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 11/22
1906 - 조난신호 SOS(...---...) 채택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 무선 전신대회에서 SOS(...---...)를 국제 무선 부호로 인정 마르코니는 무선전신기를 처음 발명하고, 영국·캐나다 간 대서양을 횡단하는 무선전신을 성공시켜 이 분야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자신의 무선전신기를 선적한 배에 한해 육지와 교신할 수 있도록 배타적으로 무선전신 체계를 운영해 다른 나라들로부터 반발을 샀다. 1906년 11월 22일 29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독일 베를린에서 처음 개최된 국제무선전신회의는 국제적인 무선전신 규약을 제정해 해상에서 잇따르는 대형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이 우선이었지만 마르코니에 대한 반발심도 일부 작용한 회의였다. 상호통신 의무, 조난통신 절대 우선권 등의 무선조약도 결정됐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조난신호로 ‘SOS’가 채택됐다는 데 있었다. 그 전까지는 마르코니사가 정한 ‘CQD(come quick danger)’가 조난신호로 사용됐으나 기상이 나쁘면 수신이 불량했고, 모스부호로 각각 세 번씩 짧게, 길게, 짧게 보내는 SOS보다 전송과 해독이 어려웠다. ‘save our souls’ ‘save our ship’의 약자라는 설이 있으나 그저 일설에 불과할 뿐이다. SOS 신호로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은 1912년에 침몰된 타이타닉호였다. 해운사상 전례없는 대참사에서 700명 이상의 생존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SOS 덕분이었다. 100년 가까이 조난신호의 대명사로 쓰여왔으나 1999년 국제해사기구(IMO)가 모스 부호를 폐기하고 조난신호를 인공위성을 이용한 새로운 신호로 대체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조선
1902 - 프랑스의 장군, 전쟁 영웅 르클레르(Leclerc, Jacques-Philippe) 출생 르클레르 [Leclerc, Jacques-Philippe, 1902.11.22~1947.11.28]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프랑스 자유군 사령관으로 활약했던 레지스탕스 운동가이자 군인이다. 1902년 프랑스 북부에서 오트클로크 백작 아드리앙(Adrien de Hauteclocque, 1864~1945)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많은 중세 기사들과 군 장교를 배출한 명망 높은 귀족가문이었다. 1924년 22살의 나이로 생 시르 육군사관학교(École spéciale militaire de Saint Cyr)를 졸업한 뒤 곧바로 군에 입대하였다. 본명은 필립 프랑수아 마리(Philippe François Marie)였으나 프랑스에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염려해 자크 필립 르클레르(Jacques Philippe Leclerc)란 예명을 사용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으로 후퇴해 전선을 유지했던 자유프랑스군 제2기갑사단을 이끌었다. 그의 부대는 샤를 드골의 지휘 아래 있었던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핵심 군대였다. 영국군과 힘을 합친 르클레르의 부대는 독일과 연대했던 이탈리아군을 공격했다. 또한 연합군과 함께 독일에 빼앗겼던 프랑스 도시들을 하나씩 해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북부 도시들에 이어 1944년 8월 파리 탈환에도 성공을 거두었다. 르클레르의 부대는 몽파르나스 지역에 거점을 두고 활약했는데 오늘날 몽파르나스 역사 건물에는 르클레르의 업적과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파리 해방의 날과 르클레르 드 오트클로크 기념관(Mémorial du maréchal Leclerc de Hauteclocque et de la Libération de Paris)’이 들어서 있다. 파리 탈환에 성공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7년 알제리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세상을 떠난지 5년 뒤인 1952년 르클레르는 프랑스 군대원수(Maréchal de Franc)로 추대되었다. <주나미> /naver 1901 - 스페인의 작곡가 로드리고(Rodrigo, Joaquin) 출생 로드리고 [Rodrigo, Joaquin, 1901.11.22~1999.7.6] [역사 속의 인물] 토요명화 시그널 '아랑훼즈 협주곡' 지은 로드리고 십수 년 전만해도 공중파에서 틀어주던 영화는 영화팬들의 필시청 프로그램이었다. 짠짠짠짠♬ 짠짠짠짠♬. 토요일 밤마다 울려 퍼지던 KBS 토요명화에서 시그널로 사용된 곡은 '아랑훼즈 협주곡'의 제2악장 아다지오 도입부이다. 