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달리면 경기도 안성 오세영 시인의 안성집필실이 나온다. 작년 가을서부터 본격적인 건축에 힘을 쓴 결과 이젠 제법 안정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공간은 작은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 넓지 않았는데도 공간 활용이 잘 되어 있어선지 훤한 인상을 받았다. 아직 한창 자라고 있는 푸른 잔디와 울타리 겸 방풍의 역할을 하고 있는 활엽수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어 안온한 느낌마저 들었다. 정년퇴임 후의 생활이 더 바쁘다는 시인과 만남은 흔쾌히 이루어졌지만 짬을 내어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여전히 강의에 여념이 없는 시인에게 쉴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빼앗는 것만 같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담한 집필실에 들어서자 새집 냄새가 코를 찌른다. 더위에 문이란 문은 활짝 열어젖혀 바람을 불러들인다. 자리에 앉기 전 시인은 조용필의 음반을 걸었다. 바쁜 걸음을 멈추고 숨을 잠시 바닥에 놓은 채 조용필의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무척 감미롭다. 클래식 음반을 걸 줄 알았는데 뜻밖이다. 애조 어린 음성이 실내를 한 바퀴 돌아 거실 밖으로 퍼졌다. 앞마당의 초록 생명들이 일시에 출렁일 것 같은 이 절묘한 분위기. 평소에 기억하던 시인의 모습과 현재의 상황이 잠시 오버랩되었다. 소탈하고 소박하며 한 가지 일을 하기로 작정하면 무섭도록 매진하는, 할 말은 하되, 철저한 자기반성의 시간을 아끼지 않는 이 시대의 자연, 생명 시인이자, 학자이신 오세영 시인과의 모처럼의 조우는 이렇게 조용필로 인해 부드럽게 이루어졌다. 이미 언론 매체를 통해 수많은 인터뷰가 이루어졌기에 특별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기로 한다. 여전히 현역이신 요즘의 근황을 물으면서 무더위를 이기기 위해 수박을 한 입 베어 먹으면서 가벼운 화제를 주고받는다. 고교 교과서를 보면 시인의 작품 경향을 놓고“초기 기교적이고 실험적인 시를 발표. 첫시집 이후 언어의 예술성을 철학에 접목시키는 방법론에 고민, 동양사상과 불교에 심취. 이후 불교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사물의 인식을 통해 존재론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현대문명 속에서 아픔을 느끼는 인간 정서를 서정적으로 형상화하는 시적 변모를 모색한다.”고 정리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여쭈었는데 빙그레 웃으신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인다. 아마 막 데뷔한 시작詩作 초기에 요즘 시처럼 알 수도 없는 난해한 시를 썼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라고 한다. 뭘 알고 쓴 거 아니었으니 이해해 달라고 겸연쩍어 한다. 요즘 난해한 시를 보면 초기의 시가 자꾸 생각난다는 말을 하면서 헛헛 소리 내어 웃기까지 한다.
“ 사소한 것이 운명을 만듭니다.” 이런저런 두서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불쑥 시인이 말은 던지다. 유리문 너머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싶었는데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듣는다. 좀 전과 달리 한 줄기 소나기가 뿌릴 태세다. 이야기를 막 시작하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비 소리와 시인의 이야기가 하모니를 이루며 잔잔히 흘러간다. 누구의 삶이든 큰 계기보다 사소한 계기가 운명적 길을 좌우한다는 데 동의한다. 빗소리가 점점 거세어졌다. 바닥을 치는 빗소리에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바깥과 안이 구분되어 있는 것을 지금 막 깨달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든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삶은 사소한 것의 연속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어떤 사소한 계기가 있다. 그것이 운명적인지 아닌지를 모를 뿐이다. 시인의 삶이 조금씩 열리나보다. 단호하나 알맞은 온기로 덥혀진 언어의 조합이 구수하다. 시인 특유의 화법에 새삼 귀 기울인다.
