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영·정일근·최승범·신웅순·윤금초·이정환의 시조
이달균 시인
번다한 섬은 적막이 그립다
지중해의 보석 카프리 섬은 파블로 네루다로 인해 추억으로 가는 창(窓)이 된다. 에메랄드빛 바다, 코발트블루의 하늘, 천혜의 자연경관으로 고대 로마 때부터 황제와 귀족의 별장지로 알려졌다. 칠레의 시인은 타의에 의해 카프리 섬에 유배되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싶어 만지도에 왔다. 돌아가는 마지막 배가 아쉽다면 하룻밤 민박을 청하기를. 그래서 코발트 빛 바다에 뜬 가을 섬 그늘에선 제발 시계를 보지 않기를. 이 섬에 오면서 시집 한 권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래, 차라리 시에서 놓여나자. 이런 날은 그저 나를 놓아두자. 유배는 사람을 더 사랑하게 하고, 두고 온 세상을 더 그리워하게 한다. 차라리 한 며칠 바람이라도 불어 육지에 나가지 못하는 불상사가 은근히 기다려진다. 만지도는 외로운 섬이었다. 그러나 이젠 연대도와 출렁다리가 연결되면서 번다한 섬이 되었다. 섬사람들은 늘 적막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했지만 정작 길손이 많아지다 보니 다시 예전의 적막이 그리워진다.
만지도에서 시조를 생각한다. 예전의 시들은 거의가 단시조였다. 그러다가 할 말이 많아지면서 차츰 단시조는 연시조로 흘러갔다. 현재 한국 시조단은 연시조가 주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권위를 인정받는 시조문학상은 대부분 연시조에 돌아간다. 연시조가 대종을 이룰 때 자유시의 산문화 경향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원심력만큼이나 구심력의 힘도 작용한다.
그런 반성 위에서 시조도 그 원형인 단시조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 힘을 얻고 있다. 너무 할 말이 많아지면 차라리 입을 닫고 만다. 그런 생략과 압축이 그리워지는 시대다. 외로웠던 섬이 관광지가 되자 다시 적막함이 그리워진다. 그것은 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조가 이와 흡사하다. 혼돈의 벼랑으로 내몰리면 차라리 단순해진다. 그 단순함의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시들, 그 심연에 닿고 싶다.
예사로운, 그러나 예사롭지 않은
받아 든
금간 시간
가만히
바라보면
수묵빛
산그늘이
서늘하게
고여 있다
적막과
마주한 겸상
얼핏, 그가 그립다
— 유재영 〈겸상(兼床)〉 《서정과 현실》 2015년 하반기호
바야흐로 방흥하는 벚나무 호흡 장단
살려면 다 버려라, 는 저 성자의 푸른 할!
— 정일근 〈할!〉 《시조시학》 가을호
위 시〈겸상(兼床)〉은 유재영 시학을 잘 보여준다. 사물은 시인을 만나 그의 빛깔로 재탄생된다. 그는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언어들을 정갈히 씻고 조리하여 소반 위에 올려놓는다. 독자들은 젓가락으로 그 명징한 이미지들을 집어 먹기만 하면 되었다. 어떤 작품에선 아삭아삭한 소리가 나고, 또 어떤 작품에선 쟁반을 떠나며 ‘쟁그랑’ 하고 소리를 내기도 한다.
시인은 누군가와 겸상을 한다. 가족이거나 아니면 어떤 실체가 없는 그림자와 함께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누구이든 간에 “수묵빛/ 산그늘이/ 서늘하게/고여 있다”고 느낀 것을 보면 마주 앉은 이와는 살짝 금이 간 사이인가 보다. ‘서늘’함은 ‘적막’을 불러와 그 금의 경계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 짧지만 여백이 많은 시다. 그림이 있고 사연도 있다. 함께 실은 〈은방울꽃〉 역시 마찬가지다. 하찮은 꽃 하나이지만 이 산에 숨겨 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바람에 꽃잎은 “뎅 뎅 뎅” 하고 운다. 그 미세한 소리에 거대한 “산도 울컥” 하고 목이 멘다. 세상에 하찮은 것은 없다. 방금 숨어 지는 꽃을 신께선 다 알고 계신다.