기타와 관현악이 엮어내는 스페인 풍의 정열과 색채감 있는 선율로 유명한 아랑훼즈 협주곡은 스페인의 작곡가인 호아킨 로드리고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아랑훼즈 협주곡은 로드리고가 평생 동반자이자 음악적 친구인 아내 빅토리아를 위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1년 오늘 태어난 로드리고는 3살 때 거의 실명을 해 앞을 보지 못했다. 작곡가로서는 엄청난 핸디캡이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만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는 점자로 악보를 쓰면서 예술혼을 펼쳐나갔다. 그가 파리에서 유학하던 시절, 빅토리아는 첫 아이를 유산한 뒤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아팠다. 가난과 삶의 무게로 허덕이던 로드리고는 자신의 신혼여행지였던 아랑훼즈의 아름다운 풍경과 18세기 궁전 정경, 아내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곡을 썼다. 스페인 마드리드 남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 아랑훼즈는 로드리고의 음악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1997년 7월 6일 로드리고가 타계하자 아랑훼즈시는 3일 동안을 애도의 날로 정했고 모든 공식 행사를 취소하기도 했다. 김해용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3.11.22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7780&yy=2013
1898 - 미국의 비행기 조종사 포스트(Post, Wiley) 출생 포스트 [Post, Wiley Hardeman, 1898.11.22~1935.8.15] 윌리 핼드맨 포스트(Wiley Hardeman Post, 1898년11월 22일~ 1935년8월 15일)는 비행기로 세계 일주에 성공한 최초의 비행사이다. 미국텍사스 주 반잔트에서 태어난 그는 고도를 높게 택해 비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가 입었던 비행복은 기압복의 원류 중 하나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가 사용했던 비행기는 합판으로 외압을 견디는 모노코크 구조였는데 현재 미국 국립항공우주박물관의 우드바-헤지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비행복도 진열 준비 중이다. 포스트는 1935년8월 15일 작가 윌 로저스와 비행하던 중 알래스카 최북단점 중 하나인 배로우 포인트(Barrow Point) 인근에서 늪가에 비행기가 충돌하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위키백과 1899 - 미국의 작곡가, 가수, 배우 카마이클(Carmichael, Hoagy) 출생 카마이클 [Carmichael, Hoagy, 1899.11.22~1981.12.27] 본명은 Hoagland Howard Carmichael. 미국의 작곡가·가수·배우.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빅 밴드 시절 인기 있는 노래를 많이 작곡했다. 블루밍턴의 인디애나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1926 법학사학위) 코넷 연주자인 빅스 바이더베크 등 재즈 연주가들을 알게 되어 그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지을 정도로 큰 영향을 받았다. 첫 작품 〈리버보트 셔플 Riverboat Shuffle〉은 재즈의 고전이 된 곡으로, 1924년 바이더베크와 시카고의 재즈 그룹 '울버린스'의 연주로 녹음되었다. 계속해서 〈내 마음속의 조지아 Georgia on My Mind〉(1930)·〈로킹 체어 Rockin' Chair〉(1930)·〈유유히 흐르는 강 Lazy River〉(1931) 등 일련의 대중적 노래들을 작곡했고 선율 구조와 흥미로운 화성으로 루이 암스트롱, 잭 티가든 등 많은 연주가들을 매혹시켰다. 할리우드에서는 처음에는 작가로, 나중에는 성격배우로 활동하면서 〈Thanks for the Memory〉(1938)·〈Two Sleepy People〉(1939)·〈In the Cool Cool Cool of the Evening〉(1951, 이 노래로 아카데미상 수상) 등의 히트 곡을 내놓았다. 가장 성공을 거둔 노래는 〈스타더스트 Stardust〉(1927)이다. 1970년대에도 작곡활동을 하면서 또한 배우로도 활동했다. 그가 출연한 영화로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To Have and Have Not〉(1944)·〈케니언의 통로 Canyon Passage〉(1946)·〈호른을 가진 젊은 남자 Young Man with a Horn〉(1950) 등이 있다. 2권의 자서전 〈스타더스트 로드 The Stardust Road〉(1946)·〈때때로 나는 방황한다 Sometimes I Wonder〉(1965)를 저술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드골 [de Gaulle, Charles(-Andre-Marie-Joseph), 1890.11.22~1970.11.9] 드골은 프랑스의 제5공화정을 건설한 군인·저술가·정치가이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로마 가톨릭계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수료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 