너무 늦게 온 것이 아닐까. 담 밖까지 은은한 독경소리, 호곡소리. 너무 늦게 왔구나. 고속도로로 왔는데, 외줄의 선을 따라서 실낱같은 빛을 좇아서 이 한밤 외길의 인생을 왔는데. 이미 가셨구나. 눈길 한 번 건넬 시간도 주지 않고, 향 피울 시간도 주지 않고 추월해 당도하신 그곳은 목련꽃 이슬로 영그는 공간. 어머니, 출근길 쫓기는 이 아침, 당신의 생가엔 어느덧 목력꽃 피었습니다. -「생가生家」전문
시인의 시전집 『오세영 시전집1』의 제4부 「들길을 가며」에 묶인 시다. 운명을 결코 사소한 것이라 할 수 없지만 사소함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인 것만은 확실하다. 태어나서 아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것, 어머니마저 일찍 여의었다는 것은 절대 사소함이라 할 수 없다. 묵직한 운명의 사슬에 꼼짝 없이 걸려든 것 같은, 올무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고 단단한 그 무엇에 삶이 감금당했으리라. 이런 배경 아래 시 「생가生家」는 자신의 근본根本을 확인하러 간 시인을 읽을 수 있다. 도로 중에서도 가장 지름길인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한달음에 어머니를 만나러 외할머니 댁을 찾아간 시인은 생가에 환하게 핀 목련꽃을 만난다. 목련꽃이 상징하는 어머니는 처음이자 마지막 그리움의 보고일 것이다. 친가(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났으되 100일 이후부터 소년 시절까지 성장이 이루어진 곳, 외조부모와 외가댁(전라남도 장성) 친척들 틈에서 보냈던 그 시절을 만나고 싶었던 시인의 열망은 한 눈에도 어머니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스름 깔리는 마당귀에는/감꽃만 수북이 떨어져 있었다./사립밖엔 한나절/물 나는 소리./윤사월 조금날 썰물이 길어/바다가 빈 개펄 드러내듯이/아, 나도/가진 것이라곤 시의 묘망한 하늘뿐,/너를 두고 한 세상 살아왔다./애비 없이 태어난 나는/에미도 일찍 잃어/세 살에 든 열벙을 아직도 고치지 못한 채/이마는 항상 뜨겁기만 하다./내 시의 먼 하늘, 노을에 맺힌 그 이슬이/밤바다에 반짝이는 별이 될 수 없음을 나/너로 인해 비로소 알았으니/이제 더 이상 속지 않으리라./네가 가고 또 그로 하여 시마저 버린다면/이 세상 슬퍼할 그 무엇이 아직/남아 있으리.(「하늘의 시」전문, 제8시집『눈물에 어리는 하늘그림자』)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이 세상에서 오직 의지할 그리운 어머니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눈길 한 번 건넬/시간도 주지 않고,/향 피울 시간도 주지 않고’가 버린 것이다. 세상에 달려오기도 전에 아버지는 이미 떠났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한껏 달려왔지만 어머니마저 이제‘나’를 떠나고 없다. 어머니가 태어나서 성장을 이룬 그곳, 그곳은 내가 자란 곳이며, 어머니의 기억과 현존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그곳은 시인에게 시에 대한 이해와 시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 시작점이기도 하다. 유학자의 후손인 외조부(하서 김인후)가 즐겨 시낭독회를 한 곳이며, 시회를 하면서 학문과 문학의 산실이 되기도 했던 곳이며, 숱한 선비들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그 모습들에서 자연스럽게 내 인생의 가치관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전쟁은 이 모든 것을 앗아간다. 안정된 가문의 부富 대신 가난이 찾아왔으며 전주로 삶의 터전을 옮길 계기가 주어진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운명적 힘이 작동된 것이리라. 결코 사소하지 않은 운명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소년의 내적 삶에 깊은 상흔을 남기고 시간을 마구 굴린다.
