국 국새전각전 건립을 완성해 전통을 이을 제자를 키우고, 사라진 조선 국새들을 복원하는 계획에 매진하려고 한다는 말 등 서로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지만 바른 철학, 바른 생각을 갖은 분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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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홍규님에게는 현재 커다란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국새전각전이 들어설 경남 산청군 금서면 특리일원 건립부지 옆으로 커다란 사찰이 들어선다는 계획 때문이다. |
하지만 민홍규님에게는 현재 커다란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국새전각전이 들어설 경남 산청군 금서면 특리일원 건립부지 옆으로 커다란 사찰이 들어선다는 계획 때문이다. 고유한 궁중 예술의 진수, 국새 만드는 전통이 가급적 자연환경과의 조화로움 속에서 훌륭하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이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었으면 한다.
전통 속에서 현대적 실용을 찾는 대목수 박충수
우리 전통의 원리와 현대적 집짓기가 결합된 퓨전한옥을 짓는 박충수님의 안내로 덕산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곧장 시천면 반천리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산속에서 은거하며 조용히 자연과 벗하며 사는 게 꿈으로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게 살고 있는 듯 보였다.
산길을 따라 그가 살고 있는 지리산 한쪽 끝자락인 시천면 반천리를 찾았을 땐 마침 부인과 딸이 외출하려고 집을 나서는 중이었다. 우선 10년 먹을 소금저장 창고가 있는 집 뒤 공간과 1년치 쌀을 보관하는 창고를 가리키며 목수 자신의 집보다도 삶의 정신을 소상히 전해주었다. 이어 야생차를 말리고 작업하는 지붕이 있는 커다란 평상을 보여주었다.
우리 전통의 원리와 현대적 집짓기가 결합된 퓨전한옥을 짓는 박충수님의 안내로 덕산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곧장 시천면 반천리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산속에서 은거하며 조용히 자연과 벗하며 사는 게 꿈으로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게 살고 있는 듯 보였다. 산길을 따라 그가 살고 있는 지리산 한쪽 끝자락인 시천면 반천리를 찾았을 땐 마침 부인과 딸이 외출하려고 집을 나서는 중이었다. 우선 10년 먹을 소금저장 창고가 있는 집 뒤 공간과 1년치 쌀을 보관하는 창고를 가리키며 목수 자신의 집보다도 삶의 정신을 소상히 전해주었다. 이어 야생차를 말리고 작업하는 지붕이 있는 커다란 평상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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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 속에서 현대적 실용을 찾는 대목수 박충수님의 집을 방문했다. |
요즘 친한 지인의 집을 강화에서 짓고 있어 다소 분주하다. 집짓기 방식에서 향을 고집하지 않으며 지붕을 높게 처리하여 공기의 순환을 원활히 했다. 단열은 공기가 밑에서 위로 순환하는 원리를 이용 그만큼의 흙을 천정에 채워 단열을 했기 때문에 열손실이 적다고 했다. 우리 전통원리인 골조와 골조의 연결에 못이 아닌 짜맞추기공법과 현대적인 공간구조식의 집짓기를 자신만의 건축철학으로 구현하고 있는 듯 했다.
생활의 편리성과 견고함만을 생각하다보면 자칫 한옥의 멋스러운 디자인은 살리지 못하는 점에 있어서는 실용적인 현대건축에 전통 집짓기의 철학과 디자인을 결합시킬 마음도 있다고 했다.
집의 기본 틀은 전통을 따르되, 전통양식에서는 모두 분리돼 있는 본채마루·화장실·부엌을 한곳에 통합시킨 그의 집, 그가 추구하는 건축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땡감나무 잎을 말려 우려낸 발효차와 손수 만든 곶감 맛이 일품이다. 생땅 나올 때 까지 땅 파고 집터도 바닥에서 1M이상 높게, 못하나 없이 나무로 뼈대 짜 맞추고, 짚 넣은 황토 벽돌 쌓아올려 만든 옛 방식 그대로의 집은 200~300년을 거뜬히 견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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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 그가 살고 있는 집도 그가 직접 지었다. 생땅 나올 때 까지 땅 파고, 집터도 바닥에서 1M이상 높게, 못하나 없이 나무로 뼈대 짜 맞추고, 짚 넣은 황토 벽돌 쌓아올려 만든 옛 방식 그대로의 집은 200~300년을 거뜬히 견딘다고 한다. |
그가 살고 있는 집도 그가 직접 지었다. 가족으로는 부인과 두 딸 등 네 식구다. 필자도 깊은 산골에 땅만 마련된다면 앞으로 전통한옥의 미와 함께 마당과 뜰 그리고 연못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집을 짓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