6월 18일 독일과의 전투를 계속할 것을 프랑스 국민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휴전이 선포되고, 7월 9~10일 비시 프랑스가 수립되자 '자유 프랑스군'을 조직하여 자타가 공인하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의 대표가 되었다. 1965년 드골은 7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자 알제리를 프랑스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고, 경제성장, 통화안정, 안정된 정부 운영을 위해 노력했다. 1968년 5월 3일 파리 대학생들의 소요로 인한 위기가 심화되자 그는 국민투표에서 헌법 수정안이 부결되면 사임하겠다고 약속했다. 1969년 4월 27일 헌법 수정안이 부결되자 그날 밤으로 집무실을 떠났다. 1970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저서로 1924년 독일 내 민간정부와 군부세력의 갈등을 다룬 <적의 내분 La Discorde chez I'ennemi>, 리더십에 관한 견해를 피력한 <칼날 Le Fil de I'epee>(1932), 군사이론서인 <미래의 군대 Vers l'armee de metier>(1934)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프랑스의 검을 휘둘러야 할 의무를 지닌 자들이 오히려 칼을 땅에 내동댕이쳐 산산조각낸 까닭에 나는 깨진 칼날을 집어들었다. "
- 샤를 드골, 1940
1890 - 영국의 공산주의자 폴리트(Pollitt, Harry) 출생 폴리트 [Pollitt, Harry, 1890.11.22~1960.6.27] 영국의 공산주의자. 영국 공산당 서기장(1929~39, 1941~56)과 위원장(1956~60)을 역임했다. 그의 아버지는 공장노동자이자 노동조합주의자였으며, 어머니는 직물을 생산하는 마을에서 직공으로 일했다. 1903년 13세가 되던 해에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직조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보일러 제조공이 되어 그곳의 노조지도자가 되었다. 1920년 영국 공산당의 창당을 도왔으며, 1921년 제3인터내셔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가 그곳에서 레닌을 만났다. 1925년 선동적인 비방과 폭동 주도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며(1934년에 기소된 선동죄 재판에서는 무죄로 풀려남), 1929년 그는 당서기장으로서 당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폴리트는 1939년 9월 3일 독일에 대한 영국의 선전 포고를 열성적으로 지지했으나 2주 후 모스크바의 공식노선이 바뀌어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게 되자 폴리트는 그 사실에 모순을 느끼며 당황해 했다. 그는 서기장직에서 축출되었으나 1941년 6월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당서기장으로 복귀했다. 1956년 다시 한번 뜻밖의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스탈린을 찬양하고 있는 동안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0차 당대회 비밀회의에서는 이전의 소련 지도자였던 스탈린을 비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다시 서기장직에서 물러나 이번에는 명색뿐인 영국 공산당 위원장직을 맡게 되었다. 1940년에는 자서전 〈이 시대에의 봉사 Serving My Time〉가 출간되었다. /브리태니커
1889 - 레바논의 작가 나이마(Naimah, Mikhail) 출생 나이마 [Naimah, Mikhail, 1889.11.22~1988.2.28] Nouayme, Naimy라고도 씀. 레바논의 문학평론가·극작가·수필가·단편작가. 아랍의 산문소설에 근대적인 사실주의를 도입하는 데 이바지했다. 레바논·팔레스타인·러시아·미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미국 워싱턴주립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뉴욕에 정착하여 언론인으로 일하는 한편, 미국에서 출판된 아랍어 작품에 대한 평론을 썼고 아랍 작가인 할릴 지브란과 교분을 맺었다. 1932년 그는 존경 받는 작가가 되어 레바논에 돌아와 고향에 정착했다. 단편소설에서 레바논의 사회문제를 이전의 아랍 작가들보다 더 사실적이고 세련된 기법으로 묘사했다. 그의 단편집에는 〈생의 단계들 al-Marāhil〉(1933)·〈옛날 옛적에 Kana ma kāna〉(1937)·〈탈곡장 alBayādir〉(1945)이 있다. 그밖의 뛰어난 저서로는 지극히 주관적으로 쓴 지브란의 전기(1934)와 자서전 〈일흔 Sabun〉(3권, 1959~60)을 들 수 있다. /브리태니커
