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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양 지혜 스크랩 허준 (許浚)의 묘
성기숙 추천 0 조회 50 13.12.22 07:26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허준 (許浚)의 묘

 

 

 

 

 

 

 

 

 

 

 

 

 

                                                  

                                                  출생과 성장

 

 

 

 

허준 (許浚... 1539~1615)의 본관은 양천(陽川), 字는 청원(淸源), 號는 구암(龜岩)으로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 지금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허곤(許琨)은 武官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으며, 아버지 허론(許론)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고, 생모 영광김씨는 아버지의 소실이었으므로 허준은 庶子이었다.

 

 

허준은 어린 시절 경상도 산청으로 이사를 가서 그 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허준은 이 곳에서 어렸을 때부터 의사수업을 시작하는데, 신분제 사회에서 벼슬길을 나가지 못하고, 당시 中人이나 서얼(庶孼)들의 業으로 생각되었던 의학의 길을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허준은 부단한 노력 끝에 이미 20대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의사가 된다. 1569년 6월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에 당시 副提學이었던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하여 서울로 초치되었고, 이듬해에는 유희춘(柳希春)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서울에서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내의원(內醫院) 생활의 시작

 

 

 

부인과 자신의 병을 치료하는 허준을 신뢰하게 된 유희춘(柳希春)은 허준을 내의원에 추천하게 된다.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의하면 1569년(선조2)에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허준을 내의원에 천거하여 주도록 부탁하였다는 기록과 1573년에 허준이 정3품 내의원정에 올랐다는 기록으로 보아 1569년 즈음에 내의원에 들어 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陽川許氏 世譜"에는 1574년 등과(登科)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두가지 說 모두 확인하기는 어렵다. 하여튼 내의원에 들어 간 허준은 명나라 출신 어의 안광익(安光翼)과 더불어 宣祖의 병을 진찰하고 효험이 있자 왕의 신망을 받게 되었다. 1587년에는 선조의 건강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내의원 책임자와 御醫들이 모두 포상을 받게 되었는데, 허준은 태의 양예수 (太醫 楊禮壽)등과 함께 녹피(鹿皮) 1령(令)을 하사받았다.

 

 

1590년에는 당시 世子로 있던 光海君의 두창(痘瘡)을 치료하여 낫게 하였으므로 허준은 堂上官(정3품 이상의 벼슬)에 가자(加資)받았는데, 그러나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일제히 들고 일어나 " 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당연한 일인데, 비록 功이 있다하더라도 의관에게 당상관의 加資를 내린다는 것은 부당하다 "고 宣祖에게 상소를 올리나 선조는 신하들의 거듭된 요구를 물리쳤다. 

 

 

 

 

 

 

 

 

 

 

 

                            

                             임진왜란과 호성공신(扈聖功臣) 그리고 동의보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宣祖는 義州까지 피난가야 될 형편이었다.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요사스러운 말이 퍼지자...명망 진신(縉神)들은 자신의 保身에만 뜻을 두고.....義州에 이르기 까지 文,武官이 17명에 불과하였고.... 御醫 허준을 비롯한 몇몇이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라는 기록이 있듯이  허준은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宣祖의 건강을 곁에서 돌보았고, 이 때의 공로로 허준은 뒷날 功臣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1596년 宣祖는 허준에게 완비된 우리나라의 醫書를 찬집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허준이 양예수(楊禮壽) 등과 함께 편국을 설치하고 책의 요령을 잡아가는 시점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고 , 의관들이 흩어지게 되어 편찬작업은 자연히 중지되었다.  

  

 

이에 宣祖가 다시 허준을 불러 許浚 혼자 책임지고 새로운 醫書를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관련 내장방서 500권을 내주며 참고하도록 조치하였다. 1600년 수의 (首醫 ..내의원책임자) 양예수가 사망하자, 허준이 首醫가 되었다.

 

 

 

  

  

 

1604년 선조는 호성공신(扈聖功臣)의 교서를 발표하며, 의관으로서는 허준과 이연록(李延綠) 두 사람을 3등에 책훈하고 허준은 양평군(陽平君)에 봉작되었다. 1606년에는 왕의 병을 치료한 공으로 양평군 보국숭록대부(報國崇綠大夫)로 승급하게 되는데, 이는 벼슬로서는 최고의 品階인만큼 신하들의 반대가 극심하여 선조도 결국 허준의 加資를 보류하게 되었다. 