오세영 시인은 19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에 의해 「현대문학」으로 데뷔, 첫시집 『반란하는 빛』을 필두로 하여 2011년 6월 김달진 문학상을 수상한 『밤하늘의 바둑판』까지 총 19권의 시집을 펴냈다. 시력 47년 차에 19권이면 2.5년에 한 권씩 시집을 발간한 셈인데 대학 강단에서 학자로서 교수로서의 막중한 소임을 감안하면 꽤 많은 숫자다. 정년퇴임 때 시전집 2권을 묶은 것을 합하면 그 양이 더 많다. 여간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이 많을 일들이 가능하지 않았으리라. 학술 저서 및 평론집『20세기 한국시 연구』, 『상상력과 논리』,『한국현대시 분석적 읽기』, 『문학연구방법론』등과 1986년 소월시문학상(1986년), 정지용문학상(1992년), 불교문학상(2009년) 등의 결과물은 그간의 시인의 녹록치 않은 삶을 엿볼 수 있다. 그 외 한국시인협회회장 등 한국문단에서 중추적 리더로서의 역할도 마다않은 것은 미래 한국 문학의 안위가 걱정되었던 것 같다. 이 모든 에너지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체구가 그리 크지 않은 시인이 갑자기 커 보였다.
‘시에서 길을 찾다’ 시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시인의 길과 시에서 길을 찾는 시인은 각기 다른가. 다른 듯 같은 이 말의 진의를 찾는 듯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인의 길은 시인을 대상으로 하지만 시에서 길을 찾는 일은 보다 넓은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꼭 시인일 필요도 없을뿐더러 시를 잘 알고 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시에서 길을 찾는 일은 일사불란한 연보를 나열하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 내 삶이 시를 통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 왜 그래야만 하는가, 그 이면에 놓인 시대의 지형도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가 등등, 삶과 시와 밀착된 논리적이지 않으나 진실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다. 동전의 앞뒤를 그 시인만이 갖는 시의 길을 알고 싶은 것이다. 시인이니까 시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분명 아니다. 시인은 황진이를 불러냈다. 시대를 초월한 시의 아름다움을 황진이가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시의 영원성을 추구하는 것이 시의 본질이라면 이 보다 더 확실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좋은 시와 독자의 관계도 언급한다. 시를 알아보고 공감한다는 것은 좋은 독자다. 시인의 길을 걷고 있는 당사자로서 우선 시인의 덕목을 말하고 싶은 게다.
“내가 왜 시인이 되었는가 하면…” 시인은 다시 되새김질 한다. 여기까지 많은 시인들이 공통분모를 갖는다. 다음 순간 시인은 운명론적인 것의 ‘사소함’에 대해서 언급한다. 생각은 많으나 단순한 표현으로 자신의 삶을 압축한 ‘사소한 것이 운명을 만든다’의 의미심장한 이 말은 지금까지 한 그 어떤 인터뷰 내용보다 더 의미충전하고 함축적이며 압축된 시인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고1 때 ‘아카시아꽃’이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장원이 된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진작 중고등학교 시절 시인이 되어야 겠다고 작정했고 나름 독서와 습작을 해왔다. 하지만 정작 대학에선 철학을 전공하는 것이 글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철학과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사소한 참견이 운명을 만든 계기를 만난다. 입학원서를 쓸 때 담임선생님이 문학을 하는데 웬 철학과? 하면서 국문과 란에 동그라미를 직접 그리는 순간 운명은 결정지어졌다고 한다. 내 인생은 이렇게 내 의지도 아니고 심각한 고민 끝에 한 것도 아닌 채 동그라미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며 하하 웃으신다. 혹 우연은 아닐까? 말씀드리니 우연이나 사소한 것이나 통하는 것 같다고 하신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우연과 사소함이 돌아다니고 있을까. 이들이 만들어내는 필연이나 운명은 또 얼마나 많은 삶을 결정짓고 있는 것일까.