1877 - 헝가리의 시인 오디(Ady, Endre) 출생 어디(오디) [Ady, Endre, 1877.11.22~1919.1.27] 헝가리의 시인. 1877년 11월 2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보들레르와 베를렌의 작품에 심취하였다. 데브레첸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으며, 1904~1911년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파리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하면서 프랑스상징파의 영향을 받았다. 귀국한 뒤 진보적 서구파의 문예지 《뉴고트 Nyugat;서방(西方)이라는 뜻》를 주재하여 문단의 보수파와 맞서고, 사회주의 사상과 데카당스가 교차하는 급진파의 시인·평론가로 활약하였다. 《뉴고트》는 헝가리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잡지로 평가받는다. 1899년 처녀시집 《시 Versek》를 펴냈고, 1906년 《신시집 Uj versek》을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이밖에 《피와 금 Vér és arany》(1907) 등 모두 10편의 시집을 출간했으며, 소시민 생활의 속물성을 날카롭게 파헤친 단편소설과 수필집 등도 남겼다. 관례를 벗어난 시어와 색다른 형용사의 사용 등 그의 시에서 드러나는 격렬한 표현과 사상은 신세대와 구세대 사이에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등장은 20세기 헝가리 문학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헝가리 최고의 서정시인으로 꼽힌다. 1918년 10월 뵈뢰스마르티 아카데미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19년 1월 27일 부다페스트에서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하였다. /naver
1869 - 프랑스의 소설가 지드(Gide, André) 출생 지드 [Gide, André, 1869.11.22~1951.2.19] 프랑스의 소설가. 1869년 11월 22일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신교도이며 파리 법과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가톨릭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엄격한 종교적 계율을 강요한 어머니 밑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그 무렵에는 병약하고 학업습득도 불규칙하여 지능발달도 늦은 편이었으나, 18세경부터 문학에 대한 열정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891년 종매(從妹)에 대한 열띤 사랑의 표현을 짙게 담은 《앙드레 발테르의 수기 Cahier d’Andre Walter》가 최초의 작품이다. 그 후 그는 S.말라르메의 영향을 받아 상징주의적인 발상에서 《나르시스론 Traite du Narcisse》(1893)을 비롯한 몇 편의 수상집·시·소설 등을 썼다. 이 초기작들을 보아도 벌써 육체적 욕망과 정신적 사랑의 갈등이나 자아에 대한 심리적 분석과 같은 테마가 밑에 깔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것은 1893년의 아프리카 여행이었다. 아프리카의 작렬하는 태양과 야성적 풍토는 지금까지 그를 묶어온 엄격한 그리스도교적 윤리에서의 해방을 가져왔으며, 모든 구속에서 풀려난 강렬한 생명력을 향유하는 것이 삶의 길임을 가르쳐주었다. 《팔뤼드 Paludes》(1895)는 문학이라는 미명하에 심미적·정신주의적 언어에 묶였던 자신에 대한 고별사와 같은 것이며, 《지상의 양식 Nourritures terrestres》(1897)은 그 힘찬 시적(詩的) 산문을 통하여 새로 체험한 육체의 복권과 생명력의 분출을 노래한다. 그의 최초의 본격적인 소설인 《배덕자 L’Immoraliste》(1902)도 모든 인습을 무시하고 이 새로운 생명의 기쁨을 끝까지 추구하려는 당시의 지드의 변신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렇듯 삶이 베풀어 주는 기쁨을 최대한으로 향유하겠다는 자세에 지드 문학의 독특한 출발점이 있다. 그러나 그의 문학과 사상은 그것에만 얽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변신을 거듭하면서 삶의 온갖 측면을 통찰하고 문학의 여러 가능성을 실험해 나갔다. 지드의 진실한 특징은 바로 이 규정지을 수 없는 다양성 속에 있는 것이다. 《좁은 문 La Porte etroite》(1909)과 《전원교향곡 La Symphonie pastorale》(1919)은 내적 자아를 살피는 프랑스 특유의 모랄리스트들의 전통을 이은 작품으로서, 종교적 계율이 가져오는 위선과 비극을 그렸다. 이러한 내적 자아의 성찰은 그 이후에도 《여인학교 L’ cole des femmes》(1929)를 비롯한 다른 작품으로 이어진다. 한편, 《교황청의 지하실 Les Caves du Vatican》(1914)에서는 인습적인 도덕을 초월한 절대적 자유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동기 없는 ‘무상의 행위’로서의 살인을 하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보기도 한다. 