 

 

 

 

 

 

   

 

1607년, 宣祖의 병이 위중하여 치료가 되지 못하는데 이것은 허준이 藥을 잘못 處方하였기 때문이라고 허준의 罪를 논하는 자리가 매일 벌어진다. 그러나 선조는 벌을 주기보다는 의술을 다하게 하여야 한다고 허준을 보호한다.

 

 

1608년 마침내 宣祖의 병세가 급박하다가 돌연 사망하였다. 宣祖의 병은 이미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사간원,사헌부 등에서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즉위한 광해군도 거듭된 신하들의 요구에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허준의 직책을 거두고, 居處를 제한하는 벌을 내리도록 승인하였다.

 

 

그러나 그 해가 지나기 전에 광해군은 허준에게 내린 罪를 모두 해제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허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찬집에 노력하여 1610년(광해군 2)에 드디어 완성하였다. 이후 허준은 어의로 있다가 1615년 죽었다. 허준의 死後 광해군은 그동안 보류되었던 보국숭록대부(報國崇綠大夫)를 추증하였다.

 

 

 

 

 

 

 

 

 

 

 

 

 

 

 

 

 

 

 

                               

                               동의보감  東醫寶鑑  .. 보물 제 1085 호

 

 

 

1608년 선조가 죽자, 책임 어의(責任 御醫)로서 義州에 유배되었다가 바로 풀려난 허준은 광해군의 御醫로 활동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 시절 허준은 주로 醫書를 편찬한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동의보감이다.

 

 

1610년에 완성된 이 책은 총 25권 25책으로 당시 국내 의서인 의방유취(醫方類聚),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림촬요(醫林撮要)를 비롯하여 중국측 醫書 86종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이다. 그 내용은 내경(內景), 외형(外形), 잡병(雜病), 탕액(湯液), 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된 백과전서(百科全書)로서 오늘날까지 애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모든 병증상을 5가지로 나누어서 항목에 따라 치료방법을 기록하고, 치료 근거가 되는 여러가지 문헌을 제사하였다. 치료 방법을 제시함에 있어 의서에 근거를 둔 기록만을 추린 것이 아니라, 병에 따라서는 민간에 전해지는 이른바 속방(俗方)의 치료방법과 허준이 스스로 경험한 비방까지 덧붙였다. 이렇게 의관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도 활용하기 쉽도록 편찬되었다.

 

 

이 책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전해져 중국판 서문에는 " 天下의 보(寶)를 천하와 함께 한 것 "이라 하였고, 일본판 발문(跋文)에서는 " 보민(保民)의 단경(丹經)이요, 의가(醫家)의 秘級 "이라고 평가하고 있어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1613년 동의보감 처음 출간되고 115년 뒤에 일본에서 완질이 출판된 것을 비롯하여 1763년 중국에서도 출판되었으며, 이후 중국과 일본에서 모두 7번 출판을 거듭하였다.   

 

 

 

 

 

 

 

동의보감은 1613년 훈련도감에서 만든 목활자(木活字)로 인쇄되었는데, 이 때의 초판본 완질 25권은 남아있지 않고, 후에 전주와 대구에서 목판본으로 출판된 것이 완전하게 전승되고 있다. 후일 19세기에는 백성들이 더욱 쉽게 참고할 수 있도록 한글본이 출판되었다.

 

 

 

 

 

 

 

 

 

 

 

 

 

 

 허준은 동의보감 이외에 구급방(救急方)을 언해(諺解)한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2권, 창진집(瘡疹集)을 개정하여 언해한 언해창진집(諺解瘡疹集) 2권, 노중례(盧重禮)의 태산요록(胎産要錄)을 개편하여 언해한 언해태산요집(諺解胎産要集)을 비롯하여 벽역신방(癖疫神方), 맥결집성(脈訣集成) 등의 저술을 남겼다. 즉 백성들을 위하여 전문적인 醫書들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조선, 국가적 프로젝트

 

 

 

 

동의보감...하면 許浚을 연상한다. 하지만 허준이라는 名醫 만의 힘으로 빛을 본 것은 결코 아니다.