대학에서 카를 야스퍼스를 만나고 ‘비극’에 대해서 깊은 사유를 하게 된다. 시인은 본격적으로 철학에 심취하게 된다. ‘비극이야말로 진실을 깨우치는 암호’임을 알게 된다. 인간이 비극을 경험할 때 비로소 깨우침이 오는 것이다. 경험되지 않은 비극은 진실이 되지 못한다. 문학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지침서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용하다. 문학에서 비극을 말할 때 오이디푸스왕이나 햄릿, 성경의 욥 같은 인물을 그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데 이러한 깨달음의 연속을 경험한 시인의 대학생활은 야스퍼스와 결합되면서 이전의 문학에서 이후의 문학으로 급속도로 거듭난다. 특히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를 만났기에 시인의 운명론적인 삶은 분명해졌다. ‘하느님의 진실과 인간이 아는 진실은 다르다, 논리적인 진실과 비논리적인 진실은 분명 다르다. 이 둘의 모순의 진실이야말로 내 문학의 열쇠가 되었다.’는 시인은 문학에 있어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강조한다. 야스퍼스를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실존철학을 삶에 접목시키게 된 것 같다. 인간이 위협과 불안과 허무에 직면해 있을 때 존재를 박탈당하게 된다. 하지만 자기 상실의 상태에서 벗어나 그 상황을 분명히 인식할 때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고귀함과 연대성을 회복하게 된다. 야스퍼스적 이 현대적 존재양식에 20대의 청년은 매료된다. 비로소 ‘나’를 발견한 것이다. 살아 있는 언어와 체계적 사유와 삶의 천착한 이야기를 문학 안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출가出家라니 정녕 어딜 간단 말이냐. 머리 깎아 바랑 메고 산으로 간단 말이냐. 장삼 걸쳐 법장法杖 짚고 바다로 간단 말이냐. 바람 따라 향기 좇아 이른 계곡엔 도화桃花는 시나브로 꽃잎 지는데 하염없이 개울물은 흘러가는데 강물 따라 소리 좇아 이른 바다엔 파도는 실없이 부서지는데 출가라니 누굴 따라 어디로 간단 말이냐. 집만이 집이 아니고 집밖에 있는 것이 또 집인데 비로봉 만물상 곰바위 밑에 앉은뱅이 민들레나 되란 말이냐. 지리산 세석대 널 바위 밑에 가지 꺾인 소나무나 되란 말이냐. 출가라니 집 밖이 또 집인데 정녕 어디로 가란 말이냐. -「집만이 집이 아니고」전문
위의 시는 시인의 제 10시집 『벼랑의 꿈』에 수록된 작품이다. 1999년도 <시와시학>에서 펴낸 것으로 이순耳順을 앞둔 시점에 씌어졌다. 성찰이란 배경 아래 ‘나’를 만난다는 것은 매우 뜻 깊다. 지난 삶과 현재의 삶 그리고 미래의 삶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시인은 ‘집’을 꿈꾸고 있다. ‘출가出家’는 새로운 집을 찾아 떠나는 일이다.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일이다. 자신에게 서슴없이 성토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전의 삶과 삶의 방식, 지금의 삶과 삶의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존재에 대한 불안을 새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열심히 걷고 달리면서 부지런히 뭔가 일을 벌이고 마무리하며 긴장과 성취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잘 살고 있다는 증거이지만 미래에도 그렇게 살아질까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질 법하다. 아니, 두려움보다 노년을 앞에 두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대한 정리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수용하고 살아야 하기에 두렵다.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든 두려운 법이다. 지금까지의 삶도 중요하지만 지금부터의 행로는 더 중요하다. 삶의 안팎은 가운데 선이 있기에 나뉘어진다. 세상이라는 선을 중심에 놓고 나를 조망하면 ‘집만이 집이 아니고/집밖에 있는 것이 또 집’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시인의 현재는 기로에 서 있다. 안과 밖에 동시에 놓여 있다. 그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가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세계를 넘어서야 하는, 그래야 다다를 수 있는 세계를 만나야 하는 기로인 것이다. 또 한편의 시를 읽어본다.