또 이와 반대로 지드는 전적인 자유와 육체적 환락이 결국은 자아의 파탄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이런 생각이 종교적 율법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그의 희곡 《사울 Saul》(1903)에 반영되고, 또한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성서에 대해서 가진 비상한 관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변신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살피고 자신의 길을 걸어간 지드의 정신적 노정을 그의 자서전 《한 알의 밀이 죽지 않는다면 Si le grain ne meurt》(1924)과 그의 《일기 Journal》(1939∼1950)를 통해서 소상히 알 수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 《테제 Thesee》(1946)는 육체와 정신, 자유와 규율 등의 양 극단의 조화를 삶의 가장 높은 형식으로 삼으려는 그의 문학적 결론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지드에 대한 평가는 일정하지 않고 그의 작품들에 대한 해석도 가지가지이다. 그러나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그의 중요한 역할을 인정하는 데는 모두 의견이 일치하였다. 하나는 그가 1909년 이후 《신프랑스 평론 Nouvelle Revue Fran aise》지(誌) 주간의 한 사람으로서 프랑스 문단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어 20세기 문학의 진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가 유일하게 ‘소설’이라고 지칭한 《사전꾼들 Les Fauxmonnayeurs》(1926)을 발표함으로써 현대소설에 준 자극이다. 이 작품은 종래의 소설 관념을 타파하고 새로운 형식과 구성을 시도한 획기적인 작품이다. 지드의 다양성은 창작 이외에 사회적 관심과 비평활동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그의 《콩고 여행 Voyage au Congo》(1926)은 프랑스 식민주의에 시달리는 원주민의 참상을 여지 없이 폭로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후 그의 사상은 좌경하여 공산주의로의 전환을 선언하였으나, 1936년에는 《소련기행 Retour de L’URSS》을 발표하여 그 나라의 문화적 폐쇄성과 획일주의를 통렬히 비난하였다. 한편 평론가로서의 지드의 활동도 의의가 깊다.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론》을 비롯한 여러 논문에서 외국문학을 새로운 각도에서 소개·해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문학에 관한 비평에서도 종래의 견해를 뒤엎는 형안(炯眼)의 소유자였다. 1947년 그에게 수여된 노벨문학상은 문학의 감성과 지성을 다각적으로 재검토하고 갱신한 그의 평생의 공적에 대한 당연한 찬사라고 하겠다. /naver
1863 - 중국의 화가 치바이스[齊白石] 출생 치바이스 [齊白石, 1863.11.22~1957.9.16] 호 바이스[白石]. 이름 황[璜]. 후난성[湖南省] 출생. 40세무렵까지 고향에서 소목장(小木匠)을 업으로 하면서 생계유지를 위해 그림을 그리다가 화초·영모(翎毛:가축이나 가금)·초충류(草蟲類)의 명수로 알려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송(宋)·원(元)의 그림에 촉발되고, 육방옹(陸放翁)의 시에서도 자극을 받아 시·서·화를 배웠으며, 전각(篆刻)에도 솜씨가 있었다. 50세 이후 베이징[北京]으로 이사하여 한때 미술전문학교 교수가 된 적도 있다. 그의 그림은 점차 석도(石濤)·서위(徐渭)·주탑(朱?:八大山人) 등 양저우계[揚州系] 화풍이 되었고, 자유롭게 감흥을 표현하는 중국문인화의 도미(掉尾)를 장식하였다. 《화훼화책(花卉畵冊)》 《하엽도(荷葉圖)》 《남과도(南瓜圖)》 등의 작품이 있다. /naver
1861 - 메리나 왕국의 마지막 왕 라나발로나 3세(Ranavalona III) 출생 라나발로나 3세 [Ranavalona III, 1861.11.22~1917.5.23] 라나발로나 3세(Ranavalona III)는 메리나 왕국(現 마다가스카르 공화국)의 마지막 왕으로써, 1883년부터 1897년까지 재위했다. 1897년에 프랑스의 의해 폐위되었고, 1917년 알제리에서 죽었다. /위키백과
1850 - 중국 청나라의 정치가 임칙서[林則徐] 사망 임칙서[林則徐, 1785.8.30~1850.11.22] 자 소목(少穆). 호 사촌노인(竢 村老人). 푸젠성[福建省] 출생. 1811년 진사(進士) ·지방관을 역임하며 수리사업(水利事業)에 힘쓰고, 승진을 거듭하여 장쑤순무[江蘇巡撫] ·양강(兩江)총독을 거쳐, 1837년 후광[湖廣]총독이 되었다. 이듬해 황제 도광제(道光帝)의 자문(諮問)에 응하여 아편(阿片)의 엄금책(嚴禁策)을 진언(進言)하고, 임지(任地)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이로 인하여 1839년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발탁되어 광둥[廣東]의 아편무역의 단속을 명령받고, 영국상인들이 소유한 아편을 몰수하여 2만여 상자를 불태우고, 아편상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는 등 강경수단을 써서 아편밀수의 근절을 꾀하였다. 