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함'은 없고, '신채호함' '홍범도함'은 있다! 한국 해군은 삼국통일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자의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건가? 홍범도함이 공산군에게 어뢰를 쏠 수 있나? 趙甲濟
'김유신함'은 없고, '신채호함' '홍범도함'은 있다! -한국 해군은 삼국통일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자의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건가? 홍범도함이 공산군에게 어뢰를 쏠 수 있나? -김일성 세력과 신채호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韓民族을 만든 金庾信! -한국인 50% 이상이 신라계 姓氏, 김유신 매도는 조상에 침뱉기 -한국 보수는 "민족사의 로마" 신라에서 활로를 찾아야! 趙甲濟(조갑제닷컴/TV대표) 신채호함과 홍범도함의 문제 지난 4월5일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3000t급 잠수함 '신채호함' 인도식이 있었다. 신채호는 편협한 민족주의적 관점에 사로잡혀 삼국통일을 사대주의라고 부정하고 민족통일 국가를 만든 1등 공신 김유신(金庾信)을 감정적으로 비방한 사람이다. <조선상고사>에서 그는 삼국사기 등에 적힌 김유신의 전공(戰功)을 거의 허위로 몰고 "음험하고 사나운 정치가로서 이웃 나라를 어지럽힌 인물"이라면서 백제 왕실에 대한 성공적인 분열공작까지도 순진한 민족감정으로 매도했다.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 이름을 국군 함정 이름으로 새겨 기릴 수 있나? 민족이란 개념은 동양에서는 없었고, 19세기 유럽에서 만들어졌다. 일본을 통해서 수입된 '민족'(번역 자체가 틀렸다. 국민으로 번역했어야)을 흉기화하여 자주적 통일의 화신(化身) 같은 존재인 김유신을 매도하는 사람을 숭앙하는 것은 조국뿐 아니라 조상에 대한 자기 부정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인의 원형(原型)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의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 해군은 새 잠수함에 공산주의자 '홍범도함'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가 항일운동을 한 것은 소련을 위한 일이었지 대한민국의 독립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항일운동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일제(日帝)보다 못한 스탈린식 전체주의를 세우기 위한 것임으로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없다. 육사(陸士)에 설치된 홍범도 흉상 이전도 아직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남북간 대결은 민족사의 정통성과 삶의 양식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다. 남북한 사이 다시 전쟁이 터지면 이는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체제대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자를 기리는 한국 잠수함은 공산군을 향해서 어뢰를 쏠 수 있나? 공산주의자를 매일 경배해온 한국 육군 장교단은? 이런 본질적인 모순점보다 더 충격적인 건 이런 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너무나 약하다는 점이다. 특히 보수세력 안에서. 김일성 세력은 김유신의 위대성을 안다 신채호함과 홍범도함을 배출한 한국 해군은 '김유신함'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2015년 동아일보 보도를 참고하면 해군은 김유신이 동족(同族)을 상대로 전쟁한 인물이라고 해서 함정 이름에서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심은 김유신을 매도한 신채호를 함정 이름으로 결정한 데서 역으로 확인된다. 그런 해군이 김유신을 부리고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군을 쳐서 이겨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대왕은 함정 이름으로 사용한다. 한국 해군엔 최소한의 합리성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합리성은 감성적 존재인 민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인 국가에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해군의 정신력 수준은 1300년 전 신라 때의 지도층보다 함참 후진적이다. 고대 국가 형성 이전의 종족주의 정도라고 할까. 삼국시대엔 '한민족(韓民族)'이 없었고 서로 말도 달랐을 것이다. 3김씨, 즉 김유신·김춘추(金春秋) ·김법민(金法敏)이 주도한 삼국통일에 의하여 공통의 말과 정치제도, 종교, 국토를 갖게 됨으로써 한민족(韓民族) 형성의 위대한 시작이 이뤄진 것이다. 신라는 백제를 치기 위하여 당과 손잡았고, 백제는 신라를 치기 위하여 왜(倭)를 한반도에 끌어들였지만 이는 민족반역이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국가의 행동윤리였다. 스코트랜드가 잉글랜드를 치기 위하여 프랑스와 손잡은 것을 두고 영국 지식인들이 스콧랜드 사람들을 민족반역자라고 욕하면 정신병자 취급을 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채호와 한국 해군은 왜 하필 민족사 최고 인물 중 한 사람이자 당대(當代)엔 일본과 당에서도 알아주었던 '동양의 명장' 김유신을 이렇게 보는 것일까? 육군 사관학교는 '화랑대'로 불리고 김유신은 대표 화랑(풍월주)이었다. 해군은 왜 '민족사의 가장 위대한 군인'을 회피하고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를 숭배하는가? 해군사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는 민족을 지키는 '민족사관학교'가 아니라 국가를 지키는 국군 사관학교인데도 말이다. 2011년에 출판되어 지금 북한 각급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는 '조선력사인물'은 세 권이다. 100여 명의 역사적 인물들을 흥미 위주로 그린 대중적 역사물이다. 