버선에 댓님 흰 옥양목 두루마기에 옷고름을 매니 사뭇 조선 사람 같구나. 마루에서 차례를 지내다 문득 마당가 양지바른 돌담 밑 잔설殘雪에 시드는 파초를 본다. 남의 땅에서 들여온 화초라지만 조선 파나 죽순이나 난초나 무엇이 다르겠느냐. 껍질을 벗기면 속은 모두 텅 비어 있느니 겉에 파초의 옷을 입혀 파초, 죽순의 옷을 입혀 죽순, 난초의 옷을 입혀 난초일 뿐 내 오늘 설날이라 양복을 벗어던지고 한복으로 갈아입으며 문득 잃어버린 ‘나’를 생각한다. 그 동안 나는 너무 잘못 살아온 것 같구나. -「잃어버린 나」전문
어릴 때 외할머니가 손주를 무릎에 앉히곤 찾아온 사람들에게 “이 아이는 하늘에서 똑 떨어졌어요.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거예요.”하며 자랑스러워하셨다는 말씀을 시인이 했을 때 그 말이 참말이라고 생각한 어린 아이가 보였다. 손주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물론 자신감을 통해, 만인에게 자랑을 통해 그대로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했을 외할머니도 보였다. 그때의 소년은 이제 어른이 되어‘잃어버린 나’와 직면하고 있다. 성찰의 한 가운데 있다. 현재에 뿌리내린 삶은 늘 현재형이다. 추구하는 것들 모두 현재형이다. 그러기에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시인은 문득 근본을 사유한다. 어릴 때 그 소년은 외할머니의 소망대로 살아가고 있지만 스스로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와서 정작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고 고백한다. 어떻게 살아왔기에 ‘그 동안 나는 너무/잘못 살아온 것 같구나’하고 회한에 젖는가. 시인은 겉으로 모양새만 갖추고 살아온 그동안의 자신을 돌아보며 옷만 갈아입으면 깜쪽 같이 변신을 하게 되는 자신이 두렵다. 양복을 벗어던지고 한복으로 갈아입는 과정에서 그 틈새에 낀 ‘나’를 문득 찾아내었다. 내 삶의 주변에 보잘 것 없는 존재를 확인하고 있는 ‘파초’, ‘조선파’, ‘죽순’, ‘난초’를 보며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나’를 본 것이다. 성찰이라는 거울은 이렇듯 시시각각 시인을 반사하고 있다. 이 깨달음이 시인을 끊임없이 순환시키고 있다.
“사물이 말하는 것을 들으라.” 시인의 외침이다. 스스로 사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거나, 말을 거는 작업이 곧 창작의 길이다.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인은 없고, 사물이 말하는 것을 알게 된다. 사물이 말하는 것을 잘 들을 때, 시는 온다. ‘사물의 언어言語를 시詩로 쓰는 것이다.’ 시인은 힘주어 말한다. 시에서 길을 찾는 시인의 눈빛이 영롱하다.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가는 것은 노동이다.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닦으면서 시를 말하고 삶을 말하고, 사물을 말하는 것이다. 무릇 시인이라면 시인이 되기 위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사물에게 귀를 기울이고 말을 건넬 때, 시는 내게 오는 것이고 나를 만나는 것이다. 내가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으며 그 길이 시인이 가야할 길이라는 말일 게다. 오세영 시인을 말할 때 불교 정신을 떼어놓을 수 없다. 불교는 기독교와는 달리 신이 없는 종교이므로 훨씬 시적詩的이다. 그의 시 세계 전반에 뿌리를 내린 불교적 향취는 이러한 연유로 기인한다. 논리적인 철학적 사유와 비논리적인 문학의 사유는 궁합이 아주 잘 맞다. 누가 뭐래도 주위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지킬 때 문학은 내 것이 된다. 기본 인문학 서적은 물론 철학 및 신화와 고전 등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주문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길을 흔들림 없이 가야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시류에 맞게 창작하는 일은 절대 삼가야 한다는 논리도 편다. 시인이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펴낸 19권의 시집은 그 나름의 길을 갖고 있다. 