전부터 중국의 개항(開港)과 자유무역 실현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영국은 자국 상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임칙서는 해외사정을 연구하며 군비(軍備)를 강화하는 한편, 관민(官民)의 협력을 얻어 영국군에 저항하였으나, 오히려 타협파(妥協派) 관료들에 의하여 전쟁도발자로 몰리게 되었고, 1840년 청나라 조정이 강화(講和)로 기울자 그는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이듬해 이리[伊犁]로 유배되었다. 후에 복직이 허락되어 1845년 산간[陝甘]총독, 1847년 윈구이[雲貴]총독을 역임하였다. 1850년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흠차대신 광시순무[廣西巡撫]에 임명되어 부임 도중 병사하였다. 저서에 《임문충공정서(林文忠公政書)》 《임문충공유서(遺書)》 《신급록(信及錄)》 등이 있다. /naver
1842 - 쿠바 출생의 프랑스 시인 에레디아(Hérédia, José Maria de) 출생 에레디아 [Hérédia, José Maria de, 1842.11.22~1905.10.2] 쿠바 출생. 에스파냐인을 아버지로, 프랑스인을 어머니로 하며, 일찍이 프랑스로 건너가 교육을 받고 시인이 되었다. 고답파의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인 르콩트드릴(1818∼1894)에게 사사(師事)하여, 완벽한 기교를 구사한 소네트를 지었다. 1893년에 《트로피 Les Trophees》라는 제목으로 첫시집을 내놓았는데, 이 한 권의 시집으로 아카데미프랑세즈의 회원이 된 것은 이례적이었다. 고대·그리스신화, 로마·중세·동양·열대·자연·꿈 등, 다양한 소재와 잘 다듬어진 문체로 대상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완벽하게 조형적으로 아로새기는 전형적인 고답파 시인이다. 회화적이며 환상이 넘치는 그의 시풍이 후대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다. 시 작품 외에는 에스파냐 작가의 불역(佛譯)이 2편 있을 뿐이다. /naver
1819 - 영국의 여류소설가 엘리엇(Eliot, George) 출생 엘리엇 [Eliot, George, 1819.11.22~1880.12.22] 본명 에반스(Mary Ann Evans). 소녀시절은 영국 중부의 벽촌에서 강한 종교적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으나 성장함에 따라 실증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입장에 섰다. 1854년 철학자이며 비평가인 G.H.루이스와 사랑하게 되어 동거생활로 들어갔다. 루이스는 그녀의 예술상의 훌륭한 조언자로, 1857년에 그녀가 최초의 소설 《에이모스 바튼 Amos Barton》을 쓴 것은 오로지 루이스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다음해 다른 두 작품과 함께 《목사생활의 정경(情景)》에 종합 정리되었으며, 계속하여 전원생활을 무대로 한 《애덤 비드 Adam Bede》(1859), 《플로스 강변의 물방앗간 The Mill on the Floss》(1860), 《사일러스 마너 Silas Marner》(1861)를 발표하고, 그후의 대작 《미들마치 Middlemarch》(1871∼1872), 《다니엘 데론다》(1876)를 집필하였다. 멋진 심리묘사와 도덕·예술에 대한 뛰어난 지적(知的) 관심에 의해 20세기 작가의 선구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naver
1787 - 덴마크의 언어학자 라스크(Rask, Rasmus) 출생 라스크 [Rask, Rasmus Kristian, 1787.11.22~1832.11.14] 독일 브란데킬데 출생. 독일의 F.보프가 산스크리트의 동사 조직에 관한 비교연구를 발표하기 전에 《고대 노르드어 또는 아이슬란드어의 기원 연구》로써 1814년 아카데미상을 받아 보프와 더불어 비교문법의 선구자가 되었다. 1818년에 펴낸 고대 아이슬란드어 연구에서 게르만의 여러 언어와 그리스어, 라틴어, 발트의 여러 언어, 슬라브의 여러 언어들 사이의 음운 대응의 규칙성을 제시하였고, 이러한 여러 언어가 서로 가까운 관계에 있다는 것을 시사함으로써 J.그림 이전에 그 법칙의 사실을 지적하여 역사적 비교방법의 원칙을 확인하였다. 이 밖에 핀우고르의 여러 언어의 연구가 있고 페르시아어와 팔리어 등의 문헌을 수집하여 비교언어학의 발달에 공헌하였다. /naver
1767 - 오스트리아의 애국자, 군사지도자 호퍼(Hofer, Andreas) 출생 호퍼 [Hofer, Andreas, 1767.11.22~1810.2.20] [역사 속의 인물] 충성한 조국에 배신당한 안드레아스 호퍼 안드레아스 호퍼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여관을 운영하면서 술과 가축 매매를 하는 등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남다른 애국심을 지닌 인물이었고 이 때문에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후대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1767년 오늘, 오스트리아의 티롤에서 태어난 호퍼는 30대의 나이에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감행한 유럽 정복에 직면하게 된다. 1805년 티롤이 나폴레옹의 동맹국이었던 바이에른 왕국에 넘어가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해 강한 충성심을 지녔던 그는 티롤을 오스트리아로 되돌리려고 노력했다. 