한 음절씩 분절하여 행을 가는 것도 이 시인이 즐겨 쓰는 방식이다. 그것은 대나무가 한 그루 나무를 구성하면서 마디를 지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시에서 이런 방식은 스타카토로 음을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음절 간의 호흡을 느리게 하여 행간을 숙성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후배 시인들이 이런 배열법을 많이 차용하는데, 혹시 시각적 효과를 위해 이런 방식을 택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행을 가를 때도 꼭 필요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유재영 시인의 시가 그렇듯 정일근의 시에서도 새로운 사실은 없다. 우리가 다 아는 자연의 이법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도 시로서의 필요충분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예사로운 것을 예사롭지 않게 읽게 하는 것이 시라면 잘된 시임에 틀림없다. 정일근 시인은 얼마 전 어떤 자리에서 나에게 ‘한 일 년 시조만 쓰겠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시와 동시, 동화 등 전방위적 문학 활동을 하는 그가 그런 다짐을 하는 이유를 굳이 물을 이유는 없었다. 그런 말을 들은 후에 읽은 《시조시학》의 대표작과 신작들은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온다.
벚꽃은 무량하다. 어찌 다 셀 수 있으리. 하나 아무리 꽃이 많기로서니 꽃잎 떨구지 않고는 잎을 볼 수 없다. 초장의 “이파리 받아 펴며”라는 구절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꽃잎 떨구고 잎을 피우는 행위는 특별하지 않지만, 잎을 “받아 펴”는 자세는 경건한 것이다. 벚나무가 애써 틔워낸 꽃잎을 며칠 만에 날려 보내는 것이 숨찬 노동의 결과라면 그런 후에 맞이하는 푸른 잎은 예사로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푸른 잎을 받들어 편다. 시인의 이런 발견이 시가 되는 이유다. 벚나무의 생애는 급박한 호흡과 장단을 가진다. 성자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신다. 벚나무의 그런 삶이 꼭 시조와 닮았다. 살려면 다 버려야 한다. 절창을 얻기 위해선 언어를 버려라.
음률의 결을 고르는 경지
돌아가는 길이다
술 한 잔 걸쳤겠다
곤드레 만드레
제 흥에 겨웠다
적적한
한밤의 밤길이다
기러기도
울며 간다
— 최승범 〈귀갓길〉 《현대시조》 여름호
감꽃
필 때였나
찔레꽃
질 때였나
봄비가
왼종일
산녘에서
내렸었지
뉘 목어
울음인지 몰라
가슴에서 그친
그 빗소리
— 신웅순 〈어머니 74〉 《시조미학》 가을호
위의 두 작품을 두고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최승범의〈귀갓길〉은 한잔 거나하게 걸치고 돌아가는 가을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곤드레 만드레”라곤 하지만 인사불성은 아니다. “제 흥에 겨”운 사내가 볼 건 다 보고 노래할 건 다 하면서 걷는다. 기분 좋을 만큼이지 대취는 아니다. 대취했다면 “한밤의 밤길”이 “적적”할 리가 있겠는가. 어쨌든 취기는 오르고, 오줌은 마렵고, 기러기 울며 가는 소리에 으스스 한기도 느끼는 밤이다.
신웅순의 〈어머니 74〉는 흥겨움과는 거리가 있지만 아련한 서정이 손끝을 저며 온다. 사실 시인들은 어머니를 노래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어머니를 소재로 하면 잘 쓴 시도 어머니 이상의 것을 넘지 못하리란 우려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시인은 어머니 연작을 수십 편이나 쓰고 있으니 그 마음이 절절하다. “감꽃/ 필 때였나/ 찔레꽃/질 때였나” 초장의 음률이 절창이다. 그렇게 던지고 난 후 중장에선 봄비 내린 산녘을 추억하고 종장에선 빗소리 그치지 않았지만 “뉘 목어” 울음에 그만 먹먹해져서 가슴엔 비가 멎는다. 그래서 “가슴에서 그친/ 그 빗소리”로 장을 맺고 닫는다.
이 두 수의 시조는 빛깔은 다르지만 어딘지 닮은 데가 있다. 앞의 시는 흥에 겨워 툭툭 던지는 어투가 맛깔스러운데 이는 어미 ‘다’를 중복하면서 자연스레 음악을 만들어 낸다. 뒤의 시는 첫 수의 시작부터 “감꽃”과 “찔레꽃”을 차용해 와 음운의 결을 고르고, “봄비”와 그친 빗소리를 나열하며 시상을 점점 고조시키는 묘미를 보여준다. 질박함도 함께 느껴진다. 최승범 시인은 1958년 등단한 원로시인이고, 신웅순 시인은 1985년 등단한 중진 시인이다. 이 정도의 시력이라야 단수시조의 참맛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