허준은 선조의 명에 의하여 편찬을 시작한다. 편찬 작업은 광해군시절인 1613년, 전 25권의 초간본이 나오기까지 장장 17년의 세월이 필요하였다. 정유재란 등의 전란으로 인한 중단기간을 빼고도 편찬에만 7년 이상, 판각과 인쇄에 3년 가량의 시간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 사이 투입된 인력과 재료는 물론 , 이후 보급을 위하여 들어간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목활자로 만들어진 초간본은 2질씩 8도감영으로 보내졌고, 다시 일반 백성을 위한 보급용 판본이 만들어졌다.

 

 

宣祖는 허준에게 " 중국의 그 것은 번잡하기만 하고 별로 효과가 없다 "라고 말하며 허준에게 새로운 의서의 편찬을 지시하지만, 한편 의학에 식견을 갖춘 여러 유학자들을 편찬팀에게 붙여 주었다. 정작(鄭斫), 양예수(楊禮壽), 김응탁(金應鐸), 이명원(李明源), 정예남(鄭禮男) 등이 그들인데, 비록 정유재란으로 편찬이 중단된 후에는 허준이 거의 단독으로 집필하였지만, 동의보감의 기본 골격을 세우는 일에는 이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또한 世宗때 만들어진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85권과 의방유취(醫方類聚) 365권 등의 先行 연구가 없었다면 동의보감은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세계 기록문화유산.   MEMORY OF  THE  WORLD

 

 

 

 

2009년 동의보감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는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승정원일기, 고려대장경, 조선왕조의괘(儀掛)에 이어 7번째이며, 전 세계에서 아직까지 193건만 인정받은 보물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기록문화유산으로 인정하면서 유네스코는 두가지 이유를 들었는데, 바로 동의보감의 價値와 哲學을 압축하여 잘 정리하고 있다.

 

 

informed the evolution of medicine in East Asia  and above  ...  즉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하였고, developed the principles of preventive medicine and public health care by the State, which were virtually unprecedented ideas up to the 19th century .... 즉 19세기까지도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豫防醫學과 國家 公衆保健의 원칙들을 발전시켰다. 치료보다는 예방에 역점을 둔 그리고 국가차원에서 공중보건을 중요시한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인데, 바로 이 점이 동의보감의 진정한 가치이고 철학일 것이다.

 

 

 

 

 

 

 

 

 

 

                           1610년 8월 6일 광해군일기 ... 동의보감에 대한 기록

 

 

 

 

 

 

 

 

                                 

                                   동의보감은 중국 醫書의 짜깁기 ???

 

 

 

 

동의보감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가장 큰 논거는... 동의보감은 중국 의서들의 짜깁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동의보감 내용의 90%가 중국의 醫書를 인용하였다는 것이다.

 

 

 

 

90%의 인용은 사실이고, 허준은 동의보감을 편찬함에 있어 모든 항목에 인용한 문헌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박 논리는 다음과 같다. 똑같은 레고(LEGO) 조각이라도 어떤 밑그림을 가지고 조립하느냐에 따라서 최종 작품은 전연 다를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동의보감에서 허준이 일일이 인용된 중국醫書를 언급한 것은 ...

 

 

당시 술이부작(述而不作 ... 孔子가 옛 사람의 說을 저술하였을 뿐, 창작한 것은 아니다 ..라고 자신의 글을 겸손하게 표현한 일)식 글쓰기가 유행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허준이 언급한 중국의 문헌들을 하나하나 비교해 보면, 처방법이나 약재 등을 그대로 인용하여 ㅆ느 것이 아니라 우리 풍토나 체빌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여 바꾸었다고 한다.