여러 시집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눈에 띄는 시집을 발견한다. 17번째 시집 『임을 부르는 물소리』(108편)이다. 2008년에 발간된 이 시집은 백두에서 한라까지, 압록에서 낙동까지 한반도의 국토와 산하에 관한 시만 모아 놓았다. 총 7부로 나누었는데 지리산, 한라산, 금강산,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설악산, 계룡산 등 이름난 산과 한반도의 젖줄인 압록강, 두만강, 한강, 낙동강 및 울릉도, 마라도, 독도, 흑산도 등 많은 섬을 노래했다. “언어가 한 민족의 영혼이라면 국토는 그 민족의 육체다. 진정한 삶은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결합된 상태가 아니겠는가.”했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우며“한평생 시인으로 길러준 국토, 죽어서 다시 돌아가야 할 이 땅에 바치는 헌사”라고 밝힌 언론사의 인터뷰가 눈에 띈다. 시인의 광범위한 시적 소재와 주제는 여타의 어느 시인보다 다양하게 변주되어 그의 시 세계를 관류하고 있다. 이는 그가 걷는 시의 길이 다양한 색채와 힘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세영 시인은 잘 웃지 않는다. 그러다 웃을 때 꼭 천진한 아이 같다. 스스로 내성적, 내향적인 사람이며 사람들과 친화력이 떨어진다고 고백했지만 최소한 내향적인 분 같지는 않다. 그가 보여준 19권의 시집의 시 세계는 평소에 그가 지향했던 것에의 관심과 추구와 애정의 결정판이다. 그렇다면 지향하고자 하는 세계는 분명 외향적이다. 범세계적이며 우주적이다. 반세기 가까이 철학적 성찰과 사유를 기반으로 확장되어온 그의 시세계는 분명 많은 성장통을 통해 갖가지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어느 부분은 아직 소년으로 남아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건 왜일까. 필자만의 생각인가. 하고 싶은 말은 하되 불필요한 말은 삼가는 시인의 이미지에서, 군더더기를 싫어하고 시행착오를 거쳐서라도 시의 본류에 다가가기를 소망하는 거침없는 시적 변모의 과단성은 성장이 끝난 어른이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 아직도 성장과정에 있는 소년이 갖는 풋풋한 용기에 가깝다. 시류의 끼리끼리의 평론에 몸 사리고, 주변 세력에 눈치를 보며, 잡지 권력에 몸 조아리는 것을 싫어한다는 시인의 지론 탓일까. 시인이 보기에 잘못 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고, 잘 한 것은 잘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대단한 용기다. 어떤 문제가 제기되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이건 이러하고, 저건 저러하다. 그리고 이건 이래선 안 되겠다하는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사실 말이 쉽지 아무나 하지 못한다.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학문을 하려고 대학에 남은 거지 문학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라는 은사의 질책을 듣고 학문이면 학문, 시 창작이면 시 창작,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함 없이 40여년을 학자와 시인의 길을 동시에 걸어왔다는 것은 더욱 아무나 하지 못한다.
“가능한 말을 줄이고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되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메시지를 담아보고자 했다. 이미지와 메시지가 상충한다고 생각하지만 단순히 사물을 묘사하는 식이 아니라 사물의 내면에 있는 진실을 드러내는 작업을 진행하고 싶었다.” 시인의 진솔한 이 말은 19번째 시집 『밤하늘의 바둑판』의 서정시집을 통해 전달된다. 그가 지향하고자 하는 시의 세계는 곧 그가 시에서 자신의 삶을 보았고 그 길을 처음인 듯 끝까지 정성을 다해 걷고자 함이다. 그가 끊임없이 가고자 하는 길, 가다가 지쳐도 다시 일어나 시를 쓰면서 나를 찾아가는 행보를 멈추지 않는다면 시가 그를 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