그는 민중 봉기를 선동해 군대를 편성,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고 1809년 8월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바이에른 군을 물러나게 했다. 호퍼는 티롤의 총사령관을 자처하며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묵인 아래 행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프란츠 1세는 나폴레옹에 대항해 결성한 동맹군이 전투에서 패하자 티롤을 양도하고 호퍼의 처리 문제도 프랑스에 넘겼다. 호퍼는 이에 저항을 계속할지,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사이 프랑스군에 붙잡혀 1810년 2월에 처형됐다.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애국자로 추앙받는 그는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구했으나 샤를 7세의 외면 속에 화형 당한 잔 다르크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2년 11월 22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2302&yy=2012
1744 - 미국의 서간문 작가 애덤스(Adams, Abigail) 출생 애덤스 [Adams, Abigail, 1744.11.22~1818.10.28] 신생 공화국의 생활상을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한 수많은 편지를 썼으며,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아내이자 제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의 어머니이다. 애비게일 애덤스는 비록 정식 교육은 별로 받지 못했지만 매우 박식했고, 특히 역사서적을 탐독했다. 1764년 보스턴의 젊은 변호사 존 애덤스와 결혼한 뒤, 두 사람은 평생 동안 서로 존중하고 도와주는 이상적인 부부생활을 했다. 네 아이를 낳은 뒤 1774년부터 10년 동안 대부분 남편과 헤어져 살았는데, 그녀는 퀸시에 있는 집에서 아이들을 키워야 했고 존 애덤스는 필라델피아의 대륙회의에서 연방의 일을 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별거생활은 수많은 편지를 낳았고, 그결과 서간문 작가로서 애덤스 부인의 비범한 재능이 꽃을 피우게 되었다. 애덤스 부인은 꾸밈 없는 문체로 혁명시대의 주요사건들에 대한 견해와 사소한 일상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매력적으로 조화시키면서 당시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식민지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할 필요성을 강력하게 지지했고, 여권운동을 옹호하면서 특히 여성도 교육받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노예제도를 맹렬히 반대했다. 1783년 평화조약이 체결된 뒤, 외교관으로 파견된 남편과 합류해 파리·헤이그·런던에서 생활했다. 고국에 있는 친구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도 당시의 풍속과 관습에 대한 다채로운 기록이 담겨 있다. 존 애덤스가 미국 부통령과 대통령으로 일한 1789~1801년에 매사추세츠 주와 필라델피아(임시 수도)를 왕래하면서, 남편과 헤어져 있을 때는 또다시 수많은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1800년 11월 중순에 워싱턴 D. C.의 포토맥 강변에 새로 지은 백악관의 안주인이 되었다. 은퇴 후 17년 동안 애덤스 부부는 매사추세츠의 집에서 조용히 은둔생활을 했다. 애덤스 부인의 서간집(1840, 1876, 1947, 1963)이 잇따라 출판될 때마다, 대중은 미국 초기 역사에 관한 독창적인 자료를 제공해준 그녀의 공로를 새롭게 인식했다. 그녀의 전기를 로라 E. 리처드(1917)와 재닛 휘트니(1947)가 썼고, 1981년에 린 위데이가 쓴 〈다정한 친구:애비게일 애덤스의 생애 Dearest Friend:A Life of Abigail Adams〉가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718 - 영국 출신의 악명 높은 해적 검은수염(Blackbeard) 사망 티치 [Teach, Edward "Blackbeard", 1680~1718.11.22] 검은 수염 에드워드 티치(Edward Teach "Blackbeard", 1680년 ~ 1718년 11월 22일)는 카리브 제도와 미주 동부 해안에서 활동하던 18세기의 악명높은 영국계 해적이다. 영국의 브리스틀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데, 1716년에 티치는 벤저민 호르니골드의 해적단에 입단해 신속히 자기 기선 퀸 앤스 리벤지 호를 차지하고 1717년에서 1718년까지 악명 높고 무시무시한 해적으로 활동했으며, 뻑뻑한 검은 수염과 공포스러운 외모 때문에 검은 수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티치는 적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자기 모자 밑에 불 붙은 도화선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호르니골드 해적단에서 독립한 후, 티치는 해적 동맹을 결성했고 자기 패들과 함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을 봉쇄했다. 항구 주민들의 몸값을 성공적으로 뜯어낸 후 자기 배를 타고 돌아다니던 티치는 왕실 사면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티치는 곧바로 바다로 되돌아왔고, 이에 영국령 아메리카 버지니아 주의 주지사 알렉산더 스포츠우드는 티치의 추적과 체포를 위해 한 무리의 군인들과 항해사들을 소집한다. 결국 1718년 11월 22일에 발각당하고, 혈투 끝에 로버트 메이너드가 지휘하는 해병들에게 살해당했다. /위키백과