 

  

 

 

 

 

 

동의보감의 가장 우수한 점의 하나는 체계적인 항목 선정과 논리의 전개이다.  동의보감은  "인간은 자연 속에서 생활하면서 출생과 성장 과정에서 선천적, 후천적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 나간다 "라는 道敎的 인간관을 바탕으로 쓰여졌고, 人體를 총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며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의서보다 탁월하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신을 보낼 때마다 동의보감을 구해가고, 나중에는 자신들이 직접 수십차례 판본을 만들었던 사실도 그 때문인 것이다. 중구의 강희제가 애독하던 동의보감이  중국 황살에 비장되어 있다 발견된 사실도 있다

 

 

 

 

 

 

 

 

 

 

 

 

 

 

 

 

 

 

 

동의보감의 잡병편(雜病編)에는 여러가지 재미있는, 異色的인 비기(秘技)들이 소개되어 있다. 洋醫學에서 한의학을 비난하는 소재가 되고 있기도 하지만, 히포크라테스의 醫書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유치한 밥그릇 싸움일 뿐 ..동의보감의 가치와 의미를 모르는 것일뿐..

 

 

 

 

은형법 (隱形法 .. 투명인간이 되는 방법)    몇년 전 방송국에서 실제로 실험해 보았지만 실패하였던 방법이다. 흰개의 쓸개와 통초(通草 .. 말린 등칡의 줄기), 계심(桂心 ... 계피의 노란 속 부분)을 섞어 가루로 만든 뒤, 꿀에 반죽하여 알약으로 먹으면 자신의 몸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가리워 진다. 푸른 개의 쓸개가 더 좋다.

 

 

 

견귀방 (見鬼方 ... 귀신을 보는 방법)   생마자(生麻子 .. 역삼씨 생 것)와 석창포, 귀구(풀 이름)를 각각 같은 量으로 꿀에 반죽하고 달걀 노른자 크기의 알약을 만들어 한번에 1알씩 매일 아침에 해를 향하고 먹는데 10일이 지나면 귀신을 볼 수 있다. 

 

 

 

인신작량 (人身作兩 ... 幽體離脫 또는 分身 등 몸이 두개로 보이는 방법)   자기 몸이 2개로 되어 나란히 누워 있는 것 같이 느껴지면서 어느 것이 정말 자기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알아 볼 수가 없을 때가 있는데 이는 혼(魂)이 나가서 생기는 일이다. 주자, 인삼, 백복령을 진하게 달여서 먹으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가짜 몸뚱이가 보이지 않게 된다. 

 

 

 

영부부상애 (令夫婦相愛 ... 부부가 사랑하는 방법)    부부간에 의가 좋지 못 할 경우에는 원앙새 고기로 국을 끓여서 알지 못하게 먹이면 서로 사랑하게 된다. 음력 5월5일에 뻐꾸기를 잡아 다리와 대가리뼈를 차고 다니게 된다.

 

 

 

거투방 (去妬方 .. 질투하지 않게 하는 방법)  율무쌀, 천문동(풀 이름), 붉은 기장쌀을 각각 같은 양으로 하여 가루러 만든 뒤 꿀에 반죽해서 알약을 만들어 남녀가 먹으면 서로 질투하지 않는다. 꾀꼬리 고기를 먹어도 그렇게 된다.

 

 

 

 

전녀위남법 (轉女爲男法 .. 여자를 납자로 바꾸는 방법)  임신 3개월이 되었을 때는 남녀가 구별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성별을 바꾸는 방법이 있다. 석웅황(石雄黃 .. 천연 비소화합물) 한 냥을 비단주머니에 넣어 임신부의 왼쪽허리에 두르고 있게 하고, 활 줄 한 개를 비단주머니에 넣어 임신부의 왼팔에 차게 하고, 수탉의 긴꼬리 3개를 뽑아서 누워있는 임신부의 자리에 넣고 알려주지 않는다.

 

 

 

 

흉년에 음식을 먹지 않고도 사는 방법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일 때에는 입을 다물고 혀로 아래 위의 이빨을 ?으면서 침을 모아 하루에 360번 삼키면 좋다. 이런 방법을 점차로 연습해 1,000여번 삼키면 저절로 배가 고프지 않게 되는데 3~5일 동안은 좀 피곤하지만 이때가 지나면 점차 몸이 가벼워지고 든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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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3.12.22 07:26

    첫댓글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13.12.23 23:04

    캄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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