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구리와 미꾸리 / 김만년
산행을 마치고 개울가에 자리를 잡았다. 아내와 김밥을 먹으며 모처럼 탁족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피라미들이 발가락을 툭툭 친다. 가만히 보니 고기들이 꽤 많이 보였다. 슬금슬금 천렵 본능이 도졌다. 어릴 적 농사일을 거들다가 아버지 몰래 미꾸리처럼 밭고랑을 살살 기어 냅다 개울가로 달아나곤 했다. 돌을 들추며 반두로 고기 잡는 일이 그 시절엔 큰 즐거움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울력으로 하는 들치기나 훌치기도 있었으나 나는 주로 반두를 이용해서 고기를 잡는 정적인 방법을 선호했다. 물이랑이 거칠어질까 조용조용 돌을 들추며 고기들의 동태를 살피며 도주로를 예상하고 추적하는 일은 요즘 아이들의 서바이벌게임 이상의 스릴이 있었다. 덕분에 물고기들의 습성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피라미들은 주로 은빛 살을 반짝이며 깊은 소(沼) 부근을 떼로 몰려다니며 제 우쭐한 맛에 산다. 꺽지는 한 길 물속 바위 옆에 바짝 붙어서 정중동 좌선하는 맛으로 살고 버들치나 붕어는 휘늘어진 물 버들 늪지 부근에서 유유자적 은거하는 맛으로 산다. 미꾸리나 꾸구리 같은 잡어들은 주로 얕은 여울목 부근에서 재잘거리며 수다 떠는 맛으로 살고 퉁가리는 얕은 여울에서 살기는 하나 다른 어종들과는 좀체 동거하지 않는 독불장군의 기질이 있다. 주로 물살이 센 넙적 바위 밑에서 자기만의 비밀요새를 지어 놓고 거기서 알을 낳으며 독립생활을 한다. 수염 부근에 날카로운 독침까지 달고 있어서 방어본능 또한 만만치 않다.
미꾸리는 말 그대로 매끄럽고 빠르다. 좀체 잡을 수 없는 약삭빠른 어종이다. 어디로 튈지 튀어봐야 하는 놈이다. 내 포획전략을 번번이 비웃기라도 하듯이 반두를 잘도 빠져나간다. 표피마저 매끄러우니 어쩌다가 잡아 본들 고기 통에 넣다가도 놓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런가 하면 꾸구리는 생긴 모양새만큼이나 둔하고 느리다. 일시에 쏜살같이 달아나는 법이 없다. 반둣대로 주둥이를 툭툭 건드려 유인하면 기꺼이 ‘잡혀주지 뭐’ 하는 식으로 포도씨만 한 눈알을 껌벅거리면서 느럭느럭 반두 속으로 들어온다. 어쩌다 놓쳐도 느리고 굼떠서 십중팔구 다시 잡힌다. 더러 변색으로 능청을 떨기도 하지만 그 정도 위장술로는 내 포획 망을 빠져나갈 순 없다. 거기에다 표피까지 깔끄러우니 잘만 하면 맨손으로도 잡을 수 있는 정말 어부렁한 놈이다.
우리 집에도 꾸구리와 미꾸리가 있다. 생긴 모양새나 성격으로 보아 첫째가 꾸구리라면 둘째 녀석은 영락없는 미꾸리다. 첫째가 느리고 고집스럽고 순진하다면 둘째는 빠르고 타협적이고계산적이다. 첫째가 어물쩍 손해를 보는 쪽이라면 둘째는 언제나 제 몫을 먼저 챙기고 베푸는 쪽이다. 어쩌다가 명절날 삼촌들이 용돈이라도 주면 둘째가 불쑥 형에게 오천 원을 더 준다. 첫째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고맙게 받는데 둘째는 이미 계산 끝났다는 듯이 씩 웃는다. 둘째의 계산법은 공평하기는 하나 제 몫은 이미 챙겨 놓고 남는 돈으로 형에게 생색을 내는 식이다. 싸울 때도 언제나 서럽게 울며 쏘개질하는 쪽은 둘째이고 나중에 자초지종을 물어보면 억울한 쪽은 첫째이다. 이런 개성들이 걱정도 되지만 그래도 첫째는 듬쑥해서 좋고 둘째는 살갑게 감기는 면이 있어서 좋다.
세상이라는 강에도 다양한 어종들이 살고 있다. 피라미처럼 떼로 몰려다니며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수면을 자맥질하는 십대들의 발랄함도 있고, 버들치나 붕어처럼 외진 물 버들 늪지에서 은유자적하며 미래의 꿈을 열독하는 이십대의 열정도 있다. 그런가 하면 퉁가리처럼 일찌감치 자기만의 요새를 축조하고 세상의 순류에 아집의 침을 세우며 독불장군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해탈한 스님처럼 한 길 물속에 침잠해 자기만의 시안을 밝히는 꺽지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강의 주류에는 언제나 미꾸리와 꾸구리가 있다.
요즘 들어 직장에서도 효율성을 부쩍 중시한다. 성과란 이름으로 사람의 능력이 계량화되고 수치화된다. 능력은 언제나 앞서가는 자의 몫이다 이런 분위기를 먼저 감지하는 쪽이 미꾸리족들이다. 이들은 매사에 논리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신세대들이다. 트위터를 하고 개인생활을 중시한다. 경제지표에 해박하고 회사에도 적극적이다. 당연히 직장에서 선호하는 어종이다. 반면에 이들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어종이 있다. 주로 베이비부머 세대들이다. 이들은 고비용 저효율의 상징으로 눈칫밥을 먹는다. 은퇴를 걱정하면서도 변화에는 둔감하다. 정보의 스펙트럼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이들과의 밥상머리 대화에서도 종종 구식이란 소릴 듣는다. 스마트폰 사용에도 둔감하고 신세대 언어도 거부감을 느낀다. 가끔 귀농을 생각하며 평안한 누항의 삶을 꿈꾸기도 한다. 이들이 꾸구리족들이다.
철길이 직선으로 펴지면서 변화에도 가속이 붙었다. 문명의 이기라는 달콤한 속도에 앉아 전국을 쾌감 질주한다. “속도는 풍경을 지운다.” 는 말처럼 이젠 차창을 스치는 풍경을 보며 옛 생각 한 자락 펼쳐보는 여유도 사라진 것 같다. 빌딩과 아파트, 도로와 철길로 표상되는 직선과 사각의 풍경이 왠지 비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비정한 빌딩 숲을 날렵한 미꾸리족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 구둣발 소리가 병사들의 보폭처럼 날쌔고 씩씩하다. 내가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다. 아니 밟히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미꾸리는 미래로 가는 길목에 있고 꾸구리는 과거로 가는 길목에 있다. 나는 지금 과거와 미래의 교차로에 어물쩍하게 서 있다. 신호등이 켜지면 어디론가 무작정 떠밀려가야 될 것 같아 두렵다. 늘 새로운 것들에 당황해하면서도 또 쉽게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경쟁에 뒤쳐진다는 불안을 느끼면서도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선 완고하다. 존재하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 낡기 마련이다. 열사람이 함께 천천히 걸어가는 세상, 구식과 신식, 빠름과 느림이 조화롭게 흘러가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걸어가는, 미꾸리도 살고 꾸구리도 살고 피라미도 사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이 넘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어릴 적 물고기를 잡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뭉게구름과 미루나무와 꾸구리들이 어슬렁거리던 작은 개울, 그 적요한 한낮을 느리게 쉬어가던 아버지의 휘어진 등이 오늘따라 그립다.