여기서 딱 한 사람 부정적으로만 소개된 사람이 있다.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金庾信)이다. 김유신에 대한 기술(記述)은 트집잡기이자 거의 욕설, 코미디 수준이다. 북한정권, 그리고 남한의 종족주의자들이 집중적으로 비방하는 두 인물이 바로 이승만(李承晩)과 김유신인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선 박정희보다 이승만이, 문무왕보다 김유신이 더 두려운 것이다. 이승만과 김유신이 자유와 자주를 중심 가치로 한 민족 주체성을 최고 수준에서 구현한 인물임을 북한 노동당 정권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북한정권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인물이란 원리를 명심하면서 읽어보자(북한식 맞춤법 대로). 국가는 민족 위에 있는 존재 <김유신은 화랑으로서 무술훈련에 힘씀으로써 신라 봉건통치배들 속에서 호전적인 무관으로 자라났다. 그리하여 김유신은 그 시기 싸움판에서 두각을 나타내였다.> -유능한 군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뒤늦게야 술에서 깨여난 김유신은 제가 단념했던 그 길로 제 말이 찾아갔다고 하여 말에서 뛰여내려 단칼에 그 목을 동강냈다. 자기의 결심을 뒤흔들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애매한 말만 목 잘리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도 김유신의 생각은 기생 천관에게로 가 있었으니 목치는 놀음은 결국 제 뺨을 친 짓이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눈엔 개과천선(改過遷善)도 악이다. <김유신은 저들의 령토확장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당나라 세력까지 끌어들이는 매국행위를 감행함으로써 이미 고구려에 의하여 마감 단계에 이르렀던 삼국통일의 위업을 좌절시키는 죄악을 범하였다.> -소련과 중공을 끌어들여 동족을 친 전범(戰犯) 집단이 할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당나라의 내속은 신라를 도와주자는 것이 아니였다. 당나라 통치배들은 고구려,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신라마저 타고 앉으려는 것이였다. 이렇게 김유신은 외세를 끌어들이는 천추에 용서 못할 큰 죄를 범하였다.> -그런 당을 상대로 9년 간 결전을 벌인 끝에 세계최강의 당군(唐軍)을 추방하고 한반도를 민족의 보금자리로 만든 신라의 위대한 민족독립 투쟁은 빼버렸다. <고구려 땅에 발을 들여놓자 신라의 군사들은 동족의 나라를 밟아선 가책으로 몸을 떨었다. 그러나 김유신은 기고만장하여 웨쳐 댔다. 《이만한 일이 두려워서야 어찌 신라의 군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힘을 내라. 나라의 운명이 우리들에게 달려 있지 않느냐!》> -김유신이 국가가 민족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선언했다는 뜻인데 이야말로 신라 지도부의 합리성이고 근대성이다. 북한식 논리대로라면 국군이 인천상륙 작전 성공 후 북진한 것도 동족을 친 배신이 된다. 가짜 同族論에 넘어간 한국군 <신라의 문무왕은 어전회의를 열고 열을 올렸다. 《오늘 우리가 이긴 것은 오로지 대각간 김유신 장군의 공이요. 이제 나는 그 공을 치하하여 김유신 장군에게 태대각간의 벼슬을 내리려 하오.》 이렇게 김유신은 고구려를 무너뜨린 《공로》로 태대각간이라는 가장 높은 등급의 벼슬을 받았으며 죽은 후인 흥덕왕 때(826~836년)에는 《흥무대왕》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이와 같이 김유신을 비롯한 신라통치배들의 사대주의적이며 배족적인 외세의존정책에 의하여 당나라 침략군은 대동강 이북의 광대한 령토를 일시 차지하게 되였다.> -김유신은 한국 역사상 왕이 아닌 사람으로서 살아서도 죽어서도 가장 높은 직위에 올랐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수십 년간 병권(兵權)을 잡고 네 왕을 모셨지만 왕들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 또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통일대업에 몰두, 통일신라-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적 정통성의 주류를 열었다. 신라가 확보한 국토는 그 흐름 속에서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압록강 두만강에 이르게 된 것이다. <김유신은 673년 7월 죄악에 찬 한생을 마치였다. 종래의 봉건사가들과 사대주의 사가들은 신라에 의하여 3국이 통일되였다고 보는 데로부터 김유신을 삼국시기의 《큰 인물》로, 3국통일에 이바지한 《인물》로 내세웠다. 그러나 력사적 사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김유신을 비롯한 신라 집권자들은 시종일관 령토확장 야망으로부터 제힘으로는 강대한 고구려를 누를 수 없고 또 백제를 먹을 수 없게 되자 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간의 정복전쟁을 벌려 놓았으며 광대한 조상의 땅을 당나라에 섬겨 바치는 큰 죄를 저질렀다. 하여 공정한 력사는 김유신을 치졸한 사대주의의 시조로, 민족반역자로 락인하고 있다.> -신라, 백제, 고구려 사이엔, 특히 집권세력 사이엔 "우리가 남이가" 식의 민족의식이 없었다. 말도 서로 제대로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을 치기 위하여 다른 나라와 동맹하는 것을 동족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방하는 건 유아적(幼兒的) 발상이고, 민족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을 회칠하려는 자기 부정이다. 한때 신라의 삼국통일을 높게 평가했던 북한이 이렇게 표변한 것은 역사전쟁에서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고구려-발해 중심으로 정통성을 조작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민족사의 지류인 발해를 통일신라와 동급으로 왜곡하는 것은, 민족사의 이단인 북한정권을 대한민국과 동급으로 추켜 세우는 것과 꼭 같은 사실(史實)부정인데 이런 역사전쟁 프레임의 함정에 한국군이 빠졌음을 보여주는 것이 ‘신채호함’이고 ‘홍범도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