1643 -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탐험가 라살(La Salle, Robert de) 출생 라살 [La Salle, Robert Cavelier de, 1643.11.22~1687.3.19] 루앙 출생. 가톨릭계 예수회파의 교육을 받았다. 1666년 캐나다의 몬트리올로 이주하여 1669∼1670년에 온타리오호(湖) ·이리호의 남부를 탐험하였다. 캐나다 총독 프론테나크에게 인정을 받고, 1674년에 총독의 대표로 프랑스에 파견되어 미시시피강(江) 유역 교역의 독점권을 획득하였다. 1679년 미시간호의 서안으로 남하, 세인트 조셉강 하구에 도달하여 마이애미 성채(城砦)를 축조한 후, 다시 일리노이강으로 나아가 미시시피강 상류에 도달하였다. 1682년 4월 마침내 그가 바라던 미시시피강 하구에 도달함으로써 미시시피강 유역 전체를 프랑스의 루이 14세 치하에 둔다고 선언하고, 이 지방을 ‘루이지애나’로 명명하였다. 이 광대한 지역의 자원을 지키기 위해 그 해 12월 일리노이 강안(江岸)에 세인트루이스 성채를 축조하였으며, 시카고에도 중계지를 두는 등 그의 공적이 인정되어 루이지애나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684년 프랑스로부터 이민 희망자를 데리고 갔다가 이민계획에 실패하여 돌아오던 길에 그 사람들의 손에 죽었다. /naver
1594 - 영국의 항해가, 탐험가 마틴 프로비셔(Frobisher, Martin) 사망 프로비셔 [Frobisher, Martin, c.1535~1594.11.22] 영국의 항해가. 캐나다 북동해안의 초기 탐험자였다. 1576년 프로비셔는 배 3척을 이끌고 태평양으로 가는 북서항로를 찾기 위해 영국을 떠났다. 래브라도와 배핀 섬을 탐험한 이들은 영국으로 돌아가 금광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1577, 1578년 같은 지역에 대한 2차례의 원정으로 허드슨 만을 발견했지만 금을 찾지 못했고, 식민지를 건설하려던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1585년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의 서인도 제도 원정대에 부대장으로 참가했고, 3년 뒤에는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전투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1591년에는 함대를 지휘하여 아조레스 제도에서 스페인 보물섬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594년 프랑스 서해안에서 벌인 스페인군과의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그해에 죽었다. /브리태니커
역사속의 오늘-바스코 다 가마 희망봉 통과 1497년 11월 22일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이끄는 4척의 선대가 아프리카 남단 ‘폭풍의 곶’을 도는 항해를 감행했다.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석주를 세우고 귀환한 바로 그 장소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같은 해 7월 8일 170명의 선원들과 인도항로 개척이라는 사명을 갖고 리스본항을 떠난 지 4개월여 만이었다. 다 가마 선대의 모험은 당시 유럽의 동방무역에 획기적인 일이었다. ‘항해왕’ 엔리케의 꿈이 그의 사후 20여 년 만에 현실화의 기반을 놓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1499년 항해 시작 26개월 만에 귀항했을 때 왕인 후안 2세는 ‘폭풍의 곶’을 아예 ‘희망의 곶(Cabo da Boa Esperana)’으로 개명하기까지 했다. 다 가마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귀족이 되고 연금까지 받았다. 새로운 항로 개척이었던 만큼 다 가마 선대의 항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긴 항해로 인한 영양분 부족과 질병, 이슬람 국가들의 경계도 조심해야 했다. 인도와의 독점무역에 위협을 느낀 이슬람 상인들의 방해도 받았다. 돌아가는 길에는 폭풍우 등으로 선원의 절반을 잃어야만 했다.불굴의 도전 정신이 아니었다면 이뤄지지 않을 업적이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5년 11월 2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4037&yy=2005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